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redi 30 juillet 2008

몽마르트르 (Montmartre)

몽마르트르는 빠리 북쪽의 산 이름이자, 그 산을 둘러싸고 있는 동네의 이름입니다. 사실 산 (mont) 이라기 보다는 작은 언덕 (butte, colline) 이지만, 땅이 매우 평평한 빠리에서는 어쨌거나 가장 높은 장소입니다. 물론 에펠탑 (Tour Eiffel) 이나 몽빠르나쓰 빌딩 (Tour Montparnasse) 같이, 인간이 세운 더 높은 건물들도 있지만, 자연 지형 중에서는 몽마르트르가 빠리의 최고 지점입니다. 그 정상에서부터 내려다보면 빠리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몽마르트르 정상에서 내려다 본 빠리
(vue sur Paris)

Montmartre 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빠리의 최초의 주교였던 성 드니가 3세기 무렵 이 언덕에서 순교를 당한 후 순교자의 산 (Mons martyrum)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이미 그보다 훨씬 이전 로마 시대부터 전쟁의 신 마르쓰에게 바쳐진 산 (Mons Martis) 이었다는 설입니다. 아마도 결국은 두 이름이 혼합되어 현대 불어의 Montmartre 로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몽마르트르가 빠리의 일부가 된 것은 그다지 오랜 일이 아닙니다. 1860년까지 몽마르트르는 빠리와는 별개의 독립된 도시로서, 그 때까지는 주민의 수도 적었고, 나무와 밭이 우거진 진짜 산 다운 산이었답니다. 지금은 집과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차서, 산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마르트르는 어딘가 모르게 시골스런 분위기가 납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성심 성당떼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 정도만 보고 돌아가는데, 몽마르트르를 구석구석 걸으면서 둘러보면 매력적인 장소가 정말 많습니다. 이 때,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다녀도 나쁠 것은 없으나, 사실 좋은 안내책과 지도를 가지고 산책하는 것을 권합니다. 왜냐하면 좁은 골목길, 가파른 층계, 숨겨진 정원, 유명한 예술가들의 집, 등등은 사실 쉽게 눈에 띄지 않거든요.

몽마르트르의 여기저기

그런데 몽마르트르를 처음에는 우습게 보았다가도 이렇게 걸어다녀 보면 꽤 경사가 심한 산이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면 몽마르트로뷔쓰 (Montmartrobus) 라는 버쓰를 타는 것도 좋습니다. 이 버쓰는 빠리의 일반 시내 버쓰와 똑같은데 다만 몽마르트르 산동네 만을 운행하는 노선입니다. 보통 버쓰나 지하철 타는 표를 한 장 내고 타거나, 아니면 정기권이 있는 사람들은 수십번 마음껏 탈 수 있습니다. 이 버쓰는 몽마르트르의 유명 관광지들은 물론, 꼬불꼬불하고 좁고 가파른 길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기 때문에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dimanche 27 juillet 2008

성심 대성당 (Basilique du Sacré-Cœur)

1871년의 꼬뮌시청, 뛰일르리, 벙돔 기둥 같은 빠리의 유적 여러 품이 훼손을 입은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오늘날 프랑쓰를 대변하는 유명한 기념물 하나를 더 낳는 핑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피의 주간의 학살을 통해 꼬뮌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제 3 공화국 정부는, 오늘날 생각하면 정말 믿기 힘들지만, 꼬뮌이 저지른 죄의 용서를 하늘에 빈다는 명목으로 새로운 성당 하나를 세우기로 합니다. 띠에르가 대포를 뺏기 위해 보낸 군대와 빠리 시민들이 처음 격투를 벌인 장소, 즉 꼬뮌 혁명의 시발점이 바로 몽마르트르였기 때문에, 새 성당은 몽마르트르의 정상에 짓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계획에 반대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 국회는 매우 보수적인 왕정파 의원들 위주였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엉리 드 셩보르를 왕으로 추대해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까지 했을 정도니까, 교회와 손잡고 성당 하나 새로 짓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 (1873년 7월 23일 법령)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 할 수 있지요.

새로운 성당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Sacré-Cœur) 에 바쳐지기로 기획되었으며, 건축에 드는 비용은 프랑쓰 전국민의 성금을 통해 모아졌고, 공개 경쟁을 통해 뽈 아바디 (Paul Abadie) 라는 건축가의 도안이 채택되었습니다. 1875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14년 완성된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바디는 비정땅 양식 (style byzantin) 과 로멍 양식 (style roman) 을 혼합한 중세 풍의 건물로 설계하였습니다. 그리고 건축에 사용된 돌은 빠리 남동쪽의 샤또-렁동 (Château-Landon) 이라는 마을에서부터 가져왔는데, 이 돌은 물에 젖으면 더욱더 흰색이 되는 특별한 돌이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성심 성당은 비를 맞으면 맞을 수록 더욱 더 하얗게 빛난다고 하지요. 하지만 빠리 어디서나 눈에 띄는 이 흰 색의 둥근 지붕들 때문에 성심 성당은 흔히 거대한 므랑그 (meringue) 라고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므랑그는 달걀 흰자를 부풀려서 구운 과자).

1914년 완성되었지만 1차 대전의 발발로 이 성당은 결국 1919년에야 공식적으로 축성을 받았고, 이 때 교황으로부터 바질릭 (basilique) 의 호칭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공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던 1885년부터 지금 현재까지 이 성당은 단 한 순간도 문을 닫은 적이 없으며, 밤낮으로 성체 경배가 이어지고 있답니다. 매우 놀랍지만 전 세계에서 순례 온 신자들이 릴레이 식으로 이어가며 하루 24시간씩 120년이 넘게 꼬뮌 혁명의 죄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측에서는 이제 꼬뮌 얘기는 피하는 추세이며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밤이나 낮이나 성심 성당은 기도하는 사람들, 관광하는 사람들로 항상 붐빕니다.

몽마르트르 산 위의 성심 대성당
(Basilique du Sacré-Cœur de Montmartre)

samedi 26 juillet 2008

벙돔 기둥 (Colonne Vendôme)

벙돔 기둥은 빠리의 벙돔 광장 (Place Vendôme)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높다란 (약 45미터) 청동탑입니다. 이 탑 역시 빠리 시청사처럼 1871년의 꼬뮌 때에 무너졌다가 꼬뮌이 끝나고 난 후 복원된 기념물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약간 맥락이 다릅니다. 뛰일르리나 시청, 대법원 같은 건물들은 꼬뮌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아무렇게나 파손된 것이지만, 벙돔 기둥은 꼬뮌 정부가 아직 활동중일 때, 법적인 합의를 거쳐 제대로 철거를 시켰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꼬뮌이 보기에 이 탑은 권위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지요.

아닌게 아니라, 이 탑은 나뽈레옹 1세가 오스떼를리츠 전투 (1805년) 에서 적군에게서 뺏은 대포를 녹여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기 위하여 세운 탑으로, 로마에 있는 트라잔 기둥 (Colonne Trajane) 을 모방하고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쎄자르 (César ou Caesar) 의 모습을 한 나뽈레옹의 동상이 얹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실 이 기둥은 이미 꼬뮌 전에도 여러번 구설수에 올랐었는데, 이 기둥을 아예 없애버리자는 제안을 처음으로 낸 사람은 다름아닌 화가 귀스따브 꾸르베 (Gustave Courbet) 였습니다. 꾸르베는 세상의 원천 (L'Origine du monde) 같은 현실주의적 그림으로도 유명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심취하여 정치 활동도 했으며, 특히 1871년의 꼬뮌 정부의 한 의원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이미 제 3 공화국 정부에게도 이러한 제안을 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꼬뮌이 출범하고 나서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871년 5월 16일, 벙돔 기둥은 철거되었는데, 그로부터 며칠 후 - 정확히는 5월 22일부터 피의 주간, 즉 꼬뮌의 몰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특히 꼬뮌에 극도로 적대적이었던 제 3 공화국 정부는 꼬뮌 해체 후 벙돔 기둥을 같은 자리에 새로 세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게 보게 되는 것은 1874년에 복구된 탑.

