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dredi 30 novembre 2007

울리뽀 (OuLiPo)

실종 (La Disparition) 이나 돌아온 여자들 (Les Revenentes) 같은 특이한 작품은 죠르쥬 뻬렉 (Georges Perec) 만 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울리뽀의 일원이었는데, 이 문학 모임의 회원들은 모두 형식적 구속을 받는 작품들을 쓰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OuLiPo 라는 말은 Ouvroir de Littérature Potentielle (잠재적 문학의 작업장) 의 첫자들을 따서 만들어진 말로, 1960년, 작가 레몽 끄노 (Raymond Queneau) 와 수학자 프렁쓰와 르 리요네 (François Le Lionnais) 에 의해 창설된 후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문학 운동입니다. 그 회원은 oulipien 이라 불리는데, 유명한 울리삐앙으로는 두 창설자를 비롯하여 죠르쥬 뻬렉, 이딸로 깔비노 (Italo Calvino), 쟉 루보 (Jacques Roubaud), 베르나르 쎄르낄리니 (Bernard Cerquiglini) 같은 작가, 수학자, 언어학자 등을 꼽을 수 있지만, 그외에도 대중적으로 덜 유명한 사람들도 있고, 몇몇 외국인들도 있습니다. 전반적인 수는 창설 이래 지금까지 총 서른명 정도로,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모든 울리삐앙의 목록. 이들 중 일부는 이제 죽고 없지만, 울리뽀는 일단 가입하면 절대 탈퇴가 안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들도 여전히 회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기 모임에 나오지 않아도 너그러이 용서해 준다는군요.^^

울리삐앙들은 모두 특이한 형식, 말장난, 수학 공식, 복잡한 틀 등을 적용시킨 문학 작품을 쓰는 것을 즐깁니다. 그들은 이러한 구속이 더욱 상상력을 발휘시킨다고 생각하며, 형식적 제한을 받으면서도 내용이 제대로 성립되는 글을 쓰는 것을 문학적 도전으로 삼습니다.

울리뽀는 여러 비슷한 모임을 낳았습니다. 예를 들면,
  • 울리뽀뽀 (OuLiPoPo) = Ouvoir de Littérature Policière Potentielle = 잠재적 추리 문학의 작업장
  • 우빵뽀 (OuPeinPo) = Ouvoir de Peinture Potentielle = 잠재적 미술의 작업장
  • 우트라뽀 (OuTraPo) = Ouvoir de Tragicomédie Potentielle = 잠재적 희비극의 작업장

그외에도,

  • 우뮈뽀 (OuMuPo) = Musique = 음악
  • 울리트라뮈뽀 = OuLiTraMuPo = Littérature Traduite en Musique = 음악으로 번역된 문학
  • 우바뽀 (OuBaPo) = Bande dessinée = 만화
  • 우그라뽀 (OuGraPo) = Grammaire = 문법
  • 우이스뽀 (OuHisPo) = Histoire = 역사
  • 우마뽀 (OuMaPo) = Marionnette = 인형극
  • 우포뽀 (OuPhoPo) = Photographie = 사진
  • 우씨뽀 (OuCiPo) = Cinématographie = 영화
  • 우라뽀 (OuRaPo) = Radio = 라디오
  • 우앙뽀 (OuInPo) = Informatique = 컴퓨터
  • 우뽈뽀 (OuPolPo) = Politique = 정치
  • 우뀌이뽀 (OuCuiPo) = Cuisine = 요리
  • 우쟈뽀 (OuJaPo) = Jardinage = 정원가꾸기
등등.

그리고 이 모든 모임들을 통칭하여 우익쓰뽀 (OuXPo) 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X 는 변수로서, 위에서 보다시피 각 분야의 첫음절로 대치되는 것이지요.

mercredi 28 novembre 2007

돌아온 여자들 또는 글자들 (Les Revenentes)

글자 e 를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완성한 소설, 실종 (La Disparition) 으로부터 몇 년 뒤 (1972), 뻬렉 (Georges Perec) 은 자신이 e 에게 부당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여, 이번엔 오로지 e 만 사용한 소설을 썼습니다. 즉, a 도, i 도, o 도, u 도, 이 소설엔 등장하지 않습니다. y 은 반모음/반자음이기 때문에, 드물게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돌아온 여자들. 실종처럼 제목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 하나는 소설의 내용에 등장하는 오랫만에 돌아온 여자들을 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e 자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 글자 » 는 LA lettre, 즉 여성이기 때문에). 그 시작의 일부 :

Telles des chèvres en détresse, sept Mercedes-Benz vertes, les fenêtres crêpées de reps grège, descendent lentement West End Street et prennent sénestrement Temple Street vers les vertes venelles semées de hêtres et de frênes près desqelles se dresse, svelte et empesé en même temps, l'Évêché d'Exeter. Près de l'entrée des thermes, des gens s'empressent. Qels secrets recèlent ces fenêtres scellées ?

역시나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약간 실망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뻬렉이 간혹 편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즉 발음만 같으면 글자를 바꾸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단 제목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원래 정확한 철자대로 쓰자면 Les Revenantes 여야 하는데 이것을 Les Revenentes 로 바꾼 것이지요. 발음은 두 경우 모두 [레 르브넝뜨] 라고 되기 때문. 그 외에도 위의 예문에서도 보면, desqellesqels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단어들도 원래는 각각 desquellesquels 이어야 합니다. 다른 서양 언어들에서도 비슷하지만, 불어에서도 u 가 뒤따르지 않는 q 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그런데 불어에서는 qu 가 들어가는 단어가 매우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표기를 약호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종에 비해서는 반 밖에 안되는 부피이지만 (140쪽), 그래도 대단하다는 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번엔 글자 하나가 아니고 네 개나 뺏으니까요 !

mardi 27 novembre 2007

출현 (apparition)

e 를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쓰여진 뻬렉의 소설 실종 (La Disparition) 은 간혹 좀 특이한 단어나 잘 안쓰는 표현들이 억지스럽게 나오는 감도 없지 않으나,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매우 유연하게 쓰여져, 읽다 보면 어느새 e 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그저 보통 책처럼 자연스럽게 읽지 않고, 눈에 불을 키고 e 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장난기 많은 뻬렉이 몰래 e 를 하나 숨겨두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의도적이 아니었더라도 실수로 e 가 들어간 말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거죠. 그들이 이 책과 뻬렉에 대한 관심이 넘쳐난 사람들인지, 너무나도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인지, 아무튼 이 실종된 e 찾기는 1969년 책이 출판된 이후, 세대를 넘어 가면서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고, 사람들은 뻬렉의 천재성에 감탄하거나, 아니면 순전히 무의미한 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2003 년에 드디어 e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해 4월에 걀리마르 (Gallimard) 사에서 재판되어 나온 실종 의 119 쪽, 위에서 네번째 줄, 왼쪽에서 두번째 단어에 분명히 e 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 이 네번째 줄은 다음과 같습니다 :

« Booz dorme non loin du grain qu'on amassait »
(보즈는 우리가 줍던 곡식알 가까에서 잔다)

