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fichage des articles dont le libellé est Paris. Afficher tous les articles
Affichage des articles dont le libellé est Paris. Afficher tous les articles

dimanche 9 janvier 2011

떵쁠 (Temple)

렁발 공주가 프랑쓰 왕가와 함께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낸 떵쁠의 탑 (Tour du Temple) 은 떵쁠의 집 (Maison du Temple) 을 구성하던 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떵쁠의 집은 중세에 떵쁠리에 (Templier) 들이 오늘날의 빠리의 3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세운 넓은 공간으로, 중세에는 거의 독립된 도시와도 같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떵쁠리에들은 십자군 전쟁 시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활동했던 수사이자 군인이면서, 은행가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애초에 떵쁠회 (Ordre du Temple) 는 예루살렘의 성전 (Temple) 이 있던 자리를 첫 본거지로 삼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는데, 크게 번성하여 유럽 도처에 분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을 떵쁠의 집이라 불렀지요. 빠리의 떵쁠도 그 중 하나로, 다른 떵쁠의 집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넓은 농지로 구성되었습니다. 흔히 떵쁠리에들을 군인이나 은행가로만 보지만, 실제로는 다른 수사들처럼 땅을 경작하는 일에도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따라서 농사에 관계된 여러 부속 건물들 (곳간, 마굿간 등등) 이 있었으며, 빠리의 떵쁠은 사각형의 거대한 탑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늪과 습지에 불과했던 이 지역은 빠리의 외곽으로서, 떵쁠리에들은 상당히 넓은 영토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을 성벽으로 둘러 쌓아 요새화 시켰습니다.

1450년 경의 떵쁠을 묘사한 그림

하지만 1312년 프랑쓰의 왕 필립 4세 르 벨 (Philippe IV le Bel) 과 교황 끌레멍 5세 (Clément V) 가 떵쁠회를 폐지시키면서, 떵쁠회의 재산과 소유지는 모두 오삐딸회 (Ordre de l'Hôpital) 로 넘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리의 떵쁠은 여전히 떵쁠이라 불리면서 여러 변화를 거치지요. 우선 빠리 시내가 커지면서 떵쁠이 빠리 시내의 일부가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여러 저택과 집들이 들어서고, 병원, 묘지, 정원 등이 생겨납니다. 거대한 떵쁠의 탑은 14세기 말에 잠시 감옥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16-17세기에는 군대의 무기고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는 문서보관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6세기 말에는 원래 있던 50 미터 높이의 떵쁠의 탑 (Grande Tour) 앞에 그 절반 정도 높이의 작은 탑 (Petite Tour) 을 덧붙여 세워, 문서보관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살기도 했습니다. 17세기에는 베르싸이으를 건축한 아르두앙-멍싸르 (Jules Hardouin-Mansart) 가 오삐딸회의 대원장을 위한 궁전 (Palais du Grand Prieur) 을 세웠으며, 이 건물은 18세기에 아르뜨와 백작 (comte d'Artois), 즉 루이 16세의 동생이자 훗날의 샤를 10세의 소유가 됩니다.

18세기의 떵쁠 탑을 묘사한 그림

비록 중세의 두껍고 투박하고 순전히 군사적인 보호를 목적으로 하던 성벽은 사라졌지만, 떵쁠은 여전히 보다 낮고 보다 얇은 벽으로 둘러쌓인 동네였습니다. 이 동네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딱 하나의 문 밖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꼬뮌 드 빠리는 왕정이 무너진 후 왕가를 떵쁠에 가두기로 했던 것입니다. 즉 통제를 하기가 쉬웠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왕가를 떵쁠로 이송한다고 했을 때, 그래도 프랑쓰의 왕실인데, 모두들 대원장의 궁에 머물게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꼬뮌 드 빠리는 작은 탑을 왕실의 거처로 정했습니다. 그나마도 큰 탑이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수리하는 동안만이었습니다. 따라서 작은 탑에서는 약 한 달 여간, 그리고 큰 탑으로 옮겨가서는 식구별로 최소 4개월에서 최대 3년 넘게까지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우선 루이 16세가 떵쁠을 가장 먼저 떠나긴 했지만, 이것은 1793년 1월 21일 기요띤에 목이 잘리기 위함이었지요. 다음으로 마리-엉뜨와넷이 1793년 8월에 꽁씨에르쥬리 (Conciergerie) 로 이감됩니다. 1794년 5월에는 루이 16세의 여동생 엘리자벳 (Élisabeth) 공주가 역시 기요띤 형을 당하고, 1795년 6월에는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살던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이 결핵으로 죽습니다. 유일한 생존자는 루이 16세의 첫째 딸 마리-떼레즈 (Marie-Thérèse) 로, 그녀는 1795년 12월 외스터라이히 제국에 잡혀 있던 네 명의 프랑쓰 포로와 교환됩니다. 

이후 세월이 바뀌면서 왕정주의자들이 떵쁠의 탑을 마치 순례지처럼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자, 황제가 된 나뽈레옹이 1808년 탑을 제거하게 합니다. 지금은 탑이 있던 자리를 표시해 주는 흔적 만이 길 위에 그려져 있습니다.

탑이 있던 자리의 한 쪽 모퉁이를 표시해 주는 3구 구청 앞의 흔적

dimanche 17 janvier 2010

필립 오귀스뜨 (Philippe Auguste)

필립 2세 (Philippe II) 또는 필립 오귀스뜨프랑쓰의 영토 확장과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한 왕입니다. 루이 7세 (Louis VII) 가 세 번의 결혼 끝에 얻은 유일한 아들인 필립은 태어나면서부터 왕위를 잇는 것이 확정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아버지의 살아 생전에 이미 왕으로서 축성을 받았습니다 (1179). 비록 바로 그 다음 해에 루이 7세가 사망하긴 하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프랑쓰는 공식적으로 두 명의 왕이 다스린 셈이 되지요. 축성을 받았을 때 필립의 나이는 14살이었으며, 15살부터는 단독으로 프랑쓰의 왕 필립 2세가 됩니다.

당시의 프랑쓰 및 유럽의 정치 체제는 봉건주의 (féodalisme) 로서, 이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론적으로는 많은 귀족들이 프랑쓰의 왕에게 복종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귀족들은 매우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영지를 다스렸습니다. 따라서 프랑쓰 왕의 직접적인 권한은 오늘날 빠리와 일-드-프렁쓰 (Île-de-France) 를 둘러싼 극히 작은 지방에 밖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지요. 특히 영국의 왕은 이론적으로 프랑쓰 왕의 신하였으나, 영국 섬은 물론 프랑쓰 내에 그보다 더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쓰의 남서쪽, 북서쪽, 북쪽 등등이 모두 영국 왕의 영지였지요. 따라서 프랑쓰는 상당히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필립 2세가 단독으로 다스리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자벨 드 에노 (Isabelle de Hainaut) 와의 결혼이었고, 이 공주는 결혼 선물로 아르뜨와 (Artois) 지방을 필립에게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영토 확장을 시작한 필립 오귀스뜨는 계속해서 술책과 정책, 전쟁과 외교를 통하여 프랑쓰의 영토를 넓히는데 일생을 바칩니다. 특히 프랑쓰 내의 영국 영토를 빼았기 위해 그는 영국 왕자들이 그들의 아버지인 엉리 2세 (Henri II) 에게 일으킨 반란을 후원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엉리 2세의 아들 리샤르 (Richard) 가 영국의 왕이 되자, 이번엔 그와 그의 동생인 졍 (Jean) 사이를 이간질 시켰습니다. 또한 후사없이 죽은 리샤르를 뒤이어 졍이 왕이 되자, 그가 프랑쓰 내에 소유했던 영토를 하나하나 다 빼앗았습니다. 그 때문에 졍은 흔히 졍 썽 떼르 (Jean sans Terre) 즉 « 땅없는 졍 »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엉리 2세와 리샤르, 졍 등은 모두 프랑쓰 출신인 쁠렁따쥬네 가문의 사람들로, 불어와 옥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비록 영국이라는 섬의 일부를 다스리기는 했지만 영어를 전혀 몰랐으며, 영국의 왕인 동시에 노르멍디 공작, 엉주 백작, 멘 공작, 쁘와뚜 백작, 아끼뗀 공작으로써, 대부분 프랑쓰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프랑쓰에 묻혔습니다.)

