lundi 29 décembre 2008

진 쎄베르그 (Jean Seberg)

몽빠르나쓰 묘지에서 델핀 쎄릭의 무덤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진 쎄베르그 (1938-1979) 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인이지만, 프랑쓰와 관계가 많은 배우입니다.

그녀가 출연한 처음 두 편의 작품은 모두 미국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 다 그녀는 프랑쓰 여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녀의 데뷔작은 오토 프레밍거 (Otto Preminger) 의 성녀 쟌 (Saint Joan, 1957) 으로서, 여기서 그녀는 무려 18 000 명의 후보자들을 제치고 프랑쓰의 역사적 영웅인 성녀 쟌 다르크의 역할을 따냈다고 합니다.

쎄베르그의 후속작은 역시 프레밍거의 작품인 안녕 슬픔 (Bonjour Tristesse, 1959) 입니다. 프렁쓰와즈 싸겅 (Françoise Sagan) 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이 작품에서 쎄베르그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깨닫는 쎄씰이라는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그녀의 세번째 영화는 프랑쓰 영화 숨가쁜 (À bout de souffle, 1960) 인데, 재미있게도 여기서는 오히려 미국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졍-뤽 고다르 (Jean-Luc Godard) 의 이 영화야말로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그녀가 사라진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쎄베르그 하면, 이 영화에서 그녀가 맡았던 빠트리씨아 프란끼니 (Patricia Franchini) 역할을 떠올립니다. 그 이유는 누벨 바그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영화가 유달리 강한 인상을 남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후 쎄베르그의 출연작들이 모두 일종의 이류 영화들로서,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필립 드 브로꺄, 끌로드 샤브롤, 필립 갸렐 같은 감독들이 그녀를 꾸준히 고용하기는 했지만, 쎄베르그는 영화보다는 사생활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역사상 유일하게 공꾸르 상을 두 번 탄 작가 로망 갸리 (Romain Gary) 와의 결혼은 당시에 아주 유명했다고 하지요.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갸리는 아내를 자신의 영화 두어편에 출연시키기도 하였으나, 역시 큰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 두 사람의 이혼 문제와 결혼 말기에 태어난 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쎄베르그는 블랙 팬더스 (Black Panthers) 운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한 바가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FBI 에서, 이 딸은 갸리의 딸이 아니라, 블랙 팬더스 중 한 명의 딸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그외에도 미행과 도청, 위협 등을 당한 끝에, 쎄베르그는 미숙아를 낳고 말았습니다. 이 아기가 태어난지 며칠 만에 죽고 말자, 쎄베르그는 아이의 죽음을 FBI 의 책임으로 몰아 세웠으며, 아기의 장례식에서는 아기의 흰 피부를 보란 듯이, 의도적으로 유리관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후 쎄베르그는 알콜과 마약 중독에 빠졌으며, 여러 차례, 주로 딸이 죽은 날짜 (8월 25일) 를 전후하여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8월말 그녀는 행방불명되었다가, 십여일이 흐른 뒤에야 경찰의 조사에 의해, 자신의 차 뒷좌석에서 담요에 휩싸인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는 쎄베르그의 자살로 발표되었지만, 앞뒤 상황이 분명치 않아, 로망 갸리를 선두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FBI 에서 처치한 것이라고 믿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사건의 진상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한때 누벨 바그의 샛별로 떠올랐던 진 쎄베르그는 기대에 못미친 경력을 뒤로 하고, 마흔의 나이에 사라졌습니다.

Tombeau de Jean Seberg

mardi 23 décembre 2008

델핀 쎄릭 (Delphine Seyrig)

작 드미의 재미있고 환상적인 영화 당나귀가죽 (Peau d'âne) 에 출연한 바 있는 델핀 쎄릭 (1932-1990) 은 드미와 마찬가지로 몽빠르나쓰 묘지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무덤은 그녀의 살아 생전 이미지처럼 깔끔하고 단정합니다.

쎄릭의 무덤
당나귀가죽에서 쎄릭은 응큼한 생각을 품고 있는 약간 엉뚱한 라일락의 요정 (Fée des lilas) 을 연기했지만, 다른 작품들에서는 대부분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역할들을 맡았습니다. 특히 그녀의 이름을 널리게 한 작품은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알랑 레네 (Alain Resnais) 의 지난해 마리엔바드에서 (L'Année dernière à Marienbad, 1961) 입니다. 알랑 로브-그리예 (A. Robbe-Grillet) 가 각본을 쓴 이 난해한 영화는 두 남녀가 그 이전 해에 마리엔바드에서 만난 적이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고민하는 수수께끼같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 뒤이어 쎄릭은 다시 한번 레네의 대작으로 평가받는 뮈리엘 또는 어느 귀환 (Muriel ou le temps d'un retour, 1963) 에서 주인공 엘렌 역을 맡습니다. 제목의 뮈리엘은 주인공의 이름이 아니라, 영화 속에는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서, 아련한 기억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지난해 마리엔바드에서 가 사실과 가정, 기억과 꿈 등을 뒤섞는 몽환적인 작품인데 비해, 뮈리엘 은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며, 사실주의적인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그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쎄릭의 또다른 주목할만한 출연작은 프렁쓰와 트뤼포의 도둑맞은 입맞춤 (Baisers volés, 1968) 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이제 청년이 된 엉뜨완 드와넬의 흠모를 받는 연상의 기혼녀 역할을 하는데, 영화 속에서 엉뜨완 드와넬이 그녀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 « Ce n'est pas une femme. C'est une apparition ! » (그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환영이야.) 이 대사는 영화 속 인물 뿐 아니라, 신비로운 미모와 그윽한 목소리, 늘 노래부르는 듯한 억양을 가졌던 실제 델핀 쎄릭에게도 자주 적용되었습니다.

쎄릭은 1971년에는 최초로 엘리자벳 바또리 (Elisabeth Bathory) 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붉은 입술 (Les Lèvres rouges) 에서 이 유명한 흡혈 살인범을 연기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두 편의 로제 (사고, 인형의 집), 두 편의 뷔뉘엘 (은하수, 중산계층의 은밀한 매력), 두 편의 아께르만 (쟌 딜만, 황금의 팔십년대), 세 편의 뒤라쓰 (라 뮈지꺄, 인디아 쏭, 박스떼르, 베라 박스떼르) 영화를 찍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스스로도 직접 몇 편의 영화들을 감독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모두 여성인권운동의 발전을 위한 자료영화들입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여러 여배우들과의 인터뷰를 담은 예쁘게 꾸미고 입닥치고 있어 (Sois belle et tais-toi, 1975-77).

아래의 비데오는 드미의 영화 당나귀가죽의 한 장면으로, 대녀인 당나귀가죽 (꺄트린 드뇌브) 에게 아버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대모인 라일락의 요정이 노래로 설교하는 장면입니다. (그 이유는 사실은 자기가 결혼하고 싶어서.^^)

당나귀가죽 중 라일락 요정의 충고
Les conseils de la Fée des lilas, extraits du film Peau d'âne

samedi 20 décembre 2008

작 드미의 무덤 (tombeau de Jacques Demy)

니끼 드 쌍-팔이 조각한 리꺄르도 므농의 무덤도 매우 눈에 띄는 무덤이기는 하나, 몽빠르나쓰 묘지에서 가장 예쁜 무덤은 롤라 (Lola), 천사의 해안 (La Baie des anges), 셰르부르의 우산들 (Les Parapluies de Cherbourg), 로슈포르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e Rochefort), 당나귀 가죽 (Peau d'âne) 등의 명작을 남긴 영화감독 작 드미의 무덤이 아닐까 합니다. 아녜쓰 바르다 (Agnès Varda) 가 꾸민 남편의 무덤은 초록색 덩굴로 뒤덥힌 무덤 자체도 단아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옆에 싱싱하게 우거진 나무와 작은 벤치가 있어 무덤답지 않은 정취가 있습니다. 빼곡히 들어찬 몽빠르나쓰 묘지에 이러한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mercredi 3 décembre 2008

리꺄르도의 무덤 (tombeau de Ricardo)

따로의 정원이 니끼 드 쌍-팔 (Niki de Saint-Phalle) 의 필생의 대작이기는 하나, 사실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그녀의 작품은 빠리의 스트라빈스끼 연못일 것입니다. 비록 쌍-팔의 작품이 세계 도처에 설치되어 있기는 하나, 빠리가 워낙 국제적인 관광 도시인 까닭이지요. 더군다나 많은 관람객을 모으는 뽕삐두 쎈터 바로 옆에 있는 관계로, 빠리를 방문한 전세계의 관광객들에게 이 연못은 꽤 친숙합니다.

그런데 빠리에는 니끼 드 쌍-팔의 작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하여 훨씬 덜 알려진 이 조각은 사실 예술 작품으로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라, 리꺄르도 므농 (Ricardo Menon) 이라는 친구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개인적인 조각입니다. 리꺄르도 므농은 1977년 이후로 십여년간, 쌍-팔의 조수이자 비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녀에게 더없이 소중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듬해부터 시작된 따로의 정원의 건축에도 그는 활발히 참여했지요.

하지만 1986년, 그는 개인적인 예술가로 독립하고자, 니끼와 따로의 정원을 떠나, 빠리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 후 채 3년이 못되어 씨다로 사망하고 맙니다. 1952년 출생이니, 서른 일곱의 나이에 죽은 것입니다. 씨다 퇴치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쌍-팔은 이미 몇년전 AIDS: You Can't Catch It Holding Hands (en français, Le sida, tu ne l'attraperas pas, 1986) 라는 책을 쓰기도 했는데, 므농이 죽은 후 필립 매튜스 (Philippe Matthews) 와 공동 감독으로 이 책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필립은 니끼가 첫남편 해리 매튜스로부터 얻은 아들). 또한 그녀는 빠리의 몽빠르나쓰 묘지에 마련된 리꺄르도의 무덤을 장식할 기념비를 조각했습니다. 커다란 고양이의 모습을 한 이 조각은 쌍-팔의 작품답게,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의 모자익으로 장식되어 있어, 몽빠르나쓰 묘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무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밝은 느낌에도 불구하고, 쌍-팔이 자필로 쓴 비문을 읽으면 인생의 허무함을 상기하게 됩니다 : « 젊고, 사랑받고, 아름다왔으나, 너무나 일찍 죽은 우리의 절친한 친구 리꺄르도를 위하여 ».