그런데 여기서 이 dorme 라는 단어는 문법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dormir (잠자다) 라는 동사가 접속법 현재 3인칭 단수로 쓰인 것인데, 문맥과 문장 구조상 여기서는 접속법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의 조사에 나선 뻬렉의 추종자들은 원문은 dormait 라고, 즉 e 가 없는 형태라고 주장했습니다. dormaitdormir 동사의 직설법 반과거 3인칭 단수로, 해석은 « 자고 있었다 » 가 되며, 그래야 문맥에도 맞고 문법에도 맞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전 판본들을 보아도 쉽게 확인되는 것이고, 심지어 2003년 재판되어 나온 책들 중에도 dormait 라고, 원문대로 잘 찍혀 있는 것들도 있다고 합니다. 즉, 재판본들 중에서도 일부 권수에만 오자가 난 것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 실수, 장난, 기적 ? 우선, 현대의 인쇄 기술상 이런 식의 실수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고의적인 장난일 확률이 가장 많은데, 사람들은 제일 먼저 걀리마르 출판사를 의심했습니다. 일부러 이런 소란을 일으켜서 책을 많이 팔고자 하는 속셈 아닐까 하는 것이죠. 그런데 걀리마르사는 이 사건에 대해 정말로 놀라면서, 그러한 상업적 계획이 없음을 진심으로 맹세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인쇄소에 의심이 돌아갔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이야 어디서 왔건, 실질적으로는 인쇄 과정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잘 돌아가고 있던 기계를 잠시 멈추고, 문제의 글자를 바꿔 놓은 다음, 다시 기계를 돌리다가, 또 슬쩍 멈추고는, 글자를 다시 원래대로 수정해 놓고는 사라졌을 것이라는 가정이지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인쇄소 직원인지, 아니면 출판사 직원인지, 아니면 몰래 침입한 제 삼 자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혼자 생각으로 저지른 일인지, 출판사에서 내려온 비밀 방침을 따른 것인지, 등등은 정말로 심각하고 본격적인 수사가 있어야 밝혀질 수 있는 문제였는데, 아무도 그렇게까지 파해칠 마음은 없었나 봅니다. 대신 출판사는 오자가 난 판본들을 가능한 한 모두 거둬들여 파본시키기로 했습니다. 그 때문에 유일하게 e 가 찍힌 실종 판은 모두가 찾아 헤매는 희귀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책의 본문에만 주의를 기울이느라 거의 의식하지 않고 넘어가는데, 책의 표지에 e 가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바로 저자의 이름 중에 : Georges Perec. 게다가 이 책은 imaginaire 라는 이름의 총서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것까지 치면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셈입니다. (옆에 그림에는 제목이 안 보이는데, 제목이 흰색 바탕에 흰색 글자로 쓰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책을 손에 들고 봐도 잘 안 보입니다.)

lundi 26 novembre 2007

실종 (La Disparition)

죠르쥬 뻬렉 (Georges Perec, 1936-1982) 은 대회문 (Le Grand Palindrome) 을 비롯하여 특이한 작품을 많이 쓴 작가입니다. 그 중에서도 매우 유명한 실종 (La Disparition, 1969)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책은 실종된 인물을 찾는 일종의 탐정-추리 소설의 내용을 가지고 있으나, 책의 제목에는 또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다름아닌 글자 e 의 실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약 삼백여쪽에 달하는 이 책에는 단 한번도 e 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문장들에서 e 자만 빼고 인쇄한 것이 아니라, e 가 들어있는 단어 자체를 작가가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서양 언어에서나 e 라는 모음은 많이 쓰이겠지만, 불어에는 유난히 e 가 들어간 단어가 많습니다. 그리고 e 는 문법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에, 애초에는 e 가 없던 단어에도, e 를 첨가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동사의 시제를 변화시킬 때, 발음을 구별해야 할 때, 여성형을 만들 때, 등등. 따라서 e 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휘의 선택과 활용을 극도로 제한하겠다고 작가가 스스로에게 구속을 거는 것입니다. 뻬렉은 이러한 형식적인 틀에 구속을 받으면서도 내용을 자유롭게 쓸 수 있음을 보이고 싶어했습니다. 다음은 그 중 한 문단 :
Il fut bon pour l'oto-rhino, un gars jovial, au poil ras, aux longs favoris roux, portant lorgnons, papillon gris à pois blancs, fumant un cigarillo qui puait l'alcool. L'oto-rhino prit son pouls, l'ausculta, introduisit un miroir rond sous son palais, tripota son pavillon, farfouilla son tympan, malaxa son larynx, son naso-pharynx, son sinus droit, sa cloison. L'oto-rhino faisait du bon travail, mais il sifflotait durant l'auscultation ; ça finit par aigrir Anton.

보다시피 e 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한 문단만 해도 정말 대단해 보이는데, 이런 식으로 삼백쪽이나 계속되니, 그저 놀랍고 신기할 수 밖에 ! 어떻게 e 를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도 이리 교묘하게 문장을 만들어 나갈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올 따름입니다.

dimanche 25 novembre 2007

회문 (palindrome)

그리쓰어에서 온 접두사 palin- 은 « 다시 »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접두사는 불어에 별로 많은 어휘를 낳지는 않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단어 하나는 palimpseste. palin- + psân (긁다) 이라는 동사의 과거분사로 구성된 이 말은 « 다시 긁어낸 (필사본) » 이라는 뜻.

또다른 잘 알려진 단어로 palindrome 이 있습니다. palin- + drome 으로 구성된 이 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은 다음,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다시 읽어도 똑같은 형태와 의미를 유지하는 문장이나 단어를 지칭합니다. 방금 달려온 길을 거꾸로 다시 (palin) 달려가는 (drome) 행위에 비유한 것이지요. 불한사전을 찾아보니 우리말로는 « 회문 » 이라고 한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처음 듣는 말이지만, 아마도 회전하는 문장이라는 뜻인 듯.

회문은 그저 개별적인 단어일 수도 있지만 (예 : ressasser, Éve), 대개는 짤막한 문장들입니다 :

À l'étape épate-la. (그 단계에서 그녀를 놀래켜라.)
Eh ! ça va, la vache ? (야, 암소는 잘 지내냐 ?)
L'ami naturel ? le rut animal. (자연스런 친구 ? 동물적인 발정.)

이 세 빨랑드롬은 말장난을 좋아했던 프랑쓰의 작가 루이즈 드 빌모랑 (Louise de Vilmorin, 1902-1969) 의 창작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또 벨직의 작가 루이 스뀌뜨네르 (Louis Scutenaire, 1905-1987) 의 회문 하나 :

La mère Gide digère mal. (지드 할멈은 소화를 잘 못시킨다.)

특이한 작품을 많이 쓴 프랑쓰의 작가 죠르쥬 뻬렉 (Georges Perec, 1936-1982) 은 1969년에 Le Grand Palindrome 이라는 제목의, 엄청나게 긴 회문을 발표했습니다. 1247 개의 단어와 5566 글자로 구성된 이 문장은 아마도 가장 긴 (최소한 불어로 된 것들 중에서는) 빨랑드롬일 것입니다. 그 시작과 끝 :

Trace l'inégal palindrome. Neige. Bagatelle, dira Hercule. Le brut repentir, cet écrit né Perec. L'arc lu pèse trop, lis à vice-versa. Perte. Cerise d'une vérité banale, le Mälstrom, Alep, mort édulcoré, crêpe porté de ce désir brisé d'un iota...

...à toi, nu désir brisé, décédé, trope percé, roc lu. Détrompe-la. Morts : l'Âme, l'Élan abêti, revenu. Désire ce trépas rêvé : Ci va ! S'il porte, sépulcral, ce repentir, cet écrit ne perturbe le lucre : haridelle, ta gabegie ne mord ni la plage ni l'écart.

전문을 감상하려면 여기로.

samedi 24 novembre 2007

양피지 (parchemin)

베르가못에 이름을 준 베르가마 시는 서양 문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또다른 물체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 parchemin. 우리말로 « 양피지 » 라고도 번역하는 빠르슈망은 꼭 양 뿐만 아니라, 소, 염소, 송아지, 돼지 등의 가죽에 필요한 처리를 가해 종이처럼 사용하던 재질입니다.

