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29 décembre 2008

진 쎄베르그 (Jean Seberg)

몽빠르나쓰 묘지에서 델핀 쎄릭의 무덤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진 쎄베르그 (1938-1979) 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인이지만, 프랑쓰와 관계가 많은 배우입니다.

그녀가 출연한 처음 두 편의 작품은 모두 미국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 다 그녀는 프랑쓰 여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녀의 데뷔작은 오토 프레밍거 (Otto Preminger) 의 성녀 쟌 (Saint Joan, 1957) 으로서, 여기서 그녀는 무려 18 000 명의 후보자들을 제치고 프랑쓰의 역사적 영웅인 성녀 쟌 다르크의 역할을 따냈다고 합니다.

쎄베르그의 후속작은 역시 프레밍거의 작품인 안녕 슬픔 (Bonjour Tristesse, 1959) 입니다. 프렁쓰와즈 싸겅 (Françoise Sagan) 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이 작품에서 쎄베르그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깨닫는 쎄씰이라는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그녀의 세번째 영화는 프랑쓰 영화 숨가쁜 (À bout de souffle, 1960) 인데, 재미있게도 여기서는 오히려 미국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졍-뤽 고다르 (Jean-Luc Godard) 의 이 영화야말로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그녀가 사라진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쎄베르그 하면, 이 영화에서 그녀가 맡았던 빠트리씨아 프란끼니 (Patricia Franchini) 역할을 떠올립니다. 그 이유는 누벨 바그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영화가 유달리 강한 인상을 남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후 쎄베르그의 출연작들이 모두 일종의 이류 영화들로서,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필립 드 브로꺄, 끌로드 샤브롤, 필립 갸렐 같은 감독들이 그녀를 꾸준히 고용하기는 했지만, 쎄베르그는 영화보다는 사생활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역사상 유일하게 공꾸르 상을 두 번 탄 작가 로망 갸리 (Romain Gary) 와의 결혼은 당시에 아주 유명했다고 하지요.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갸리는 아내를 자신의 영화 두어편에 출연시키기도 하였으나, 역시 큰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 두 사람의 이혼 문제와 결혼 말기에 태어난 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쎄베르그는 블랙 팬더스 (Black Panthers) 운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한 바가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FBI 에서, 이 딸은 갸리의 딸이 아니라, 블랙 팬더스 중 한 명의 딸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그외에도 미행과 도청, 위협 등을 당한 끝에, 쎄베르그는 미숙아를 낳고 말았습니다. 이 아기가 태어난지 며칠 만에 죽고 말자, 쎄베르그는 아이의 죽음을 FBI 의 책임으로 몰아 세웠으며, 아기의 장례식에서는 아기의 흰 피부를 보란 듯이, 의도적으로 유리관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후 쎄베르그는 알콜과 마약 중독에 빠졌으며, 여러 차례, 주로 딸이 죽은 날짜 (8월 25일) 를 전후하여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8월말 그녀는 행방불명되었다가, 십여일이 흐른 뒤에야 경찰의 조사에 의해, 자신의 차 뒷좌석에서 담요에 휩싸인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는 쎄베르그의 자살로 발표되었지만, 앞뒤 상황이 분명치 않아, 로망 갸리를 선두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FBI 에서 처치한 것이라고 믿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사건의 진상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한때 누벨 바그의 샛별로 떠올랐던 진 쎄베르그는 기대에 못미친 경력을 뒤로 하고, 마흔의 나이에 사라졌습니다.

Tombeau de Jean Seberg

mardi 23 décembre 2008

델핀 쎄릭 (Delphine Seyrig)

작 드미의 재미있고 환상적인 영화 당나귀가죽 (Peau d'âne) 에 출연한 바 있는 델핀 쎄릭 (1932-1990) 은 드미와 마찬가지로 몽빠르나쓰 묘지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무덤은 그녀의 살아 생전 이미지처럼 깔끔하고 단정합니다.

쎄릭의 무덤
당나귀가죽에서 쎄릭은 응큼한 생각을 품고 있는 약간 엉뚱한 라일락의 요정 (Fée des lilas) 을 연기했지만, 다른 작품들에서는 대부분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역할들을 맡았습니다. 특히 그녀의 이름을 널리게 한 작품은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알랑 레네 (Alain Resnais) 의 지난해 마리엔바드에서 (L'Année dernière à Marienbad, 1961) 입니다. 알랑 로브-그리예 (A. Robbe-Grillet) 가 각본을 쓴 이 난해한 영화는 두 남녀가 그 이전 해에 마리엔바드에서 만난 적이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고민하는 수수께끼같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 뒤이어 쎄릭은 다시 한번 레네의 대작으로 평가받는 뮈리엘 또는 어느 귀환 (Muriel ou le temps d'un retour, 1963) 에서 주인공 엘렌 역을 맡습니다. 제목의 뮈리엘은 주인공의 이름이 아니라, 영화 속에는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서, 아련한 기억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지난해 마리엔바드에서 가 사실과 가정, 기억과 꿈 등을 뒤섞는 몽환적인 작품인데 비해, 뮈리엘 은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며, 사실주의적인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그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쎄릭의 또다른 주목할만한 출연작은 프렁쓰와 트뤼포의 도둑맞은 입맞춤 (Baisers volés, 1968) 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이제 청년이 된 엉뜨완 드와넬의 흠모를 받는 연상의 기혼녀 역할을 하는데, 영화 속에서 엉뜨완 드와넬이 그녀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 « Ce n'est pas une femme. C'est une apparition ! » (그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환영이야.) 이 대사는 영화 속 인물 뿐 아니라, 신비로운 미모와 그윽한 목소리, 늘 노래부르는 듯한 억양을 가졌던 실제 델핀 쎄릭에게도 자주 적용되었습니다.