한편 벙돔 광장은 원형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팔각형의 모습으로 생긴 광장으로, 호화로운 건물들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지금 이 건물들 대부분에는 세계적인 보석상들 (Cartier...) 이나, 최고급 호텔 (Ritz...), 아랍 왕자들의 별장, 그리고 프랑쓰 법무부 (Ministère de la justice) 가 들어서 있습니다.

vendredi 25 juillet 2008

빠리 시청 (Hôtel de ville de Paris)

뛰일르리 궁과 비슷한 운명을 겪은 또다른 건물로 빠리 시청이 있습니다. 빠리 시청의 위치는 1357년 이후로 변함없이 그레브 광장이기는 하나,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건물은 사실 19세기 말에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1533년부터 이딸리아 건축가 보꺄도르 (Boccador) 의 설계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 수세기 동안 빠리 시청으로 쓰였으나, 1871년 피의 주간 동안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뛰일르리 궁과는 달리 빠리 시청 건물은 이듬해부터 곧 복원 공사에 들어가서, 1882년 새로이 완성되었습니다. 원래 시청과 똑 닮게 지었기 때문에, 19세기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르네썽쓰 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건물이 사라지면, 왜 시대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꼭 옛날 식으로 복원하고들 싶어하는지, 개인적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가기는 하지만, 빠리 시청은 빠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임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빠리 시청

jeudi 24 juillet 2008

뛰일르리 (Tuileries)

1871년의 꼬뮌의 진압 동안 빠리시는 많은 인명을 잃었을 뿐 아니라, 여러 유적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흔히 말하기로는, « 악독한 » 꼬뮈나르들이 스스로 빠리의 명소에 불을 지르고 폭파시켰다고 하는데, 요즘은 조금 다른 견해들도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빠리 시민군이 뛰일르리 궁이나 시청, 대법원 같은 기념비적 장소들을 방어 요지로 삼은 것은, 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런 장소들이 꼬뮌 드 빠리의 주요 행정기관이었으므로,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꼬뮈나르들에게는 당연한 의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는, 정부군이 이런 유적지들을 파괴시키면서까지 밀고 들어오지는 감히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으리라는 것이죠. 하지만 정부군은 문화 유산의 파괴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결국 시민군도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열세에 몰리다보니, 시간을 벌기 위해, 의도적인 화재를 일으키는 일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다보니 오늘날 과연 어느쪽 군대가 역사적 장소의 파괴에 더 큰, 또는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영원히 사라진 대표적인 건물이 바로 뛰일르리 궁 (Palais des Tuileries) 입니다. 뛰일르리는 옛날에 기와 (tuile) 를 굽던 장소에 지어진 궁으로, 현재의 루브르 궁과 뛰일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이 만나는 경계에, 남북으로 길게 세워졌던 건물입니다. 이 궁은 1564년, 프랑쓰의 왕비이자 섭정이었던 꺄트린 드 메디씨쓰 (Catherine de Médicis) 의 명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한 후로, 종종 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지만, 왕실이 베르싸이으로 이주한 후는 거의 버림받은 상태였습니다. 왕실이 다시 뛰일르리로 돌아온 것은 1789년 10월 6일로, 이 날 빠리의 여자들은 손에 부엌칼과 곡괭이를 들고 베르싸이으까지 찾아가서, 억지로 왕과 왕비를 빠리로 끌고 왔습니다. 이후로 뛰일르리는 체제가 무엇이든 간에 프랑쓰 정부의 중심이 됩니다.

우선 루이 16세는 비록 감시받는 상태로나마 1792년까지 뛰일르리에서 입헌왕정을 유지했으며, 그가 사형된 후로는 혁명 정부가 뛰일르리에 자리잡습니다. 나뽈레옹 역시 집정관 (consul) 시절이나 황제 (empereur) 시절이나, 뛰일르리 궁을 본거지로 삼았고, 왕정 복귀가 된 후로는 루이 16세의 두 동생,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차례차례 뛰일르리 궁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들어선 7월 왕정 (Monarchie de juillet) 의 주인공 루이-필립 역시 뛰일르리에 왕실을 차렸으며, 그 역시 밀려났을 때는 프랑쓰 최초의 대통령 (président) 으로 뽑힌 루이-나뽈레옹 보나빠르뜨가 뛰일르리를 대통령 관저로 삼았습니다. 곧이어 그가 나뽈레옹 3세로 등극하면서 뛰일르리는 나뽈레옹 1세 때처럼, 황제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제 2 제정이 무너진 후, 뛰일르리궁은 꼬뮌의 차지가 되었으며, 결국 1871년 피의 주간 때 이 궁전은 꼬뮈나르들이 저지른 화재에 의해 장장 3일간을 탔다고 합니다.

하지만 뛰일르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이 때가 아닙니다. 이 때의 화재는 나무로 장식된 뛰일르리의 내부만 태웠지, 돌로 만들어진 골격과 외부는, 그을림을 제외하고는, 거의 피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꼬뮌이 몰살된 후 제 3 공화국 정부는 뛰일르리를 재건하려는 계획도 여러번 가졌습니다. 하지만 여러번의 업치락 뒷차락 끝에 결국 1883년에 아직도 버티고 서 있던 뛰일르리 본궁을 깨끗이 철수시켰습니다.

하지만 뛰일르리를 구성하던 몇몇 부속 건물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선 뛰일르리 궁과 루브르 궁을 연결하던 두 건물 (플로르 관과 마르썽 관) 은 그대로 있으며, 뛰일르리 궁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꺄루젤 개선문 역시 굳건히 서 있습니다. 또 뛰일르리 정원에는 나뽈레옹 3세가 사용하던 손바닥 놀이장 (Jeu de paume) 이, 그 맞은편에는 똑같이 생긴 온실 (Orangerie) 이, 지금은 모두 박물관으로 변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뛰일르리 궁이 사라진 바람에, 오늘날의 관광객들은 루브르 마당부터 꽁꼬르드 광장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드넓은 정원을 산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정원을 산책하고 나면 꼭 신발과 바지 밑자락이 뽀얗고 고운 흙먼지로 뒤덥히는데, 그것을 보면서, 이 정원의 흙으로 원래는 기와를 구웠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꺄루젤 개선문 (Arc de triomphe du Carrousel)
왼쪽부터 꺄루젤 개선문, 마르썽 관, 루브르 궁
(Arc de triomphe du Carousel, Pavillon de Marsan, Louvre)

오른쪽부터 꺄루젤 개선문, 플로르 관, 루브르 궁
(Arc de triomphe du Carrousel, Pavillon de Flore, Louvre)

뛰일르리 정원의 손바닥 경기장
(Jeu de paume du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의 온실 (Orangerie du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
멀리에 오벨리스크와 에뜨왈 개선문이 보입니다.

lundi 21 juillet 2008

두번째 꼬뮌 드 빠리 (Commune de 1871)

첫번째 꼬뮌 드 빠리로부터 팔십여년 뒤에 빠리시는 봉기를 통하여 또한번 시립 자치 정부를 구성합니다. 두번째, 또는 1871년의 꼬뮌 드 빠리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는 빠리시 뿐 아니라 지방의 주요 도시들 (리용, 마르쎄이으, 그르노블, 뚤루즈...) 에도 꼬뮌이 성립되었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말할 때는 종종 그냥 꼬뮌이라고도 합니다.

이 때도 역시,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킨 이유는, 한마디로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당시 프랑쓰는 독불전쟁을 막 치루고 난 참이었는데, 준비없이 무턱대고 일으킨 이 전쟁에서 프랑쓰는 엄청난 손실을 보았습니다. 또한 당시 황제였던 나뽈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제 2 제정이 무너지는 바람에, 프랑쓰는 국내, 국외, 경제, 사회, 군사... 모든 면에서 큰 혼란을 겪습니다. 1870년 9월, 제 3 공화국이 곧 선포되었으나, 이 모든 혼란을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오히려 빠리는, 수도까지 쳐들어온 독일군에게 거의 5개월간 포위 공격을 받았고, 아돌프 띠에르 (Adolphe Thiers) 가 지휘하는 새 정부는 결국 1871년 1월, 매우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 알자쓰와 로렌 지방의 일부가 독일 땅이 됩니다).