쌍-팔이 조각한 리꺄르도 므농의 무덤
빠리, 몽빠르나쓰 묘지

dimanche 23 novembre 2008

따로의 정원 (Jardin des Tarots)

이딸리아 또스까나 지방 남부의 까빨비오 (Capalbio) 라는 작은 도시에는 따로의 정원 (Giardino dei Tarocchi) 이라는 장소가 있습니다. 이곳은 니끼 드 쌍-팔 (Niki de Saint-Phalle) 이 거의 이십여년에 걸쳐서 꾸민 예술 공간으로, 따로 카드에서 영감을 받은 스물 두 점의 환상적인 조각들로 수놓아져 있는 정원입니다. 쌍-팔 특유의 화려한 색채와 기괴한 모양새를 갖춘 이 조각들은 모두 십여미터 이상 높이의 대형 작품들로, 조각이라기보다 거의 건축물로 보아야 옳을 듯 싶습니다. 실제로 이 중 일부는 조각품 내부를 방문할 수 있으며, 특히 여제 (L'impératrice. 아래 사진에서 가장 왼쪽) 의 내부는 완전한 아파트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따로의 정원을 손보는 동안, 쌍-팔과 그녀의 남편 졍 땅글리 (Jean Tinguely) 는 바로 이 조각품 안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따로의 정원의 전경 (Vue sur le Jardin des Tarots)Source de la photo : le site officiel du jardin

따로의 정원이 기본적으로 쌍-팔의 작품이긴 하지만, 그녀의 다른 많은 조각들처럼 따로의 정원도 역시 땅글리와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남편 외에 몇몇 예술가 친구들이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 정원은 그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전혀 국가나 재단의 후원 없이 오로지 사비만 들여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쌍-팔은 자신의 다른 작품들을 팔거나 새로운 주문을 받기도 했고 (그 중 하나가 스트라빈스끼 연못), 또한 특별히 향수를 만들어 팔았다고 합니다.

재정 마련 차원에서 보나, 작품의 규모와 양식 측면에서 보나, 따로의 정원은 슈발 우체부의 이상적인 궁전 (Palais idéal du facteur Cheval) 과 닮은 데가 있습니다. 실제로 니끼 드 쌍-팔은 슈발 (Ferdinand Cheval) 의 궁전을 방문한 후 큰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따로 정원을 건설하는데 그녀는 보마르쪼에 있는 괴물의 정원 (Jardin des monstres à Bomarzo) 과 가우디 (Antoni Gaudi) 가 만든 귀엘 정원 (Jardin Güell) 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래는 Le Jardin des Tarots 라는 책 (Benteli éditions, 2005) 에 실린 쌍-팔의 자필로, 따로의 정원을 만들게 된 동기와 과정을 작가가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끌릭하면 보다 또렷하게 글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lundi 17 novembre 2008

따로 (tarot)

비록 오늘날에는 프랑쓰식 놀이용 카드가 전세계적으로 규격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몇몇 지역, 특히 프랑쓰 남부와 이딸리아, 스위쓰와 독일의 일부 지방 등에서는 고유한 전통 카드 역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예이자 가장 유명한 예로 따로 카드 (cartes de tarot) 를 들 수 있습니다. 따로 카드는 프랑쓰 카드에 비하여 모양이 보다 갸름하고 길며, 무늬도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한 벌을 이루는 카드의 수가 78 장으로, 보통 프랑쓰 카드보다 26장이나 더 많습니다. 그 중 네 장은 기사 (cavalier) 들로서, 그 가치는 시종 (valet) 과 부인 (dame) 의 중간입니다. 나머지 22장은 완전히 다른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1부터 21까지 번호가 크게 매겨져 있습니다. 마지막 한 장은 아무런 번호도 글자도 없는 대신, 또는 멍돌린을 연주하는 사람이 그려져 있습니다. Excuse (변명) 라고 불리는 이 카드는 일종의 죠커 역할을 합니다. 이 스물 두 장의 카드는 현대 불어로 atout, 즉 « 으뜸패 » 라고 불리는데, 오래 동안 triomphe, 즉 « 승리패 » 라고도 불렸습니다. 바로 여기서 영어의 trump 라는 용어가 비롯되었습니다.

외국에는 따로 카드가 마치 점술용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놀이용입니다. 따로 카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놀이는 몇가지가 있으나,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따로지요. 따로라는 놀이를 하는데 사용되는 카드이기 때문에 바로 따로 카드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따로 놀이는 몇가지 변형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네 명이서 하는 놀이입니다. 각각 18장의 카드를 손에 들고 시작하며, 앞사람이 낸 카드와 같은 무늬이면서 더 높은 값을 가진 카드를 내 놓는 원칙입니다. 같은 무늬가 없을 때는 바로 으뜸패 카드를 냄으로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18장의 카드가 모든 참가자들의 손을 떠나면 한 판이 끝나게 됩니다. 현대에 행해지는 많은 카드 놀이들의 규칙이 바로 따로에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놀이들에 비해 한가지 유별난 점은 따로에서는 카드의 점수를 반점 단위로 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왕은 4.5, 부인은 3.5. 사실 따로에서 제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점이 바로 점수 계산법입니다. 카드의 값과 조합에 따라, 더하고 빼고 곱하는 매우 복잡한 점수 계산을 해야 합니다.

따로의 정확한 근원에 대해서는 매우 논란이 많습니다. 점술용으로도 쓰이는 점과 관련하여, 매우 황당하고 전설같은 해석들이 많은데, 언어학적으로는 이딸리아어 tarocco 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딸리아어 tarocco 가 과연 어디서 온 말인가에 대해서는 또다시 황당하고 전설적인 주장들이 난무합니다. 아무튼 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따로 놀이는 1430년 경 롬바르디아 (현재 이딸리아 북서부) 에서 처음 목격되었으며, 곧 프로벙쓰 (현재 프랑쓰 남동부) 로 수입되었습니다. 라띠나어 문화권의 놀이이기에, 따로용 카드에는 오랫동안 라띤 무늬가 쓰였습니다 : 즉 그릇, 칼, 막대기, 동전. 그런데 18세기에 따로가 독일에 전해지면서, 오히려 프랑쓰 무늬로 변하였습니다 : 즉 심장, 창끝, 토끼풀, 네모. 또한 19세기에는 22장의 으뜸패를 장식하던 중세풍의 상징적인 그림 역시, 일상 생활 풍경을 묘사하는 귀여운 (?) 그림들로 변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술용 따로 카드는 여전히 옛날식 무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색다르고 신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주기 위해서겠지요. 그때문에 오늘날 프랑쓰에는 크게 두 종류의 따로 카드가 존재합니다 : 놀이용 따로 (tarot à jouer) 와 점술용 따로 (tarot divinatoire).

점술용 따로는 자주 마르쎄이으 따로 (tarot de Marseille) 라고 불리며, 드물게 이딸리아 따로 (tarot italien) 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방금 말했듯, 마르쎄이으 (즉 프로벙쓰) 와 이딸리아에서 쓰이던 라띤 무늬 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점술에서는 22장의 특별 카드를 으뜸패승리패라 부르지 않고 대비밀 (arcanes majeurs) 이라고 칭합니다. 이런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저로서는 폭소가 터져나오는 표현이기는 하나, 아무튼 대비밀을 구성하는 카드들은 방금 말했듯 여전히 중세풍의 상징적, 은유적 그림을 띄고 있습니다.

1. Le bateleur (마술사)
2. La papesse (여교황)
3. L'impératrice (여제)
4. L'empereur (황제)5. Le pape (교황)6. L'amoureux (사랑에 빠진 남자)7. Le chariot (수레 또는 마차)8. La justice (정의)9. L'hermite (은둔자 또는 연금술사)10. La roue de la fortune (운명의 바퀴)
11. La force (힘)12. Le pendu (거꾸로 매달린 남자)13. L'arcane sans nom ou la mort (이름없는 비밀 또는 죽음)14. La tempérance (절제 또는 균형)15. Le diable (악마)
16. La Maison-Dieu (신-집)17. L'étoile (별)
18. La lune (달)19. Le soleil (해)20. Le jugement (심판)21. Le monde (세계)그리고 번호가 없는 마지막 카드 Le mat (광대)
나머지 카드들은 소비밀 (arcanes mineurs) 이라고 불리며, 소비밀과 대비밀의 여러 조합을 통하여 점을 치나 봅니다. 아무튼 따로 카드들은 그 그림의 특이함 때문에, 점술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점술의 관점이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서, 사회 현상으로서, 풍습의 역사로서 따로 카드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학문을 tarologie 라고도 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프랑쓰 국립 도서관에는 여러 벌의 희귀한 따로 카드들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 (15세기) 은 샤를 6세의 따로 (tarot de Charles VI) 라고 불리는 카드들로서, 불행히도 17장 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대부분을 위에 소개했으나,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으신 분은 여기를 방문하시길...

samedi 15 novembre 2008

놀이용 카드 (cartes à jouer)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늘날 국제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서양식 놀이용 카드는 그 기원이 프랑쓰 (보다 정확히는 루엉) 입니다. 물론 놀이용 카드 자체의 기원은 중국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유럽에는 이슬람 문화권을 거쳐 1370년 경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중세의 놀이용 카드는 화가들이 일일이 손으로 그려야 했으므로, 매우 값비싼 예술품이었습니다. 따라서 귀족들이나 부유한 시민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지요. (한 예로, 15세기에 제작된 샤를 6세의 따로 카드를 보세요.) 그런데 카드 한 장 한 장이 독창적인 « 작품 » 이나 다름없다 보니, 놀이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내가 가진 카드들과 상대방이 소유한 카드들의 크기와 모양, 색깔과 그림이 다 달랐으니까요. 따라서 15세기 무렵부터는 정해진 모양에 따라 통일된 카드를 만들어 내는 일을 전문 직업으로 삼는 cartier 들이 등장했습니다. (프랑쓰에는 Cartier 라는 성이 매우 흔한데, 필경 먼 조상들 중에 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이 되었다고는 해도 처음부터 당장 유럽 전역에서 똑같은 카드를 사용할 수는 없었겠지요 ? 따라서 나라마다, 지방마다 고유의 카드가 있었습니다. 르네썽쓰 시대에는 크게 세 종류의 카드가 존재했습니다 : 라띤 무늬 카드 (couleurs latines), 제르마닉 무늬 카드 (couleurs germaniques), 그리고 프랑쓰 무늬 카드 (couleurs françaises). 라띤 카드는 프랑쓰 남부와 이딸리아, 에스빠냐 등에서 사용되었으며, 그릇, 칼, 막대기, 동전을 무늬로 가지고 있습니다. 제르마닉 카드는 심장, 나뭇잎, 도토리, 방울을 무늬로 하며, 두말할 나위 없이 오늘날의 독일어권 지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프랑쓰는 당연히 라띤 카드를 사용하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카드를 개발했습니다. 이때 채택된 무늬가 바로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무늬들을 지칭하기 위하여 영어를 사용하나, 다른 나라들은 당연히 자국어를 사용합니다. 불어로는 각각 cœur (심장), pique (창끝), trèfle (토끼풀), carreau (네모).

또한 10 이상의 값을 가진 카드들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불어로는 valet (시종), dame (부인), roi (왕) 라고 부르며, 따라서 카드에는 약자로 V, D, R 로 표기합니다 (J, Q, K 가 아니라). 이 초상들 역시 16세기 초반 빠리에서 처음 표준화되었다고 합니다. 그 전에는 각자 그리고 싶은 얼굴을 그렸지요.

