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dredi 30 janvier 2009

셩-젤리제 (Champs-Élysées)

자칭 타칭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la plus belle avenue du monde) 이라고 불리는 셩-젤리제는 빠리 중앙으로부터 서쪽을 향해 길게 뻗은 대로 (avenue) 를 말합니다. 정확한 행정 구역 이름은 avenue des Champs-Élysées 이며, 쁠라쓰 들 라 꽁꼬르드 (place de la Concorde) 와 쁠라쓰 샤를-드-골 (place Charles-De-Gaulle), 두 광장을 이어주는, 길이 약 2 킬로미터, 폭 약 70 미터의 길입니다. 빠리의 길들은 대부분 좁고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셩-젤리제처럼 곧고 넓은 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긴 하지만,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 이라는 것은 너무 광고문안적인 표현이 굳어진 것 아닌가 합니다. 혹시 옛날에는 더 아름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넓게 트인 길에 가로수가 끝이 안 보이게 줄지어 있고, 인도도 매우 넓어서 산책하기에 쾌적한 길이었을테니까요. 사실 이미 18세기에도 이 동네를 빠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역의 하나라고 묘사한 문서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점들, 은행들, 식당들, 여행사들이 너무 많이 들어 차 있어서, 과연 이 길만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예전에는 최고급 상점들 위주라 희귀성이라도 있었지만, 요즘은 전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체인 상표들이 셩-젤리제를 수 놓고 있습니다.

셩-젤리제에서 그나마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부위는 꽁꼬르드 광장부터 롱-쁘왕 데 셩-젤리제 (rond-point des Champs-Élysées), 즉 아브뉘의 한 중간 정도까지입니다. 여기도 물론 차도에는 차들이 씽씽 달리지만, 양 옆 인도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고, 인도의 폭이 거의 삼사백미터에 가깝도록 넓직하기 때문에 산책하는 맛이 있습니다. 물론 셩-젤리제의 나머지 부위도 빠리의 보도로서는 정말 넓은 편이지만, 관광객들로 미어 터지고, 소매치기들의 활약이 많으며, 잡상인들로 들끓기 때문에, 발디딜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셩-젤리제 — 또는 빠리 사람들이 줄여 말하듯 셩 (Champs) — 에 가면, 알 수 없는 흥분과 때로는 « 감동 » 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괜히 술렁이는 분위기 때문이겠지만요. 특히 11월 말부터 가로수에 성탄절 장식을 했을 때는 정말 엘리제 (Élysées) 들판 (champs) 에 온 듯한 기분도 듭니다. 엘리제 들판은 그리쓰 신화에서 영웅들과 착한 사람들이 죽은 후 가게 되는, 일종의 천국과 같은 장소를 말하지요. 여기서부터 이 길의 이름이 왔으며, 그 외에도 프랑쓰에는 엘리제라는 이름을 딴 장소나 명소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ex. Palais de l'Élysée).

아브뉘 데 셩-젤리제는 매년 7월 14일 군인들의 행진 장소로 쓰이고, 또 매년 여름 뚜르 드 프렁쓰 (Tour de France = 프랑쓰 일주 자전거 대회) 의 종착지로도 쓰이며, 그 외에도 특별한 행사들, 주로 화려한 축제 분위기의 행사들이 종종 열립니다. 공식적인 행사 외에도 나라에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빠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와 모여드는 곳도 셩-젤리제랍니다.

셩-젤리제의 성탄 장식

꽁꼬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위에서부터 개선문 쪽을 향해 바라 본
아브뉘 데 셩-젤리제source de cette photo

mercredi 28 janvier 2009

엘리제 궁 (Palais de l'Élysée)