모든 경제 활동이 마비된 채,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다섯개월, 특히 추운 겨울을 굶주리면서 버틴 빠리 시민들은 이 항복을, 그리고 무능력한 정부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띠에르는 지나치게 긴장이 감도는 빠리를 벗어나, 정부와 국회를 베르싸이으로 옮겼고, 그에 따라 여러 고급 공무원들 및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 대부분이 빠리를 떠났습니다. 결국 빠리에는 가난한 서민 계층만 남은 셈이 되었지요. 그런데 띠에르는 3월 18일, 독일군의 포위 공격 때 쓰던 대포들을 수거하기 위하여 군대를 빠리에 보냈습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상 빠리시가 무기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우려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이것이 발단이 되어 빠리의 가난한 노동자 계층은 군대와 무력 다툼을 벌인 끝에, 3월 28일, 빠리시 자치 정부, 즉 꼬뮌 드 빠리를 선포했습니다.

이 1871년의 꼬뮌은 1789년의 꼬뮌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이번 혁명은 더이상 세습 왕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화국 정권에 대한 거부였으며, 무엇보다도 노동자 계층이 중산 계층에 대항한 혁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맑쓰도 1871년의 꼬뮌을 역사상 최초의 프롤레따리아 혁명으로 평가했고, 레닌도 공산주의가 모델로 삼아야 할 혁명이라고 찬양했다지요. 실제로 꼬뮌 정부는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 최대 노동 시간과 최저 임금 측정, 야근 금지, 남녀 월급 동일, 학교의 무료화, 기업의 국영화, 정교 분리, 등등... 이외에도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빚에 억눌린 사람들을 돕기 위한 다양한 기관과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채 두 달이 못되어 모두 무효로 돌아갔습니다. 지금도 그렇듯이 좌파 내에서도 의견과 사상이 분분하였고, 여러가지 경험 미숙에다가, 베르싸이으에서 보낸 프랑쓰 정규 부대에 의해 빠리시는 또다시 포위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독일군의 포위가 끝난지 불과 2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계속된 전투 끝에 정부군은 5월 21일, 마침내 빠리 시내를 뚫고 들어오는데 성공하였으며, 22일부터 28일까지 이만 명 이상의 시민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이 7일간을 가리켜 피의 주간 (Semaine sanglante)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 살아남은 꼬뮈나르들도 결국은 단두대형을 선고받거나, 누벨-꺌레도니 (Nouvelle-Calédonie) 로 강제 추방, 또는 강제 노동 같은 매우 가혹한 징벌을 받았습니다. 지방의 꼬뮌들도 모두 엄하게 진압되어 대부분 빠리시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런 비극들을 겪는 와중 빠리의 서민들이 불렀던 노래가 랑떼르나씨오날버찌의 계절이었습니다.

dimanche 20 juillet 2008

첫번째 꼬뮌 드 빠리 (Commune de Paris)

버찌철랑떼르나씨오날은 모두 1871년의 꼬뮌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라띠나어 commune [꼼문네] 에서부터 비롯된 불어 commune [꼬뮌] 이란 단어의 뜻은 원래는 그저 « 공동체 » 로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데, 중세에는 흔히 왕이나 황제, 기타 다른 봉건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고, 시민들끼리 공동 (commun) 으로 꾸려나가는, 비교적, 또는 완전히 독립된 도시들이 꼬뮌이란 이름을 취했습니다. 현대 불어에서도 commune 은 매우 자주 쓰이는 용어로서, 프랑쓰 행정구역의 가장 작은 단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빠리는 하나의 꼬뮌이며, 리용도 하나의 꼬뮌이지요. 즉, 우리나라의 시 정도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Commune de Paris 라고 하면 « 빠리시 » 란 뜻에 불과하지만, 프랑쓰 역사에는 조금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꼬뮌 드 빠리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번째 꼬뮌 드 빠리는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이 바스띠으 (Bastille) 를 점령함과 동시에 공포되었습니다. 이것은 중세의 자유 꼬뮌들처럼, 빠리시가 더 이상 왕권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일종의 독립 의사의 표명이었지요. 이 시립 자치 정부 체제는 1795년까지 계속되었고, 그동안 혁명의 매우 중요한 사건들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1792년 8월 10일의 폭동을 조직하여 왕권을 완전히 몰락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면서 꼬뮌 드 빠리는 매우 강력한 조직이 되었습니다. 1792년 9월 학살 (Massacre du septembre) 을 일으킨 장본인도 꼬뮌이었고, 비상 범죄 재판소 (Tribunal criminel extraordinaire) 를 설립한 것도 꼬뮌이었습니다. 1793년, 혁명 재판소 (Tribunal révolutionnaire) 로 발전한 이 법정은 공화국에 혹시라도 해를 끼칠 우려가 있을지 모른다고 조금이라도 염려되는 사람들을 후다닥 재판하기 위한 기관으로서, 여기서 내려진 결정은 24시간 내로 시행되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재심은 요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꼬뮌은 이 재판소를 통해 지롱당 (간단히 말하여 온건파) 의원들을 모두 제거하였으며, 점점 더 극단적이고 과격화되어, 1793년 9월 5일, 꽁벙씨옹 나씨오날 (간단히 말하여 국회) 로 하여금 프랑쓰 전국에 공포 정치 (Terreur) 를 합법화시키는 법령을 발표하게끔 하였습니다. 공포 정치의 첫 희생자 중 한 명이 바로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녀 외에도 약 17.000 명이 약식 재판 뒤에 처형을 당하였고, 25.000 명은 단순히 이름만 확인한 뒤 사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꼬뮌 드 빠리는 엄격히 말하면 빠리시의 업무 만을 처리하여야 했겠지만, 이렇게 실제로는 혁명 정부와 함께 프랑쓰 전국을 좌지우지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1793년 말부터 영향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여, 1794년 7월 이후로는 모든 힘을 잃었고, 1795년 8월 제정된 새로운 헌법 (Constitution de l'an III) 이, 빠리시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시를 열 두 개로 조각냄으로써 꼬뮌 드 빠리는 해체됩니다. 이 열 두 개의 조각에 1860년, 여덟 개의 교외 도시들이 합쳐지면서 오늘날 빠리를 구성하는 스무 개의 구 (arrondissement) 가 생겨났습니다.

jeudi 17 juillet 2008

버찌철 (Le Temps des cerises)

Le Temps des cerises (버찌철, 버찌의 계절) 라는 노래는 랑떼르나씨오날과 더불어, 1871년의 꼬뮌 이후 크게 유행했던 저항가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이 노래는 꼬뮌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 1866년, 제 2 제정 치하에서 작곡되었습니다. 하지만 1871년의 꼬뮌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해 5월 말, 피의 주간 (Semaine sanglante) 이라고 불리는 한 주 동안, 수만 명의 꼬뮈나르 (communard = 꼬뮌에 참가한 사람) 들이 무참히 학살되고 나자, 이 사건과 이 노래 사이에 깊은 연관이 생겨났습니다. 아마도 마침 버찌철이 막 시작되고 있었고, 버찌와 피의 색깔이 닮은 데다가, 이 노래가 전하고 있는 쓸쓸함이, 너무나 짧게 끝나 버린 꼬뮌 정부 (약 두 달) 에 대한 아쉬움과 겹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이 노래의 작사가 졍-바띠스뜨 끌레멍 (Jean-Baptiste Clément) 은 비록 뒤늦게나마, 피의 주간에 학살당한 한 무명의 간호사에게 이 노래를 헌사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지금도 이 노래는 혁명가로, 좌익 사상을 담은 노래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사실 그냥 사랑의 노래로 보아도 좋습니다. 랑떼르나씨오날이나 라 마르쎄이예즈에 비하면 이 노래의 가사는 매우 온순하고, 설사 혁명에 대한 상징을 찾아볼 수 있다고는 해도, 훨씬 덜 직설적입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는 음악적으로도 (작곡가는 엉뜨완 르나르) 랑떼르나씨오날이나 라 마르쎄이예즈보다 더 완성도가 높습니다. 필경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오늘날 버찌철은 정치적 상황을 떠나 많은 가수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랑떼르나씨오날이나 라 마르쎄이예즈보다 국제적으로는 덜 알려진 듯 하지만, 하야오 미야자끼의 팬들은 아마 들어보셨을 겁니다. 놀랍게도 빨간 돼지 (Porco rosso) 에 이 노래가 등장하니까요. 아마도 일본 가수가 부르는 듯 한데, 불어 발음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들을만 합니다. 영화 속에서 버찌철은 직접적인 정치적 의미는 없고, 그저 막연한 향수감을 불어 일으키는 아름다운 노래로만 쓰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노래를 통해, 젊은 시절 노동 조합원으로 활동했던 미야자끼의 과거를 보기도 하더군요. 또한 1996년, 사회당 출신 대통령이었던 프렁쓰와 미떼렁 (François Mitterrand) 이 죽었을 때, 바르바라 헨드릭쓰 (Barbara Hendricks) 는 그에 대한 마지막 추모로 바스띠으 광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바스띠으 근처에 사는 저는 그 때 집에 앉아서 창문으로 울려 들어오던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Quand nous chanterons, le temps des cerises,
Et gai rossignol et merle moqueur
Seront tous en fête.
Les belles auront la folie en tête
Et les amoureux du soleil au cœur
Quand nous chanterons, le temps des cerises,
Sifflera bien mieux le merle moqueur.