그리고 1 점을 가진 카드의 원래 명칭도 ace 가 아닌 as 입니다. 아쓰는 로마 시대에 사용된 화폐이자 무게의 단위인데, 주사위에서 점이 하나만 찍혀진 면을 일컫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사위 놀이에서 아쓰 동전을 내기돈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주사위 놀이에서나 카드 놀이에서나 아쓰는 그 표면값과는 달리, 가장 높은 점수로 자주 취급되었고, 그 때문에 테니쓰에서도 상대방을 어쩔 수 없게 만드는 강한 공을 as 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as 라고 하면 한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위의 특징들을 종합하여 16세기 초반 루엉 (Rouen) 에서 프랑쓰식 카드가 완성되었습니다. 루엉은 당시 유럽에서 매우 중요한 상업 도시였기 때문에 곧 프랑쓰 카드가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사용하는 카드도 사실상 루엉의 모델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두가지 차이점이라면, 우선, 당시에는 카드에 위아래가 있었습니다. 현재의 카드들은 아쓰 같이 몇몇 특정한 카드를 제외하면 위와 아래를 구분할 수 없지요. 이것은 인쇄술의 발전으로 19세기 이후에야 도입된 특징이라고 합니다. 두번째 차이점은 죠커 (joker) 입니다. 역시 19세기에 미국에서 도입된 죠커는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카드였습니다. 물론 죠커라는 개념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따로 카드에는 이미 광대 그림이 있었고, 이 카드는 다른 어떤 카드든지 대체할 수 있었지요. 아무튼 joker 는 프랑쓰 카드들을 지칭하는 이름들 중 유일하게 영어를 어원으로 하는 단어입니다.

죠르쥬 들 라 뚜르, 네모 아쓰를 가진 속임꾼
Le Tricheur à l'as de carreau, Georges de la Tour (vers 1635)
Musée du Louvre, Paris.

jeudi 13 novembre 2008

인내와 성공 (patience et réussite)

patienceréussite 은 각각 « 인내 » 와 « 성공 » 을 뜻하는 불어 단어들이지만, 또한 특별한 종류의 카드 놀이들을 칭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이 범주에 속하는 놀이들은 거의 대부분 혼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낼 때 (patienter) 하는 놀이로서, 정해진 원칙에 따라 카드를 일정한 모양으로 늘어 놓거나, 또는 짝을 맞추어 가며 한 장도 남김 없이 모두 거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계 (horloge) 라고 불리는 빠씨엉쓰 (또는 레위씻) 는 52 장의 카드를 시계 모양으로 구성하는 놀이입니다. 즉 한시 자리에는 네 장의 1이 모두 모여야 하며, 여섯시 자리에는 네 장의 6이 모두 모여야 하는 식이지요. 이렇게하여 결과적으로 각각의 시간마다 그에 해당하는 숫자를 가진 네 장의 카드가 모두 놓이고, 가운데에는 왕이 네 장 놓여야 성공 (réussite) 입니다.

또, 삐라미드 (pyramide) 라 불리는 빠씨엉쓰는 애초에 카드들을 삐라미드 모양으로 늘어 놓고, 삐라미드의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카드를 두 장씩 거두어 가는 놀이입니다. 이 때 조건은 두 카드의 합이 13을 이루어야 합니다 : 3과 10, 6과 7, 1과 왕비... 왕은 혼자서 13을 이루므로 한 장만 있어도 거두어 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삐라미드의 가장 꼭대기를 구성하는 마지막 한 장의 카드까지 모두 없애야 성공 (réussite) 입니다.

이외에도 14를 잡아라 (prenez le 14), 황제의 수행 (suite impériale), 몽떼-꺄를로 (Monte-Carlo), 죠제핀 (Joséphine), 숫자의 행진 (défilé des nombres), 초상화 회랑 (gallerie des portraits), 결혼 (mariage) 등, 특이한 이름을 가진 빠씨엉쓰와 레위씻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놀이들이 이렇게 불리는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성공을 위해서는 인내를 가지고 침착하게 여러번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애초에는 (그리고 지금도) 이런 놀이들을 jeu de patience (참을성 놀이) 라 불렀습니다. 쥬 드 빠씨엉쓰는 카드 놀이 뿐 아니라, 그림 맞추기 퍼즐이나, 성냥개비 쌓기, 숫자 문제, 암호 해독, 복잡한 미로, 또는 뤼빅쓰 뀝 (Rubik's cube) 같이, 대개 혼자서 시간을 보낼 때 하게 되는, 그리고 어느 정도 인내심이 필요한 온갖 종류의 놀이들을 칭합니다. 그 중에서 특히 카드를 가지고 하는 놀이를 그저 patience 라 부르게 되었지요. 따라서 patiencejeu de patience 는 조금 구별되는 용어입니다. 반면 patienceréussite 은 차이가 없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카드 놀이들은 사람에 따라 patience 라고도 불리고, réussite 이라고도 불립니다. 그 과정을 중시하느냐, 결과를 중시하느냐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 역사적으로는 patience 라는 말이 좀 더 일찍 등장했습니다. 이 단어 (카드 놀이라는 의미로서) 의 첫등장은 1779년 Mémoires sur les jeux (놀이에 대한 기록) 라는 저술에서였습니다. 또 1842년에는 오로지 빠씨엉쓰 놀이들의 규칙만을 모아 놓은 Livre des patiences (빠씨엉쓰 책) 가 발간되었습니다. 이 놀이와 단어는 곧 유럽 도처에 퍼져 오늘날까지도 영어, 독어, 러시아어 등에서는 patience 라는 불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현대의 프랑쓰에서는 réussite 의 사용이 좀 더 일반화된 느낌이 듭니다.

mercredi 12 novembre 2008

pati 의 파생어들 (dérivés de « pati »)

라띠나어 동사 pati (참다, 견디다, 괴로움을 겪다) 는 불어에 많은 파생어들을 낳았습니다. 우선 뜻과 모양이 거의 똑같은 pâtir 동사가 있으며, 그 명사형인 passion이미 보았듯이 애초에는 « 아픔, 고통, 수난 » 의 뜻이었습니다. 이 단어는 오늘날 뜻이 거의 정반대로 변하였지만, 다른 파생어들은 대부분 어원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compassion 은 말그대로 남의 고통 (passion) 을 함께 (com) 한다는 뜻이지요. 즉 « 동정 ». 이 단어의 동사는 compatir 이고, 형용사는 compatissant 입니다. 모두 남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뜻이지요. 주의할 것은 기본 동사 pâtir 에는 악썽 씨르꽁플렉쓰가 있는데 비해, 파생어인 compatir 에는 악썽이 없다는 점입니다.

compatircompatissant 외에 또다른 형용사를 하나 더 가지고 있습니다 : compatible. 이 형용사는 «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되어 보이지만 함께 어울릴 수 있다 » 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마음에 꼭 들지는 않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상대방의 단점을 참고 견딘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특히 현대에는 컴퓨터 분야에서 프로그람들이나 주변기기들의 호환성 (compatibilité) 을 언급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나, 막킨토시와 윈도우즈는 오래동안 서로 꽁빠띠블하지 않았지요. 이럴 때에는 바로 incompatible 하다고 합니다.

또한 어원을 생각하지 않고 자주 쓰는 단어 passif 도 알고 보면 라띠나어 pati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역시, 자기에게 닥치는 일들을 그저 참고 견딘다는 의미이죠. 비슷한 단어로 patient 이 있습니다. 역시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미는 « 참고 견디는, 참을성 있는, 인내심이 강한 » 입니다. 그리고 명사로 쓰이면, « 참을성이 많은 사람 » 을 가리킬 뿐 아니라, 자주 « 환자 (malade) » 의 의미로 쓰입니다. 환자는 바로 병을 참고 견뎌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이 형용사로부터 동사 patienter 가 나왔습니다 : « 힘들거나 짜증나고 지루한 상황을 참고 견디다 ». 일 처리가 느리고, 어딜 가나 줄서기로 유명한 프랑쓰에서 이 동사는 매우 자주 듣게 되는 단어이지요. 그 명사형은 patience (참을성, 인내) 라고 합니다.

vendredi 3 octobre 2008

passion « 수난 = 열정 »

불어 passion 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주로 « 열정, 격렬한 사랑 » 등의 뜻으로 쓰이지만, 원래는 « 고통 » 의 뜻이었습니다. 특히, 신체적인 상처 보다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뜻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뜻이 발전하여,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너무 좋아할 때 느끼게 되는, 가슴이 거의 아픈 듯한 감정을 뜻하는 말이 된 것입니다. 이 단어는 그 강렬한 느낌을 여전히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 불어에서는 너무 자주 쓰이다보니 의미가 좀 약화된 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Ma passion, c'est la musique 같은 문장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이 말은 « 음악을 아주 좋아한다 » 는 뜻이지요. 물론 « 음악을 정말로,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좋아한다 » 는 의미일 수도 있겠으나, 문맥과 상황에 따라서는 그저 « 취미 생활로 음악을 즐긴다 » 정도의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거의 violon d'Ingres 의 동의어가 된 셈입니다.

한편, 원래의 뜻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다만 이 의미는 종교적인 맥락에서만 사용됩니다. la passion du Christ, 또는 절대적으로 la Passion 이라고 하면 « 그리스도의 수난 » 을 뜻하며, 꾸미는 말을 덧붙여, 다른 성인들, 순교자들이 겪은 박해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la passion de Jeanne d'Arc).

그리고 프랑쓰 사람들 중에도 fruit de la passion 의 의미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로 « 수난의 과일 » 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과일과 그리스도의 수난 사이에는 실제로는 아무 연관도 없지만, 수난꽃 (passiflore) 의 열매이다 보니 이렇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일의 강렬한 맛, 그리고 뜨거운 지방에서 온 열대 과일이라는 사실 때문에, 많은 프랑쓰 사람들이 이 과일의 이름을 « 정열의 과일, 사랑의 과일 » 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passion 은 또한 음악 용어로서, 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룬 부분에 음악을 붙인 « 수난곡 » 을 뜻합니다.

jeudi 2 octobre 2008

수난꽃과 수난과 (passiflore et fruit de la passion)

우리말로 꽃시계 또는 시계꽃이라고 부르는 덩굴 식물을 불어로는 passiflore, 즉 « 수난꽃 » 이라고 합니다. 우리말 이름은 아마도 꽃의 전체 모양이 둥글고, 가운데에 있는 세 개의 꽃술이 시, 분, 초를 가리키는 세 개의 바늘처럼 보인 데서 비롯된 것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프랑쓰 사람들은 이 꽃에서 시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 (Passion) 을 봅니다. 우선, 넓은 꽃잎 안 쪽에 둥글게 심어져 있는 실 같은 꽃잎들은 예수의 가시관을 연상시키며, 세 개의 꽃술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데 사용된 세 개의 못을 상징합니다. 또,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이 식물의 이파리는 갸름하고 뾰족하여 예수의 허리를 찌른 창에 비유되며, 덩굴 줄기는 예수를 때린 채찍과 닮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는 대중들 틈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17 세기에 남미에 파견되었다가 이 꽃을 발견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의도적으로 짜맞춘 연관입니다. 아무튼 여기에서 꽃의 이름이 비롯되었습니다.

이 크고 화려한 꽃은 오늘날 관상용으로도 많이 재배되지만, 그 열매를 엊기 위해서도 재배됩니다. 이 식물의 열매는 바로 너무나 맛있는 수난 과일 (fruit de la passion). 수난과는 씨가 많고, 그 자체로는 별로 먹잘게 없지만, 즙을 짜서 이용하면 새콤달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향기가 너무 그윽하며, 색깔 역시 매우 고운 노란색이 되기에, 과자, 아이스크림, 무쓰 등을 만들 때 자주 사용됩니다. 겉으로 보면 쪼글쪼글하고 미운데, 많이 쪼글거릴 수록 잘 익은 거라고 하더군요.