영국의 왕으로부터 빼앗은 땅 이외에도 필립 2세는 여러 지역을 차지하여 오귀스뜨 (Auguste) 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가 죽을 무렵 (1223) 에는 프랑쓰 왕의 소유지가 현대 프랑쓰의 거의 3분의 2 정도가 될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렇게 영토가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오귀스뜨는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 왕국 전체를 통일적으로 다스리는 데 성공했으며, 도시 시민들 (bourgeois) 을 장려함으로써, 봉건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필립 오귀스뜨는 또한 수도 빠리를 확장시키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도 많은 정성을 들였습니다. 진흙 바닥이었던 빠리의 길은 돌로 포장이 되었고,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성벽이 축조되었습니다. 바로 이 성벽을 쌓으면서 루브르 (Louvre) 궁도 지어졌습니다. 또한 빠리의 중앙에 거대한 시장을 만든 것도 바로 이 왕으로, 이 시장은 1969년까지 지속되었고, 빠리의 여러 학교들을 모아 공식적으로 빠리 대학 (Université de Paris) 의 지위를 준 것도 필립 2세였습니다.

현재도 남아 있는 필립 오귀스뜨의 성벽의 유적
(Reste de l'enceinte Philippe Auguste)

vendredi 30 janvier 2009

셩-젤리제 (Champs-Élysées)

자칭 타칭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la plus belle avenue du monde) 이라고 불리는 셩-젤리제는 빠리 중앙으로부터 서쪽을 향해 길게 뻗은 대로 (avenue) 를 말합니다. 정확한 행정 구역 이름은 avenue des Champs-Élysées 이며, 쁠라쓰 들 라 꽁꼬르드 (place de la Concorde) 와 쁠라쓰 샤를-드-골 (place Charles-De-Gaulle), 두 광장을 이어주는, 길이 약 2 킬로미터, 폭 약 70 미터의 길입니다. 빠리의 길들은 대부분 좁고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셩-젤리제처럼 곧고 넓은 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긴 하지만,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 이라는 것은 너무 광고문안적인 표현이 굳어진 것 아닌가 합니다. 혹시 옛날에는 더 아름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넓게 트인 길에 가로수가 끝이 안 보이게 줄지어 있고, 인도도 매우 넓어서 산책하기에 쾌적한 길이었을테니까요. 사실 이미 18세기에도 이 동네를 빠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역의 하나라고 묘사한 문서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점들, 은행들, 식당들, 여행사들이 너무 많이 들어 차 있어서, 과연 이 길만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예전에는 최고급 상점들 위주라 희귀성이라도 있었지만, 요즘은 전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체인 상표들이 셩-젤리제를 수 놓고 있습니다.

셩-젤리제에서 그나마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부위는 꽁꼬르드 광장부터 롱-쁘왕 데 셩-젤리제 (rond-point des Champs-Élysées), 즉 아브뉘의 한 중간 정도까지입니다. 여기도 물론 차도에는 차들이 씽씽 달리지만, 양 옆 인도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고, 인도의 폭이 거의 삼사백미터에 가깝도록 넓직하기 때문에 산책하는 맛이 있습니다. 물론 셩-젤리제의 나머지 부위도 빠리의 보도로서는 정말 넓은 편이지만, 관광객들로 미어 터지고, 소매치기들의 활약이 많으며, 잡상인들로 들끓기 때문에, 발디딜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셩-젤리제 — 또는 빠리 사람들이 줄여 말하듯 셩 (Champs) — 에 가면, 알 수 없는 흥분과 때로는 « 감동 » 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괜히 술렁이는 분위기 때문이겠지만요. 특히 11월 말부터 가로수에 성탄절 장식을 했을 때는 정말 엘리제 (Élysées) 들판 (champs) 에 온 듯한 기분도 듭니다. 엘리제 들판은 그리쓰 신화에서 영웅들과 착한 사람들이 죽은 후 가게 되는, 일종의 천국과 같은 장소를 말하지요. 여기서부터 이 길의 이름이 왔으며, 그 외에도 프랑쓰에는 엘리제라는 이름을 딴 장소나 명소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ex. Palais de l'Élysée).

아브뉘 데 셩-젤리제는 매년 7월 14일 군인들의 행진 장소로 쓰이고, 또 매년 여름 뚜르 드 프렁쓰 (Tour de France = 프랑쓰 일주 자전거 대회) 의 종착지로도 쓰이며, 그 외에도 특별한 행사들, 주로 화려한 축제 분위기의 행사들이 종종 열립니다. 공식적인 행사 외에도 나라에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빠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와 모여드는 곳도 셩-젤리제랍니다.

셩-젤리제의 성탄 장식

꽁꼬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위에서부터 개선문 쪽을 향해 바라 본
아브뉘 데 셩-젤리제source de cette photo

mercredi 28 janvier 2009

엘리제 궁 (Palais de l'Élysée)

오뗄 마띠뇽프랑쓰 수상의 공식 관저라면, 프랑쓰 대통령의 공식 관저는 엘리제 궁입니다. 엘리제 궁도 갈리에라 궁처럼, 사실 궁이라기 보다는 오뗄 빠르띠뀔리에라 보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오뗄 마띠뇽과 비슷한 시기 (1722) 에 완성된 이 집은 그 첫주인인 에브르 백작 (Comte d'Évreux) 의 이름을 따서 한동안 오뗄 데브르 (Hôtel d'Évreux) 라고 불렸으며, 바띨드 도를레엉 (Bathilde d'Orléans), 즉 부르봉 공작 부인의 소유이던 시절에는 오뗄 드 부르봉 (Hôtel de Bourbon) 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프랑쓰 혁명으로 재산을 많이 잃게 된 바띨드 도를레엉은 오방 (Hovyn) 이라는 상인과 손을 잡고, 자신의 저택 1층과 정원을 대중에게 공개하였습니다. 이 때 여기에 일반인들이 많이 드나들면서, 저택의 위치가 아브뉘 데 셩-젤리제 (avenue des Champs-Élysées) 와 가깝다하여, 엘리제 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엘리제 궁은 공식적으로는 제 2 공화국 시절부터 프랑쓰 대통령의 공식 거처로 지정되었으나, 대통령으로 뽑힌 나뽈레옹 3세가 황제로 둔갑하면서, 역사적으로 진짜 왕궁이었던 뛰일르리로 옮겨 가 버리는 바람에, 엘리제 궁이 실제 역할을 발휘하게 된 것은 1873년 이후부터입니다. 이후로는 지금까지 프랑쓰의 모든 대통령들이 엘리제 궁에서 집무를 보고 생활을 하나, 대통령 관저로서 적합치 않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엘리제 궁이, 위에서 말했듯 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작고, 관광객으로 들끓는 셩-젤리제 바로 옆, 상점들이 즐비한 좁고 긴 거리 (rue du faubourg saint-Honoré) 에 위치해 있는 데서 생기는 여러 안전 문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대통령이 뽑힐 때마다 이사 계획이 논의되다가도, 번번이 무산되고 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알 수가 없지요. 엘리제 궁 역시 문화유산의 날들 같은 드문 기회에 일반인의 구경을 허락합니다.