언뜻 보면 parchemin Bergama 두 단어 사이에는 별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베르가마의 옛 이름은 불어로 Pergame, 라띠나어로 Pergamum, 그리쓰어로 Pergamon 이었습니다. 고대 소아시아에는 지금의 베르가마를 수도로 한 뻬르감 왕국이 크게 번성했었습니다. 양피지도 기원전 2세기 무렵 거기서 발명되었거나, 또는 그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종이는 그리쓰어로 pergamênê, 라띠나어로 pergamena 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훗날 불어에서 parchemin 이라는 형태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도서관들에 보관되어 있는 중세의 필사본들 중에는 양피지로 된 것이 종이로 된 것보다 월등히 많은데, 이것은 종이가 귀하기도 했었지만, 종이로 된 책들은 세월의 흐름에 살아 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종이의 사용이 보편화 된 후로도, 중요한 공식 문서들은 여전히 양피지에 작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양피지라고 해서 영원한 것은 아니죠. 양피지 필사본들도 그 보관이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때문에 많은 도서관들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필사본을 만져볼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대신 필름화 되었거나 전산화 된 형태로 열람할 수 밖에는 없지요. 빠르슈망 필사본을 몇번 만져볼 기회가 있었던 제 경험에 의하면 그 느낌이 상당이 특이합니다. 약간 고무 같기도 하고, 플라스틱 같기도 하고... 그리고 눈으로만 보면 알기 어렵지만, 손으로 만져 보면 어느 쪽이 털이 있던 쪽이고, 어느 쪽이 살이 있던 쪽인지 감이 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필사본의 정체와 구성 등을 판단하는 데에 때때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빠르슈망 중에서도 특히, 죽어서 태어난 송아지, 또는 갓 태어난 송아지의 가죽으로 만든 것은 vélin 이라 부릅니다 (veel = « 송아지 » 를 뜻하는 옛 불어). 벨랑은 보통 빠르슈망에 비하여 훨씬 희고, 얇고, 섬세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다 고급스런 벨랑을 만들기 위해 심지어는 아직 태아 상태의 송아지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빠르슈망은 매우 비싼 재료였지요. 중세의 책은 그래서 아무나 손에 들고 읽던 것이 아니라, 부자들만 소유하고, 잘 모셔두는 귀중품이었습니다. 때로는 새로 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백지 빠르슈망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이전의 책을 다시 이용한 경우도 있습니다. 더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빠르슈망을 물에 빨고 박박 긁어, 원래의 글자를 지우거나 희미하게 한 후, 새로운 내용으로 덮어 쓴 것입니다. 이러한 필사본을 palimpseste 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쓰말로 « 다시 긁어낸 ». 지웠다고는 해도 자국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빨랑쎄스뜨들은 읽기가 더 힘듭니다.

jeudi 22 novembre 2007

베르가못 (bergamote)

베르가못은 살이 매우 부드럽고 향기가 새콤한 배 (과일) 의 일종으로, 불어 bergamote 은 이딸리아어 bergamotta 로부터 왔습니다. 비록 이딸리아를 통해 이름이 널리 전파되긴 했지만, 베르가못은 이딸리아의 도시 베르가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대신 뛰르끼 (Turquie) 의 도시 베르가마 (Bergama) 가 이 과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Perse 에서 온 과일을 pêche (복숭아) 라 부르듯이, Bergama 에서 온 과일은 bergamote 이라는 이름을 받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확실한 어원은 아니고, 진짜 어원은 뛰르끼어 beg armâdé 라는 설도 있습니다 (beg = « 주인, 나리, 영주... » + armâdé 또는 armûdî = « 배 »). 어느 설이 더 정확한지는 이제 판단하기 어렵게 돼버렸지만, 아무튼 이 과일이 뛰르끼로부터 서유럽에 도입된 것은 맞나 봅니다.

그런데 오늘날 베르가못이라고 하면 전혀 다른 과일, 즉 귤의 일종을 가리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 귤은 베르가못 배와 모양과 향기가 비슷해서 같은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불어에서는 구별 없이 la bergamote 이라는 말 밖에는 쓰이지 않지만, 이딸리아어에서는 la bergamotta 라고 하면 오로지 배를, il bergamotto 라고 하면 배와 귤을, 하지만 주로 귤을 가리킵니다. 신맛이 매우 강한 이 귤은 과일로서 먹기 보다는 그 향만 축출하여 다른 데에 사용합니다 : 차, 사탕, 향수...

mercredi 21 novembre 2007

멜바 복숭아 (pêche Melba)

뻬슈 멜바는, 설탕물에 졸인 복숭아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산딸기즙을 끼얹고, 크렘 셩띠이와 아몬드 조각 등으로 장식한 후식입니다. 직접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요리법을 보아하니 쁘와르 벨-엘렌과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배를 복숭아로, 쵸콜렛을 산딸기즙으로 대체하기만 하면 될 듯 싶습니다. 제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은 pêche Melba 라는 이름은 절반은 지명에서, 다른 절반은 인명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pêche. « 복숭아 » 를 뜻하는 불어 pêche 는 라띠나어 persicum 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 뻬르쓰의 » 라는 뜻입니다. 왜냐면 복숭아는 뻬르쓰 (현재의 이란) 로부터 유럽에 도입되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persicum pomum (뻬르쓰의 과일) 이라고 불리웠는데, 차차 뒷부분이 떨어져나가 persicum 이라고만 해도 이 과일을 뜻하게 되었고, 이 단어가 발전하여 불어에서는 pêche, 이딸리아어에서는 pesca 가 되었습니다. peach 는 불어를 영어화시킨 말이구요.

다음으로, Melba 는 19세기 말 유명한 성악가였던 넬리 멜바 (Nellie Melba, 1859-1931) 를 가리킵니다. 뻬슈 멜바는 바로 이 사람을 위해 프랑쓰의 요리사 오귀스뜨 에스꼬피에 (Auguste Escoffier, 1846-1935) 가 발명한 후식이었던 것입니다 (1892년 런던에서).

그런데 더 파고 들어가면, Melba 역시 인명이 아니라 지명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Nellie Melba 는 사실 예명일 뿐이고, 이 가수의 본명은 Helen Mitchell 인데, 호주 출신인 그녀는 도시명 Melbourne 을 이용하여 예명을 지었던 것입니다.

mardi 20 novembre 2007

마요네즈 (mayonnaise)

여러 차례 보았듯 (베샤멜, 프랄린, 싸바랑, 꺄르빠쵸, 빠르멍띠에, etc.), 새로운 요리법이 발명되었을 때는 그와 관련된 인명을 따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은데, 크렘 셩띠이의 경우는 지명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비슷한 예로 마요네즈가 있습니다.