수난 과일 즙을 넣은 띠라미쑤 (산 것^^)

mardi 30 septembre 2008

바르바리 무화과 (figue de Barbarie)

프랑쓰의 과일 가게에서는 바르바리 무화과라는 과일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뽕쓰 (oponce) 라는 선인장의 열매로서, 진짜 무화과 (figue) 와는 완전히 별종이지만, 그 모양이 닮았다하여 이렇게 불립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진짜 무화과와 바르바리 무화과는 사실 별로 닮아 보이지 않습니다.

.......보통 무화과.......................바르바리 무화과


굳이 닮은 과일을 찾자면, 오히려 끼위가 아닐까 합니다. 크기와 모양 뿐 아니라, 과육의 질감도 그러하며, 맛도 무화과보다는 끼위에 더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비따민 쎄 (vitamine C) 가 풍부하다는 점도 비슷하구요. 하지만 바르바리 무화과는 신 맛은 없습니다. 또는 안에 씨가 많은 것이, 수난 과일 (fruit de la passion) 도 연상시킵니다. 바르바리 무화과를 먹을 때 성가신 것이 바로 이 씨입니다. 그냥 삼키기에는 좀 크고 딱딱하며, 일일이 골라 내자니 수가 너무 많습니다 (마치 수박씨처럼). 또한가지 조심할 것은 가시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매끈해 보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가시가 껍질을 벗길 때 손을 찌를 수도 있습니다.

de Barbarie 라는 수식어는 바르바리 오르간과는 무관하며, 아마도 이 과일이 애초에는 중남미 대륙의 원주민들이 재배하던 과일인 데서 유래된 듯 싶습니다. Barbarie = « barbare (야만인) 들의 땅, 낯선 이국 ». 또는 19세기 초까지 프랑쓰에서는 북아프리카 일대를 싸잡아 Barbarie 라는 이름으로 칭했는데, 그와도 무관하지만은 않을 듯 합니다. 비슷한 식으로, 이딸리아어에서는 이 과일을 ficodindia, 즉 « 인도의 무화과 » 라고 부릅니다. 오늘날에는 중남미와 북아프리카는 물론 지중해 연안 지역 전체에서 재배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선인장에서부터 이렇게 단 과일이 나온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습니다. 색깔은 알록달록 여러가지이지만, 불행히도 맛은 모두 똑같습니다.

바르바리 무화과들의 단면

lundi 29 septembre 2008

바르바리 오르간 (orgue de Barbarie)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이지만, 프랑쓰에서는 간혹 길거리에서 바르바리 오르간을 볼 수 있습니다. 바르바리 오르간은 특별한 종류의 이동식 오르간으로, 나무 상자에 손잡이가 하나 달린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크기는 어깨에 멜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피아노만한 것까지 다양합니다. 대개 알록달록, 어찌보면 유치하고 촌스런 그림으로 치장된 바르바리 오르간은 겉으로 볼 때는 건반도 없고, 관도 없기 때문에 과연 오르간이라 부르는 것이 적당한지 의심이 되지만, 사실은 상자 안에 일련의 관이 숨겨 있고, 여기에 바람을 통과시켜 소리를 내게 하는, 즉 오르간과 같은 원리에 의한 악기가 맞습니다. 하지만 건반은 정말 없으며, 대신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면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반드시 바르바리 오르간 전용 특수 악보가 있어야 합니다. 특수 악보란, 음표가 그려진 악보가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구멍이 빼곡히 뚫려진 두꺼운 종이 (carton perforé) 로서, 이것을 오르간의 정해진 틈에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구멍의 위치와 길이에 따라 다양한 음이 산출되게끔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사 음악을 외우고 있다 해도, 이 악보가 없으면 바르바리 오르간은 연주할 수 없으며, 원하는 곡 마다 일일이 따로, 구멍을 뚫은 개별 악보를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물론 오르간을 만든 업체에서 악보도 만들어 함께 팝니다. 그 중 한 업체의 싸이트에 가서 재밌는 사진들도 보시고 악기의 소리도 직접 들어보세요.

그 어떤 음악적 기량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옛부터 바르바리 오르간은 매우 대중적인 악기였습니다. 유랑 가수와 거리의 악사들이 시장터나 관광지 등에서 이 악기를 연주하거나,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러, 끼니를 벌곤 했지요. 지금도 일종의 민속 풍경으로서 조금 남아 있긴 하나, 점점 보기가 힘들어집니다.

악기의 이름은 이 악기의 발명가 죠반니 바르베리 (Giovanni Barberi) 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마도 이 특이한 악기가 « 낯선 이국 » (= barbarie) 으로부터 왔으리라는 생각과 발명가의 이름이 겹쳐지면서, 혼동이 생긴 것 같습니다. 바르바리 오르간은 사실 이국에서 온 것이 맞긴 하지만,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이딸리아 모데나 (Modena = Modène) 에서 18세기 초에 발명되었습니다. 그 후 이딸리아 보다도 유난히 프랑쓰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프랑쓰에서는 특히 Limonaire 라는 상표가 바르바리 오르간을 만드는 대표적인 업체로 유명해지면서 limonaire 라는 단어도 생겨났습니다. 엄격히 따지면 리모네르는 보다 큰 규모의 바르바리 오르간이라고 하는데, 일상 용어에서는 사실 두 명칭이 동의어로 쓰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Barbarie 는 철자가 변하면서까지도 고유명사라는 생각이 뚜렷하여 대문자로 남은데 비하여, limonaire 는 상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일반명사화되어 소문자로 쓰입니다.

빠리의 떼르트르 광장에서 바르바리 오르간을 연주하는 한 거리 예술가

mercredi 24 septembre 2008

중세의 오르간 (orgues médiévaux)

그리쓰의 수학자이자 기술자였던 에롱 (Héron) 에 의하면, 오르간은 기원전 250년 무렵 알렉썽드리의 크테지비오쓰 (Ctésibios d'Alexandrie) 라는 사람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언급을 하고 있는 에롱의 저술 (Les Pneumatiques) 자체가 기원전 120년 정도에 쓰여졌으므로, 그의 말을 무조건 믿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그의 저술이 오르간의 원리를 상당히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오르간이 매우 오래된 악기 중의 하나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고대 오르간 (orgue hydraulique) 과 굽은 트롱뺏 (trompette courbe) 의 연주자. 기원후 2세기.
네니히 (Nennig) 의 로마 빌라.

위의 로마 시대 모자익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의 오르간들은 오늘날의 오르간들과는 달리, 이동이 가능한 « 비교적 » 작은 악기였습니다. 15세기 이전까지 프랑쓰를 비롯한 서유럽에서 사용된 오르간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우선, orgue positif 라고 부르는 것은, 이름 그대로, poser (놓다) 할 수 있는 오르간으로, 장소를 옮겨 다니며, 원하는 자리에 내려 놓을 수 있을 만한 크기였습니다. 어떤 것은 탁자 위에 놓을 만큼 작았으며, 또다른 것은 오늘날의 풍금이나 피아노처럼 바닥에 직접 놓아야 할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이동이 가능하며, 음량이 컸기 때문에 오르그 뽀지띠프는 실제로 야외에 들고 나가서도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악기는 최소한 두 명의 연주자를 필요로 하는 상당히 번거로운 악기였습니다. 한 명은 주연주자로서 실제로 건반을 연주하였으며, 다른 한 명 (또는 그 이상) 은 바람을 불어 넣는 조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귀부인과 유니콘 (La Dame à la licorne) 따삐쓰리 연작 중
« 청각 » (L'Ouïe).

빠리, 끌뤼니 중세 박물관.
(주인 마님이 탁자 위에 놓인 뽀지띠프를 연주하는 동안 하녀가 바람을 넣고 있습니다.)
뽀지띠프를 연주하는 두 멧돼지 (?).
스딸 (stalle) 에 새겨진 조각.
빠리, 끌뤼니 중세 박물관.
또하나의 부류는 orgue portatif 라고 부르는데, 즉 porter (손에 들다, 몸에 지니다) 할 수 있는 오르간이라는 뜻이지요. 뽀르따띠프는 바닥에 내려 놓을 필요 없이, 무릎에 얹거나, 아니면 끈으로 어깨에 둘러 메고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작고 가벼운 오르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도, 왼손으로는 풀무를 작동하여 바람을 불어 넣고, 오른손으로는 건반을 연주할 수 있게끔 만들어졌습니다. 뽀르따띠프는, 물론 건반의 크기, 음역, 관의 수와 종류, 음색, 음량 등 모든 면에서 뽀지띠프보다 제한된, 어찌보면 장남감 같은 악기였지만, 그래도 사용의 편리성 때문에 중세에 널리 이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세 말기의 유명한 작곡가였던 프란체스꼬 란디니 (Francesco Landini) 는 장님 오르간 연주자로도 명성을 떨쳤는데, 거대한 오르간을 장엄하게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오산입니다. 15세기에 작성된 스꽈르챨루삐 필사본 121 장 뒷면은 란디니의 초상을 담고 있되, 뽀르따띠프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다 아래쪽에도 뽀르따띠프 연주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Ms. Laur. Med. Palat. 87, dit Squarcialupi, f° 121v
Florence, Biblioteca Medicea Laurenziana

현대의 오르간과 닮은 악기들이 등장하는 것은 15세기 이후로, 오르그 뽀지띠프가 점점 더 커지다보니 더이상 이동을 삼가하고 한 장소에 고정시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세속 음악에도 사용되었던 오르간이 점점 더 교회 음악과 밀접해짐으로 해서 더이상 교회 밖에서 쓸 일이 없어지자 오르그 뽀르따띠프는 차차 사라졌습니다.

lundi 22 septembre 2008

orgue « 오르간 »

orguegens 이나 amour 처럼 성과 수의 사용이 조금 특별한 단어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첫눈에는 보통 단어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남성 단수 (un orgue) 는 한 대의 오르간을 가리키며, 남성 복수 (des orgues) 는 여러 대의 오르간을 가리키니까요.

문제는 여성 복수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때 특이한 점은 복수이면서도 여전히 단 한 대의 오르간을 칭하는 것입니다. 오르간이라는 악기가 워낙 대규모이고 다양한 부위들 (수많은 관, 여러 층의 건반과 페달, 바람을 불어 넣는 송풍기, 음색을 조절하는 단추들과 기계장치들) 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한 대의 악기를 말할 때도 복수로 여기게 된 것 같습니다. 결국 un grand orgue = des grandes orgues = 한 대의 대형 오르간. 반면, des grands orgues = 여러 대의 대형 오르간.

물론 여성 복수형은 성당이나 큰 연주회장 등에 설치된 진짜 오르간에만 적용됩니다. 해먼드(식) 오르간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성당에서 볼 수 있는 전자 오르간) 이나 중세의 이동식 오르간, 바르바리 오르간 등은 다른 보통 남성 명사와 마찬가지 취급을 받습니다.