삼색기가 휘날리는 엘리제 궁의 정문source de la photo

lundi 26 janvier 2009

오뗄 마띠뇽 (Hôtel Matignon)

마리아 브리뇰레-쌀레 (Maria Brignole-Sale) 는 갈리에라 궁 외에도 빠리 시내에 또하나의 화려한 오뗄 빠르띠뀔리에 (hôtel particulier) 를 소유했었습니다. 그 첫 소유자였던 쟉 드 마띠뇽 (Jacques III de Matignon) 의 이름을 따서 오뗄 마띠뇽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1725년에 완성된 이래, 상속과 판매를 통해 끊임없이 주인을 바꾼 뒤, 1848년 라파엘레 데 페라리 (Raffaele de Ferrari) 의 소유가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갈리에라 공작 (duc de Galliera) 이며, 마리아 브리뇰레-쌀레의 남편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며, 빠리에서 리용을 거쳐 마르세이으까지 가는 철도를 놓기도 한 갈리에라 부부는 갈 곳 없는 필립 도를레엉 (Philippe d'Orléans) 과 그 가족들에게 오뗄 마띠뇽의 1층을 내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쓰는 꼬뮌 드 빠리를 거친 후 제 3 공화국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왕위 계승자 (prétendant au trône) 임을 자칭하는 필립 도를레엉은 자신의 조상들과는 달리, 왕궁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필립 도를레엉의 맞딸 아멜리 도를레엉 (Amélie d'Orléans) 이 뽀르뛰갈의 인판떼 까를로쓰 (Carlos ou Charles) 와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갈리에라 부인은 1886년 5월 14일, 오뗄 마띠뇽에서 매우 성대한 잔치를 열었고, 여기에는 삼천여명의 귀족들과 왕정파들이 초대받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오뗄 마띠뇽이 위치해 있는 뤼 드 바렌 (rue de Varenne) 이 마차와 자동차로 미어 터졌는데, 하필 그 때 죠르쥬 끌레멍쏘 (Georges Clemenceau) 의 차 역시 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급진 좌파 국회의원으로 이름을 얻고 있던 끌레멍쏘는 호사스럽게 차려 입은 왕정주의자들이 오뗄 마띠뇽 앞에 길게 줄을 지어 늘어 서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추방법을 제안하게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또는 이 때의 차막힘에 휘말려 든 것은 끌레멍쏘의 차가 아니라 당시 국무총리였던 샤를 드 프레씨네 (Charles de Freycinet) 의 차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전설적인 일화를 떠나, 그 다음날부터 신문들, 특히 르 피갸로 (Le Figaro) 같은 우파 신문들이 오뗄 마띠뇽에서 있었던 왕정주의자들의 모임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제 3 공화국 정부는 추방법의 통과를 급하게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했듯, 추방법으로 오를레엉 일가가 망명길에 오르게 되자, 갈리에라 부인은 갈리에라 궁과 자신의 예술품을 프랑쓰에 기여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대신 갈리에라 궁은 빠리 시에, 예술품은 제노바 시에, 오뗄 마띠뇽은 외스터라이히의 황제에게 기증하고 죽습니다.

외스터라이히 측은 오뗄 마띠뇽을 잠시 재불 대사관으로 사용했으나, 1차 대전의 발발로, 두 나라는 적군이 되며, 프랑쓰는 오뗄 마띠뇽을 적군의 재산으로 압수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수많은 교섭 끝에, 오뗄 마띠뇽은 1922년부터 프랑쓰 국가의 소유가 되며, 1935년 이후로는 국무총리의 공식 관저가 됩니다. 1958년부터는 제 5 공화국의 출범으로 정부 체제가 조금 바뀌게 되어, 국무총리 (président du Conseil) 대신 수상 (premier ministre) 이 내각의 우두머리가 되고, 오뗄 마띠뇽은 지금까지도 프랑쓰 수상의 사무실이자 그 가족들이 먹고 살고 자는 숙소로 쓰이고 있습니다.

오뗄 마띠뇽은 대부분의 다른 오뗄 빠르띠뀔리에와 마찬가지로 넓은 뒷정원을 가지고 있는데, 빠리 시내에서 대중에게 개방된 공원들을 제외하면 가장 넓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6년 수상으로 임명된 레몽 바르 (Raymond Barre) 이래 역대 모든 수상들은 이 정원에 자신이 원하는 나무를 한 그루씩 심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물론 평소에는 오뗄 마띠뇽과 그 정원은 일반인에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유산의 날들이나 하얀 밤 같은 특별한 행사 때는 개방되기도 합니다.

Hôtel Matignon
source de la photo

dimanche 25 janvier 2009

갈리에라 궁 (Palais Galliera)

도쿄 궁 바로 맞은 편에는 갈리에라 궁이 있습니다. 샤이오 궁이나 도쿄 궁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 역시 왕궁으로 쓰였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앞의 두 궁에 비하면 보다 구체제와 관련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갈리에라 궁은 갈리에라 공작부인이었던 마리아 브리뇰레-쌀레 (Maria Brignole-Sale, 1812-1888) 가 19세기 말에 빠리 서쪽에 짓게한 개인 저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의 개인 저택은 palais 보다는 hôtel particulier 라고 칭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이 건물은 palais 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사실 크기도 궁이라고 하기에는 좀 자그마합니다.

갈리에라 부인은 이 궁에 자신이 수집한 예술 작품들을 보관할 예정이었으며, 사망시, 건물과 예술품 모두를 프랑쓰에 기증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추방법 (loi d'exil) 이 공표되자, 마음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추방법이란 이전의 왕족과 황족 및 그 직계 후손들이 프랑쓰 공화국에 체류하는 것을 금지할 목적으로, 1886년에 만들어진 법입니다. 이딸리아의 귀족부인이었던 마리아 브리뇰레-쌀레는 사실상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지만, 왕정에 호의적이었고, 필립 도를레엉 (Philippe d'Orélans, 당시 프랑쓰 왕위 요구자) 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기에, 오를레엉 가문을 쫓아낸 프랑쓰에 자신의 재산을 기증할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궁 만은 결국 — 프랑쓰가 아닌 — 빠리 시에 기증하고 죽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건물은 빠리 시의 시립 의상 박물관 (Musée de la mode et du costume) 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갈리에라 궁source de la photo

jeudi 15 janvier 2009

도쿄 궁 (Palais de Tokyo)

불어 palais 는 흔히 « 궁 » 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이 항상 « 왕궁 » 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palais 는 왕궁은 물론, 그에 준할 만큼 « 크고 화려한 건축물 » 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의 하나가 여러 박물관을 품고 있는 샤이오 궁입니다. 그리고 샤이오 궁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도쿄 궁이라 불리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 궁 역시 1937년의 세계 박람회를 치루기 위해 지어졌으며, 샤이오 궁처럼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Palais de TokyoSource de la photo

현재 도쿄 궁은 현대 미술관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에는 사실 두 개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하나는 빠리 시에서 운영하는 빠리시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이고, 또하나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현대 창작의 장 (Site de création contemporaine) 입니다. 빠리시립 현대 미술관썽트르 뽕삐두 (국립) 와 함께 프랑쓰의 주요 현대 미술관의 하나이며, 현대 창작의 장은 이러한 박물관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실험적인 현대 미술, 그리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예술 (상업용 디자인, 의상, 비데오 놀이 등) 에까지 개방된 전시 공간입니다.