오뗄 마띠뇽프랑쓰 수상의 공식 관저라면, 프랑쓰 대통령의 공식 관저는 엘리제 궁입니다. 엘리제 궁도 갈리에라 궁처럼, 사실 궁이라기 보다는 오뗄 빠르띠뀔리에라 보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오뗄 마띠뇽과 비슷한 시기 (1722) 에 완성된 이 집은 그 첫주인인 에브르 백작 (Comte d'Évreux) 의 이름을 따서 한동안 오뗄 데브르 (Hôtel d'Évreux) 라고 불렸으며, 바띨드 도를레엉 (Bathilde d'Orléans), 즉 부르봉 공작 부인의 소유이던 시절에는 오뗄 드 부르봉 (Hôtel de Bourbon) 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프랑쓰 혁명으로 재산을 많이 잃게 된 바띨드 도를레엉은 오방 (Hovyn) 이라는 상인과 손을 잡고, 자신의 저택 1층과 정원을 대중에게 공개하였습니다. 이 때 여기에 일반인들이 많이 드나들면서, 저택의 위치가 아브뉘 데 셩-젤리제 (avenue des Champs-Élysées) 와 가깝다하여, 엘리제 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엘리제 궁은 공식적으로는 제 2 공화국 시절부터 프랑쓰 대통령의 공식 거처로 지정되었으나, 대통령으로 뽑힌 나뽈레옹 3세가 황제로 둔갑하면서, 역사적으로 진짜 왕궁이었던 뛰일르리로 옮겨 가 버리는 바람에, 엘리제 궁이 실제 역할을 발휘하게 된 것은 1873년 이후부터입니다. 이후로는 지금까지 프랑쓰의 모든 대통령들이 엘리제 궁에서 집무를 보고 생활을 하나, 대통령 관저로서 적합치 않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엘리제 궁이, 위에서 말했듯 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작고, 관광객으로 들끓는 셩-젤리제 바로 옆, 상점들이 즐비한 좁고 긴 거리 (rue du faubourg saint-Honoré) 에 위치해 있는 데서 생기는 여러 안전 문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대통령이 뽑힐 때마다 이사 계획이 논의되다가도, 번번이 무산되고 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알 수가 없지요. 엘리제 궁 역시 문화유산의 날들 같은 드문 기회에 일반인의 구경을 허락합니다.

삼색기가 휘날리는 엘리제 궁의 정문source de la photo

lundi 26 janvier 2009

오뗄 마띠뇽 (Hôtel Matignon)

마리아 브리뇰레-쌀레 (Maria Brignole-Sale) 는 갈리에라 궁 외에도 빠리 시내에 또하나의 화려한 오뗄 빠르띠뀔리에 (hôtel particulier) 를 소유했었습니다. 그 첫 소유자였던 쟉 드 마띠뇽 (Jacques III de Matignon) 의 이름을 따서 오뗄 마띠뇽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1725년에 완성된 이래, 상속과 판매를 통해 끊임없이 주인을 바꾼 뒤, 1848년 라파엘레 데 페라리 (Raffaele de Ferrari) 의 소유가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갈리에라 공작 (duc de Galliera) 이며, 마리아 브리뇰레-쌀레의 남편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며, 빠리에서 리용을 거쳐 마르세이으까지 가는 철도를 놓기도 한 갈리에라 부부는 갈 곳 없는 필립 도를레엉 (Philippe d'Orléans) 과 그 가족들에게 오뗄 마띠뇽의 1층을 내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쓰는 꼬뮌 드 빠리를 거친 후 제 3 공화국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왕위 계승자 (prétendant au trône) 임을 자칭하는 필립 도를레엉은 자신의 조상들과는 달리, 왕궁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필립 도를레엉의 맞딸 아멜리 도를레엉 (Amélie d'Orléans) 이 뽀르뛰갈의 인판떼 까를로쓰 (Carlos ou Charles) 와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갈리에라 부인은 1886년 5월 14일, 오뗄 마띠뇽에서 매우 성대한 잔치를 열었고, 여기에는 삼천여명의 귀족들과 왕정파들이 초대받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오뗄 마띠뇽이 위치해 있는 뤼 드 바렌 (rue de Varenne) 이 마차와 자동차로 미어 터졌는데, 하필 그 때 죠르쥬 끌레멍쏘 (Georges Clemenceau) 의 차 역시 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급진 좌파 국회의원으로 이름을 얻고 있던 끌레멍쏘는 호사스럽게 차려 입은 왕정주의자들이 오뗄 마띠뇽 앞에 길게 줄을 지어 늘어 서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추방법을 제안하게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또는 이 때의 차막힘에 휘말려 든 것은 끌레멍쏘의 차가 아니라 당시 국무총리였던 샤를 드 프레씨네 (Charles de Freycinet) 의 차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전설적인 일화를 떠나, 그 다음날부터 신문들, 특히 르 피갸로 (Le Figaro) 같은 우파 신문들이 오뗄 마띠뇽에서 있었던 왕정주의자들의 모임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제 3 공화국 정부는 추방법의 통과를 급하게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했듯, 추방법으로 오를레엉 일가가 망명길에 오르게 되자, 갈리에라 부인은 갈리에라 궁과 자신의 예술품을 프랑쓰에 기여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대신 갈리에라 궁은 빠리 시에, 예술품은 제노바 시에, 오뗄 마띠뇽은 외스터라이히의 황제에게 기증하고 죽습니다.