mayonnaise 의 어원은 아주 확실하지는 않은데, 가장 널리 퍼져 있고, 대부분의 어학 사전들에서도 받아들이고 있는 설은 메노르까 (Menorca, ou en fr. Minorque) 섬의 수도 마온 (Mahón) 항의 이름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지중해의 섬 메노르까는 현재는 에스빠냐 영토이지만, 역사를 통해 여러 차례 에스빠냐와 영국, 프랑쓰 사이의 분쟁 대상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이 처음 이 섬에 손을 댄 것은 에스빠냐 왕위 계승 전쟁 중으로, 1708년, 에스빠냐 + 프랑쓰 연합군은 메노르까를 영국인들에게 빼앗깁니다. 영국인들의 지배는 그 후로 거의 오십년간 지속되다가, 1756년 프랑쓰는 마온 항을 영국인들로부터 다시 빼앗습니다. mayonnaise 라는 이름은 바로 이 때 기원했을 확률이 많습니다. 하지만 마요네즈가 정말로 마온 사람들만이 먹던 쏘쓰였는데, 이 기회에 프랑쓰로 수입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프랑쓰에도 알려져 있던 쏘쓰에 이 때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러한 이름을 준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튼 처음에는 mahonnaise 라는 표기만이 쓰였습니다. Mahón 에 해당하는 불어 형용사가 mahonnais 인데, sauce 는 여성 명사이므로 그것을 꾸미려면 mahonnaise 가 됩니다. la sauce mahonnaise (마온의 쏘쓰), 또는 la sauce à la mahonnaise (마온식 쏘쓰). 그러던 것이 차차 변형되어 1807년 이후로는 mayonnaise 라는 형태로 굳혀졌습니다.

lundi 19 novembre 2007

크렘 셩띠이 (crème chantilly)

베르나르 르와조보다 수백년 전에, 비슷한 이유로 자살한 프렁쓰와 바뗄 (François Vatel, 1631-1671) 이라는 요리사가 있습니다. 푸께 (Nicolas Fouquet) 와 꽁데 (Louis II de Bourbon, prince de Condé) 같이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갖춘 인물들을 차례로 섬긴 바뗄은 후자의 밑에서 일하던 중, 왕 루이 14세를 비롯하여 많은 귀족들이 초대받은 큰 잔치를 주관하게 됩니다. 이 잔치는 삼일낮-삼일밤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었으므로, 몇몇 문제들이 생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이나, 아마도 완벽주의자였던 바뗄은 별것 아닌 실수에도 큰 스트레쓰를 받았나 봅니다. 특히 둘째날, 물고기의 배달이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자, 그는 요리사로서의 자신의 명예에 금이 갔다고 비관하여, 잔치가 한창이던 중 자살했습니다.

이 잔치는 꽁데 가문의 소유인 빠리 근처의 셩띠이 성 (château de Chantilly) 에서 치루어졌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바뗄이 크렘 셩띠이를 발명한 것도 이 성에서라고 합니다. 크렘 셩띠이는 설탕과 향 등을 섞어 거품을 낸 크림으로, 주로 과자나 아이스크림 등의 장식에 쓰이거나, 다른 과자의 밑받침 재료로 들어가기도 하고, 과일 (주로 딸기, 산딸기...) 과 곁들여 먹기도 합니다. 크렘 셩띠이는 성공하기가 쉽지 않은데,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차디 차야 합니다. 그래서 크림 자체는 물론, 그릇과 거품기도 냉장고에 미리 넣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때로는 아예 냉동실에). 그리고 크림에 얼음 가루를 섞으면 좀 더 성공의 확률이 높아진다고 하지요. 제 개인적 경험으로는 큰 차이는 확인 못했습니다. 얼음을 섞으나 안 섞으나 저는 자주 실패하게 되더라구요.^^ 또 어떤 사람들은 전기 거품기를 쓰면 열이 나기 때문에, 팔 힘을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데, 솔직히 팔로 저으면, 팔이 떨어져 나가도록 저어도 크림이 부푸는 기미조차 안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간혹 다 만들어진 것을 사기도 합니다. 파는 것들은 방부제가 섞여 있고, 많이 달지만, 훨씬 편리한 점은 부인할 수가 없지요. 아니면 보온병처럼 생긴 셩띠이 만드는 기구도 있습니다. 이런게 있으면 집에서 크림을 담아서 흔든 후 짜내기만 하면 되므로, 저도 언젠가 장만해 볼 생각입니다.^^

집에서 만든 셩띠이로 장식해 본 치즈 케익 (왼쪽 사진) 확실히 파는 것만 못합니다, 흑흑 (오른쪽)


dimanche 18 novembre 2007

미슐린 (micheline)

(여전히 파업 중인) 빠리의 지하철은 모두 열 네 개의 노선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특이하게도 타이어 (pneu) 를 가진 기차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유형의 기차, 즉 철로 위를 달리되 고무 바퀴를 가진 기차를 불어로 micheline 이라고 부릅니다. 이 명칭은 그 제조 회사인 미슐랑 (Michelin) 사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빠리의 지하철 (métro parisien)
오늘날도 번성하고 있는 타이어 회사, 미슐랑은 엉드레 (André Michelin, 1853-1931) 와 에두아르 (Édouard Michelin, 1859-1940) 두 미슐랑 형제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1889). 이들은 타이어 자체를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바퀴 철체는 그대로 두고 그것을 둘러싼 고무 만을 바꿔낄 수 있는, 즉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분리식 타이어 (pneu démontable) 를 발명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타이어에 구멍이 나면 바퀴 전체를 통째로 갈아야 했다고 합니다. 특허권을 획득한 미슐랑 형제의 타이어는 처음에는 자전거에 (1891), 다음에는 마차 (1894) 와 자동차에 (1895), 그리고 마침내 기차 (1932) 에 적용되었습니다.

미슐랑 타이어를 사용하는 자동차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라는 의미에서, 미슐랑 사는 1900년부터 관광 안내서 (guide Michelin) 도 발간하고 있습니다.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빨간색 표지 때문에 Guide Rouge, 즉 « 빨간 안내서 » 라고 불리는 책은 매우 유명하긴 하지만, 실은 관광 안내서라기 보다는 식당 (과 호텔) 안내서입니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안내서들과 잡지들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드 미슐랑은 이 분야에서 절대적인 잣대로 여겨져, 그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이 책에 이름이 오르는 것은 식당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크나큰 명예이며, 더군다나 높은 별점을 받는다면 (별 세 개 만점), 그것은 부와 명성의 지름길이지요. 그런가하면, 별을 잃거나 책에서 이름이 사라지면, 이것은 모욕과 수치와 파산의 대명사로 간주되어, 유명한 요리사들은 여기에 거의 목숨을 걸고 삽니다. 실제로 몇년 전 베르나르 르와조 (Bernard Loiseau) 라는 유명한 요리사는 수년째 별 세 개를 받다가 별 두 개로 줄었다고 자살을 했습니다. 프랑쓰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던 이 사건으로 인해, 기드 미슐랑을 비롯한 몇몇 식도락 평론서들의 횡포와 비리, 요리사들이 겪어야 하는 압력 등에 대해 한동안 논쟁이 많았는데, 여전히 매년 새 기드 미슐랑이 출판되면 과연 누가 별 세개를 받았나, 유지했나, 잃었나 크게 보도가 되곤 합니다. 프랑쓰 전체의 식당 중 별 세 개를 받는 식당의 수는 (매년 달라지지만) 대략 스무 개 전후.

jeudi 15 novembre 2007

싸보따쥬와 보이꼿 (sabotage et boycott)