도쿄 궁이라는 이름은 물론 일본의 수도로부터 왔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 건물이 위치한 길의 이름이, 궁이 건축되던 1937년 당시에는 avenue de Tokio 였기 때문에 붙었습니다. 이 길의 이름은 현재는 avenue de New York 입니다. 아브뉘의 이름이 de Tokio 에서 de New York 으로 바뀐 때는 바로 1945년 ! 이것은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2차대전시 일본은 프랑쓰의 적이었고, 미국은 프랑쓰가 독일군에게서 해방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나라였지요. 그 때문에 길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건물의 이름은 어쩌다 보니 그대로 남았습니다. 다만 현재는 철자가 조금 바뀌어 de Tokyo 라고 씁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에는 일본의 수도명을 Tokio 라 쓰는 것이 유럽 여러 나라에서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dimanche 11 janvier 2009

샤이오 궁 (Palais de Chaillot)

샤이오 궁은 빠리의 서쪽, 트로꺄데로 광장 (Place du Trocadéro) 에 위치한 대형 건물로, 궁이라고 불리지만 왕이 살았던 것은 아니고, 1937년 빠리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 (exposition universelle) 를 치루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입니다. 현재는 인류 박물관 (Musée de l'Homme), 해양 박물관 (Musée de la Marine), 샤이오 국립 극장 (Théâtre national de Chaillot), 건축과 문화재 도시 (Cité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등이 들어서 있습니다. 프랑쓰 씨네마떽 (Cinémathèque française) 도 오랜 세월을 샤이오 궁에서 보냈는데, 이제는 독립된 건물로 이사를 나갔습니다.

활짝 펼친 두 개의 날개 모양으로 이루어진 샤이오 궁은 외모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나, 그 거대함이 사람을 압도합니다. 그리고 약간 언덕진 곳에 지어졌기 때문에, 샤이오 궁에서부터 쎈 강을 향해 내려다 보는 전망이 시원합니다.

에펠탑에서부터 내려다 본 샤이오 궁과 트로꺄데로 정원source de la photo

샤이오 궁을 이루는 두 날개 사이에는 훤하게 트인 넓은 떼라쓰 (terrasse) 가 판판하고 튼튼하게 잘 닦여 있어, 롤러 스케이트 (patins à roulettes) 등의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며, 관광객으로도 항상 붐빕니다. 1948년 12월 10일, 국제 연합 (ONU) 이 세계 인권 선언 (Déclaration universelle des Droits de l'Homme) 을 한 곳이 바로 샤이오 궁인 까닭인지, 인권을 건드리는 문제들이 발생하면 프랑쓰 사람들은 흔히 이 떼라쓰에 모여 시위를 하곤 합니다.

샤이오 궁과 쎈 강 사이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Jardin du Trocadéro), 가운데 길에는 넓은 분수가 펼쳐져 있어, 여름에는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기도 합니다. 떼라쓰에서부터 이 분수를 따라 내려온 후 이에나 다리 (Pont d'Iéna) 를 통해 쎈 강을 건너면, 바로 에펠탑입니다.

트로꺄데로 정원

samedi 16 août 2008

몽빠르나쓰 (Montparnasse)

몽빠르나쓰는 빠리 중심에서 약간 남쪽, 대략 6구와 14구, 15구가 만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네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그리쓰의 유명한 빠르나쏘쓰 산에서부터 온 것인데, 이 산은 특히 아뽈롱과 뮈즈들의 거처, 즉 문화와 예술의 근원지로 간주되곤 하지요.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빠리의 몽빠르나쓰 일대에 산은 커녕 도무지 낮은 경사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빠리 사람들이 몽마르트르 (Montmartre)몽 쌍뜨-쥰비에브 (Mont Sainte-Geneviève) 처럼, 산 같지도 않은 걸 산이라고 부르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

사실은 18세기까지는 현재의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 (bd. du Montparnasse) 와 불바르 라스빠이으 (bd. Raspail) 가 교차하는 지점 쯤에 작은 언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를 뚫으면서 깎여 없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도 이 언덕은 진짜 산은 아니었습니다. 1860년까지 몽빠르나쓰는 빠리의 외곽으로서, 그 지하는 수백년 동안 채석장으로 쓰였는데, 여기서 돌을 캐내고 난 후, 한 쪽 옆에다 필요 없는 흙과 자갈 등을 쌓아 놓기를 오랜 세월을 하다보니, 거의 작은 산을 이룰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 인공 흙더미에 옛날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빠르나쓰 산 (Mont Parnasse) 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옛날에 몽빠르나쓰가 있던 교차로
(멀리, 유명한 꺄페 라 로똥드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 비웃기 위해 붙인 이름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제 값을 하게 되었습니다. 몽마르트르에서 살던 화가들과 시인들이 점차 빠리 시내와 보다 가까우면서 방값도 적당한 몽빠르나쓰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많은 외국인 망명객, 또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프랑쓰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몽빠르나쓰는 매우 다양한 색깔을 지닌 활기찬 동네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유명한 꺄페, 뮤직홀, 극장 등이 밀집되면서 몽빠르나쓰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몽빠르나쓰에서 살았던 유명한 사람들 중 몇몇 : 모딜리아니, 위트리요, 쑤띤, 브락, 샤걀, 삐까쏘, 루오, 끌레, 레제, 마띠쓰, 그리쓰, 부르델, 쟈꼬메띠, 뒤셩, 쟈꼽, 아뽈리네르, 썽드라르,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밀러, 파운드, 레, 콜더, 죠이쓰, 레닌, 트로츠끼, 싸띠, 미요, 오네게르. 오릭, 뿔랑크, 아라공과 트리올레, 싸르트르와 보브와르, 드미와 바르다...

몽빠르나쓰를 찾은 사람들의 국적은 각양각색이었지만, 20년대에는 특히 금주법을 피해서 도망온 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작가, 예술가, 지식인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자유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또 19세기 말에 프랑쓰 북서부를 연결하는 기차 노선이 생긴 이후로는 많은 브르따뉴 사람들이 몽빠르나쓰로 모여들었습니다. 몽빠르나쓰 역에 내린 이들은 멀리 가지 않고 이 주변에 정착한 것이지요. 브르따뉴 사람들은 프랑쓰 나머지와는 다르게 쎌트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색다른 분위기를 갖는데 한 몫 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시작된 재개발 계획 때문에 이런 전설적인 몽빠르나쓰의 자취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옛 몽빠르나쓰 역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59층짜리 몽빠르나쓰 빌딩이 들어섰으며, 그 옆에 약간 자리를 옮겨 빠리에서 유일하게 현대식 외관을 갖춘 기차역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현재는 역과 빌딩을 중심으로 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현대식 상업 시설과 사무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La tour Montparnasse et la gare Montparnasse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화가에서부터 조금만 멀어지면 몽빠르나쓰는 상당히 쾌적한 분위기를 주는 동네입니다. 대단한 관광거리는 없지만, 죽죽 뻗은 대로에 가로수가 울창한 넓은 인도, 종종 눈에 띄는 아르 데꼬 건물들, 여전히 밀집되어 있는 크렙 식당들 (크렙은 브르따뉴의 전통 음식), 유서 깊은 꺄페들과 크고 작은 연극 무대들, 호젓한 몽빠르나쓰 묘지... 이 모든 것들이 몽빠르나쓰를 여전히 매력적인 장소로 유지해 주고 있습니다.

jeudi 7 août 2008

세탁선 (Bateau-Lavoir)

세탁선 (un bateau-lavoir) 이란, 이름 그대로 빨래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배를 말합니다. 세탁기는 커녕, 집에 수도 시설 조차 없던 때에 - 대략 20세기 초까지는 빨래를 하기 위해 일부러 빨래감을 가지고 빨래터 (lavoir) 까지 찾아다녀야 했는데, 세탁선이 바로 그런 빨래터의 일종이었던 것입니다. 빨래터는 어차피 물가에 만들어야 하기에, 아예 강에 둥실 떠 있는 빨래터를 만든 것이지요. 세탁선으로 사용된 배들은 비교적 큰 규모로서, 안을 개조하여, 물을 퍼 올리는 시설, 물을 끓이는 시설, 빨래 말리는 장소 등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간혹 강을 따라 운항을 하며 이곳 저곳 옮겨 다니는 세탁선도 있었지만, 대개 이런 배들은 운항을 하기에는 좀 낡은 배들을 개조한 것이라, 한 장소에 정착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가서 더 자세한 설명과 사진들을 보세요.)