외스터라이히 측은 오뗄 마띠뇽을 잠시 재불 대사관으로 사용했으나, 1차 대전의 발발로, 두 나라는 적군이 되며, 프랑쓰는 오뗄 마띠뇽을 적군의 재산으로 압수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수많은 교섭 끝에, 오뗄 마띠뇽은 1922년부터 프랑쓰 국가의 소유가 되며, 1935년 이후로는 국무총리의 공식 관저가 됩니다. 1958년부터는 제 5 공화국의 출범으로 정부 체제가 조금 바뀌게 되어, 국무총리 (président du Conseil) 대신 수상 (premier ministre) 이 내각의 우두머리가 되고, 오뗄 마띠뇽은 지금까지도 프랑쓰 수상의 사무실이자 그 가족들이 먹고 살고 자는 숙소로 쓰이고 있습니다.

오뗄 마띠뇽은 대부분의 다른 오뗄 빠르띠뀔리에와 마찬가지로 넓은 뒷정원을 가지고 있는데, 빠리 시내에서 대중에게 개방된 공원들을 제외하면 가장 넓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6년 수상으로 임명된 레몽 바르 (Raymond Barre) 이래 역대 모든 수상들은 이 정원에 자신이 원하는 나무를 한 그루씩 심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물론 평소에는 오뗄 마띠뇽과 그 정원은 일반인에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유산의 날들이나 하얀 밤 같은 특별한 행사 때는 개방되기도 합니다.

Hôtel Matignon
source de la photo

dimanche 25 janvier 2009

갈리에라 궁 (Palais Galliera)

도쿄 궁 바로 맞은 편에는 갈리에라 궁이 있습니다. 샤이오 궁이나 도쿄 궁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 역시 왕궁으로 쓰였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앞의 두 궁에 비하면 보다 구체제와 관련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갈리에라 궁은 갈리에라 공작부인이었던 마리아 브리뇰레-쌀레 (Maria Brignole-Sale, 1812-1888) 가 19세기 말에 빠리 서쪽에 짓게한 개인 저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의 개인 저택은 palais 보다는 hôtel particulier 라고 칭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이 건물은 palais 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사실 크기도 궁이라고 하기에는 좀 자그마합니다.

갈리에라 부인은 이 궁에 자신이 수집한 예술 작품들을 보관할 예정이었으며, 사망시, 건물과 예술품 모두를 프랑쓰에 기증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추방법 (loi d'exil) 이 공표되자, 마음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추방법이란 이전의 왕족과 황족 및 그 직계 후손들이 프랑쓰 공화국에 체류하는 것을 금지할 목적으로, 1886년에 만들어진 법입니다. 이딸리아의 귀족부인이었던 마리아 브리뇰레-쌀레는 사실상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지만, 왕정에 호의적이었고, 필립 도를레엉 (Philippe d'Orélans, 당시 프랑쓰 왕위 요구자) 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기에, 오를레엉 가문을 쫓아낸 프랑쓰에 자신의 재산을 기증할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궁 만은 결국 — 프랑쓰가 아닌 — 빠리 시에 기증하고 죽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건물은 빠리 시의 시립 의상 박물관 (Musée de la mode et du costume) 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갈리에라 궁source de la photo

jeudi 15 janvier 2009

도쿄 궁 (Palais de Tokyo)