쎄릭은 1971년에는 최초로 엘리자벳 바또리 (Elisabeth Bathory) 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붉은 입술 (Les Lèvres rouges) 에서 이 유명한 흡혈 살인범을 연기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두 편의 로제 (사고, 인형의 집), 두 편의 뷔뉘엘 (은하수, 중산계층의 은밀한 매력), 두 편의 아께르만 (쟌 딜만, 황금의 팔십년대), 세 편의 뒤라쓰 (라 뮈지꺄, 인디아 쏭, 박스떼르, 베라 박스떼르) 영화를 찍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스스로도 직접 몇 편의 영화들을 감독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모두 여성인권운동의 발전을 위한 자료영화들입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여러 여배우들과의 인터뷰를 담은 예쁘게 꾸미고 입닥치고 있어 (Sois belle et tais-toi, 1975-77).

아래의 비데오는 드미의 영화 당나귀가죽의 한 장면으로, 대녀인 당나귀가죽 (꺄트린 드뇌브) 에게 아버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대모인 라일락의 요정이 노래로 설교하는 장면입니다. (그 이유는 사실은 자기가 결혼하고 싶어서.^^)

당나귀가죽 중 라일락 요정의 충고
Les conseils de la Fée des lilas, extraits du film Peau d'âne

samedi 20 décembre 2008

작 드미의 무덤 (tombeau de Jacques Demy)

니끼 드 쌍-팔이 조각한 리꺄르도 므농의 무덤도 매우 눈에 띄는 무덤이기는 하나, 몽빠르나쓰 묘지에서 가장 예쁜 무덤은 롤라 (Lola), 천사의 해안 (La Baie des anges), 셰르부르의 우산들 (Les Parapluies de Cherbourg), 로슈포르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e Rochefort), 당나귀 가죽 (Peau d'âne) 등의 명작을 남긴 영화감독 작 드미의 무덤이 아닐까 합니다. 아녜쓰 바르다 (Agnès Varda) 가 꾸민 남편의 무덤은 초록색 덩굴로 뒤덥힌 무덤 자체도 단아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옆에 싱싱하게 우거진 나무와 작은 벤치가 있어 무덤답지 않은 정취가 있습니다. 빼곡히 들어찬 몽빠르나쓰 묘지에 이러한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mercredi 3 décembre 2008

리꺄르도의 무덤 (tombeau de Ricardo)

따로의 정원이 니끼 드 쌍-팔 (Niki de Saint-Phalle) 의 필생의 대작이기는 하나, 사실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그녀의 작품은 빠리의 스트라빈스끼 연못일 것입니다. 비록 쌍-팔의 작품이 세계 도처에 설치되어 있기는 하나, 빠리가 워낙 국제적인 관광 도시인 까닭이지요. 더군다나 많은 관람객을 모으는 뽕삐두 쎈터 바로 옆에 있는 관계로, 빠리를 방문한 전세계의 관광객들에게 이 연못은 꽤 친숙합니다.

그런데 빠리에는 니끼 드 쌍-팔의 작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하여 훨씬 덜 알려진 이 조각은 사실 예술 작품으로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라, 리꺄르도 므농 (Ricardo Menon) 이라는 친구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개인적인 조각입니다. 리꺄르도 므농은 1977년 이후로 십여년간, 쌍-팔의 조수이자 비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녀에게 더없이 소중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듬해부터 시작된 따로의 정원의 건축에도 그는 활발히 참여했지요.

하지만 1986년, 그는 개인적인 예술가로 독립하고자, 니끼와 따로의 정원을 떠나, 빠리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 후 채 3년이 못되어 씨다로 사망하고 맙니다. 1952년 출생이니, 서른 일곱의 나이에 죽은 것입니다. 씨다 퇴치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쌍-팔은 이미 몇년전 AIDS: You Can't Catch It Holding Hands (en français, Le sida, tu ne l'attraperas pas, 1986) 라는 책을 쓰기도 했는데, 므농이 죽은 후 필립 매튜스 (Philippe Matthews) 와 공동 감독으로 이 책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필립은 니끼가 첫남편 해리 매튜스로부터 얻은 아들). 또한 그녀는 빠리의 몽빠르나쓰 묘지에 마련된 리꺄르도의 무덤을 장식할 기념비를 조각했습니다. 커다란 고양이의 모습을 한 이 조각은 쌍-팔의 작품답게,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의 모자익으로 장식되어 있어, 몽빠르나쓰 묘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무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밝은 느낌에도 불구하고, 쌍-팔이 자필로 쓴 비문을 읽으면 인생의 허무함을 상기하게 됩니다 : « 젊고, 사랑받고, 아름다왔으나, 너무나 일찍 죽은 우리의 절친한 친구 리꺄르도를 위하여 ».

쌍-팔이 조각한 리꺄르도 므농의 무덤
빠리, 몽빠르나쓰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