그런데 몽마르트르 산등성이에도 유명한 세탁선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배도 아니고, 빨래터도 아닙니다. 단지 이름만 그렇게 붙었을 따름이지요. 몽마르트르의 세탁선 또는 바또-라브와르 (le Bateau-Lavoir) 는 20세기 초반에 많은 화가들이 살았던 건물입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훗날 유명인이 되었지요 : 반 동겐, 모딜리아니, 그리쓰, 삐까쏘, etc... 또 오랜 기간 상주하지는 않았더라도 로렁쌍, 블라망끄, 뒤피, 마띠쓰, 브락, 레제, 드랑, 위트리요, 브란꾸지, 루쏘 등이 이 곳을 거쳐갔습니다. 그리고 화가들 외에도 아뽈리네르, 쟈리, 꼭또, 라디게, 스타인 남매, 쌀몽, 쟈꼽 등의 작가들 역시 자주 이 곳에 모였다고 하지요. 바또-라브와르는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명실공히 현대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입체주의 또는 뀌비슴 (cubisme) 의 탄생지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서 1906년과 1907년에 걸쳐 삐까쏘가 아비뇽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Avignon) 을 그렸기 때문이지요.

애초에 피아노 공장이었던 이 건물은 1889년부터 화가들의 작업실로 변모되기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막쓰 쟈꼽이 바또-라브와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건물 모양이 세탁선들과 비슷하다하여). 지금은 아무리 상상력을 가지고 보아도 이 건물에서 전혀 배 모양이 연상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원래 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무로 지어졌던 건물은 1970년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저 밋밋한 시멘트 벽만을 밖에서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 건물은 지금도 여전히 화가들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미 1차대전무렵부터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빛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몽마르트르에 살던 많은 화가들이 몽빠르나쓰로 이주하였기 때문이지요.

세탁선 (Bateau-Lavoir)

lundi 4 août 2008

걀렛 풍차방아 (Moulin de la Galette)

몽마르트르에서 떼르트르 광장보다 훨씬 더 색다른 볼거리는 걀렛 풍차입니다. 뤼 르삑 (rue Lepic) 과 뤼 지라르동 (rue Girardon) 이 만나는 모서리에 17세기부터 자리잡고 있는 이 풍차는 빠리에 남아있는 유일한 풍차이며, 지금도 여전히 작동이 가능한 상태라고 합니다 (물론 여러차례 보수, 복원 공사를 거쳤습니다). 유일하다고 했는데, 사실 알고보면 풍차가 두 개 있습니다. 길가에 있어서 사람들 눈에 쉽게 띄며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사진에 담아가는 풍차 (Radet) 말고도, 보다 안 쪽을 잘 들여다보면 풍차가 하나 더 (Blute-fin) 있습니다. 라데와 블륏-팡, 이 두 풍차를 합해서 걀렛 방앗간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길거리의 라데 풍차와 숨어 있는 블륏-팡 풍차


작동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지금은 물론 이 풍차들을 사용하여 방아를 찧지는 않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방앗간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음식점으로 영업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사실 완전히 식당이 되기 전에도 이 방앗간은 이미 어느 정도 간이 식당이었습니다. 풍차를 이용해서 빻은 곡식으로 얇은 빵, 즉 걀렛 (galette) 을 만들어 팔았던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여기서 방앗간의 이름이 생겨났지요.

술집겸 식당이 되고 나서 이 방앗간은 많은 화가들의 단골집이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몽마르트르가 예술의 중심지였을 때 많은 화가들이 이 풍차의 외형이나 식당 안의 흥겨운 풍경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 중 몇 점 :

벙 고그, 걀렛 풍차 (Van Gogh, Moulin de la Galette)
위트리요, 뤼 똘로제와 걀렛 풍차 (Utrillo, Rue Tholozé et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 걀렛 풍차의 무도회
(Renoir, Le Bal du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의 윗그림을 재 작업한
뒤피의 걀렛 풍차 (Dufy, Moulin de la Galette)

뚤루즈-로트렉, 걀렛 풍차 (Toulouse-Lautrec, Moulin de la Galette)
삐꺄쏘, 걀렛 풍차 (Picasso, Moulin de la Galette)
반 동겐, 걀렛 풍차 (Van Dongen, Moulin de la Galette)

samedi 2 août 2008

떼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

떼르트르 광장성심 성당 바로 뒤 쪽에 있으며, 성심 성당 다음으로 몽마르트르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장소인데, 도대체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힘듭니다.

tertre 라는 말은 « 언덕, 작은 산 » 을 뜻하는 일반 명사로, Place du Tertre 는 말그대로 « 언덕 위의 광장 » 이라는 뜻이지요. 산꼭대기 위의 이 작은 광장에 옛부터 식당과 찻집 등이 들어섰고, 거기 오는 손님들에게 그림을 파는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몽마르트르의 풍경이나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 파는 무명의 화가들이 활동 중이나, 떼르트르 광장은 이제 도무지 발 디딜 틈이 없는 시장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 말로는 떼르트르 광장에서 볼거리는 바로 관광객이라고 하더군요. 좋게 말하면, 활발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이지만, 아무튼 낭만적인 정취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떼르트르 광장의 한쪽 구석 (un coin de la place du Tertre)

vendredi 1 août 2008

퓌니뀔레르 (funiculaire)

몽마르트르에 오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은 퓌니뀔레르를 타는 것입니다. 퓌니뀔레르는 케이블 카의 일종인데,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케이블 카라고 부르는 것이 공중에 매달린 줄을 타고 다니는데 비해, 퓌니뀔레르는 바닥에 고정된 철도 위를 다니는 작은 기차입니다. 단 자체에 동력이나 운전대가 있는게 아니라, 줄을 당겼다 풀었다 함으로써 기차를 레일 위에서 이동시킵니다. 대부분 언덕, 산등성이 같은 비탈에 장착돼 있기 때문에, 줄을 감으면 퓌니뀔레르가 올라가고, 줄을 천천히 풀면 자체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내려가는 원리이지요. funiculaire 라는 이름도 라띠나어 funiculus, 즉 « 밧줄 » 에서 유래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밧줄보다는 철줄을 이용하지요.

퓌니뀔레르가 처음 태어난 곳은 바로 프랑쓰의 리용 (Lyon) 이었습니다 (1862년). 시내 한 복판에 산이 있는 리용은 한때 퓌니뀔레르 노선이 다섯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두 개만 활용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사라졌거나, 지하철로 변모되었습니다. 프랑쓰에는 리용, 빠리 뿐 아니라 여러 도시와 관광지에서 퓌니뀔레르를 이용하며, 프랑쓰 외에도 유럽의 도시들에는 퓌니뀔레르가 꽤 흔합니다.

이딸리아 꼬모의 퓌니뀔레르 (funiculaire de Côme, Italie)

사실 타도시들에 비해 빠리의 퓌니뀔레르는 장난감 수준이지요. 원래는 빠리의 퓌니뀔레르도 몽마르트르 아주 바닥부터 시작하여 꼭대기까지, 여러 정거장을 갖춘 긴 노선으로 만들 예정이었답니다. 또 1990년대에는 지하철 역과 곧장 이어지게 하려는 구상도 있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비용이나 기타 여러 다른 이유들 때문에 결국은 지금과 같은 짧은 길이로 남게 되었습니다 (승차시간 약 1분). 몽마르트르 주민들 중에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 이 퓌니뀔레르는 성심 성당을 찾는 관광객들이 재미로 타보는 놀이 기구인 셈입니다.