쌍-떼띠엔-뒤-몽 성당의 오르간
l'orgue ou les orgues de l'église Saint-Étienne-du-Mont

dimanche 21 septembre 2008

gens « 사람들 »

gensamours 보다도 성의 용법이 조금 더 복잡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그 자체가 이미 복수형으로서, 기본적으로는 남성 복수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gens 을 꾸며주는 형용사도 남성 복수로 써줍니다 : les gens méchants ; Ces gens sont bons.

하지만 형용사가 gens 앞에 놓일 때는 여성으로 변합니다 : les méchantes gens ; les bonnes gens.

그러나 bon/bonne 처럼 여성형과 남성형이 분명하게 달라야지, 만약 같은 모양을 가진 형용사라면, gens 앞에 올 때도 남성으로 취급됩니다. 즉 les pauvres gens 이라고 했을 때, pauvres 는 여성형이 아니라 남성형입니다. 물론 이 문장에서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pauvres 를 꾸며주는 또다른 말이 붙으면 성이 확인됩니다 : tous ces pauvres gens. 하지만 여성형이 뚜렷한 형용사는 여성형을 유지합니다 : toutes ces bonnes gens.

이러한 규칙들이 조합되어 적용되다 보니, les vieilles gens sont fatigués 같이 문법적으로 특이한 문장이 가능합니다. vieillesfatigués 는 모두 gens 을 꾸미는 말인데도, 한 문장 내에서 하나는 여성, 하나는 남성으로 쓰였습니다.

gens 의 성이 불분명한 이유는 아마도 애초에 gens 의 단수형이 gent 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gent ([졍] 또는 [졍뜨]) 는 « 인종, 민족, 부족, 부류 » 등의 뜻으로, 요즘은 gens 과는 무관한, 개별적인 단어처럼 여겨지는데, 바로 여성 명사입니다. 반면 gens 은 그저 « 사람들 » 이라는 뜻으로, 정확한 성과 수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막연하게 쓰는 단어이기 때문에 아마도 남성화된 듯 합니다. 불어에서 여자들만 있을 때는 여성으로, 남자들만 있을 때는 남성으로, 남녀가 섞여 있을 때는 남성으로 받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여성으로 쓰이던 흔적 역시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두 성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vendredi 19 septembre 2008

amour(s) « 사랑 »

불어를 잘, 또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대표적인 불어 단어로 잘 알려진 amourdélice 와 비슷한 문법적 특징을 가진 명사입니다. 즉 단수일 때는 남성으로, 복수일 때는 여성으로 취급됩니다. 예 : un amour pur ; des amours pures (et non purs).

그런데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사랑, 순수한 감정으로서의 사랑을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위의 원칙이 적용되나, 육체적인 사랑, 연애 관계, 사랑의 대상(물) 등을 뜻할 때는 복수이더라도 남성을 유지합니다. 예 : des amours secrets (et non secrètes).

단수일때는 비교적 일관적으로 남성으로 쓰이는 편이긴 하나, 드물게 여성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강조하고 싶은 의미에 따라, 발음의 조화로움에 따라, 성을 잘 골라서 써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며, 이해할 때도 역시 조금 더 섬세한 노력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사실 현대인들은 amour 의 성을 혼동하여 사용하는 추세이며, 유명한 작가들도 문학적인 암시와 각운 따위의 효과를 위해, 남성으로 써야 할 자리에 여성으로, 또는 그 반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amour 의 성이 고정되지 못한 것은 아마 단어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 현대 불어 amour 는 라띠나어 amor 로부터 유래하긴 했는데, 대부분의 다른 불어 어휘들과는 달리, 라띠나어로부터 곧장 온 것이라기 보다는, 옥어를 한번 거쳐서 왔습니다. 만약 라띠나어가 자연스럽게 변했더라면 amor 는 불어에서 amour 가 아니라 *ameur 라는 형태를 띄었어야 정상입니다. 다른 예들 : calor (더위) => chaleur ; cantor (가수) => chanteur ; valor (가치) => valeur, etc. 반면 amoramour 로 변하는 것은 옥어에서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리고 바로 옥어에서 이 단어는 여성입니다. 옥어로부터 이 단어를 수입한 까닭에, 불어에서도 중세에는 amour 의 성이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our 로 끝나는 다른 단어들이 대부분 남성이므로, 그리고 원래 라띠나어에서도 amor 는 남성이었기 때문에, 불어 amour 를 남성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후로, 어떤 사람들은 남성으로, 또다른 사람들은 여성으로, 이럴 때는 남성으로, 저럴 때는 여성으로, 망설이며 사용하던 습관이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고정되지 못한 채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amour, délice, hymne 등은 현대 불문법에서 두 가지 성이 있는 단어로 인정을 받은 경우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단어들이 지역에 따라, 공식적으로 정해진 성과는 반대의 성으로 쓰입니다. 한 예로, armoire (장롱) 는 공식적으로는, 그리고 프랑쓰 도처에서 여성으로 간주되지만, 루씨용 지방에서는 남성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자주 목격된다고 합니다. 또 lièvre (산토끼) 는 사전에 남성으로 표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산토끼 중 특별히 수컷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뻬르삐녕 근처와 루에르그 지방에서는 여성 명사 취급을 받습니다. 성의 변화는 지역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도 나타납니다. doute (의심), poison (독약), navire (항해선) 등은 현재에는 모두 남성으로 고정된 단어들이지만, 17-18세기까지는 모두 여성 명사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예들은 모두, 문법적인 성이 얼마나 임의적이고 인위적인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불어 뿐 아니라, 성이 있는 외국어들을 배울 때 초보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 몇몇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지름길이 없습니다. 단어 하나하나 별로 무작정 외우는 수 밖에는...

mercredi 17 septembre 2008

un hymne/une hymne

불어의 명사들은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그 중 몇몇은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enfant, malade, pianiste, etc.
un enfant = « 남자 아이 » ; une enfant = « 여자 아이 »
un malade = « 남자 환자 » ; une malade = « 여자 환자 »
le pianiste = « 남자 피아노 연주자 » ; la pianiste = « 여자 피아노 연주자 »

이런 단어들은 enfant 을 제외하면 대개 -e 로 끝나는 어휘들로서, 한 단어가 양성을 모두 갖고 있다기 보다는, 남성 단어와 여성 단어가 같은 모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이런 단어들은 주로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 상태 등과 관련된 말로서, 실제 자연의 성에 문법의 성을 그대로 맞춰 쓰기만 하면 되므로, 사실상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물건이나 개념을 칭하는 단어들, 즉 자연의 성이 없는 단어들이, 뜻이나 수에 따라 성이 변화하는 경우입니다. 그러한 예 중 하나가 hymne [임느]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남성 명사로 쓰여서, « 찬가, 송가 », 즉 신이나 영웅, 위대한 역사적 인물, 또는 집단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찬미하는 노래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찬가는 특별한 형식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쁨과 열광을 표현하는 내용을 담은 시와 노래, 음악 등을 두루 포괄합니다. 그리고 한 나라의 국가를 칭하기도 하는데, 역시 남성으로 쓰입니다 : l'hymne national français (O) ; l'hymne nationale française (X).

hymne 가 여성으로 쓰이면 특별히 천주교의 수도자들이 성무일도 중 읊거나 노래하는 기도문을 칭합니다. 이것은 우리말로 « 찬미가 » 라고 하며, 전통적으로 노래로 불려졌기 때문에, 음악 양식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찬미가의 노랫말은 운문으로 쓰여져 있으며, 한 연은 대개 4행 정도, 전체 연 수는 대략 십여개에 달합니다. 그리고 모든 연은 같은 음절수, 같은 행수, 같은 각운 구조를 유지합니다. 결국 시만 놓고 볼 때는 찬미가는 부속가와 매우 닮았습니다. 그 때문에 고통의 어머니 (Stabat Mater) 같은 시는 부속가로도, 찬미가로도 사용됩니다. 하지만 찬미가는 부속가보다 훨씬 짧기 때문에, 같은 시로부터 세가지 찬미가가 나왔습니다 (Stabat Mater, Sancta Mater, Virgo uirginum). 길이 보다도, 찬미가와 부속가를 구별하는 보다 결정적인 특징은 음악입니다. 부속가는 비교적 정교한 선율이 계속해서 새로 나오는데 비해, 찬미가는 모든 연을 비교적 단순한 단 하나의 선율로 반복하니까요.

아무튼 이렇게, 성에 따라 같은 단어가 넓은 의미로도, 특정한 전문 용어로도 쓰인다는 사실 !

délice(s) « 쾌락 »

두 가지 성을 모두 가진 단어 중 또다른 예로 délice 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hymne 와는 또다르게, 복수냐 단수냐에 따라 성이 달라집니다. 우선, délices 는 라띠나어 시절부터 이미 여성 복수형으로 굳어진 단어로서 (deliciae), « 지극한 쾌락, 극도의 즐거움, 환희, 황홀 » 등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단수로 쓰이면, 남성으로 취급되며, 비슷한 뜻을 유지하기는 하되, 특별히 먹는 것과 연관되어 쓰일 때가 많습니다. 즉 un délice = « 매우 맛있는 음식, 황홀할 정도로 감미로운 진미 ».

délices 와 연관된 숙어 하나로 délices de Capoue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Capoue 는 이딸리아 남부에 있던 고대 도시 까뿌아 (Capua) 를 말하는데, 아니발 (Hannibal) 이 여기서 기원전 215년의 겨울을 한가로이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는 2차 뽀에니 전쟁 (2e guerre punique) 중이었는데, 아니발과 그의 군대는 훈련과 경계는 커녕, 까뿌아에서 먹고 마시고 온갖 종류의 다른 쾌락을 즐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일화가 속담처럼 굳어져서, délices de Capoue 라는 숙어가 나왔습니다. 이 표현과 함께 사용되는 동사는 주로 s'endormir 로, je m'endors dans les délices de Capoue 라고 하면, « 나는 꺄뿌의 쾌락 속에 잠든다 » 고 직역할 수 있는데, 물론 이것은 실제로 잠들 때 하는 말이 아니라,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채) 안이하고 나른한 삶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딱 내 경우...)

dimanche 14 septembre 2008

Stabat Mater dolorosa 2

Stabat Mater dolorosa est une célèbre séquence, mais aussi une hymne. L'hymne (au féminin) est une prière chantée aux offices. Les textes des hymnes ont exactement les mêmes caractéristiques que ceux des séquences de sorte qu'on ne peut pas distinguer les uns des autres. Seule la musique les différencie, car les strophes d'une hymne sont chantées toutes sur une seule et même mélodie, tandis qu'une séquence propose du nouveau matériau musical groupé par paire tout au long du texte. Ainsi, dans un livre de chants, Stabat Mater hymne se présente comme suit :

L'hymne Stabat Mater (à comparer avec la séquence Stabat Mater)
Mais ici seulement la première moitié du poème Stabat Mater est utilisée. En fait, on a subdivisé le long texte de la séquence pour en créer trois hymnes à l'usage différent : Stabat Mater dolorosa (v. 1-10) pour vêpres, Sancta Mater istud agas (v. 11-14) pour matines et Virgo uirginum praeclara (v. 15-20) pour laudes. Et il semble que jusqu'au XVIIIe siècle, les trois hymnes se chantaient sur trois ou quatre mélodies différentes. À la fin du XVIIIe siècle, deux d'entre elles se sont réunies pour devenir la mélodie qu'on voit ci-dessus, et depuis, toutes les trois hymnes issues de Stabat Mater sont chantées sur cette musique. L'hymne Virgo uirginum a donc exactement le même aspect que l'hymne Stabat Mater.

