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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anche 17 janvier 2010

필립 오귀스뜨 (Philippe Auguste)

필립 2세 (Philippe II) 또는 필립 오귀스뜨프랑쓰의 영토 확장과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한 왕입니다. 루이 7세 (Louis VII) 가 세 번의 결혼 끝에 얻은 유일한 아들인 필립은 태어나면서부터 왕위를 잇는 것이 확정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아버지의 살아 생전에 이미 왕으로서 축성을 받았습니다 (1179). 비록 바로 그 다음 해에 루이 7세가 사망하긴 하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프랑쓰는 공식적으로 두 명의 왕이 다스린 셈이 되지요. 축성을 받았을 때 필립의 나이는 14살이었으며, 15살부터는 단독으로 프랑쓰의 왕 필립 2세가 됩니다.

당시의 프랑쓰 및 유럽의 정치 체제는 봉건주의 (féodalisme) 로서, 이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론적으로는 많은 귀족들이 프랑쓰의 왕에게 복종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귀족들은 매우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영지를 다스렸습니다. 따라서 프랑쓰 왕의 직접적인 권한은 오늘날 빠리와 일-드-프렁쓰 (Île-de-France) 를 둘러싼 극히 작은 지방에 밖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지요. 특히 영국의 왕은 이론적으로 프랑쓰 왕의 신하였으나, 영국 섬은 물론 프랑쓰 내에 그보다 더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쓰의 남서쪽, 북서쪽, 북쪽 등등이 모두 영국 왕의 영지였지요. 따라서 프랑쓰는 상당히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필립 2세가 단독으로 다스리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자벨 드 에노 (Isabelle de Hainaut) 와의 결혼이었고, 이 공주는 결혼 선물로 아르뜨와 (Artois) 지방을 필립에게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영토 확장을 시작한 필립 오귀스뜨는 계속해서 술책과 정책, 전쟁과 외교를 통하여 프랑쓰의 영토를 넓히는데 일생을 바칩니다. 특히 프랑쓰 내의 영국 영토를 빼았기 위해 그는 영국 왕자들이 그들의 아버지인 엉리 2세 (Henri II) 에게 일으킨 반란을 후원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엉리 2세의 아들 리샤르 (Richard) 가 영국의 왕이 되자, 이번엔 그와 그의 동생인 졍 (Jean) 사이를 이간질 시켰습니다. 또한 후사없이 죽은 리샤르를 뒤이어 졍이 왕이 되자, 그가 프랑쓰 내에 소유했던 영토를 하나하나 다 빼앗았습니다. 그 때문에 졍은 흔히 졍 썽 떼르 (Jean sans Terre) 즉 « 땅없는 졍 »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엉리 2세와 리샤르, 졍 등은 모두 프랑쓰 출신인 쁠렁따쥬네 가문의 사람들로, 불어와 옥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비록 영국이라는 섬의 일부를 다스리기는 했지만 영어를 전혀 몰랐으며, 영국의 왕인 동시에 노르멍디 공작, 엉주 백작, 멘 공작, 쁘와뚜 백작, 아끼뗀 공작으로써, 대부분 프랑쓰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프랑쓰에 묻혔습니다.)

영국의 왕으로부터 빼앗은 땅 이외에도 필립 2세는 여러 지역을 차지하여 오귀스뜨 (Auguste) 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가 죽을 무렵 (1223) 에는 프랑쓰 왕의 소유지가 현대 프랑쓰의 거의 3분의 2 정도가 될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렇게 영토가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오귀스뜨는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 왕국 전체를 통일적으로 다스리는 데 성공했으며, 도시 시민들 (bourgeois) 을 장려함으로써, 봉건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필립 오귀스뜨는 또한 수도 빠리를 확장시키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도 많은 정성을 들였습니다. 진흙 바닥이었던 빠리의 길은 돌로 포장이 되었고,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성벽이 축조되었습니다. 바로 이 성벽을 쌓으면서 루브르 (Louvre) 궁도 지어졌습니다. 또한 빠리의 중앙에 거대한 시장을 만든 것도 바로 이 왕으로, 이 시장은 1969년까지 지속되었고, 빠리의 여러 학교들을 모아 공식적으로 빠리 대학 (Université de Paris) 의 지위를 준 것도 필립 2세였습니다.