이 1분 정도를 타기 위하여 지하철이나 버쓰 표 한 장을 내야 합니다. 물론 정기권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탈 수 있지요. 퓌니뀔레르는 빠리 교통 공사 (RATP) 에서 다루고 있고, 지하철 노선의 일부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지하철 노선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빠리 지하철 노선도의 일부 (détail du plan de métro parisien)

퓌니뀔레르를 타기 싫은 사람들은 바로 옆의 층계로 걸어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모두 222개의 계단으로 구성된 이 층계는 빠리에서 가장 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빠리에서 가장 긴 계단과 그 오른편을 오르내리는 퓌니뀔레르

mercredi 30 juillet 2008

몽마르트르 (Montmartre)

몽마르트르는 빠리 북쪽의 산 이름이자, 그 산을 둘러싸고 있는 동네의 이름입니다. 사실 산 (mont) 이라기 보다는 작은 언덕 (butte, colline) 이지만, 땅이 매우 평평한 빠리에서는 어쨌거나 가장 높은 장소입니다. 물론 에펠탑 (Tour Eiffel) 이나 몽빠르나쓰 빌딩 (Tour Montparnasse) 같이, 인간이 세운 더 높은 건물들도 있지만, 자연 지형 중에서는 몽마르트르가 빠리의 최고 지점입니다. 그 정상에서부터 내려다보면 빠리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몽마르트르 정상에서 내려다 본 빠리
(vue sur Paris)

Montmartre 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빠리의 최초의 주교였던 성 드니가 3세기 무렵 이 언덕에서 순교를 당한 후 순교자의 산 (Mons martyrum)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이미 그보다 훨씬 이전 로마 시대부터 전쟁의 신 마르쓰에게 바쳐진 산 (Mons Martis) 이었다는 설입니다. 아마도 결국은 두 이름이 혼합되어 현대 불어의 Montmartre 로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몽마르트르가 빠리의 일부가 된 것은 그다지 오랜 일이 아닙니다. 1860년까지 몽마르트르는 빠리와는 별개의 독립된 도시로서, 그 때까지는 주민의 수도 적었고, 나무와 밭이 우거진 진짜 산 다운 산이었답니다. 지금은 집과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차서, 산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마르트르는 어딘가 모르게 시골스런 분위기가 납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성심 성당떼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 정도만 보고 돌아가는데, 몽마르트르를 구석구석 걸으면서 둘러보면 매력적인 장소가 정말 많습니다. 이 때,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다녀도 나쁠 것은 없으나, 사실 좋은 안내책과 지도를 가지고 산책하는 것을 권합니다. 왜냐하면 좁은 골목길, 가파른 층계, 숨겨진 정원, 유명한 예술가들의 집, 등등은 사실 쉽게 눈에 띄지 않거든요.

몽마르트르의 여기저기

그런데 몽마르트르를 처음에는 우습게 보았다가도 이렇게 걸어다녀 보면 꽤 경사가 심한 산이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면 몽마르트로뷔쓰 (Montmartrobus) 라는 버쓰를 타는 것도 좋습니다. 이 버쓰는 빠리의 일반 시내 버쓰와 똑같은데 다만 몽마르트르 산동네 만을 운행하는 노선입니다. 보통 버쓰나 지하철 타는 표를 한 장 내고 타거나, 아니면 정기권이 있는 사람들은 수십번 마음껏 탈 수 있습니다. 이 버쓰는 몽마르트르의 유명 관광지들은 물론, 꼬불꼬불하고 좁고 가파른 길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기 때문에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dimanche 27 juillet 2008

성심 대성당 (Basilique du Sacré-Cœur)

1871년의 꼬뮌시청, 뛰일르리, 벙돔 기둥 같은 빠리의 유적 여러 품이 훼손을 입은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오늘날 프랑쓰를 대변하는 유명한 기념물 하나를 더 낳는 핑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피의 주간의 학살을 통해 꼬뮌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제 3 공화국 정부는, 오늘날 생각하면 정말 믿기 힘들지만, 꼬뮌이 저지른 죄의 용서를 하늘에 빈다는 명목으로 새로운 성당 하나를 세우기로 합니다. 띠에르가 대포를 뺏기 위해 보낸 군대와 빠리 시민들이 처음 격투를 벌인 장소, 즉 꼬뮌 혁명의 시발점이 바로 몽마르트르였기 때문에, 새 성당은 몽마르트르의 정상에 짓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계획에 반대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 국회는 매우 보수적인 왕정파 의원들 위주였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엉리 드 셩보르를 왕으로 추대해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까지 했을 정도니까, 교회와 손잡고 성당 하나 새로 짓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 (1873년 7월 23일 법령)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 할 수 있지요.

새로운 성당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Sacré-Cœur) 에 바쳐지기로 기획되었으며, 건축에 드는 비용은 프랑쓰 전국민의 성금을 통해 모아졌고, 공개 경쟁을 통해 뽈 아바디 (Paul Abadie) 라는 건축가의 도안이 채택되었습니다. 1875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14년 완성된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바디는 비정땅 양식 (style byzantin) 과 로멍 양식 (style roman) 을 혼합한 중세 풍의 건물로 설계하였습니다. 그리고 건축에 사용된 돌은 빠리 남동쪽의 샤또-렁동 (Château-Landon) 이라는 마을에서부터 가져왔는데, 이 돌은 물에 젖으면 더욱더 흰색이 되는 특별한 돌이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성심 성당은 비를 맞으면 맞을 수록 더욱 더 하얗게 빛난다고 하지요. 하지만 빠리 어디서나 눈에 띄는 이 흰 색의 둥근 지붕들 때문에 성심 성당은 흔히 거대한 므랑그 (meringue) 라고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므랑그는 달걀 흰자를 부풀려서 구운 과자).

1914년 완성되었지만 1차 대전의 발발로 이 성당은 결국 1919년에야 공식적으로 축성을 받았고, 이 때 교황으로부터 바질릭 (basilique) 의 호칭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공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던 1885년부터 지금 현재까지 이 성당은 단 한 순간도 문을 닫은 적이 없으며, 밤낮으로 성체 경배가 이어지고 있답니다. 매우 놀랍지만 전 세계에서 순례 온 신자들이 릴레이 식으로 이어가며 하루 24시간씩 120년이 넘게 꼬뮌 혁명의 죄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측에서는 이제 꼬뮌 얘기는 피하는 추세이며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밤이나 낮이나 성심 성당은 기도하는 사람들, 관광하는 사람들로 항상 붐빕니다.

몽마르트르 산 위의 성심 대성당
(Basilique du Sacré-Cœur de Montmartre)

samedi 26 juillet 2008

벙돔 기둥 (Colonne Vendôme)

벙돔 기둥은 빠리의 벙돔 광장 (Place Vendôme)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높다란 (약 45미터) 청동탑입니다. 이 탑 역시 빠리 시청사처럼 1871년의 꼬뮌 때에 무너졌다가 꼬뮌이 끝나고 난 후 복원된 기념물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약간 맥락이 다릅니다. 뛰일르리나 시청, 대법원 같은 건물들은 꼬뮌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아무렇게나 파손된 것이지만, 벙돔 기둥은 꼬뮌 정부가 아직 활동중일 때, 법적인 합의를 거쳐 제대로 철거를 시켰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꼬뮌이 보기에 이 탑은 권위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지요.