때때로 파업의 한 형태로 간주되기도 하는 sabotage 는 의도적으로 업무를 방해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 말은 saboter 동사에서 비롯되었고, saboter 는 19세기에 공장 등에서 기계 장치에 sabot, 즉 « 나막신 » 을 슬쩍 끼워 넣어, 고장을 유발한 행위를 일컫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최소한 기계가 수리될 때까지는 아무도 일을 못하게 했고, 동시에 고용주에게 압력을 가했던 것이지요. 오늘날에는 진짜 나막신을 기계에 집어 넣는 행위는 없거나 드물지만, sabotersabotage 는 여전히 자주 쓰이는 어휘입니다. 꼭 노동 분쟁이 아니더라도 남의 작업에 훼방을 놓는 경우, 또는 자기 스스로의 작품이나 업무라도 아무렇게나 처치해 버리는 경우에 이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싸보따쥬와도 다르고 파업과도 다르지만 보이꼿 역시 불만을 표시하는 수단입니다. 오늘날 보이꼿은 어떤 기업이나, 단체, 나라, 개인 등이 제공하는 물건이나 행사, 생각 등을 거부하는 것이지만, 최초의 보이꼿은 파업처럼 시작되었습니다. 아일랜드의 부유한 농장주 찰쓰 보이콧 (Charles Boycott, 1832-1897) 은 그의 농부들을 험하게 다루었다고 합니다. 결국은 참다 못한 농부들이 1879년에 보이콧을 위해 일하기를 단체로 거부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Boycott 의 이름은 영어의 보통 명사가 되었고, 불어에서도 그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불어에서는 또한 같은 의미로 boycottage 라는 단어도 쓰이고, boycotter 라는 동사도 있습니다.

mercredi 14 novembre 2007

파업 (grève)

오늘부터 프랑쓰 전국이 대규모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기차, 지하철, 버쓰, 전기, 가스, 교사, 학생, 법원 등이 참여하고, 곧이어 모든 분야의 공무원들에 의해 뒤를 이을 이번 파업은 무기한입니다. 대부분의 공공 업무를 « 개혁 » 하겠다는 정부의 정책 때문인데, 위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개혁이라 보지 않습니다. 이들은 절대 자신들의 권리를 양보할 마음이 없으며, 정부는 정부대로 눈꼽 만큼도 협상을 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은 채 밀어 부치고 있기 때문에, 두 파의 힘겨루기는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십여년 전에도 같은 문제로, 같은 사람들이 줄다리기를 하는 바람에 한 달 반 동안 프랑쓰 전체가 마비되는 파업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견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 그 해 겨울,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아무튼 « 파업 » 은 불어로 grève 라 하는데, 이 말은 고유 명사, place de Grève (그레브 광장) 로부터 왔습니다. 그레브 광장은 빠리 시청 앞의 광장으로, 옛부터,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이 광장에 모여, 일감이 생기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광장은 쎈 강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기에, 배가 도착하면 일손을 고용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이지요. 이 행위를 faire Grève, être en Grève 라 했고, 처음에는 글자 그대로 «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그레브 광장에 모이다 » 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뜻이 발전하여, 오늘날 같은 표현을 쓰면, « 의도적으로 일을 중지하다, 파업하다 » 라는 의미가 되었고, la grève 라고 하면 « 파업 » 이라는 보통 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레브 광장의 이름은 보통 명사 grève (모래사장) 로부터 왔습니다. 방금 말했듯, 빠리 시청은 쎈 강 바로 근처에 있기 때문에, 그 앞에는 파도가 몰아온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 모래밭 광장 (place de grève) » 이라 불리던 이 광장의 이름이 아예 고유 명사화 되어 « 그레브 광장 (place de Grève) » 이 되었습니다. place de Grève 라는 이름은 1806년까지 사용되다가, 그 때 이후로는 place de l'Hôtel de Ville (시청 광장) 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물론 둑이 쌓이고 도로 포장이 되어, 강물과는 닿지 않고 모래나 자갈도 전혀 없는 광장이지요. 하지만 빠리-해변 철에는 일부러 모래를 깔아 해변처럼 만들기도 하고, 겨울에는 얼음을 깔아 스케이트 장으로 변모시키기도 합니다.

빠리 시청 (Hôtel de Ville de Paris)

lundi 12 novembre 2007

비행선 또는 제쁠랑 (dirigeable ou zeppelin)

더운 공기를 사용하건 (montgolfière), 가스를 사용하건 (charlière), 또는 혼합된 유형 (hybride) 이건, 기구들은 수직으로 상승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하늘에 떠오른 다음에는 방향의 조종이 어려웠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몽골피에르 매우 초창기부터 있어왔는데, 예를 들어, 영불해협을 최초로 횡단한 졍-삐에르 블렁샤르 (Jean-Pierre Blanchard, 1753-1809) 는 나쎌 (nacelle = 풍선 밑의 바구니) 에 날개와 꼬리키를 달기도 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런 방법은 극히 제한된 수단에 불과했고, 몽골피에르들은 바람의 영향에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이미 1783년에 기하학자였던 졍-바띠스뜨 므니에 들 라 쁠라쓰 (Jean-Baptiste Meusnier de la Place, 1745-1793) 는 몽골피에르의 성공을 보면서, 동그란 풍선 대신 길죽한 타원형의 풍선에 바람개비 모양의 추진기를 달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문에 그는 때때로 비행선의 발명자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불행히도 그의 생각은 계획 단계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최초의 비행선이 빛을 보기 위해서는 1852년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해 9월에 엉리 지파르 (Henri Giffard, 1825-1882) 는 옆으로 누운 타원형의 긴 풍선에 수증기를 이용한 일종의 모터와 추진기를 달아 빠리와 트랍 (Trappes) 사이를 여행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조종 가능한 몽골피에르였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몽골피에르를 불어로는 dirigeable, 또는 ballon dirigeable 이라 부릅니다. 말그대로 « 조종 가능한 (풍선) ».

디리쟈블이 프랑쓰의 발명품이기는 하지만, 그 전성기는 독일의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Ferdinand von Zeppelin, 1838-1917) 에 의해서 달성되었습니다. 군인이자 기술자였던 체펠린은 1900년, 자기 이름을 딴 디리쟈블 공장을 차려, 아예 대량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체펠린 사의 디리쟈블은 20세기 초반 동안 크게 번성했고, 특히 1차 대전 동안에는 군대에 압수되어 폭격기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 체펠린은 거의 디리쟈블의 대명사가 되었고, 불어에서도 zeppelin [제쁠랑]dirigeable 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보통 명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제쁠랑 또는 디리쟈블은 광고용, 홍보용, 관광용, 또는 감시용으로 때때로 쓰이고 있습니다.

벌써 몇년 전, 우리집 창문 위를 날아가던 디리쟈블. 신기해하며 좋아라고 사진을 찍었는데, 알고보니 시민 감시용이었습니다. 점점 더 무서워져만 가는 사회...

dimanche 11 novembre 2007

기구 (montgolfière)

« 기구 »를 불어로는 (그리고 몇몇 다른 언어로도) montgolfière 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Montgolfier 형제에 의해 발명되었기 때문. 오래된 가업을 물려받아 종이 제작업을 하던 죠제프-미셸 (Joseph-Michel Montgolfier, 1740-1810) 과 쟉-에띠엔 (Jacques-Étienne Montgolfier, 1745-1799), 두 몽골피에 형제는 우연히 난로불 위에서 종이가 나풀나풀 타들어 가는 모습을 보고, 더운 공기가 찬 공기 보다 더 가볍다는 사실을 이해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에는 잘 알려진 이 원리에 입각하여 그들은 여러 사적인 실험 뒤에 1783년 6월, 프랑쓰 남부 아노네 (Annonay) 에서 최초로 하늘을 나는 대형 풍선을 공식적으로 선보였습니다.