Mais il est bien court, le temps des cerises
Où l’on s'en va deux cueillir en rêvant
Des pendants d'oreille.
Cerises d’amour aux robes pareilles
Tombant sur la feuille en gouttes de sang
Mais il est bien court, le temps des cerises
Pendants de corail qu’on cueille en rêvant.

Quand vous en serez au temps des cerises,
Si vous avez peur des chagrins d’amour,
Evitez les belles.
Moi qui ne crains pas les peines cruelles,
Je ne vivrai point sans souffrir un jour.
Quand vous en serez au temps des cerises,
Vous aurez aussi des peines d’amour.

J’aimerai toujours le temps des cerises.
C’est de ce temps-là que je garde au cœur
Une plaie ouverte.
Et Dame Fortune, en m’étant offerte
Ne pourra jamais fermer ma douleur.
J’aimerai toujours le temps des cerises
Et le souvenir que je garde au cœur.

버찌철에 우리가 노래를 하면, 즐거운 꾀꼬리와 장난스런 메를 (새의 일종) 도 모두 모여 축제를 열 것이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머리에 공상을 담을 테고, 사랑에 빠진 남자들은 가슴에 태양을 담을 것이다. 버찌철에 우리가 노래를 하면, 장난스런 메를이 더 잘 지저귈 것이다.

하지만 버찌철은 너무 짧다. 둘이서 꿈을 꾸며 버찌를 따다가 귀걸이를 만드는 철, 저리도 아름다운 빛깔의 사랑의 버찌가 나뭇잎 위로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철. 버찌의 계절은 너무 짧다. 꿈꾸며 산호빛 귀거리를 따는 철...

버찌철이 왔는데도 사랑의 아픔을 겪기 싫다면, 미녀들을 피하라. 잔인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는 살다 보면 언젠가 괴로울 것을 알고 있다. 버찌철이 오면 당신들도 사랑의 아픔을 겪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버찌철을 좋아할 것이다.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상처는 바로 이 계절에 생긴 것. 자연의 어머니도 내 상처를 절대로 아물게 못한다. 나는 영원히 버찌철을 좋아할 것이고, 마음 속에 그 추억을 간직할 것이다.


mercredi 16 juillet 2008

랑떼르나씨오날 (L'Internationale)

오늘날 라 마르쎄이예즈우파와 극우파의 « 책략 » 으로 인해 프랑쓰 국수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된 느낌이지만, 20세기 초반까지도 이 노래는 대표적인 저항의 노래로서 다른 나라에서도 자주 불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슷한 길을 걸은 노래가 하나 더 있습니다 : 바로 랑떼르나씨오날 !

랑떼르나씨오날1871년 6월, 꼬뮌 (Commune) 혁명의 실패와 그에 뒤따른 끔찍한 진압을 겪고난 후, 으젠 뽀띠에 (Eugène Pottier) 라는 정치가이자 시인이, 라 마르쎄이예즈의 선율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가사를 쓴 노래입니다. 실제로 두 노래는 가사를 서로 바꿔불러도 꼭 들어 맞습니다. 그리하여 몇년간 이 노랫말은 라 마르쎄이예즈와 함께 불리웠는데, 1888년, 벨직 출신의 노동자 음악가 삐에르 드제떼르 (Pierre Degeyter) 가 여기에 새로운 선율을 작곡하여 붙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랑떼르나씨오날이 태어났습니다.

이 새로운 랑떼르나씨오날은 1888년, 릴 (Lille) 의 노동자 축제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선보임과 동시에 큰 호응을 얻었으며, 다음해 빠리에서 결성된 제 2 차 국제 노동자 연맹 (La IIe Internationale) 의 공식 찬가로 채택되었습니다. 이후로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세계 각국의 사회당, 공산당, 노동 조합, 기타 좌파 성향의 여러 모임들에서 찬가로 불려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쏘련의 국가 (hymne national) 이기도 했답니다. 그 때문에 각 나라 말로 번역/각색된 노랫말이 있으며, 불어판 자체도 애초에 비해서 조금 달라졌습니다. 현재 프랑쓰에서 불려지는 랑떼르나씨오날의 1절 가사 :

Debout ! les damnés de la terre,
Debout ! les forçats de la faim,
La raison tonne en son cratère :
C’est l’éruption de la fin.
Du passé faisons table rase,
Foule esclave, debout ! debout !
Le monde va changer de base :
Nous ne sommes rien, soyons tout !
C’est la lutte finale.
Groupons-nous et demain
L’Internationale
Sera le genre humain.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우리말 판의 가사가 있긴 하지만, 번역이나 각색으로 보기에는 너무 내용이 달라, 직역을 해 보았습니다 :

일어서라, 이 땅의 저주를 받은이여 ! 일어서라, 허기진 죄수여 ! 이성이 들끓으니, 이제 마지막 폭발이다. 과거는 깨끗이 지우자. 노예의 군중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 세상의 기반을 바꿀 때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되도록 하자. 자, 최후의 전투다. 함께 뭉치자. 내일은 모든 인류가 노동 연맹을 이룰 것이니.

저는 이 노래를 처음 귀로만 접했을 때, 마지막 구절을 « demain l'international sera le genre humain » 으로 들었습니다. 미래에는 남자, 여자, 백인, 흑인, 황인, 부자, 빈자, 프랑쓰인, 한국인, 등의 구별 없이, 지구 상에 오로지 단 하나의 인종, 즉 국제인이라는 인종 만이 생길 것이다, 라는 바람 또는 믿음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 정말 좋은 노래구나... 했는데, 알고 보니 l'international 이 아니라 l'Internationale 이더군요.^^ 이 문맥에서 l'Internationale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의 준말로, 1864년 이후로 여러 차례 조성되었던 « 국제 노동자 연맹 » 을 가리킵니다. 결국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이 동맹에 참가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얘기지요.

아무튼, 똑같이 혁명가로 출발한 라 마르쎄이예즈는 오늘날 프랑쓰라는 한 기존 정권을 대변하는 노래가 되어 버렸는데 비해, 랑떼르나씨오날은 아직도, 그 이름처럼 전 세계에서 저항가로 남아 있습니다.


lundi 14 juillet 2008

라 마르쎄이예즈 (La Marseillaise)

오늘, 7월 14일은 프랑쓰 공화국의 국가 축일 (Fête nationale) 로서, 도처에서 삼색기가 휘날리고, 국가 (hymne national) 라 마르쎄이예즈가 울려 퍼집니다. 남부지방 (특히 마르쎄이으) 군인들이 불러서 유명해지는 바람에 이런 이름으로 굳어졌지만, 애초에 이 노래는 스트라쓰부르 (Strasbourg) 에 주둔하던 랑 군대 (Armée du Rhin) 의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랑 군대의 한 젊은 장교였던 루제 들 릴 (Claude-Joseph Rouget de Lisle) 은 스트라쓰부르 시장의 청을 받아, 1792년 4월 25일, 곧 외스터라이히와 전쟁에 들어갈 혁명군들을 위해 Chant de guerre pour l'Armée du Rhin (랑 군대를 위한 전쟁가) 이라는 노래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루제 들 릴이 가사를 쓴 것은 확실하나, 음악도 정말 그가 작곡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랬으리라고 그냥 믿고 있을 뿐이지요.