Virgo uirginum
Les trois hymnes étaient à chanter le vendredi après le dimanche de la Passion, c'est-à-dire une semaine avant le vendredi saint.

mercredi 10 septembre 2008

Stabat Mater dolorosa

Stabat Mater dolorosa (La mère se tenait douloureusement) est l'une des cinq séquences officiellement admises par l'Église. Mais elle a une histoire un peu particulière par rapport aux quatre autres. Composée au XIIIe siècle peut-être par Jacopone da Todi, cette séquence avait été bannie avec tant d'autres lors du Concile de Trente (XVIe s.) qui voulait purifier la musique liturgique. Mais en 1727, le pape Benoît XIII l'a réintégrée à la liturgie. Aujourd'hui, la fête associée à cette séquence est celle de la Notre-Dame des douleurs (15 septembre), mais comme les autres séquences, elle est rarement chantée. Au final, seules Victimae paschali et Veni, Sancte Spiritus sont obligatoires.

Pourtant, Stabat Mater n'a jamais cessé d'inspirer les compositeurs, même pendant la période où elle était interdite. Beaucoup ont écrit la musique sur le texte de cette séquence pour exprimer la souffrance d'une mère, en l'occurrence de la Vierge Marie qui se tenait péniblement près de la croix. En revanche, la mélodie de la séquence ne semble pas avoir séduit beaucoup de compositeurs. La plupart des Stabat Mater connues sont des œuvres sans relation avec le plain-chant original.

Le début de la séquence Stabat Mater dolorosa
Pourtant la mélodie originale est aussi une très belle musique, avec une structure simple et solide. Pour une pièce de la deuxième moitié du XIIIe siècle, elle respecte rigoureusement le canon des séquences classiques d'Adam de Saint-Victor. Le schéma de la musique est tout simplement de AA - BB - ... - II - JJ. Le poème a la même structure, tout en se subdivisant en aab ccb pour les rimes.


mardi 9 septembre 2008

Dies irae

Dies irae (Le jour de colère) est sans doute la plus célèbre des séquences. Elle est non seulement pour la messe du jour des morts (2 novembre), mais aussi pour toutes les messes pour les défunts et pour l'enterrement. En principe, Dies irae a donc plus d'occasions d'être chantée que Victimae paschali, Veni, Sancte Spiritus, Lauda, Sion ou Stabat Mater. Mais en réalité, il est bien rare aujourd'hui d'entendre cette séquence latine dans les messes. Comme Lauda, Sion et Stabat Mater, si elle est admise dans la liturgie, elle n'est plus obligatoire.

Dies irae reste tout de même très célèbre, car depuis le XVIe siècle, beaucoup de requiems ont une partie centrale composée sur le texte de la séquence. Parfois cette partie n'est constituée que d'un seul mouvement, mais assez souvent, le long texte de Dies irae est sectionné pour former plusieurs mouvements de suite. En tout cas, comme Dies irae est une prière importante qui distingue le requiem des autres messes, quelle que soit la position de l'Église, elle est incluse dans un grand nombre de requiems.

La mélodie originale de la séquence a aussi souvent servi de base pour une nouvelle composition. C'est certes le cas de toutes les séquences, mais les œuvres musicales utilisant le thème de Dies irae sont innombrables et dont certaines sont très populaires : plusieurs versions de Danse macabre de Liszt, celle de Saint-Saëns, Symphonie fantastique de Berlioz, etc. Rythmé, harmonisé, orchestré, le plain-chant médiéval est devenu un air que tous les mélomanes (sérieux) connaissent et reconnaissent.



La poème est souvent attribuée à Thomas de Celano (v. 1200-v. 1260), disciple et biographe du saint François d'Assise. Elle s'éloigne un peu de la norme victorine et s'autorise un peu plus de liberté. Son schéma de rimes est simple jusqu'à la huitième strophe : aaa bbb. À partir du verset 17 qui devrait être la première moitié de la strophe IX, il est difficile de schématiser et de parler des strophes, la dernière partie du poème ayant une versification plutôt libre et instable.

La structure musicale aussi est à la fois simple et particulière, comparée aux séquences classiques. Le début est « normal » : AA - BB - CC. Mais la strophe IV, au lieu de présenter une nouvelle mélodie, répète tout à partir du début. Ainsi, [AA - BB- CC] - [AA - BB - CC] - [AA - BB - C - D]. La dernière partie (D) qui reflète le changement rythmique du texte peut être subdivisé en trois phrases mélodiques.

Liber usualis ou d'autres livres de chants de l'Église ne permettent pas de voir facilement la structure de Dies irae, car la musique et le poème y sont entièrement notés et écrit de façon continue, sans répétition, sans distinction de phrase, de vers, de strophe, etc. Une page d'U. Michels, Atlas zur Musik, v. I, Munich, 1977, résume plus clairement ce que nous venons de dire.

Dies irae

dimanche 7 septembre 2008

Lauda, Sion, Salvatorem

Lauda, Sion (Loue, Sion, le Sauveur) est l'une de ces quatre séquences autorisées par l'Église après le Concile de Trente (1545-1563). Mais bien qu'elle soit autorisée, aujourd'hui, elle est rarement pratiquée. Contrairement à Victimae paschali et à Veni, Sancte Spiritus, Lauda, Sion n'est plus obligatoire. C'est probablement parce que cette séquence est trop longue et que musicalement, elle n'est pas une pièce facile à chanter.

Le début de la séquence Lauda, Sion, Salvatorem

La séquence est attribuée au saint Thomas d'Aquin. Elle serait donc du XIIIe siècle, l'époque post-victorine. Le très célèbre saint vouait une adoration particulière à l'Eucharistie. C'est pour cela que la séquence est destinée à la Fête-Dieu (60 jours après Pâques), la fête où l'on admire le corps et le sang du Christ.

La structure du poème est intéressante en ce qu'elle n'est pas entièrement isostrophique tout en ayant l'air. Depuis le début jusqu'à la neuvième strophe, les rimes suivent le schéma aab ccb, comme celui de Veni, Sancte Spiritus (sauf qu'ici, b change aussi). À partir de la strophe X, le nombre de vers augmente de deux. Ainsi, le nouveau schéma de rimes : aaab cccb. Et à la dernière strophe, encore deux vers de plus : aaaab ccccb.

La musique ne reflète pas vraiment ce changement, mais elle apporte de son côté une légère irrégularité tout en respectant le cours habituel du genre. La nouveauté se trouve dans les strophes III et IV. Au lieu d'un schéma CC - DD, nous avons ici CD - CD. Ainsi, toute la musique de la strophe III est répétée à la strophe IV. Sur le plan musical, on pourrait regrouper les deux strophes en une seule, mais le texte garde son propre agencement. La structure générale de la mélodie est donc : AA - BB - CD - CD - EE - FF - .... KK - LL. Un autre trait marquant est la tessiture très large (ut1-sol2). Et elle est entièrement exploitée tout au long du chant. Pour cela, la mélodie comporte beaucoup de sauts d'intervalle. La musique semble longue et complexe, mais elle est aussi constituée de petits motifs ou de groupes de motifs qui se répètent et qui s'imitent, ce qui donne une certaine cohérence globale.

samedi 6 septembre 2008

Veni, Sancte Spiritus

Veni, Sancte Spiritus (Viens, Saint-Esprit)
Veni, Sancte Spritus est une des quatre séquences retenues par le Concile de Trente. Comme son titre (ou plutôt son incipit) l'indique, elle est pour la Pentecôte.

Veni, Sancte Spritus est souvent attribuée soit au pape Innocent III (1160-1198-1216), soit au cardinal anglais Étienne Langton (v. 1150-1228). Dans les deux cas, elle daterait de la fin XIIe-début XIIIe siècle, c'est-à-dire l'ère « victorine ». Le schéma aussi bien poétique que musical est effectivement très régulier comme ceux établis par Adam de Saint-Victor : AA-BB-CC-DD-EE. On pense qu'il y eut des phrases isolées qui commence et qui clôt la séquence comme la norme victorine le veut, mais qu'elles furent supprimées probablement à cause de la régularité trop parfaite de la partie centrale. En effet, la régularité, la cohérence et l'équilibre caractérisent bien cette séquence. D'ailleurs, la rime est même trop simple, car il n'y en a qu'une : -ium, bien qu'on puisse parler des rimes internes plus complexes : aab ccb, b restant immuable. Cette rime (b) est reflétée dans la musique par une cadence parfaitement identique (1-6) ou très semblable (7-10).

Bien qu'elle soit souvent considérée par de grands spécialistes comme parfaitement équilibrée entre la régularité et la variété, pour ma part, je ne trouve pas cette séquence particulièrement belle. Je préfère Victimae paschali laudes, plus simple, plus courte, moins régulière, mais plus jolie, plus émouvante même. Mais c'est peut-être une question d'interprétation. Car quand Veni, Sancte Spiritus est chantée sur le mode rythmique 1 (long-bref), elle sonne bien. Est-ce que cela a un rapport avec le rythme inhérent du vers latin ? Mais est-ce que c'est la bonne façon de chanter la séquence ? Tout aussi discutable est l'interprétation suivante que j'ai trouvée sur l'internet dans laquelle s'alternent un chœur masculin et un autre féminin. C'est plutôt une bonne idée et cela fait ressortir chaque phrase musicale répétée, mais encore une fois, est-ce la façon authentique de chanter une séquence ?


dimanche 31 août 2008

Victimae paschali laudes

Victimae paschali laudes (Louanges à la victime pascale)
Attribuée à Wipo de Bourgogne (mort vers 1050), cette admirable séquence est une des plus anciennes. De plus, elle est encore en usage aujourd'hui, faisant partie des cinq séquences autorisées à la liturgie après le Concile de Trente. Comme on peut le deviner, « À la victime pascale » est chantée pour la messe de Pâques.