불어 palais 는 흔히 « 궁 » 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이 항상 « 왕궁 » 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palais 는 왕궁은 물론, 그에 준할 만큼 « 크고 화려한 건축물 » 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의 하나가 여러 박물관을 품고 있는 샤이오 궁입니다. 그리고 샤이오 궁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도쿄 궁이라 불리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 궁 역시 1937년의 세계 박람회를 치루기 위해 지어졌으며, 샤이오 궁처럼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Palais de TokyoSource de la photo

현재 도쿄 궁은 현대 미술관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에는 사실 두 개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하나는 빠리 시에서 운영하는 빠리시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이고, 또하나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현대 창작의 장 (Site de création contemporaine) 입니다. 빠리시립 현대 미술관썽트르 뽕삐두 (국립) 와 함께 프랑쓰의 주요 현대 미술관의 하나이며, 현대 창작의 장은 이러한 박물관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실험적인 현대 미술, 그리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예술 (상업용 디자인, 의상, 비데오 놀이 등) 에까지 개방된 전시 공간입니다.

도쿄 궁이라는 이름은 물론 일본의 수도로부터 왔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 건물이 위치한 길의 이름이, 궁이 건축되던 1937년 당시에는 avenue de Tokio 였기 때문에 붙었습니다. 이 길의 이름은 현재는 avenue de New York 입니다. 아브뉘의 이름이 de Tokio 에서 de New York 으로 바뀐 때는 바로 1945년 ! 이것은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2차대전시 일본은 프랑쓰의 적이었고, 미국은 프랑쓰가 독일군에게서 해방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나라였지요. 그 때문에 길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건물의 이름은 어쩌다 보니 그대로 남았습니다. 다만 현재는 철자가 조금 바뀌어 de Tokyo 라고 씁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에는 일본의 수도명을 Tokio 라 쓰는 것이 유럽 여러 나라에서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dimanche 11 janvier 2009

샤이오 궁 (Palais de Chaillot)

샤이오 궁은 빠리의 서쪽, 트로꺄데로 광장 (Place du Trocadéro) 에 위치한 대형 건물로, 궁이라고 불리지만 왕이 살았던 것은 아니고, 1937년 빠리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 (exposition universelle) 를 치루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입니다. 현재는 인류 박물관 (Musée de l'Homme), 해양 박물관 (Musée de la Marine), 샤이오 국립 극장 (Théâtre national de Chaillot), 건축과 문화재 도시 (Cité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등이 들어서 있습니다. 프랑쓰 씨네마떽 (Cinémathèque française) 도 오랜 세월을 샤이오 궁에서 보냈는데, 이제는 독립된 건물로 이사를 나갔습니다.

활짝 펼친 두 개의 날개 모양으로 이루어진 샤이오 궁은 외모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나, 그 거대함이 사람을 압도합니다. 그리고 약간 언덕진 곳에 지어졌기 때문에, 샤이오 궁에서부터 쎈 강을 향해 내려다 보는 전망이 시원합니다.

에펠탑에서부터 내려다 본 샤이오 궁과 트로꺄데로 정원source de la photo

샤이오 궁을 이루는 두 날개 사이에는 훤하게 트인 넓은 떼라쓰 (terrasse) 가 판판하고 튼튼하게 잘 닦여 있어, 롤러 스케이트 (patins à roulettes) 등의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며, 관광객으로도 항상 붐빕니다. 1948년 12월 10일, 국제 연합 (ONU) 이 세계 인권 선언 (Déclaration universelle des Droits de l'Homme) 을 한 곳이 바로 샤이오 궁인 까닭인지, 인권을 건드리는 문제들이 발생하면 프랑쓰 사람들은 흔히 이 떼라쓰에 모여 시위를 하곤 합니다.