북동부에서 작곡된 이 노래가 어찌어찌하여 남쪽까지 내려가게 되었고, 남쪽 사람들이 다시 빠리까지 가지고 올라오면서, 이 노래는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어, 1795년 7월 14일, 프랑쓰의 국가로 공식 채택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어딘지 한 나라의 국가답지 않은 면이 있어서, 저는 마음에 듭니다. 선율은 슬프고 쓸쓸하며, 가사는 매우 끔찍합니다. 혁명군이 전쟁에 나가면서 부르던 노래니 그럴 수 밖에 없지요. 모두 7절까지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함 일색이라, 이제는 가사를 바꾸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매우 자주 나옵니다. 어쨌거나 우리나라 애국가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국민들은 1절 밖에는 모르지요.

Allons enfants de la Patrie,
Le jour de gloire est arrivé !
Contre nous de la tyrannie,
L'étendard sanglant est levé (bis).
Entendez-vous dans les campagnes
Mugir ces féroces soldats ?
Ils viennent jusque dans nos bras
Égorger nos fils, nos compagnes !
Aux armes, citoyens
Formez vos bataillons
Marchons, marchons !
Qu'un sang impur
Abreuve nos sillons !

(자, 조국의 자식들아, 영광의 날이 왔도다 ! 폭정은 우리에 대적하여 피묻은 깃발을 올렸다, 피묻은 깃발을 올렸다. 들판에서 저 잔인한 군인들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는가 ? 그들은 우리의 품 안에까지 쳐들어와, 우리의 자식과 아내의 목을 따질 않는가 !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 열을 지어, 걷고 또 걷자 ! 저들의 더러운 피가 우리들의 논밭을 적실때까지 !)

인터넷 여기저기에는 프랑쓰 정부가 군악부에게 연주시킨 매우 공식적인 라 마르쎄이예즈 녹음이나, 아니면 한때 마리안이기도 했으며, 지금도 우파 정부를 위해서라면 혼신의 희생을 마다 않는 미레이으 마띠으 (Mireille Matthieu) 가 애국심에 복받쳐 열창하는 동영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너무 제 취향이 아니라서, 저는 영화 꺄자블렁꺄 (Casablanca) 중 한 장면을 골랐습니다. 이 장면에서 라 마르쎄이예즈는 프랑쓰의 국가로 불려진다기 보다는 권위적인 독일군, 그들과 한 패인 프랑쓰의 비쉬 정부에 대한 혁명가, 저항가로서 불려지기에, 훨씬 더 노래의 본의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dimanche 13 juillet 2008

삼색기 (drapeau tricolore)

마리안과 더불어 프랑쓰 공화국의 대표적인 상징 또 한가지는 삼색기입니다. 불어 tricolore 는 원래는 그저 « 세 가지 색깔의 » 란 뜻이나, 절대적인 용법으로 쓰이면 프랑쓰 국기를 구성하는 파랑, 하양, 빨강의 색만을 가리킵니다.

cocarde tricolore
마리안이나 프리지의 모자와 마찬가지로, 프랑쓰의 국기 역시 프랑쓰 혁명 중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전까지 프랑쓰를 대표하는 색깔은 왕실의 색깔이었던 흰색이었는데, 1789년 7월 14일, 빠리의 바스띠으가 시민들에 의해 점령되고 나자, 빠리의 색깔이었던 빨강과 파랑이 거리에서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그리고 7월 17일, 루이 16세가 빠리 시청을 억지로 방문할 수 밖에 없게 되었을 때, 이 빨강과 파랑 사이에 왕국의 색깔인 흰색을 집어 넣은 휘장 (cocarde) 을 선물 받고, 모자에 달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쓰 국기의 시초입니다. 이 때부터 거리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삼색 휘장, 리본, 뱃지, 띠 등을 프리지의 모자나 옷에 착용하고 다녔는데, 보다 공식적으로는 1794년에 국회의 요청을 받고 다빗 (Jacques-Louis David) 이 세 가지 색을 같은 비율로 간결하게 디자인하면서 프랑쓰의 국기가 완성됩니다. 이후로 이 깃발은 정치 체제에 상관없이 줄곧 프랑쓰의 국기로 사용되었습니다 (비교적 짧았던 두 번의 왕정 복귀 기간만을 제외하고).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는 제 3 공화국 초기에 다시 한 번 왕정 복귀 운동이 일었으며, 이 때 부르봉 왕가의 후손이었던 엉리 드 셩보르가 실질적으로 왕이 될 뻔 했었습니다만, 국기 문제로 모두 최소되고 말았습니다. 엉리 드 셩보르는 혁명기를 국기로 채택할 수는 없다고, 자신의 조상의 색깔인 흰색 국기 아니면 차라리 왕을 안 하고 말겠다고 끝까지 우기는 바람에, 결국 프랑쓰는 공화정 체제로 오늘날까지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프랑쓰에서 삼색기는 도처에서 이용됩니다. 정부와 관공서들이 이 세 가지 색을 이용한 로고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국영 기업 또는 한때 국영이었던 기업들의 상표는 꼭 세가지 색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프랑쓰의 모든 시장들 (또는 구청장, 통장, 반장, 마을 촌장...) 은 공공 업무시,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로 내려가는 삼색띠를 반드시 매야 하며, 프랑쓰 대표 선수들의 운동복 역시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되는 일이 잦습니다.

(왼쪽부터) 정부, 국회, TF1 (방송국)



사실 프랑쓰가 국기 선택을 참 잘 한 것이, 파랑, 하양, 빨강이라는 아주 기본적이고 자주 쓰이는 색깔이,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힌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조합되어 있기에, 프랑쓰의 삼색기는 응용 범위가 매우 넓은 것 같습니다. 사실 유럽의 다른 나라 국기들도 대부분 프랑쓰의 국기를 본따서 만든 것이라고 하지요 ? 때로는 같은 색을 쓰되 배치를 달리하는 경우도 있고, 배치는 비슷하되 자기네 고유한 색깔을 쓰기도 하지만, 많은 나라들이 자기네도 공화국이 되면서 프랑쓰 혁명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생각에서 혁명기를 모방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지금은 다른 나라로 합병되었으나 한 때 프랑쓰의 땅이었던 지역들 (꺄나다아꺄디, 미국의 아이오와 등) 역시 파랑, 하양, 빨강이 주를 이루는 깃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랑쓰 문화를 다루는 이 블로그 역시 파란 바탕에 하얀 색과 빨간 색 글씨로 씌어지고 있는 것을 다들 눈치채셨겠지요 ?^^

매년 7월 14일 프랑쓰 공군이 벌이는 묘기 (?)

samedi 12 juillet 2008

마리안 (Marianne)

프랑쓰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을 상징하는 여러 징표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마리안입니다. 마리안은 젊은 여자의 얼굴, 또는 어깨나 가슴 정도까지를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물로서, 반드시 프리지의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서양 문화에서는 추상적인 개념 (자유, 사랑, 아름다움, 정의, 희망, 등등) 을 흔히 여자의 모습으로 의인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프랑쓰에 왕정 (royauté) 이 무너진 후, 공화정 (république) 이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상징하기 위하여 마리안이라는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Marianne 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원인은 분명치 않으나, Marie, Anne 또는 Marie-Anne 등이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대표적으로 흔했던 여자 이름들이었기에, 아마도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굳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프랑쓰에서는 마리안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개는 공공 업무를 보는 시청, 구청, 기타 관공서들에 마리안 흉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프랑쓰 정부가 발행하는 모든 문서에는 마리안과 삼색기를 가지고 만든 로고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림). 프랑쓰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우표들은 모두 마리안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돈에도 마리안이 그려져 있습니다. 전에 아직 프랑쓰의 화폐가 프렁 (franc) 이었을 때는 물론, 외로 (euro) 화가 된 지금도 동전들의 뒷면에는 마리안이 새겨져 있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외로 동전들의 앞면은 모두 같은 모양이되, 뒷면은 자국의 특징을 살려 디자인할 수 있게끔 되어있지요. 또 프랑쓰의 유명한 정치/시사 주간지로 마리안이라는 제목을 가진 잡지도 있습니다.