아닌게 아니라, 이 탑은 나뽈레옹 1세가 오스떼를리츠 전투 (1805년) 에서 적군에게서 뺏은 대포를 녹여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기 위하여 세운 탑으로, 로마에 있는 트라잔 기둥 (Colonne Trajane) 을 모방하고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쎄자르 (César ou Caesar) 의 모습을 한 나뽈레옹의 동상이 얹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실 이 기둥은 이미 꼬뮌 전에도 여러번 구설수에 올랐었는데, 이 기둥을 아예 없애버리자는 제안을 처음으로 낸 사람은 다름아닌 화가 귀스따브 꾸르베 (Gustave Courbet) 였습니다. 꾸르베는 세상의 원천 (L'Origine du monde) 같은 현실주의적 그림으로도 유명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심취하여 정치 활동도 했으며, 특히 1871년의 꼬뮌 정부의 한 의원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이미 제 3 공화국 정부에게도 이러한 제안을 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꼬뮌이 출범하고 나서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871년 5월 16일, 벙돔 기둥은 철거되었는데, 그로부터 며칠 후 - 정확히는 5월 22일부터 피의 주간, 즉 꼬뮌의 몰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특히 꼬뮌에 극도로 적대적이었던 제 3 공화국 정부는 꼬뮌 해체 후 벙돔 기둥을 같은 자리에 새로 세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게 보게 되는 것은 1874년에 복구된 탑.

한편 벙돔 광장은 원형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팔각형의 모습으로 생긴 광장으로, 호화로운 건물들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지금 이 건물들 대부분에는 세계적인 보석상들 (Cartier...) 이나, 최고급 호텔 (Ritz...), 아랍 왕자들의 별장, 그리고 프랑쓰 법무부 (Ministère de la justice) 가 들어서 있습니다.

vendredi 25 juillet 2008

빠리 시청 (Hôtel de ville de Paris)

뛰일르리 궁과 비슷한 운명을 겪은 또다른 건물로 빠리 시청이 있습니다. 빠리 시청의 위치는 1357년 이후로 변함없이 그레브 광장이기는 하나,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건물은 사실 19세기 말에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1533년부터 이딸리아 건축가 보꺄도르 (Boccador) 의 설계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 수세기 동안 빠리 시청으로 쓰였으나, 1871년 피의 주간 동안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뛰일르리 궁과는 달리 빠리 시청 건물은 이듬해부터 곧 복원 공사에 들어가서, 1882년 새로이 완성되었습니다. 원래 시청과 똑 닮게 지었기 때문에, 19세기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르네썽쓰 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건물이 사라지면, 왜 시대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꼭 옛날 식으로 복원하고들 싶어하는지, 개인적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가기는 하지만, 빠리 시청은 빠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임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빠리 시청

jeudi 24 juillet 2008

뛰일르리 (Tuileries)

1871년의 꼬뮌의 진압 동안 빠리시는 많은 인명을 잃었을 뿐 아니라, 여러 유적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흔히 말하기로는, « 악독한 » 꼬뮈나르들이 스스로 빠리의 명소에 불을 지르고 폭파시켰다고 하는데, 요즘은 조금 다른 견해들도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빠리 시민군이 뛰일르리 궁이나 시청, 대법원 같은 기념비적 장소들을 방어 요지로 삼은 것은, 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런 장소들이 꼬뮌 드 빠리의 주요 행정기관이었으므로,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꼬뮈나르들에게는 당연한 의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는, 정부군이 이런 유적지들을 파괴시키면서까지 밀고 들어오지는 감히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으리라는 것이죠. 하지만 정부군은 문화 유산의 파괴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결국 시민군도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열세에 몰리다보니, 시간을 벌기 위해, 의도적인 화재를 일으키는 일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다보니 오늘날 과연 어느쪽 군대가 역사적 장소의 파괴에 더 큰, 또는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영원히 사라진 대표적인 건물이 바로 뛰일르리 궁 (Palais des Tuileries) 입니다. 뛰일르리는 옛날에 기와 (tuile) 를 굽던 장소에 지어진 궁으로, 현재의 루브르 궁과 뛰일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이 만나는 경계에, 남북으로 길게 세워졌던 건물입니다. 이 궁은 1564년, 프랑쓰의 왕비이자 섭정이었던 꺄트린 드 메디씨쓰 (Catherine de Médicis) 의 명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한 후로, 종종 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지만, 왕실이 베르싸이으로 이주한 후는 거의 버림받은 상태였습니다. 왕실이 다시 뛰일르리로 돌아온 것은 1789년 10월 6일로, 이 날 빠리의 여자들은 손에 부엌칼과 곡괭이를 들고 베르싸이으까지 찾아가서, 억지로 왕과 왕비를 빠리로 끌고 왔습니다. 이후로 뛰일르리는 체제가 무엇이든 간에 프랑쓰 정부의 중심이 됩니다.

우선 루이 16세는 비록 감시받는 상태로나마 1792년까지 뛰일르리에서 입헌왕정을 유지했으며, 그가 사형된 후로는 혁명 정부가 뛰일르리에 자리잡습니다. 나뽈레옹 역시 집정관 (consul) 시절이나 황제 (empereur) 시절이나, 뛰일르리 궁을 본거지로 삼았고, 왕정 복귀가 된 후로는 루이 16세의 두 동생,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차례차례 뛰일르리 궁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들어선 7월 왕정 (Monarchie de juillet) 의 주인공 루이-필립 역시 뛰일르리에 왕실을 차렸으며, 그 역시 밀려났을 때는 프랑쓰 최초의 대통령 (président) 으로 뽑힌 루이-나뽈레옹 보나빠르뜨가 뛰일르리를 대통령 관저로 삼았습니다. 곧이어 그가 나뽈레옹 3세로 등극하면서 뛰일르리는 나뽈레옹 1세 때처럼, 황제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제 2 제정이 무너진 후, 뛰일르리궁은 꼬뮌의 차지가 되었으며, 결국 1871년 피의 주간 때 이 궁전은 꼬뮈나르들이 저지른 화재에 의해 장장 3일간을 탔다고 합니다.

하지만 뛰일르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이 때가 아닙니다. 이 때의 화재는 나무로 장식된 뛰일르리의 내부만 태웠지, 돌로 만들어진 골격과 외부는, 그을림을 제외하고는, 거의 피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꼬뮌이 몰살된 후 제 3 공화국 정부는 뛰일르리를 재건하려는 계획도 여러번 가졌습니다. 하지만 여러번의 업치락 뒷차락 끝에 결국 1883년에 아직도 버티고 서 있던 뛰일르리 본궁을 깨끗이 철수시켰습니다.

하지만 뛰일르리를 구성하던 몇몇 부속 건물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선 뛰일르리 궁과 루브르 궁을 연결하던 두 건물 (플로르 관과 마르썽 관) 은 그대로 있으며, 뛰일르리 궁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꺄루젤 개선문 역시 굳건히 서 있습니다. 또 뛰일르리 정원에는 나뽈레옹 3세가 사용하던 손바닥 놀이장 (Jeu de paume) 이, 그 맞은편에는 똑같이 생긴 온실 (Orangerie) 이, 지금은 모두 박물관으로 변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뛰일르리 궁이 사라진 바람에, 오늘날의 관광객들은 루브르 마당부터 꽁꼬르드 광장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드넓은 정원을 산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정원을 산책하고 나면 꼭 신발과 바지 밑자락이 뽀얗고 고운 흙먼지로 뒤덥히는데, 그것을 보면서, 이 정원의 흙으로 원래는 기와를 구웠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꺄루젤 개선문 (Arc de triomphe du Carrousel)
왼쪽부터 꺄루젤 개선문, 마르썽 관, 루브르 궁
(Arc de triomphe du Carousel, Pavillon de Marsan, Louvre)

오른쪽부터 꺄루젤 개선문, 플로르 관, 루브르 궁
(Arc de triomphe du Carrousel, Pavillon de Flore, Louvre)

뛰일르리 정원의 손바닥 경기장
(Jeu de paume du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의 온실 (Orangerie du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
멀리에 오벨리스크와 에뜨왈 개선문이 보입니다.

lundi 21 juillet 2008

두번째 꼬뮌 드 빠리 (Commune de 1871)

첫번째 꼬뮌 드 빠리로부터 팔십여년 뒤에 빠리시는 봉기를 통하여 또한번 시립 자치 정부를 구성합니다. 두번째, 또는 1871년의 꼬뮌 드 빠리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는 빠리시 뿐 아니라 지방의 주요 도시들 (리용, 마르쎄이으, 그르노블, 뚤루즈...) 에도 꼬뮌이 성립되었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말할 때는 종종 그냥 꼬뮌이라고도 합니다.

