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프로벙쓰 (Provence) 가 따뜻하고 아름답고 살기 좋고 맛있는 게 많은, 프랑쓰의 대표적인 지방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중세에는 프로벙쓰는 프랑쓰의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신성로마제국 (Saint Empire romain) 에 속해 있었지만, 이 제국이라는 것이 상당히 이론적인 나라에 불과했으며, 제국의 황제도 별로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거의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프로벙쓰의 백작은 자기 나라를 사실상 독립적으로 다스렸습니다. 블렁슈 드 꺄스띠으 (Blanche de Castille) 가 프랑쓰를 좌지우지하던 무렵 프로벙쓰의 백작은 레몽-베렁제 5세 (Raymond-Bérenger V) 였는데, 그와 그의 아내 베아트리쓰 드 싸브와 (Béatrice de Savoie) 에게는 연달아 네 명의 딸만 태어났습니다. 프로벙쓰의 미래를 염려하는 백작 부부에게 —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 신하였던 로메 드 빌뇌브 (Romée de Villeneuve) 가 네 공주는 네 명의 왕비가 되어 프로벙쓰의 이름을 드높일 것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전설인지, 사실이라면 로메 드 빌뇌브가 어찌하여 그러한 예언을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
우선 장녀 마르그릿 (Marguerite) 은 프랑쓰의 왕 루이 9세 (Louis IX) 와 결혼하여 프랑쓰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1234).
둘째딸 엘레오노르 (Éléonore) 는 영국의 왕 엉리 3세 (Henri III) 와 결혼함으로써, 영국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1236).
셋째 썽씨 (Sancie) 는 리샤르 드 꼬르누아이으 (Richard de Cornouailles) 와 결혼하였습니다 (1243). 이 사람은 바로 위에서 말한 영국왕 엉리 3세의 동생으로써, 결혼 당시는 콘월 (Cornwall) 의 백작이었습니다. 하지만 1257년, 로마인의 왕 (roi des Romains) 으로 선출됩니다. 로마인의 왕으로 뽑히면 장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불행히도 리샤르는 황제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고, 황제건 로마인의 왕이건 모두 실질적인 권력보다는 형식적인 호칭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공식적으로 썽씨는 로마인의 왕비 (reine des Romains) 가 됩니다.
원해서든 아니든, 세 딸을 모두 막강한 가문에 시집보내게 된 레몽-베렁제는 프로벙쓰가 프랑쓰나 영국이라는 두 강국 중 하나에게 합병될 것을 우려하여, 막내딸 베아트리쓰 (Béatrice) 에게 지위와 영토를 상속시킵니다. 따라서 1245년 레몽-베렁제가 사망하자 베아트리쓰는 11살의 나이에 프로벙쓰의 백작부인 (comtesse de Provence) 으로 즉위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듬해에 베아트리쓰도 프랑쓰의 왕자 샤를 덩쥬 (Charles d'Anjou) 와 결혼하고 맙니다. 샤를 덩쥬는 프랑쓰의 왕 루이 9세의 동생으로써, 결국 네 명의 자매는 둘씩 둘씩 두 형제와 결혼한 셈이 되었습니다. 애초에 마르그릿을 통해 프로벙쓰를 합병하려던 블렁슈 드 꺄스띠으는 또다른 아들 샤를을 베아트리쓰와 결혼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프로벙쓰에 대한 그녀의 야심을 드러낸 것이죠. 실제로 프로벙쓰의 상속녀와 결혼함으로써 샤를은 프로벙쓰 백작 (comte de Provence) 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샤를이 1266년 씨칠리아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베아트리쓰 역시 씨칠리아의 왕비 (reine de Sicile) 가 됩니다. 이로써 예언대로 네 명의 공주는 네 명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한편 프로벙쓰는 베아트리쓰 드 프로벙쓰와 샤를 덩쥬의 아들 샤를 2세에게 물려지게 됩니다. 이후로 번번이 프랑쓰의 왕자들이 프로벙쓰 백작의 지위에 오르다가 결국 1481년 프랑쓰의 왕 루이 11세는 아예 프로벙쓰를 프랑쓰 왕국으로 귀속시켜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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