이 새 발명품은 곧 많은 관심과 후원을 얻어, 같은 해 9월에는 베르싸이으에서 루이 16세 앞에서 또다시 시연이 행해졌습니다. 지금까지의 실험이 그저 큰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 것이었던데 반해, 베르싸이으의 실험에는 풍선 밑에 바구니를 달아 양, 닭, 오리를 한 마리씩 싫었습니다. 이것이 날지 못하는 생물의 역사상 최초 비행입니다. 세 마리의 동물은 약 500 미터의 고도에서 8분 동안 3.5 킬로미터를 날은 후 땅으로 무사히 도착했고, 루이 16세는 이 세 동물에게, 잡아 먹히는 대신 왕궁의 동물원에서 여생을 편히 지낼 권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최초로 인간을 싫은 시험은 1783년 10월 19일, 빠리 뤼 드 몽트뢰이으 (우리집에서 가까운^^) 에서 행해졌습니다. 이 때 몽골피에르에 오른 사람은 프렁쓰와 삘라트르 드 로지에 (François Pilâtre de Rozier, 1754-1785). 이것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인간의 최초 비행이긴 하지만, 안전을 위해 몽골피에르를 끈으로 땅에 묶어두고 행해졌습니다. 실제로 완전히 자유로운 비행은 1783년 11월 21일, 다시 한번 삘라트르 드 로지에와,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보조, 프렁쓰와-로렁 다를렁드 (François-Laurent d'Arlande, 1742-1809) 를 함께 태우고 행해졌습니다. 이 몽골피에르는 현재 빠리의 16구 (서쪽) 에서부터 13구 (남쪽) 까지, 약 12킬로미터를 25분에 걸쳐 1000미터의 높이로 날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내린 자리는 현재 쁠라쓰 뽈-베를렌 (place Paul-Verlaine) 이 되었는데, 여기에 가면 이 인류 역사상 첫번째 비행인들의 도착을 기념하는 비를 볼 수 있습니다.

몽골피에르의 잇달은 성공은 많은 과학자들과 발명가들의 관심을 유발시켰는데, 그 중 쟉 샤를 (Jacques Charles, 1746-1823) 이라는 물리학자는 몽골피에르를 이용하되, 불로 공기를 덥히는 대신, 아예 처음부터 산소보다 더 가벼운 기체인 수소로 풍선을 채우는 응용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charlière 라 불린 이 풍선은 1783년 12월 1일, 그러니까 몽골피에르에 비해 단지 십일 뒤에, 발명가 샤를이 직접 타고, 약 두 시간 동안 36 킬로미터를 날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샤를리에르는 매우 큰 성공을 거두어 보다 더 발전된 여러 기구의 받침이 되었고, 현재도 사용되고 있지만, charlière 라는 단어는 완전히 잊혀졌습니다. 오늘날 가스를 이용하는 기구는 ballon à gaz (가스 풍선) 또는 그저 몽골피에르라고 부르지요.

기구 전문 비행사가 된 삘라트르 드 로지에는 몽골피에르와 샤를리에르를 혼합한 씨스뗌을 갖춘 풍선을 타고, 1785년 6월, 영불해협을 건너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영불해협은 이미 같은 해 1월 프랑쓰인 졍-삐에르 블렁샤르 (Jean-Pierre Blanchard) 와 미국인 죤 제프리스 (John Jeffries) 에 의해서 처음으로 횡단되었는데, 다만 이 때는 영국에서 프랑쓰 방향이었습니다. 삘라트르 드 로지에는 역방향 횡단을 시도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쓰에서 영국으로 날아가는 것은 바람의 자연스러운 방향에 역행이기 때문에 훨씬 어려운 도전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삘라트르 드 로지에와 그의 조수를 태운 풍선은 프랑쓰 북부 불로뉴 (Boulogne) 를 출발한지 몇 분이 채 못되어 불이 붙어 추락했고, 두 사람은 즉사했습니다. 그리하여 인류 최초로 하늘을 날은 인간인 프렁쓰와 삘라트르 드 로지에는 인류 최초로 비행 사고로 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빠리 15구, 씨트로엔 공원 (Parc Citroën) 의 몽골피에르

이 기구는 사람을 태우기는 하지만 (돈받고), 멀리 날라가지 못하도록 끈으로 땅바닥에 묶여 있습니다. 16구에서부터 바라 보고 찍었기에 사진이 좀 멉니다.

vendredi 9 novembre 2007

재단기 (massicot)

프랑쓰의 단두대는 guillotine 이라는 공식 명칭 외에도, 발명자의 이름을 따서 louisette, louison 으로도 불렸으며, 그 외에도 시대 별로 rasoir national (국립 면도칼), veuve (과부), silencieuse (말없는 여자) 등등, 여러 대중적인 별칭들이 유행했었습니다. massicot 도 그 중 하나입니다. 마시꼬 (종이 재단기) 는 인쇄소, 제본소 등에서 두꺼운 종이 뭉치를 한꺼번에 똑같은 크기로 자르는데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넓직하고 네모난 판에 정확한 측정을 위해 여러 눈금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상당히 두꺼운 칼날이 붙어 있습니다. 이 칼을 올렸다 내렸다 함으로써 종이를 자를 수 있습니다. (칼이 오른쪽에 붙은 것은 순전히 오른손잡이들의 횡포일 뿐 별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왜 소수의 사람들은 항상 괄시를 받아야 하는 걸까요 ?) 복사 가게 따위에서 마씨꼬를 사용해 보면 아닌게 아니라, 섬뜩하고 위험한 느낌이 듭니다. 혹시 손가락이라도 끼면 그대로 잘려나갈 것만 같은...

마씨꼬와 기요띤은 시퍼런 칼날 외에 언어학적 공통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massicot 라는 말도 그 발명가인 기욤 마씨꼬 (Guillaume Massicot, 1797-1870) 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니까요. 1840년에 이 기계공이 고안한 재단기는 위에서 묘사한 대로 매우 간단한 원리를 따르지만, 오늘날 마씨꼬라고 하면 컴퓨터 프로그람이 장착된 마씨꼬, 종이 뿐 아니라 철판 따위도 자르는 마씨꼬 등 매우 다양한 기계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massicoter 라는 동사도 낳았습니다. 이 말은 « 자르다, 가장자리를 다듬다 » 는 뜻

내가 집에서 사용하는 개인용 작은 마씨꼬

mercredi 7 novembre 2007

단두대 (guillotine)

프랑쓰 혁명 중에 처음 등장한 사형 기구, 기요띤 (guillotine) 은 죠제프 이냐쓰 기요땅 (Joseph Ignace Guillotin, 1738-1814) 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흔히 기요띤을 발명한 사람으로 언급되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는 발명자가 아니라 단지 기획자일 뿐입니다. 의사 출신으로서 삼부회 의원으로 뽑힌 기요땅은 사형수들이 오래 고통스러하지 않고 단숨에 죽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자고 제안했으며, 이 제안에 따라, 역시 의사 출신이었던 엉뜨완 루이 (Antoine Louis, 1723-1792) 가 사선 모양으로 생긴 무거운 칼날을 2 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수직으로 빠르게 떨어뜨림으로써 사람의 목을 일순간에 자르는 기계를 고안했습니다. 진짜 발명가의 이름을 따서 애초에 이 기계는 louisette 또는 louison 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하지만 민중들 틈에서는 설계자의 이름보다는 기획자의 이름이 더 크게 각인되었는지, 단두대는 결국 기요띤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집니다.