Son schéma musical est de A - BB - CC - D. Son schéma textuel ne correspond pas à celui de la mélodie. Le poème n'a pas de rimes régulières. De type ancien, sa structure n'est pas encore dans la norme d'Adam de Saint-Victor, qui est beaucoup plus régulière et plus longue. Sa mélodie fut reprise par plusieurs compositeurs de différentes époques.

samedi 30 août 2008

부속가 (séquence)

부속가는 몇몇 특별한 날의 미사에서만 노래되는 단선율 평성가 (plain-chant) 로, 미사의 다른 문구들과는 달리 운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음악학 저술들에서는 « 부속가 », « 속송 », « 세쿠엔치아 », « 시퀀스 » 등 다양한 용어들을 사용해 왔는데, 한국 천주교의 공식 명칭은 « 부속가 » 입니다. « 부속가 » 는 상당히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은 라띠나어 sequentia 나 불어 séquence 의 원뜻인 « 연속, 계속 » 을 포함하고 있는 동시에 그 기원까지 암시해 줍니다. 즉 부속가는 애초에 복음환호송에 « 부속 » 되어 있던 노래로서, 그 뒤를 « 계속 이어 » 불려졌던 것입니다. 현재는 부속가가 불려지는 일도 극히 드물지만, 불려질 때는 반대로 복음환호송 앞에 불려집니다. (1)

복음환호송 (alleluia) 은 말그대로 복음을 듣게 되는 것이 너무 기뻐서 환호하는 노래이기 때문에, 옛부터 매우 길고 화려한 선율을 가진 음악이었습니다. 특히 그 후렴구의 가사는 알-렐-루-야, 단지 네 음절 뿐인데, 음악에는 멜리슴 (mélisme) 이 잔뜩 들어가서, « 알. 렐. 루. 야. » 라고 노래되는 것이 아니라, « 알레에에에에에에--------- 루우우우우우우---- 야아아아아아아아------------- » 하는 식으로, 모음을 길게 늘여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나치게 길어지다보니 사람들이 음악을 외우기 힘들어 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옛날에는 악보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정확한 높이와 리듬을 표시하지 못했으므로, 가수들은 흔히 음악을 통째로 외워야 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길게 모음으로 노래되는 부분에 새로운 가사를 붙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랫말과 함께 외우면 그래도 좀 더 기억에 도움이 되니까요.

이렇게 해서 태어난 부속가 중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쌍-걀 (Saint-Gall, 현재 스위쓰령) 수도원의 수사였던 놋께르 발불루쓰 (Notker Balbulus = 말더듬이 놋께르) 가 남긴 Liber hymnorum (= 찬미가 책, 9세기 말) 에 담겨 있는 38 편의 부속가입니다. 이 책에는 서문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이 서문에서 놋께르는 방금 제가 위에서 한 이야기, 즉 긴 선율들을 외우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긴 선율들을 자신의 « 불안정한 작은 머리 » 속에 가둘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쥐미에쥬에서 온 한 수사가 자기네 수도원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답니다. 쥐미에쥬 (Jumièges) 는 빠리에서 북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노르멍디 지방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중세에는 매우 중요한 수도원 중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폐허만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튼 놋께르의 서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실제로 남아 있는 작품은 없으나, 부속가의 기원지가 프랑쓰 북부라는 사실입니다.

이후 부속가들은 곧 복음환호송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사실 초기 부속가들을 보아도 알려져 있는 복음환호송들의 선율과 그다지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부속가가 복음환호송에서부터 유래했다는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부속가는 초기의 형태와는 달리 점점 더 규칙적인 운율과 길이를 가진 시의 모습으로 변해갔으며, 따라서 음악도 여기에 맞춰 새로 작곡되었습니다. 부속가의 가장 완성된 형태는 12세기 후반, 아덩 드 쌍-빅또르 (Adam de Saint-Victor) 에 의해 달성되었습니다. 빠리의 성녀 쥰비에브 산 위에 있던 성 빅또르 수도원의 수사였던 아덩이 확립시킨 부속가의 구조는, 여러 연 (최소 십 연) 으로 구성되는 상당히 긴 노래이며, 첫 연과 마지막 연을 제외하면 중간의 연들은 모두 정확하게 둘로 나뉩니다. 이 각각의 반은 똑같은 음절수와 똑같은 리듬, 똑같은 각운 (rime) 을 가지고 있으며, 똑같은 선율에 맞춰 불립니다. 처음과 마지막 연을 빼면 모든 연이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졌으므로, 매 연마다 같은 선율을 반복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각 연마다 새로운 선율이 나와 두번씩 반복됩니다. 요약하면, A - BB - CC- DD - EE - ... - Z.

물론 초기의 부속가들은 이 틀에 잘 들어맞지 않고, 후기 부속가들 중에도 이 틀에서 약간 벗어나거나, 반복을 다시 반복하는 특이한 부속가들도 있습니다. 분노의 날 (Dies irae, 13세기) 이 그러한 예의 하나로, 이 노래는 [AA - BB - CC] - [AA - BB - CC] - [AA - BB - C - D] 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덩 드 쌍-빅또르 이후로는 사실상 모든 부속가들이 아덩의 규범을 기본으로 따릅니다.

부속가는 중세는 물론, 르네썽쓰 초기까지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 수는 거의 오천여곡에 달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미사 음악이 지나치게 화려해지자 트렌또 공의회 (Concile de Trente, 1545-1563) 에서는 단 네 곡을 제외한 모든 부속가들을 전례에서 금지시키기로 하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종교 개혁을 겪고 나서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검토하기 위해 소집된 트렌또 공의회는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중요한 지침을 내렸는데, 기본 노선은 « 쓸데 없이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을 배제한다 » 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1. 부활절 미사를 위한 Victimae Paschali laudes (부활절의 제물에게 찬양을)
  2. 성신강림절 미사 (부활절로부터 50일) 를 위한 Veni, Sancte Spiritu (오소서, 성신이여)
  3. 성체성혈 축일 (부활절로부터 60일) 을 위한 Lauda, Sion, Salvatorem (씨옹, 구세주를 찬양하거라)
  4. 그리고 위령의 날 (11월 2일) 을 비롯하여 기타 위령 또는 장례 미사를 위한 Dies irae (분노의 날)

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다 1727년에 성모통고일 (9월 15일) 을 위한 Stabat Mater dolorosa (고통스런 어머니가 서있었다) 가 뒤늦게 첨가되었습니다. 현재는 그나마도 처음 둘 만이 의무입니다.

부속가는 오늘날 많이 잊혀졌지만, 과거를 통해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몇몇 새로운 음악 졍르 (estampie, estampida, lai) 를 낳았으며, 악구 전체를 그대로 다시 한번 반복하는 작곡 기법 자체를 칭하는 말로도 굳어질 만큼, 음악사에 여러 흔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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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is selon Nancy van Deusen, le terme sequentia proviendrait de sa position avant l'évangile dans la messe : « sequentia is given, designating position, a title derived from the piece's function before the Evangelium, which begins, for example, « sequentia sancti evangelii secundum Matthaeum » [...] Sequentia as a rubric is found exclusively in the position before the Evangelium (N. van Deusen, « Polymelodic Sequences and a « Second Epoch » of Sequence Composition », in Musicologie médiévale. Notations et Séquences. Actes de la Table ronde du CNRS à l'Institut de Recherche et d'Histoire des Textes, 6-7 septembre 1982, édité par Michel Huglo, Paris, Champion, 1987 : 213). Cette explication me paraît peu convaincante voire complètement erronée. Pourquoi appellerait-on une pièce suite alors qu'elle est devant ? Et surtout, on trouve la même indication sequentia sancti evangelii... dans toutes les messes, c'est-à-dire dans toutes celles où la séquence n'est pas comprise.

mercredi 27 août 2008

위령미사곡 (requiem)

미사 중 특별히 죽은 사람들을 위한 미사를 위령미사 (missa pro defunctis = messe pour les défunts) 라 하고, 여기에 붙인 음악을 흔히 requiem 이라고 합니다. requiem 이라는 말은 라띠나어로 « 휴식 » 을 뜻하는 단어 requies 의 목적격 형태로, 옛날에는 위령미사의 입당송 (introït) 이 반드시 Requiem æternam dona eis (그들에게 영원한 휴식을 주소서)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2차 바띠까노 공의회 (1962-65) 이후로는 이 의무 규정이 사라졌지만, 위령미사를 위한 음악은 이미 하나의 졍르로 굳어졌기에, 관습상 계속 requiem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미사 전체를 보면, 위령미사는 방금 말한 입당송을 비롯하여 몇몇 고유문에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기도가 들어가는 점을 제외하면, 사실 보통 미사와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히려 음악에서 상당히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보통 미사를 위한 음악은 단지 통상문만을 다루는데 비해, 위령미사 음악은 고유문도 다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고유문들에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들어있으니까요. 다성 미사 음악이 발달한 후로, 미사 통상문과 고유문 모두에 음악을 붙이는 일은 위령미사곡들을 제외하면 극히 드뭅니다. 하지만 위령미사곡은 여러 고유문 악장이 포함되는 대신, « 대영광송 » 과 « 신앙고백 » 처럼 영광과 환희를 노래하는 통상문 악장들은 빠집니다. 따라서 위령미사곡과 일반 미사곡은 악장의 수와 구성, 형식 등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위령미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보통 미사에는 없는 분노의 날 (Dies irae) 이라는 부속가가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부속가 (sequentia = séquence) 는 몇몇 특별한 날에만 노래되는 기도문으로서, 미사 속의 다른 기도문들과 달리 시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즉 고유한 리듬을 가지고 있으며, 쌍을 이루는 각운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aa - bb - cc - dd...) , 문학적으로도 상당히 다듬어진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여러 연이 반복되는 비교적 긴 노래입니다. 중세와 르네썽쓰 시대에는 수천 곡의 화려한 부속가가 유행을 했었는데, 트렌또 공의회 (1545-1563) 에서 오로지 네 개만 남기고 모두 금지시켰습니다. 분노의 날은 그 넷 중 하나로 전통적으로 또마조 디 첼라노 (Tommaso di Celano) 가 13세기에 작사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16세기까지는 분노의 날이 모든 위령미사곡에 꼭 포함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초의 다성 레퀴엠으로 간주되는 기욤 뒤파이나 졍 오께겜의 위령미사음악에는 « 분노의 날 » 악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께겜의 제자 엉뜨완 브뤼멜 (Antoine Brumel) 이후로 « 분노의 날 » 은 점점 더 위령미사를 작곡하는 작곡가들이 가장 중점을 두는 악장이 되어 갔습니다. 특히 고전과 낭만 시대 작곡가들이 « 분노의 날 » 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한껏 드러내려는 시도를 많이 했지요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보통 미사 음악과 마찬가지로 위령미사곡의 형식적 구속이 많이 느슨해졌습니다. 이미 1868년에 브람쓰는 미사의 라띠나어 기도문이 아닌 독어판 성서에서 자유롭게 발췌한 문장들을 가사로 삼아 하나의 독일 레퀴엠 (Ein deutsches Requiem = Un requiem allemand, op. 45) 을 지었습니다. 약 백 년 뒤에 (1961) 브리튼이 작곡한 전쟁 레퀴엠 (War Requiem, op. 66) 역시 비슷한 예로, 여기서는 전통 위령미사에 사용되는 라띠나어 기도문과 윌프레드 오웬 (Wilfred Owen) 의 영어 시가 함께 사용됩니다. 결국 위령미사곡 역시 보통 미사곡처럼, 실제 미사 때에 사용하는 음악이라기 보다는, 순수 연주/감상용 음악이 되었습니다.

미사 음악 (musique de messe)

미사를 구성하는 기도문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 미사 통상문 (ordinaire) 과 미사 고유문 (propre). 미사 고유문이란 말그대로 매 미사마다 고유한 (propre), 즉 매번 달라지는 기도문을 말하는 것으로, 그 중 특히 노래로 불려지는 대표적인 예들은 « 입당송 », « 화답송 (graduel) », « 복음환호송 (alleluia) », « 부속가 (séquence) », « 봉헌송 », « 영성체송 » 등입니다.