현재도 남아 있는 필립 오귀스뜨의 성벽의 유적
(Reste de l'enceinte Philippe Auguste)

jeudi 31 décembre 2009

augur 의 파생어들

불어 août 의 어원인 augustus 는 로마 제국의 첫 황제의 이름에서 유래했지만 이것은 고유명사는 아닙니다. 이 단어는 « 거룩한, 축성받은 » 이라는 뜻의 형용사인데, 가이우쓰 옥따위우쓰 뚜리누쓰 (Caius Octauius Thurinus) 가 황제가 되면서 별명으로 취했습니다. 이후 사실상 로마의 모든 황제들이 이 형용사를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이면서 augustus 는 결국 로마 황제들의 호칭 중 하나가 되버렸습니다. 물론 지금은 관습상 아우구스뚜쓰라고만 하면 로마의 첫 황제 가이우쓰 옥따위우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가 8월에 죽었으므로, 그의 계승자가 선임자를 기념하기 위해 8월에 그의 이름을 준 것이 현재 août 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augustus 는 황제들의 호칭이 되기 이전에는 종교적인 단어였습니다. 이 말은 라띠나어 augur 로부터 왔는데, augur 란 « 미래를 점칠 줄 아는 사제 » 를 가리켰습니다. 이들은 특히 새들이 날아가는 방향이나 새들이 먹는 모이, 그리고 노래하는 소리 등을 듣고 좋은 일이 있을지 나쁜 일이 있을지를 판단했다고 하지요. augur 는 현대 불어로도 발전하여 augure 라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불어 augure 는 두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방금 말한 « 로마 시대의 사제 » 를 가리키고, 또 하나는 그 사제들이 하는 일, 즉 « 미래를 점치기 위해 주변을 관찰하는 일 » 또는 « 미래의 징조 » 입니다. 또한 augurer 라는 동사도 있는데, 이는 당연히 « 점치다, 예언하다, 예견하다 » 등의 뜻이지요. 그런가하면 자주 쓰이는 단어 inaugurer 역시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단어는 « 개막하다, 시작하다 » 등의 뜻인데, 이것은 애초에 새로운 성전이나 기념물 등을 지으면 아우구르들이 그 건물의 안전과 번성을 예언하며 축성하였기 때문입니다.

라띠나어 augur 는 불어에서 거의 모양에 변화가 없는 augure 뿐 아니라, 모양이 많이 달라진 heur 로도 발전하였습니다. heur 는 « 징조, 운, 행운 » 이라는 뜻이죠. 여기에 좋은 운이면 bon 을 붙이고, 나쁜 운이면 mal 을 붙여,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bonheur, malheur 라는 단어들이 태어났습니다.

다시 augustus 로 돌아와, 이 단어는 불어에서 auguste 로 발전하였습니다. 역시 프랑쓰에서도 로마에서처럼 왕들의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였던 단어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 왕은 필립 2세 (Philippe II) 인데, 그는 44년간 재위하면서 프랑쓰 왕권을 강화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고,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미 살아생전부터 auguste 라는 수식어가 이름 뒤에 따라다녔고, 지금도 필립 2세라기 보다는 필립 오귀스뜨 (Philippe Auguste) 라고 자주 불립니다. 더군다나 그는 8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주 적당한 별명이었던 것이지요.

Auguste 는 또한 남자 이름으로도 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Augustin, Augustine 같은 애칭들이 나오기도 했구요. Augustin 을 더 줄이면 Tintin 이 됩니다. 물론 TintinAugustin 외에도 Martin 이라든지 Justin 이라든지, 다른 이름의 애칭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만화 주인공 땅땅의 진짜 이름이 오귀스땅일 수도 있다는 사실 ! 이렇게 불어에서는 한 음절을 반복하여 애칭을 만들 때가 많은데, 마찬가지로 Auguste 의 중간 음절을 반복하여 Gugusse 라는 애칭도 있습니다. gugusse 는 이제는 일반명사화 되어 « 써커쓰의 광대 » 를 뜻하기도 하고, 넓은 의미에서 그저 « 웃기는 사람 », 그리고 더 넓은 의미에서 그저 « 사람, 남자 » 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군대에서 많이 쓰이면서 gus 로 다시 한 번 줄어, « 군인 », 그리고 뜻이 또 확장되어 « 녀석, 놈 » 등의 뜻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고귀하고 엄숙하고 종교적인 의미였던 augustus 가 참 많은 변화를 겪었지요 ?