샤이오 궁과 쎈 강 사이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Jardin du Trocadéro), 가운데 길에는 넓은 분수가 펼쳐져 있어, 여름에는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기도 합니다. 떼라쓰에서부터 이 분수를 따라 내려온 후 이에나 다리 (Pont d'Iéna) 를 통해 쎈 강을 건너면, 바로 에펠탑입니다.

트로꺄데로 정원

samedi 10 janvier 2009

엉리 렁글르와 (Henri Langlois)

몽빠르나쓰 묘지의 서쪽 끝 델핀 쎄릭의 무덤에서부터 아브뉘 뒤 노르 (Avenue du Nord) 를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면, 진 쎄베르그의 무덤, 리꺄르도 므농의 무덤을 지나 엉리 렁글르와 (1914-1977) 의 무덤에 이르게 됩니다. 이 무덤은 주변의 다른 무덤들과는 달리 유리, 또는 유리를 닮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다는 특징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러 영화의 장면들이 투사되어 있지요.

Tombeau d'Henri Langlois
렁글르와의 무덤이 이렇게 꾸며진 이유는 그가 프랑쓰 씨네마떽 (Cinémathèque française) 의 창시자였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영화광이었던 그는 사비를 들여, 버려져 가고 있던 무성영화 필름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1936년 몇몇 친구들과 함께 프랑쓰 씨네마떽을 창설하였습니다. 지금도 씨네마떽은 비록 국가의 보조를 받기는 하지만, 여전히 개인 모임 형태라고 합니다. 하지만 1950년 이후로 프랑쓰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는 반드시 씨네마떽에 한 부를 기증해야 하므로, 애초에 약 150편으로 출발했던 씨네마떽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의 필름보관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프랑쓰 영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씨네마떽 측에서 사들이거나 수집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작품들로 넘쳐 납니다.

씨네마떽은 영화들을 수집할 뿐 아니라, 오래된 필름들을 복원하고, 새로운 영화의 제작도 활발히 후원하고, 소장하고 있는 영화들을 가지고 다양한 프로그람을 짜서, 쉽게 접하기 힘든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특히, 훗날 누벨 바그라고 불리게 될 감독들이 씨네마떽을 열심히 드나들며 영화를 배웠다고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에는 렁글르와 사건 (affaire Langlois) 이라는 상당히 심각한 소동이 일어났었다고 합니다. 두 달 동안 프랑쓰 영화계를 뒤흔든 이 사건은 국가가 렁글르와를 씨네마떽에서 배출시키려는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쓰의 거의 모든 영화관계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으며, 여기에 외국의 유명 감독들까지 렁글르와를 지원하였으나, 프랑쓰 정부 측은 폭력 진압으로 맞섰습니다. 결국 두 달 간의 혼란을 겪고 나서 정부가 손을 들었는데, 이 때가 바로 1968년 4월 중순이었습니다. 즉 5월 시위가 터지기 2주 전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렁글르와는 프랑쓰 씨네마떽의 총서기장 (secrétaire général) 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사실 이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해 후회의 의견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는 36년 씨네마떽의 설립 이후로 77년 사망할 때까지, 68년 2월에서 4월까지의 두 달을 제외하고는 씨네마떽의 책임자로 있었는데, 한 사람이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아무래도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겠지요. 정부가 그를 쫓아 내려 했던 것도 씨네마떽의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보조를 해 줘도 항상 빚에 허덕이고 있기에, 사람을 바꿔 보려고 생각했던 것이랍니다. 영화에 대한 렁글르와의 사랑을 아는 영화인들은 여기에 민감하게 대응했지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렁글르와는 행정적인 업무에는 실제로 매우 둔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렁글르와에 대한 비판도 꽤 있지만, 그래도 영화라면 닥치지 않고 수집하던 그의 열정만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평가입니다.

렁글르와의 무덤 위에는 샤이오 궁 (Palais de Chaillot) 의 축소판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프랑쓰 씨네마떽이 오랫동안 샤이오 궁 안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베르씨로 자리를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