최근 십여년간의 프랑쓰 우표들 (오래된 순)
(Les photos des timbres proviennet d'ici.)

프랑쓰의 몇몇 동전 (가장 왼쪽은 프렁, 나머지 둘은 외로)


그런데 이런 그림들이 모두 마리안은 아닙니다. 마리안은 반드시 프리지의 모자를 쓰고 있어야 하며, 최대 가슴까지만 표현된 그림을 말합니다. 동전에 새겨진 그림 중 전신이 다 드러난 여자는 마리안의 일종이긴 하지만, 씨뿌리는 여자 (La Semeuse) 라고 부릅니다. 역시 프리지의 모자를 쓴 이 여자는 바람을 마주보며 걸어가면서 대지에 씨앗을 뿌리는 모습으로 구현됩니다. 이것은 아무리 힘든 역경이 있어도 자기의 임무를 꿋꿋이 다하는,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심는 여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들라크르와의 유명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역시 프리지의 모자를 쓰고 있으나, 전신이 다 드러나 있으므로, 마리안이라 부르지 않고 자유라고 부릅니다. 이 그림 역시 옛날에 프렁화 지폐에 사용되었습니다.

Eugène Delacroix,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1830)
huile sur toile, 260 x 325 cm
Paris, Musée du Louvre
들라크르와의 얼굴과 그의 작품이 수놓인 100 프렁짜리 옛 지폐
(source de la photo)

프랑쓰가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여신 상 역시 마리안을 기초로 디자인되었으나, 전신이 다 드러나기에, 게다가 프리지의 모자도 쓰고 있지 않기에 La Liberté éclairant le monde (세상에 빛을 밝히는 자유) 라 명해졌습니다.

지금까지의 사진들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이 모든 마리안들이 다 똑같은 모습,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행사나 기회가 있을 때, 아니면 그저, 미리 만들어 놓은 그림이나 조각이 동이 나서 새로 만들어야 할 때, 정부는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마리안의 도안을 주문하고, 때로는 아예 마리안의 모델을 지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 년에 한번씩 유명한 여자들이 마리안의 모델로 지정되곤 합니다. 지금까지 마리안의 모델이 되었던 여자들 중에는 브리짓 바르도 (Brigitte Bardot), 꺄트린 드뇌브 (Catherine Deneuve), 미레이으 마띠으 (Mireille Mathieu), 이네쓰 들 라 프레썽쥬 (Inès de la Fressange), 레띠씨아 꺄스따 (Lætitia Casta) 등이 있습니다. 사실 특별히 공화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라기 보다는, 뽑힐 당시 대중적인 인기가 많았고, 국외에도 프랑쓰의 미를 대표하는 인물로 어느 정도 알려졌으며, 주로 예술, 연예 계열에 종사하는 여자들입니다. 하지만 바르도나 마띠으처럼 훗날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문제가 된 사람들도 있고, 또 꺄스따는 프랑쓰 공화국을 대표하는 여자로 뽑히자마자, 프랑쓰가 세금을 너무 많이 징수해서 싫다고, 낼름 영국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가장 최근에 뽑혔던 에블린 또마 (Evelyne Thomas) 라는 여자는 매우 저속한 방송의 사회자였습니다. 대중들의 호기심만 도발하는 데 집중하던 이 여자는 아름다움이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고, 국제적인 지명도는 전혀 없었으며, 인기가 떨어지자 방송국에서도 잘려 종적을 감췄습니다.

이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자, 유명인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 마리안을 뽑자는 얘기도 많고, 또 흑인, 아랍인, 동양인 등 프랑쓰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을 마리안으로 내세우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리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극히 드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평범한 국민들 중에서 마리안을 뽑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화국 정신일텐데, 불행히도 프랑쓰는 아직도 백인 중심, 그리고 예쁜 여자 중심, 그리고 돈많고 유명한 사람 중심의 사회인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vendredi 11 juillet 2008

프리지의 모자 (bonnet phrygien)

프리지의 모자라는 것은 우리가 겨울에 흔히 보게 되는 보통 털모자처럼 생긴 것으로, 머리와 귀에 바짝 당겨서 쓰는 모자입니다. 다만 재질이 털이 아닌 보통 천이며, 모양이 좀 더 길쭉하여, 그 끝을 한 쪽 (대개는 앞 쪽) 으로 수그러뜨려 쓰는 모자입니다. 색깔은 대개 빨간 색입니다.

이 모자는 고대 소아시아의 나라 프리지 (Phrygie) 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정말 그러한 지는 알 수 없고, 대신 고대 로마 제국에서는, 노예였던 사람이 노예 신분을 벗어나게 되면, 주인으로부터 이 모자를 받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프리지의 모자는 자유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쓰 혁명 때에는 시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이 모자를 즐겨 썼고 (위의 그림), 1792년 6월 20일 뛰일르리 궁 습격 사건 때도, 성난 폭도들은 루이 16세와 도팡의 머리 위에 프리지의 모자를 씌우고 나서야 물러 갔습니다. 지금도 프리지의 모자는 프랑쓰 공화국의 공식적인 상징 중 하나이며, 프랑쓰 공화정을 구현하는 여자 마리안 (Marianne) 역시 반드시 프리지의 모자를 쓴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프리지의 모자를 쓴 루이 16세

jeudi 10 juillet 2008

당나귀 모자 (bonnet d'âne)

프랑쓰에는 당나귀 모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이것은 천이나 아니면 더 간단하게는 종이로 만든 모자로, 당나귀의 긴 귀 모양을 흉내내고 있습니다. 프랑쓰에서 당나귀는 한편으론 귀엽고 소박한 동물로 사랑받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동물의 대명사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프랑쓰의 학교에서는 아주 옛날부터 20세기 초반 무렵까지, 공부 못하는 학생, 떠드는 아이, 말썽꾸러기, 숙제 안 해 온 애, 질문에 대답 못하는 어린이 등등에게 이 모자를 씌우고 한 쪽 귀퉁이에 가서 서 있게 하는 벌을 내리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까짓게 무슨 벌인가 싶지만, 어린이들이 순진하던 시절 (!) 에는 당나귀 취급을 당하는 것을 몹시 수치스러원 했던 것 같습니다. 옛날 영화들을 보면, 선생님이 당나귀 모자를 씌웠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있고, 반 친구들도 당나귀 모자를 쓴 아이를 놀리거나 따돌리는 장면 따위를 보게 됩니다.

이제는 학교에서 실제로 당나귀 모자를 씌우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장난으로 한번 만들어 보는 일은 있을 수 있으나. 하지만 당나귀 모자라는 표현은 남아서 여전히 열등생들을 지칭할 때 자주 쓰이며, 더 나아가 일반적으로, 제대로 실력이 없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 자기가 틀린 줄 알면서도 고집부리는 사람들을 놀릴 때 사용되는 숙어가 되었습니다. 언론의 풍자란 등에서는 유명인들, 특히 정치인들을 비꼴 때 당나귀 모자를 수여하곤 합니다.

당나귀 모자를 씌운 니꼴라 싸르꼬지 

mercredi 9 juillet 2008

Le secret de Marc

Exceptionnellement, j'écris de Hongkong, le temps d'une escale...