반대로 미사 통상문은 일반적으로 모든 미사에 포함되어 있는 공통된 부분들로, « 자비송 (Kyrie) », « 대영광송 (Gloria) », « 신앙고백 (Credo) », « 거룩하시도다 (Sanctus) », « 하느님의 어린양 (Agnus Dei) » 등을 말하며, 서양 음악에서 미사라고 하면 바로 이 기도문들에 붙인 음악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미사곡들이 이 다섯 악장으로 구성되지만, 여기에 « 미사가 끝났으니 (Ite, missa est) » 가 첨가되는 일이 매우 흔하고, « 거룩하시도다 » 의 마지막 두 행이 « 주님의 이름으로 (Benedictus) » 라는 독립된 악장으로 구별되기도 합니다. 반면 평일 미사를 위한 짧은 미사곡에서는 « 대영광송 » 이나 « 신앙고백 » 이 생략되는 경우가 잦으며, 특히 사순절과 대림절 동안은 모든 미사에서 « 대영광송 » 이 반드시 생략됩니다. 그리고 « 대영광송 » 이 생략된 미사에서는 « 미사가 끝났으니 » 도 함께 사라지며, 대신 « 하느님을 축복합시다 (Benedicamus) » 로 대치됩니다. 따라서 미사곡마다 조금씩 차이가 보일 수는 있으나,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작품이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개의 미사 통상문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음악적으로 이러한 구별이 확립된 시기는 대략 14세기입니다. 그 전에는 통상문과 고유문이 모두 단선율 평성가 (plain-chant) 로 불려지다가, 고유문들이 먼저 다성 음악으로 작곡되더니, 점차 작곡가들의 관심이 거의 통상문에만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미사 통상문 모두 (다섯 기본 기도문 + « 미사가 끝났으니 ») 가 다성으로 작곡된 미사곡은 뚜르네 미사 (Messe de Tournai) 라고 부르는 작품입니다. 약 1300년 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음악은 작곡가를 알 수 없는 대신, 프랑쓰 북부 뚜르네라는 도시의 주교좌 성당에서 발견되었기에 이런 이름으로 불립니다 (뚜르네는 현재는 벨직령). 뚜르네 미사는 다성 미사로서 가장 오래된 음악이긴 하지만 과연 이 미사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악장이 단 한 사람의 작품인지는 불확실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뚜르네 미사는 여러 작곡가의 작품을 한 데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즉 A의 « 자비송 », B의 « 대영광송 », C의 « 신앙고백 »... 비록 모든 악장이 3성부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그 양식은 한 사람의 솜씨로 보기에는 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쏘르본 미사 (Messe de Sorbonne), 뚤루즈 미사 (Messe de Toulouse), 그리고 바르셀로나 미사 (Messe de Barcelone) 도 모두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 작품들입니다. 셋 다 뚜르네 미사보다 몇 년 뒤에, 하지만 모두 14세기 초반에 작곡된 다성 미사곡으로, 편의상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띠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작곡가를 알 수 없으며, 과연 각각 한 명의 개별 작곡가의 작품인지가 큰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세 미사도 서로 이질적인 특징을 가진 악장들이 혼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뚜르네 미사와는 달리 미사 통상문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지도 않는 등, 짜집기한 흔적이 쉽게 눈에 보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다성 음악 미사는 기욤 드 마쇼 (Guillaume de Machaut) 의 노트르-담 미사 (Messe de Notre-Dame) 로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랑쓰의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에서 연주되기 위해 작곡된 이 작품이야말로 전체가 단 한 명의 작곡가에 쓰여진 첫 미사 음악입니다. 하지만 이 미사마저도 그 구상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습니다. 과연 마쇼가 처음부터 이 미사를 단 하나의 작품으로 계획한 것일까요 ? 연구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많은 마쇼 전문가들이 아니라고 보는 추세입니다. 즉 각각의 악장이 여러 시기에 걸쳐 독립적으로 작곡되었다가, 1362-63년 경 성모를 위한 미사라는 이름 하에 모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중세 최대의 작곡가에 의해 작곡되었다고는 하나, 노트르-담 미사뚜르네 미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정말 현대식 개념으로서의 미사, 즉 한 명의 작곡가가 일관된 통찰력을 가지고 미사 통상문 전체를 위해 작곡한 음악 중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영국 작곡가 라이오넬 파워의 (Lionel Power) 작품입니다. 알마 레뎀또리쓰 마떼르 미사 (Missa super Alma Redemptoris Mater) 라고 부르는 이 작품은 15세기 초에 작곡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사의 모든 악장이 유명한 평성가 Alma Redemptoris Mater (= 구세주를 기른 어머니) 의 선율을 기본으로 삼아 작곡되었기 때문에, 전체가 응집력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후로 르네썽쓰 시대를 거치면서, 기욤 뒤파이 (Guillaume Dufay), 졍 오께겜 (Jean Ockeghem), 죠스깡 데프레 (Josquin Desprez), 롤렁 드 라쒸쓰 (Roland de Lassus), 죠반니 다 빨레스트리나 (Giovanni da Palestrina) 같은 거장들이 미사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음악적 소재에 기반하여 작곡하는 양식을 굳혔습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로는 점점 미사 음악의 형식적 구속이 허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작곡가들은 점점 더 다양한 형식을 실험했고, 그러면서 « 대영광송 » 이나 « 신앙고백 » 같이 긴 기도문은 여러 개의 소악장으로 잘게잘게 나눠지기도 했고, 반대로 « 미사가 끝났으니 » 나 « 하느님을 축복합시다 » 같이 극히 짧은 기도문은 많은 반복과 기악 구절의 첨가 등으로 더 길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미사 음악은 더이상 실제 미사를 위한 음악이 아닌, 순전히 연주용 예술 작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설사 자기 종교가 천주교가 아닌 작곡가들도 대부분 한두편의 미사를 남겼습니다. 그저 음악의 한 졍르가 됐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런 미사곡들은 정말 아름답긴 하지만, 불행히도 동네 성당에서 일반 신자들이 참여하는 보통 미사 때에는 부르거나 듣기가 힘듭니다. 고도로 훈련된 합창단과 대규모 관현악 반주를 필요로 할 때가 많고, 길이도 무척 길기 때문입니다. 정작 현대의 미사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방법은 오히려 14세기 이전으로 돌아간 듯 합니다. 그때그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음악들, 서로 다른 양식과 서로 다른 작곡가,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노래들을 여기저기서 모아서 짜집기로 부르니까요.

samedi 23 août 2008

graduel « 화답송 »

« 층계, 계단 » 을 뜻하는 라띠나어 gradusgradus ad Parnassum 외에 또하나의 음악 용어 graduel 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répons granduel 이나, 흔히 줄여서 부르는 graduel 이라고만 하는 이 말은 꼭 음악 용어라기 보다는, 미사의 일부로써, 제 1 독서 뒤에 노래되는 응답송을 칭합니다. 이 기도문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약간의 논쟁이 있긴 하지만, 애초에는 제단이나 독서대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서 노래불렀기 때문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도 옛날에는 « 층계송 » 이라고 했었는데, 한동안 « 응송 » 이라고도 부르다가, 얼마전부터는 « 화답송 » 이라고 한답니다.

응송, 응답송, 화답송 같은 말은 불어 répons, 라띠나어 responsorium 등을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노래를 부르는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한 명의 독창자가 한 구절 (V) 을 노래하면, 나머지 신자 모두가 여기에 대한 « 답 » 으로 짧은 후렴구 (R) 를 노래하는 것이지요. 그러고나면 다시 독창자가 새로운 가사와 새로운 선율을 노래하고, 신자들은 다시 후렴구를 부르는 식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결국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R) - V1 - R- V2 - R - V3 - R - V4 - R, etc.

R 는 모두 합창이고 항상 똑같은 선율과 가사인 대신, V 는 모두 독창이고 새로운 가사이긴 하지만 반드시 선율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는 독창자가 가사의 리듬과 길이에 따라 자유롭게 장식과 멜리슴 (mélisme) 을 넣어가며 부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천주교의 미사나 성무일도에는 이렇게 주고 받는 응답 방식으로 부르는 노래들이 여럿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라뒤엘인 것입니다.

현재는 그라뒤엘 또는 화답송을 노래로 부르는 일은 드뭅니다. 하지만 사회자 한 명이 기도문의 여러 구절을 읽는 동안 신자들이 중간중간 후렴구를 반복하는 그 낭독 방식은 여전히 음악적 기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jeudi 21 août 2008

빠르나쏘쓰로 오르는 계단 (gradus ad Parnassum)

문화와 예술, 학문과 지식의 보금자리라 믿어지는 빠르나쏘쓰 산은 빠리의 한 구역프랑쓰의 문학 운동에 그 이름을 주었을 뿐 아니라 gradus ad Parnassum [그라두쓰 아드 빠르나쑴] 이라는 라띠나어 표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직역하면 « 빠르나쏘쓰로 오르는 계단 », 의역하면 « 예술의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밟아야 할 체계적인 과정 » 을 뜻하는 이 표현은 사실상 교본, 사전, 자습서, 연습문제 같은 책의 제목으로 자주 쓰였고, 더 나아가 그런 부류의 책을 포괄하는 일반 용어가 되었습니다. 불어에서도 gradus ad Parnassum [그라뒤쓰 아드 빠르나썸] 또는 그저 gradus [그라뒤쓰] 라고 하면, 특별히 라띠나어 시 작법을 설명한 책과 라띠나어 운율 사전 등을 칭합니다.

시 외에도 이 표현은 종종 음악 분야에서도 쓰였습니다. 특히 유명한 저술 하나는 외스터라이히의 작곡가 푹쓰 (Johann Joseph Fux) 가 지은 Gradus ad Parnassum 입니다 (1725). 스승과 제자의 대화 형식으로 쓰여진 이 대위법 설명서는 많은 유명 작곡가들의 교본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끌레멘띠 (Muzio Clementi) 의 Gradus ad Parnassum (1817) 은 글로된 저술이 아니라, 피아노를 위한 실제 음악 작품입니다. 총 100 곡으로 구성된 이 피아노 연습집은 갈수록 난이도를 높여가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게끔 엮어졌기 때문에, 이 백 곡을 차근차근 연마하면 이론적으로는 피아노의 정상, 즉 빠르나쓰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요. 피아노를 배워 보신 분들은 아마 아농 (Charles-Louis Hanon) 이나 체르니 (Carl Czerny) 의 연습곡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 교본들이 바로 그라두쓰 아드 빠르나쑴의 일종입니다.

드뷔씨의 유명한 Doctor Gradus ad Parnassum 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의 구석 (Children's Corner) 의 첫 곡인 이 작품은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이들이 지겨워하는 연습곡을 의인화하여 박사라는 호칭을 붙였고, 그럼으로써 제목만 들어도 따분하고 현학적인 느낌을 줍니다. 곡 자체도 음계 연습을 연상시키지만, 물론 이 작품은 연습곡이 아니라 재미있는 풍자곡이지요.

아르뚜로 베네데띠 미껠란젤리가 연주하는 그라뒤쓰 아드 빠르나썸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