vendredi 23 octobre 2009

몽쁠리에 (Montpellier)

몽쁠리에에로 데빠르뜨멍의 수도 (chef-lieu) 이자, 렁그독-루씨용 (Langudoc-Roussillon) 지방의 수도이기도 한 프랑쓰 남부의 주요 도시입니다. 인구수로 볼 때도 프랑쓰에서 여덟번째로 큰 도시라고 합니다. 몽쁠리에는 바다와 접한 도시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중해와 매우 가깝기 때문에,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1년 내내 따뜻한 편이고, 해가 항상 화창한, 즉 많은 프랑쓰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Montpellier 라는 도시명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몽쁠리에는 실제로 언덕 위에 지어진 도시이기 때문에 mont 이 « 산 » 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나, pellier 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무할 뿐입니다 : « 헐벗은 산 » (mont pelé), « 처녀들의 산 » (mons puellarum), 등등. 학술적으로 가장 진지하게 여겨지는 설은 « 자물쇠 산 » 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도시의 라띠나어 이름은 Mons pestelarium 이었는데, 비록 이 pestelarium 의 의미가 명확치 않으나, pessulus « 자물쇠 » 와 관계있을 것이라는 가정이지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몽쁠리에는 실제로 주변 지역의 통행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Montpellier 에 관한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e 다음에 l 이 두 개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몽쁠리에] 라 발음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발음되려면 l 이 하나만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l 이 두 개라면 [몽뻴리에] 로 발음되어야 하구요. 사실 몽쁠리에의 원래 이름, 즉 옥어 이름은 [몬뻴리에] 로 발음되었습니다. 아마도 불어로 변환되면서 l 의 발음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쁠라쓰 들 라 꼬메디 (Place de la Comédie) 를 제외하면, 몽쁠리에에서 특별히 볼 것은 없고, 전반적으로 너무너무 예쁜 도시라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살기에 상당히 쾌적해 보이는 곳이기는 합니다. 또 몽쁠리에는 중세부터 의대가 유명했는데, 지금까지도 몽쁠리에 1대학의 의학과는 큰 명성을 자랑합니다.

Place de la Comédie de Montpellier

dimanche 11 octobre 2009

에로 (Hérault)

에로프랑쓰 남부를 흐르는 강 (fleuve) 의 이름입니다. 약 150 km 길이의 이 강은 마씨프 썽트랄 (Massif Central) 의 남쪽에 있는 산 몽 떼구알 (Mont Aigoual) 에서부터 흘러나와, 갸르 (Gard) 와 에로 (Hérault) 두 데빠르뜨멍을 거친 후, 지중해로 빠집니다.

프랑쓰 남부에 위치해 있는 만큼, 원래 강의 진짜 이름은 옥어로 Erau [에라우] 였습니다. 지금은 불어화된 이름을 쓰는데, 앞에 무성 h 를 붙여 씁니다 (따라서 l'Hérault). hérauthéros 는 비록 유성 아쉬로 시작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발음되지 않으므로, Hérault 는 이들과 똑같이 발음됩니다.

에로 강은 에로 (Hérault) 라는 데빠르뜨멍에도 그 이름을 주었고, 또 끌레르몽-레로 (Clermont-l'Hérault) 라는 작은 도시에도 이름을 주기도 했습니다.

mercredi 10 juin 2009

룰따비으 (Rouletabille)

땅땅하면 저는 어딘가 모르게 룰따비으가 생각납니다. 룰따비으도 프랑쓰 사람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허구 속의 인물로, 역시 취재보다는 사건 해결에 집중하는 젊은 기자입니다. 다만, 땅땅이 만화의 주인공인 반면, 룰따비으는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룰따비으는 프랑쓰의 작가 갸스똥 르루 (Gaston Leroux, 1868-1927) 가 만들어낸 인물로, 노란 방의 비밀 (Le Mystère de la chambre jaune, 1907) 이라는 책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 후 이 책의 후속편이랄 수 있는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의 향기 (Le Parfum de la dame en noir, 1908) 에도 등장하지요. 그외에도 르루는 룰따비으가 등장하는 추리소설들을 여러권 발표하였습니다 (총 여덟 편).