Le Roman de Tristan, de Béroul, Paris, Bibliothèque Nationale, ms. fr. 2171, f° 1-32, vv. 1306-1350, édité par Philippe Walter, in Tristan et Iseut. Les poèmes français. La saga norroise, Textes originaux et intégraux présentés, traduits et commentés par Daniel Lacroix et Philippe Walter, Le Livre de poche, coll. Lettres gothiques, 1989, pp. 82-84 :

Oiez du nain com au roi sert.
Un consel sot li nains du roi,
Ne sot que il. Par grant desroi
Le descovri : il fist que beste,
Qar puis an prist li rois la teste.
Li nain esr ivres, li baron
Un jor le mistrent a raison
Que ce devoit que tant parloient,
Il et li rois, et conselloient :
« A celer bien un suen consel
Molt m'a trové toz jors feel.
Bien voi que le volez oïr,
Et je ne vuel ma foi mentir.
Mais je merrai les trois de vos
Devant le Gué Aventuros.
Et iluec a une aube espine,
Une fosse a soz la racine :
Mon chief porai dedenz boter
Et vos m'orrez defors parler.
Ce que je dirai, c'ert du segroi
Dont je sui vers le roi par foi. »
Li baron vienent a l'espine,
Devant eus vient li nains Frocine.
Li nains fu cort, la teste ot grose,
Delivrement ont fait la fosse,
Jusqu'as espaules l'i ont mis.
« Or escoutez, seignor marchis !
Espine, a vos, non a vasal :
Marc a orelles de cheval. »
Bien ont oï le nain parler.
S'avint un jor, aprés disner,
Parlout a ses barons roi Marc,
En sa main tint d'auborc un arc.
Atant i sont venu li troi
A qui li nains dist le secroi,
Au roi dïent priveement :
« Rois, non savon ton celement. »
Li rois s'en rist et dist : « Ce mal
Que j'ai orelles de cheval,
M'est avenu par cest devin :
Certes, ja ert fait de lui fin. »
Trait l'espee, le chief en prent.
Molt en fu bel a mainte gent,
Que haoient le nain Frocine
Por Tristan et por la roïne.

Traduction en français moderne par Philippe Walter, ibid. pp. 83-85.

Mais écoutez plutôt ce que le nain fit au roi. Il détenait du roi un secret qu'il était le seul à connaître. Une grande imprudence l'amena à le divulguer. Il commit une bêtise car cela lui valut ensuite d'être décapité par le roi. Un jour, le nain était ivre et les barons lui demandèrent ce que signifiaient les entretiens qu'il avait fréquemment avec le roi.
« J'ai toujours gardé loyalement le secret qu'il m'a confié. Je vois bien que vous voulez le connaître, mais je ne veux pas trahir ma parole. Je vous mènerai tous les trois devant le Gué Aventureux. Il y a là une aubépine dont les racines surplombent un fossé. Je pourrai placer ma tête à l'intérieur et vous m'entendrez du dehors. Ce que je dirai concernera le secret pour lequel je suis lié par serment au roi. »
Les barons se rendent devant l'épine. Frocin les précède. Le nain était petit mais il avait une grosse tête. Ils ont vite fait d'élargir le trou et y enfoncent Frocin jusqu'aux épaules.
« Écoutez, seigneurs marquis ! Épine, c'est à vous que je m'adresse et non à eux ! Marc a des oreilles de cheval ! »
Ils ont parfaitement entendu le nain. Un jour, après le dîner, Marc s'entretenait avec ses barons. Il tenait un arc d'aubour dans la main. Les trois barons à qui le nain avait révélé le secret s'approchent du roi. Ils lui disent à voix basse :
« Sire, nous savons ce que vous cachez. »
Le roi en rit et dit :
« Cette maladie des oreilles de cheval, c'est à ce devin que je la dois. Vraiment, il n'en a plus pour très longtemps à vivre. »
Il tire son épée, décapite le nabot. Beaucoup s'en réjouissent qui haïssent le nain Frocin à cause de ses méchancetés envers Tristan et la reine.

lundi 7 juillet 2008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Roi aux oreilles de cheval)

트리스떵과 이즈의 이야기에는 유리 장갑 말고도 또다른 유명한 일화 하나가 더 들어 있습니다. 베룰이 저술한 판에 의하면, 꼬르누아이으 (Cornouaille) 의 왕 마르크 (Marc) 는 프로쌍 (Frocin) 이라는 난장이를 광대처럼 두고 있는데, 이 난장이가 바로 마르크에게 트리스떵과 이즈의 관계를 고자질한 장본인이며, 두 사람을 함정에 몰아 넣기도 합니다. 흉칙하고 못생겼으며, 교활하고 음흉한 성격에다가, 괴이한 마술까지 부릴 줄 아는 이 난장이를 궁정 사람들은 모두 싫어하지만, 질투에 눈이 먼 왕은 그를 크게 신임하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난장이가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 한 가지를 알고 있었기에, 왕은 그에게 조종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르크의 부끄러운 비밀이란, 바로 그가 매우 길고 뾰족하고 털이 난 귀를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프로쌍은 한동안 이 비밀을 굳게 지켰으나, 다른 간신들의 재촉이 있자, 입이 근질근질하여 결국은 그들에게 비밀을 털어 놓습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비밀을 지킨 행세를 하기 위하여, 대놓고 얘기하지 않고, 산사나무 (aubépine) 밑을 파서 얼굴을 묻고, 거기다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이 소리는 뿌리를 타고 나무의 몸통으로 올라와 사방으로 울려 퍼졌고, 나무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의 간신은 마르크 왕의 비밀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이 일화는 그리쓰 신화에 등장하는 미다쓰 왕의 전설과 매우 흡사하고,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나라의 어느 왕에 얽힌 전설이라고도 어디서 들었던 것도 같은데, 사실 각 나라마다 비슷비슷한 옛날 이야기가 구전되 오는 일이 종종 있지요 (콩쥐팥쥐와 썽드리용). 마르크의 경우는 순전히 그의 이름 때문에 이런 일화가 생겨났으리라는 짐작을 쉽게 해 볼 수 있습니다. 쎌트 계열 언어들에서 Marc 또는 Marc'h 는 고유명사로는 사람 이름이지만, 보통 명사로는 바로 « 말 » 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베룰은 트리스떵과 이즈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에서 그저 이 일화를 지나가듯 이야기하고 그만이지만, 프랑쓰의 브르따뉴 지방에는 마르크와 그의 귀를 주제로 하는 보다 복합적인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흔히 말해지기를 브르따뉴는 마르크와 트리스떵의 고향이기 때문이지요. 마르크는 원래 현재 프랑쓰의 북서부 브르따뉴의 일부인 꼬르누아이으의 왕이었는데, 이 말 귀 사건이 드러나고 나서, 영국 섬으로 건너가 거기서 자신의 사촌인 아르뛰르 (Arthur) 왕에게 남서부의 작은 왕국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왕국도 꼬르누아이으라 이름지었습니다. 현대 불어에서는 원래 꼬르누아이으는 Cornouaille, 영국에 새로 생긴 꼬르누아이으는 Cornouailles 라고 합니다. 하지만 s 는 발음되지 않기 때문에, 두 지명을 귀로 들어서는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단어는 현대 영어에서 Cornwall 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전설일 뿐, 마르크라는 왕이 실존했던 인물인지, 정말로 브르따뉴 출신인지, 귀가 유난히 길었는지, 아일랜드의 공주와 결혼을 했었는지, 그 공주가 시조카와 사랑에 빠졌었는지, 등등은 모두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프랑쓰의 꼬르누아이으와 영국의 콘월 두 지명이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vendredi 4 juillet 2008

유리 장갑 (gants de verre)

매우 시적이고 아름다운 칼의 일화는 모호함으로도 가득 차 있습니다. 트리스떵은 과연 왜 칼로 자신과 이즈 사이에 간격을 두었을까요 ? 또한 그들의 닿지 않은 입술, 이즈가 굳이 간직하고 있는 결혼 반지 등등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 베룰은 두 사람의 사랑이 오로지 쁠라또닉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 하지만 다른 대목에서는 그와 모순되는 장면도 많습니다. 어쨌거나 칼의 일화 다음에는 마르크 왕이 두 사람이 함께 잠든 모습을 발견하고도, 그 모습이 너무 순결하다 하여,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이 때 왕은 자신이 잠든 두 연인을 발견했음을, 그리고 충분히 그들을 처치할 수 있었지만 용서했음을 뜻하는 뚜렷한 증표를 남기고 싶어합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개인 물건들 몇 개를 남겨 두고 떠납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이즈가 아일랜드로부터 가지고 와서 결혼 선물로 왕에게 선사한 유리 장갑입니다. 이 부분의 오일어 원문을 소개하면,

« ...
Uns ganz de voirre ai je o moi,
Qu'el aporta o soi d'Irlande.
Le rai qui sor la face brande
Qui li fait chaut en vuel covrir ;
Et qant vendra au departir,
Prendrai l'espee d'entre eus deus
Dont au Morhot fu le chief blos.»
Li rois a deslïé les ganz,
Vit ensenble les deus dormanz,
Le rai qui sor Yseut decent
Covre des ganz molt bonement.
Béroul, Le Roman de Tristan, vv. 2032-2042

(«... 나는 그녀가 아일랜드에서 가져온 유리 장갑을 끼고 있다. 얼굴에 햇빛이 내리쬐어 더울테니, 그녀의 얼굴을 장갑으로 보호하고 싶다. 그리고 떠날 때는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칼, 모르올트 [트리스떵이 죽인 이즈의 삼촌] 의 머리를 잘라 낸 저 칼을 내가 가지고 가겠다.» 왕은 장갑을 벗고 나란히 누워 자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장갑으로 조심스럽게 이즈의 얼굴을 덮어, 내려 쪼이는 햇빛을 막았다.)