기요띤은 보다 인간적인 (?) 사형 방법이라 할 수 있지만 (과연 사형을 인간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혁명 정신에 보다 적합한, 즉 평등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지은 죄에 따라, 그리고 속한 신분에 따라 죽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특히 목이 잘려 죽는 사형은 이론적으로는 가장 고통이 짧은 벌로서, 귀족들에게만 제한된 « 특권 » 이었습니다. 하지만 단두대가 생기기 전에는 사람이 직접 도끼로 목을 잘랐기 때문에, 때때로 도끼가 너무 무겁거나, 죄인이 목을 움직이거나 하여, 헛질을 하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즉각 죽기는 커녕, 여러 차례 도끼질을 다시 해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지요. 평민들은 주로 교수형 (pendaison) 을 당했거나, 쟌 다르끄처럼 화형 (bûcher) 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죽기 전에 한참을 괴로와해야 하는 벌이었습니다.

한편, écartèlement 은 사지를 각각 말에 묶은 후, 말들을 동시에 사방으로 달리게 함으로써, 죄인의 몸이 갈갈이 찢어져 죽게 했던,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우리말로는 흔히 « 능지처참 »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은 다른 벌을 가리키며 écartèlement 에 해당하는 벌은 « 거열 » 또는 « 차열 » 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고 하는군요. 아무튼 프랑쓰에서 이 사형법은 왕을 살해하였거나, 왕을 해치려 시도했던 죄인들에게만 적용되었던 매우 예외적인 벌로서, 실제로 이렇게 죽은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엉리 4세를 살해한 프렁쓰와 라바이약 (François Ravaillac, 1610년).

입법국회 (Assemblée législative) 는 1791년 10월 6일자의 법령을 통해, 앞으로 모든 사형수는 머리가 잘려 죽는다고 선포함으로써, 죄수들 틈에서도 존재했던 신분 차별을 폐지했습니다. 이 법의 채택 이후 기요띤은 특히 공포 정치 (Terreur) 시대 동안 (1792-1794) 수만명의 목을 닥치는 대로 잘랐으며, 1981년 프랑쓰에서 사형제도가 완전히 폐지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기요땅은 자기 이름이 이 살인 기계와 연관된 것을 평생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기요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말이 흔한데, 이것은 잘못된 소문이고, 말년에 그는 정치와는 거리를 둔 삶을 살다가, 어깨에 생긴 혹이 잘못 도져서 그 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기요땅은 또 1789년 6월 20일, 갈 곳 잃은 삼부회 평민 의원들을 베르싸이으 시의 손바닥 놀이장으로 인도해 간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mardi 6 novembre 2007

따옴표 (guillemet)

« 따옴표 » 는 불어로 guillemet 라 합니다. 이 말은 이 문장 부호를 처음 고안한 인쇄업자 Guillaume 이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 사전, 백과 사전, 어원 전문서적, 인터넷 등을 찾아 보아도, 이 기욤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언제 어디서 나고 죽었는지, 어떤 계기로 따옴표를 발명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므로, 저 개인적으로는 약간 의심을 두고 있습니다. guillemet 라는 단어의 사용은 1667년에 처음 확인되므로, 기호는 그보다 얼마전 발명되었다고 막연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따름이겠지요. 하지만 Guillaume, Guillaumet, Guillemet, Guillemette 등은 중세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흔한 이름과 성이므로, 고유 명사로부터 이 보통 명사가 비롯된 점은 받아들여도 좋을 듯 싶습니다.

기으메는 « ... » 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기호는 흔히 프랑쓰식 따옴표라고 불리지만, 프랑쓰 외에도 이딸리아, 에스빠냐, 그 외에도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식 따옴표 ("... ") 도 불어 인쇄물들에서 종종 보게 되기도 하는데, 주로 인용문 내에서 또다시 인용을 해야 할 때 사용하거나, 또는 피치 못할 때는 프랑쓰식 따옴표를 대체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피치 못할 상황이란 주로 인터넷 상으로서, 영어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는 인터넷에서 영어 이외의 글자나 부호를 쓰려면 늘 애를 먹게 됩니다. 저 역시 이 블로그를 쓰면서 어떻게 기으메를 표시해야 되는지 몰라 처음에는 영어식 따옴표를 썼었는데, 얼마전부터는 프랑쓰식 따옴표를 쓰는 조합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 는 option + è, » 는 option + 대문자 + è) 또 프랑쓰식 따옴표는 영어식 따옴표와 달리 글자에 달라 붙지 않습니다. 즉, 따옴표과 글자 사이에 한 칸의 차이를 두어야 합니다. « 따옴표 » (O), «따옴표» (X).

lundi 5 novembre 2007

수첩 (calepin)

« 수첩 » 을 불어로는 calepin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베르가모 출신의 수사 (religieux) 이자 어학자였던 암브로죠 깔레삐노 (Ambrogio Calepino, 1435-1511) 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사전다운 사전을 출판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애초에 그의 사전은 « 라라 » (^^) 사전, 즉 라띠나어를 라띠나어로 설명한 사전이었는데, 이 사전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각 나라말 번역판이 첨부되었습니다. 즉 이 사전 한 권이면 라띠나어부터 출발하여 이딸리아어, 불어, 영어, 독어 등등을 모두 찾아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초판은 1502년, 최종판은 1772년에 나왔으니, 거의 삼백년에 가깝도록 많은 학생과 학자들에게 꺌빵 사전은 사전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세대를 거치다보니 calepin 은 첫자의 대문자를 잃고, « 사전 » 이라는 의미의 보통 명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불어 뿐 아니라 이딸리아어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딸리아어로는 현재도 calepino 라고 하면 « 사전 » 이라는 뜻입니다. 불어에서는 18세기까지는 calepin 이 « 사전 » 을 의미했으나, 19세기 초에 다시 한번 의미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손 가까이 두고 자주 찾아보는 책이다 보니 그랬는지, 이 사전을 보면서 공책에다 필기를 해서 그랬는지, calepin 은 « 작은 공책, 수첩 » 을 뜻하는 말이 되습니다. 여러 언어를 담고 있던 (판본에 따라서는 11개의 언어까지) 꺌빵은 사실 매우 방대한 사전이었는데, 오늘날은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그리고 아무 거나 적을 수 있는 백지의 작은 수첩이 되어버렸습니다.

dimanche 4 novembre 2007

점자 (braille)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올록볼록한 « 점자 » 를 불어로는 (그리고 기타 유럽 언어들에서도) braille 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 단어는 보통 명사로 쓰이지만, 애초에는 고유 명사, 즉 루이 브라이으 (Louis Braille, 1809-1852) 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자신이 맹인이었던 루이 브라이으는 열 세살 무렵 이미 초보적인 맹인용 철자를 발명했다고 합니다. 이 어린 시절의 발명을 정교화하여 1828년, 그의 나이 19 살에 완성본을 발표하였습니다. 여섯 개의 작은 동그라미를 다양하게 조합하고 배치함으로써 얻어지는 브라이으 체계는 곧 큰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던 브라이으는 악보용 점자도 만들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언어 브라이으와 달리 음악 브라이으는 전 세계에서 공통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문득 어렸을 때 저랑 같이 피아노를 배웠던 장님 소년이 생각납니다. 걔도 늘 점자로 된 악보를 가지고 와서 한 번 만져본 후 피아노를 치곤 했는데... 걔는 어디서 뭘하고 있을까나 ?

루이 브라이으의 시신은 현재 뻥떼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samedi 3 novembre 2007

식물이름들 (bégonia, etc.)

