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쓰 왕의 운명이 쌍-드니의 대성당 (basilique de Saint-Denis)에 안치됨으로써 맺어진다면, 그 시작은 랑쓰의 대성당 (cathédrale de Reims) 에서 출발합니다. 랑쓰는 빠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북동쪽으로 약 130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인데, 프랑쓰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랑쓰까지 가서, 랑쓰 주교의 축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을 불어로 sacre 라 하고 우리말로는 « 대관식, 즉위식 » 으로 번역하는 일이 잦지만, sacre 라는 말의 진짜 뜻은 « 성스럽게 함, 축성 » 으로서, 관을 쓰는 의식과 꼭 같지는 않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대관식은 축성식을 구성하는 여러 과정 중 하나라 볼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부왕이 죽는 그 순간 아들이 왕이 되지만, 공식적으로는 반드시 랑쓰에 가서 축성 예식을 거쳐야만 했으며, 이 예식을 미루게 되면 왕권에 이의가 제기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샤를 7세). 그리고 이것은 왕 뿐 아니라 왕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쓰 왕과 합법적인 결혼을 하고도 공식 축성을 받지 못했기에 왕비가 되지 못하고, 왕이라는 직업을 가진 한 남자의 부인으로만 남았던 여자들이 있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망뜨농 부인).
끌로비쓰의 영세
이러한 절차를 거치는 것은 왕권이 신으로부터 부여되었음을 상징하려는 의도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도대체 왜 굳이 랑쓰여야만 했을까요 ? 그 이유는 프랑쓰의 최초의 왕으로 여겨지는 끌로비쓰가 영세를 받은 곳이 바로 랑쓰였기 때문입니다. 끌로비쓰는 엄격히 말하면 프렁 쌀리앙 족의 왕으로서, 아직 존재하지 않은 나라였던 프랑쓰의 왕이라 보는 것은 여러가지 해석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는 사실상 처음으로 훗날 프랑쓰라는 나라가 될 영토의 대부분을 지배했습니다. 프랑쓰의 왕들의 대부분이 Louis 라는 이름을 택한 것도 (루이 1세부터 루이 18세) 끌로비쓰의 후계자임을 자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Louis 는 Clovis 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언뜻 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16세기 이전까지는 u 와 v 의 구분이 없었음을 알고 나면, Clouis 에서 Louis 라는 이름이 나올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프랑쓰에서 오래동안 통용되었던 (그리고 어찌 보면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쌀릭법 역시 끌로비쓰가 편찬토록 한 법전이며, 빠리가 프랑쓰의 수도로 정해진 것도 그의 치하 동안이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역사가들이 넓은 의미에서 끌로비쓰를 흔히 프랑쓰의 첫 왕으로 언급합니다. 프랑쓰의 왕들이 랑쓰에서 축성을 받고 싶어 했던 것 역시 끌로비쓰의 전통을 이으려는 노력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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