이 유리 장갑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합니다. 물론 오로지 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말이 안됩니다. 유리 장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걸 실제로 사람이 착용할 수 있는가 ? 그리고 유리로 어떻게 햇빛을 막는가 ? 도대체 이 이즈라는 여자는 얼굴에 햇빛이 비치고 그 위에 누가 유리를 덮는데도 계속 쿨쿨 잠만 잔단 말인가 ? 그리고 이것을 다 인정한다 치더라도, 서지학적으로도 모순이 있습니다. 장갑이 처음 언급되었을 때 (v. 2032) 는 ganz de voirre (유리 장갑) 이라고 나오지만, 곧이어 (v. 2039) 는 voirre 라는 말이 사라지고 단지 les ganz (장갑들) 이라고만 하며, 좀 더 뒤에는 (v. 2075) 아예 li gant paré du blanc hermine (흰담비로 장식된 장갑) 이라는 묘사가 나옵니다 :

De l'esfroi que Iseut en a
Geta un cri, si s'esveilla.
Li gant paré du blanc hermine
Li sont choiet sor la poitrine.
Béroul, Le Roman de Tristan, vv. 2073-2076

([악몽을 꾼] 이즈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마르크가 덮어 놓고 간] 흰담비 장갑들이 그녀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그래서 베룰의 작품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이 voirre 라는 단어가 vair 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여깁니다. « 유리 » 라는 뜻의 오일어 voirre 는 변화를 거쳐 현대 불어에서는 verre 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vair 라는 것은, 등은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회색이고, 배는 흰색의 털을 가진 다람쥐의 모피로서, 매우 값비싼 재료였습니다. 따라서 베르는 흰담비와 상당히 비슷한 동물이었고, 둘 다 매우 희귀한 고급 가죽이지요. 문제의 장갑이 다람쥐와 흰담비의 모피를 섞어 만든 장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보다 논리적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필립 왈떼르 (Philippe Walter) 같은 학자는 voirre 를 굳이 vair 로 수정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전설의 운치를 더 돋궈 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말도 맞습니다. 중세의 문학 작품들에는 여러가지 마술과 신비로운 물체들이 자주 등장하니까요.

이런 류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동일 작품의 필사본이 여러편 있으면, 서로 비교를 통하여 대개는 문제 해결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베룰의 트리스떵은 오로지 단 한 편의 필사본 (Paris, Bibliothèque Nationale, ms. fr. 2171) 을 통해서만 전해졌기 때문에, 비교의 대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트리스떵 이야기나 외국어 번역판에는 이 유리 장갑의 이야기가 아예 없거나, 극히 간략하게 처리되거나, 단지 장갑이라고만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판본들에서는 두 주인공이 잠든 장소가 나뭇잎으로 엮어 만든 숲 속의 오두막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동굴 안입니다. 그때문에 굳이 이즈의 얼굴을 햇빛으로부터 가려야 할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마르크는 장갑을 그저 이즈 곁에 놓아 둡니다. 그렇다면 유리 장갑이라도 별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논쟁이 몇 세기 뒤에 다시 한번 일어났습니다. 다만 이 때는 장갑이 아니라 신발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썽드리용의 구두 (사실은 pantoufles = « 실내화 ») 는 과연 유리인가 모피인가 ? 썽드리용의 작가 뻬로 (Charles Perrault) 는 verre 라고 썼지만, 뒤늦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vair 의 잘못된 표기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었습니다. 그렇다면 트리스떵과 이즈의 전설은 동화 썽드리용의 먼 조상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일까요 ?

mercredi 2 juillet 2008

트리스떵과 이즈 (Tristan et Yseut)

트리스떵과 이즈 (또는 이즛) 의 이야기는 유명한 중세의 전설입니다. 금지된 줄 알지만, 실수로 마술약을 먹는 바람에, 서로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 두 연인의 비극은 원래는 중세 초기부터 쎌트 문화권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던 전설로 추정되는데, 이 이야기가 전 유럽에서 인기를 얻고, 오늘날까지도 살아 남게 된 것은 사실상 불어권 작가들 덕분입니다. 트리스떵과 이즈의 이야기는 전설의 원어라 볼 수 있는 쎌트 계열 언어로도, 쎌트어를 몰아낸 영어로도 쓰여진 바가 없으며, 주로 공식적인 기록을 전담했던 라띠나어로는 물론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오로지 오일 (oïl) 어, 즉 중세 불어로만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13세기 이후로는 중세 독어와 노르와어 (스껑디나비 지역에서 사용되던 옛 언어) 로 적힌 필사본들도 나타나나, 이들은 모두 불어판의 번역일 따름입니다. 바그너는 바로 이 중, 곳프릿 드 스트라쓰부르 (Gottfried de Strasbourg) 의 독어판을 기초로, 너무나 아름다운 오뻬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를 작곡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곳프릿의 작품이 사실은 또마의 불어 원판을 번역-각색-축약한 것임을 몰랐다고 하지요.

중세 불어로 쓰여진 트리스떵과 이즈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모두 일곱 편이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그저 주인공들의 이름이나 간단한 참고가 언급된 작품들까지 다 합지자면 그 수는 이루 셀 수 없습니다. 일곱 편 중 한 편을 제외하면 모두 운문으로 쓰여졌으며, 모두 12세기의 작품입니다. 그 길이와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베룰 (Béroul) 과 또마 (Thomas) 가 지은 트리스떵의 이야기가 비교적 전체적인 줄거리를 다룬다면, 다른 시들은 트리스떵과 이즈의 이야기 중 한 일화 만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또마의 트리스떵은 중세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고, 다른 불어 작품들과 외국어 번역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가장 일찍 (1173년 경) 쓰여진 작품으로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베룰의 트리스떵이 좀 더 일찍 (1150년 경)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트리스떵 문학 연구가들의 경향입니다.

베룰의 트리스떵의 이야기 (Le Roman de Tristan) 중 마음에 드는 구절 하나를 어설피 번역해 보았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흔히 « 칼의 일화 (épisode de l'épée) » 라고 일컬어지는 이 장면은, 두 주인공이 마르크 (이즈의 남편이자 트리스떵의 외삼촌) 의 노여움을 피해 숲 속을 헤매다니며 살던 중 일어납니다. 배고프고 지친 두 사람이 나뭇잎으로 지은 오두막에서 잠시 낮잠을 취하는 장면입니다 :

이즈가 먼저 누웠다. 트리스떵도 누우면서 자신의 칼을 뽑아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이즈는 속옷을 입고 있었고 (만약 이 날 그녀가 옷을 벗었더라면 큰 일 날 뻔 했다), 트리스떵도 바지를 입은 채로 누웠다. 왕비 [이즈] 는 결혼식날 왕 [마르크] 이 준, 에므로드가 박힌 금반지를 손에 끼고 있었는데, 손가락이 너무 가늘어져서, 반지가 흘러 빠지지 않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두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잠들었는가 들어보라. 이즈는 한 쪽 팔을 트리스떵의 목 뒤로 넣었고, 또다른 팔은, 내 기억에, 그의 가슴 위에 얹었던 것 같다. 이즈는 트리스떵을 꼭 안고 있었고, 트리스떵도 그녀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들의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입술은 서로 닿을 듯 말 듯 했으나, 실제로는 닿지 않았다. 이 순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나뭇잎 하나 떨지 않았다. 단지 한 줄기 햇빛 만이 얼음보다도 더 반짝거리는 이즈의 얼굴을 밝히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잠이 든다. 그들은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

베룰의 트리스떵 이야기, 1804-1830 행.
(원문은 여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