이 때도 역시,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킨 이유는, 한마디로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당시 프랑쓰는 독불전쟁을 막 치루고 난 참이었는데, 준비없이 무턱대고 일으킨 이 전쟁에서 프랑쓰는 엄청난 손실을 보았습니다. 또한 당시 황제였던 나뽈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제 2 제정이 무너지는 바람에, 프랑쓰는 국내, 국외, 경제, 사회, 군사... 모든 면에서 큰 혼란을 겪습니다. 1870년 9월, 제 3 공화국이 곧 선포되었으나, 이 모든 혼란을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오히려 빠리는, 수도까지 쳐들어온 독일군에게 거의 5개월간 포위 공격을 받았고, 아돌프 띠에르 (Adolphe Thiers) 가 지휘하는 새 정부는 결국 1871년 1월, 매우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 알자쓰와 로렌 지방의 일부가 독일 땅이 됩니다).

모든 경제 활동이 마비된 채,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다섯개월, 특히 추운 겨울을 굶주리면서 버틴 빠리 시민들은 이 항복을, 그리고 무능력한 정부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띠에르는 지나치게 긴장이 감도는 빠리를 벗어나, 정부와 국회를 베르싸이으로 옮겼고, 그에 따라 여러 고급 공무원들 및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 대부분이 빠리를 떠났습니다. 결국 빠리에는 가난한 서민 계층만 남은 셈이 되었지요. 그런데 띠에르는 3월 18일, 독일군의 포위 공격 때 쓰던 대포들을 수거하기 위하여 군대를 빠리에 보냈습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상 빠리시가 무기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우려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이것이 발단이 되어 빠리의 가난한 노동자 계층은 군대와 무력 다툼을 벌인 끝에, 3월 28일, 빠리시 자치 정부, 즉 꼬뮌 드 빠리를 선포했습니다.

이 1871년의 꼬뮌은 1789년의 꼬뮌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이번 혁명은 더이상 세습 왕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화국 정권에 대한 거부였으며, 무엇보다도 노동자 계층이 중산 계층에 대항한 혁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맑쓰도 1871년의 꼬뮌을 역사상 최초의 프롤레따리아 혁명으로 평가했고, 레닌도 공산주의가 모델로 삼아야 할 혁명이라고 찬양했다지요. 실제로 꼬뮌 정부는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 최대 노동 시간과 최저 임금 측정, 야근 금지, 남녀 월급 동일, 학교의 무료화, 기업의 국영화, 정교 분리, 등등... 이외에도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빚에 억눌린 사람들을 돕기 위한 다양한 기관과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채 두 달이 못되어 모두 무효로 돌아갔습니다. 지금도 그렇듯이 좌파 내에서도 의견과 사상이 분분하였고, 여러가지 경험 미숙에다가, 베르싸이으에서 보낸 프랑쓰 정규 부대에 의해 빠리시는 또다시 포위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독일군의 포위가 끝난지 불과 2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계속된 전투 끝에 정부군은 5월 21일, 마침내 빠리 시내를 뚫고 들어오는데 성공하였으며, 22일부터 28일까지 이만 명 이상의 시민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이 7일간을 가리켜 피의 주간 (Semaine sanglante)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 살아남은 꼬뮈나르들도 결국은 단두대형을 선고받거나, 누벨-꺌레도니 (Nouvelle-Calédonie) 로 강제 추방, 또는 강제 노동 같은 매우 가혹한 징벌을 받았습니다. 지방의 꼬뮌들도 모두 엄하게 진압되어 대부분 빠리시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런 비극들을 겪는 와중 빠리의 서민들이 불렀던 노래가 랑떼르나씨오날버찌의 계절이었습니다.

dimanche 20 juillet 2008

첫번째 꼬뮌 드 빠리 (Commune de Paris)

버찌철랑떼르나씨오날은 모두 1871년의 꼬뮌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라띠나어 commune [꼼문네] 에서부터 비롯된 불어 commune [꼬뮌] 이란 단어의 뜻은 원래는 그저 « 공동체 » 로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데, 중세에는 흔히 왕이나 황제, 기타 다른 봉건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고, 시민들끼리 공동 (commun) 으로 꾸려나가는, 비교적, 또는 완전히 독립된 도시들이 꼬뮌이란 이름을 취했습니다. 현대 불어에서도 commune 은 매우 자주 쓰이는 용어로서, 프랑쓰 행정구역의 가장 작은 단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빠리는 하나의 꼬뮌이며, 리용도 하나의 꼬뮌이지요. 즉, 우리나라의 시 정도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Commune de Paris 라고 하면 « 빠리시 » 란 뜻에 불과하지만, 프랑쓰 역사에는 조금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꼬뮌 드 빠리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번째 꼬뮌 드 빠리는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이 바스띠으 (Bastille) 를 점령함과 동시에 공포되었습니다. 이것은 중세의 자유 꼬뮌들처럼, 빠리시가 더 이상 왕권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일종의 독립 의사의 표명이었지요. 이 시립 자치 정부 체제는 1795년까지 계속되었고, 그동안 혁명의 매우 중요한 사건들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1792년 8월 10일의 폭동을 조직하여 왕권을 완전히 몰락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면서 꼬뮌 드 빠리는 매우 강력한 조직이 되었습니다. 1792년 9월 학살 (Massacre du septembre) 을 일으킨 장본인도 꼬뮌이었고, 비상 범죄 재판소 (Tribunal criminel extraordinaire) 를 설립한 것도 꼬뮌이었습니다. 1793년, 혁명 재판소 (Tribunal révolutionnaire) 로 발전한 이 법정은 공화국에 혹시라도 해를 끼칠 우려가 있을지 모른다고 조금이라도 염려되는 사람들을 후다닥 재판하기 위한 기관으로서, 여기서 내려진 결정은 24시간 내로 시행되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재심은 요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꼬뮌은 이 재판소를 통해 지롱당 (간단히 말하여 온건파) 의원들을 모두 제거하였으며, 점점 더 극단적이고 과격화되어, 1793년 9월 5일, 꽁벙씨옹 나씨오날 (간단히 말하여 국회) 로 하여금 프랑쓰 전국에 공포 정치 (Terreur) 를 합법화시키는 법령을 발표하게끔 하였습니다. 공포 정치의 첫 희생자 중 한 명이 바로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녀 외에도 약 17.000 명이 약식 재판 뒤에 처형을 당하였고, 25.000 명은 단순히 이름만 확인한 뒤 사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꼬뮌 드 빠리는 엄격히 말하면 빠리시의 업무 만을 처리하여야 했겠지만, 이렇게 실제로는 혁명 정부와 함께 프랑쓰 전국을 좌지우지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1793년 말부터 영향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여, 1794년 7월 이후로는 모든 힘을 잃었고, 1795년 8월 제정된 새로운 헌법 (Constitution de l'an III) 이, 빠리시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시를 열 두 개로 조각냄으로써 꼬뮌 드 빠리는 해체됩니다. 이 열 두 개의 조각에 1860년, 여덟 개의 교외 도시들이 합쳐지면서 오늘날 빠리를 구성하는 스무 개의 구 (arrondissement) 가 생겨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