담배와 마찬가지로 많은 식물들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때로는 그 식물을 처음 발견하거나 유럽에 도입한 사람의 이름이 붙여졌지만, 때로는 직접 관련이 없어도 그저 이름을 기리고자 유명인의 이름이 붙기도 했습니다. 불어에서 사용되고 있는 몇몇 예 :
   
식물 이름 : 어원을 제공한 고유 명사


  • 베고니아 (bégonia) : 미셸 베공 (Michel Bégon, 1638-1710) 프랑쓰의 해군 장교
  • 부걍빌레 (bougainvillée 또는 bougainvillier) : 루이 엉뜨완 드 부걍빌 (Louis Antoine de Bougainville, 1729-1811) 프랑쓰의 항해사
  • 동백 (camélia) : 꺄멜리 또는 카멜 (Camelli ou Kamel, 17 세기) 예수회 전도사
  • 달리아 (dahlia) : 안데르쓰 달 (Anders Dahl, 1751-1789) 쒸에드의 식물학자
  • 퓌쉬아 또는 퓌크씨아 (fuchsia, 두 발음 가능) : 레온하르트 푹쓰 (Leonhard Fuchs, 1501-1566) 독일의 식물학자
  • 가르데니아 (gardénia) : 알렉싼더 가든 (Alexander Garden, 1730-1791)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
  • 마뇰리아 (magnolia) : 삐에르 마뇰 (Pierre Magnol, 1638-1715) 프랑쓰의 의사이자 식물학자
  • vendredi 2 novembre 2007

    니꼬띤 (nicotine)

    외교관이었던 졍 니꼬 (Jean Nicot, 1530-1600) 는 프랑쓰에 처음으로 담배라는 식물을 들여온 장본인입니다. 불어에는 « 담배 » 를 칭하기 위해 오랫 동안 tabac 라는 단어와 herbe à Nicot, herbe nicotiane, 또는 단지 nicotiane, 즉 « 니꼬의 풀 » 이라는 단어들이 공존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1809년에 프랑쓰의 화학자 보끌랑 (Nicolas Louis Vauquelin, 1763-1829) 이 이 식물에 담겨 있는 알꺌로이드 (alcaloïde) 를 유출해 냈을 때, 이것을 nicotine 이라 명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식으로, 커피 (café) 에 들어 있는 알꺌로이드는 caféine, 차 (thé) 에 들어 있는 알꺌로이드는 théine, 꼬꺄 열매 (coca) 에 들어 있는 알꺌로이드는 cocaïne 이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도 수백 종에 달하는 알꺌로이드의 이름들은 대부분 원래 식물의 이름에 접미사 -ine 을 붙여서 만들어졌는데, 의외로 쵸콜렛 (chocolat) 에 들어 있는 알꺌로이드는 théobromine 이라 합니다. 그 이유는 꺄꺄오 나무 (cacaoyer) 의 학술명이 그리쓰어에서 유래한 théobroma 이기 때문인데, 이 말은 재미있게도 « 신 (theos) 의 양식 (brôma) » 이라는 뜻입니다.

    양귀비 (pavot) 에서 분리해 낸 morphine 의 이름도 식물의 이름과는 무관하게 지어졌는데, 이 알꺌로이드는 잠의 신 모르페 (Morphée) 처럼 사람을 진정시키고 잠재우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귀비에서 뽑아낸 또다른 알꺌로이드 papavérinecodéine 은 각각 양귀비의 라띠나어 이름 papauer 와 그리쓰어 이름 kôdéia 로부터 유래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모르핀을 이용해서 만든 héroïne 은 섭취하면 마치 영웅 (héros) 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해서 이렇게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또다른 환각제의 이름 LSD 는 독어 Lysergsäurediäthylamid 의 약자입니다. 불어로는 acide lysergique diéthylamide. 물론 보통 읽을 때는 [엘레스데] 라고 하지, 아무도 [아씨드 리제르직 디에띨라미드] 라 하지 않습니다. 불어의 두번째 단어 lysergique 이라는 말은 독어의 첫번째 단어 lyserg 를 옮겨 적은 것이지만, 정작 이 독어는 불어 lyse (용해, 분해) 와 ergot (맥각) 를 합성시켜 만든 말입니다. 두 개별 단어가 이웃 나라에 건너가서 합쳐진 후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지요. 아무튼 이 말은 LSD가 에르고를 분해하여 얻어낸 물질임을 설명해 줍니다. 우리말로는 « 맥각 » 이라고 부른다고 하는 에르고는 주로 호밀, 보리, 벼 등에 기생하는 곰팡이로서, 에르고에서 뽑아낸 알꺌로이드는 ergoline 이라고 합니다. 즉 LSD는 ergoline 의 일종이지요.

    아쉬 빠르멍띠에 (hachis parmentier)

    오늘날 프랑쓰 사람들은 감자를 참 좋아하고 즐겨 먹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감자가 유럽에 처음 소개된 것이 16세기인데, 처음엔 다들 이 새로운 식물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처음 보는 것이니 그럴만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늘날 돌이켜 볼 때는 믿기 힘든 소문이 많이 돌았습니다 : 감자를 먹으면 죽는다, 병에 걸린다... 심지어 프랑쓰에서는 과학자들이 공식적으로 감자는 문둥병을 유발한다고 발표해서 재배를 아예 금지시키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감자는, 당시 유럽에 잦았던 기아에도 불구하고, 매우 푸대접을 받았지요. 하지만 각 나라의 식물학자들이 감자가 식용에 적합하고, 쉽게 대량 재배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내면서, 차츰차츰 아일랜드와 독일을 선두로 하여 다른 나라들에서는 감자의 소비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유독 프랑쓰 사람들만이 이백년이 넘도록 감자를 거부했습니다.

    프랑쓰에서 감자가 대중화된 것은 오로지 엉뜨완 오귀스땅 빠르멍띠에 (Antoine Augustin Parmentier, 1737-1813) 라는 약사이자 농업학자의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프랑쓰 사람들의 감자에 대한 깊은 편견을 이성적으로 고치기 힘든 것을 깨닫고, 한가지 꾀를 내었습니다. 즉, 그는 왕 (루이 16세) 에게 부탁해서 빠리 주변에 큰 밭을 샀고, 마을 주민들을 불러 모아 놓은 다음 공개적으로 감자를 심고서는, 여기서 나는 식물은 너무나 귀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왕실 만을 위한 것이니 감히 손댈 생각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군인들을 데려다가 밭을 철저하게 감시케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정말 저 야채가 맛있고 귀한 건가 보다, 나도 한 번 먹어봤으면... 감자가 많이 열리자 빠르멍띠에는 일부러 밤에는 보초를 서지 않게끔 했습니다. 평민들이 몰래 밭에 와서 감자를 훔쳐가게끔 유도한 것이지요. 다음 해에 그는 다른 곳에 더 큰 밭을 사서 같은 일을 했으며, 결과는 번번이 성공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여 차츰차츰 감자는 프랑쓰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감자를 널리 전파시킨 빠르멍띠에를 기리기 위해서 프랑쓰에는 빠르멍띠에의 이름을 딴 음식이 몇가지 있습니다. 모두 감자와 연관된 음식들인데, 그 중 매우 대중적이고 대표적인 것이 아쉬 빠르멍띠에입니다. 이것은 잘게 다져서 볶은 쇠고기 (hachis) 와 삶아 으깬 감자 (parmentier) 를 층층이 깔고, 제일 위에 그뤼예르를 얹어 그라땅처럼 구워 낸 것입니다. 제가 찍은 사진은 별로 안 예쁘지만, 실제로는 정말 맛있습니다.^^

    감자는 아이띠 원주민의 말로 batata 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에스빠냐말과 이딸리아말에서 patata 가 되었으며, 불어에서 patate 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patate 이라는 말은 «감자» 와 «고구마» 를 모두 칭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구별을 해야 할 때는 «고구마» 는 patate douce, «감자» 는 pomme de terre 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