이 인물의 원래의 이름은 죠제프 죠제팡 (Joseph Joséphin) 인데, 룰따비으는 일종의 별명처럼 쓰입니다. 불어를 아는 사람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RouletabilleRoule ta bille, 즉 « 너의 구슬을 굴려라 » 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bille 는 직역하면 « 구슬 » 이지만, 때로는 사람의 동그란 « 머리 » 를 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대중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이름을 « 머리를 굴려라 » 라고 이해하면 더 재미있겠지요. ^^

실제로 소설에서 룰따비으는 매우 동그란 머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특히 이마가 넓어서 더욱 동글동글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 동그란 머리를 굴려서 복잡한 사건들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지요. 에르제가 그린 땅땅 역시 매우 동그란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룰따비으의 이야기들은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었고, 텔레비젼 연속극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프랑쓰에서 다시 룰따비으 바람이 분 것은 2003년에 브뤼노 뽀달리데쓰 (Bruno Podalydès) 가 노란 방의 비밀을 다시 연출하면서이지요. 여기서 룰따비으 역할은 유명 배우이자 브뤼노의 동생인 드니 뽀달리데쓰 (Denis Podalydès) 가 맡았습니다. 사실 소설 속 룰따비으는 18세인데, 드니 뽀달리데쓰가 이 역할을 연기했을 때 그의 나이는 마흔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니 뽀달리데쓰는 소설 속의 묘사처럼 동그란 머리와 똘망똘망한 눈빛을 갖고 있는 배우였기 때문에, 이 역할에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어린 배우를 쓴 것보다 더 현실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드니 뽀달리데쓰 이외에도 이 영화에는 프랑쓰의 수많은 명배우들이 등장했습니다 : 싸빈 아제마 (Sabine Azéma), 삐에르 아르디띠 (Pierre Arditi), 미꺄엘 롱달 (Michael Lonsdale), 끌로드 리슈 (Claude Rich)... 이들 대부분이 같은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후속작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의 향기 (2005) 에도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저는 개인적으로 르루의 소설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하게 짜여진 추리소설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영화는 나름대로 독특한 유머가 돋보여서 재미있었습니다.

노란 방의 비밀의 예고편 (bande-annonce)

mardi 2 juin 2009

뒤뽕과 뒤뽕 (Dupond et Dupont)

만화 연작 땅땅과 밀루의 모험 속에는 땅땅과 밀루 외에도 뗄레야 뗄 수 없는 두 명의 짝꿍이 등장합니다. 뒤뽕 (Dupond) 과 뒤뽕 (Dupont) 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은 형사들인데, 항상 땅땅이 다 해결해 놓은 사건에 뒤늦게 끼여들어 일을 조금 망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매우 흡사한 외모와 똑같은 옷차림에, 행동과 말투도 꼭 쌍둥이 같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보여주듯, 이들은 쌍둥이는 커녕 한 형제도 아닙니다. 이들을 한꺼번에 통칭할 때는 les Dupondt 이라고 부릅니다.

너무나 닮은 두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콧수염입니다. 뒤뽕 (Dupond) 은 이름의 끝자 D 를 90도 눕힌 모양의 콧수염을 하고 있고, 뒤뽕 (Dupont) 은 이름의 끝자 T 를 180° 뒤집은 모양의 콧수염을 하고 있습니다.

뒤뽕과 뒤뽕

위 그림에서 왼쪽에 있는 사람이 뒤뽕 (T),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뒤뽕 (D) 입니다.

땅땅의 만화가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고유명사들도 재미나게 번역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뒤뽕과 뒤뽕의 이름은 말장난적인 특성 상 어떻게 각 나라 말로 번역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영어 : Thomson and Thompson (톰쓴과 톰쓴)
독어 : Schulze und Schultze (슐츠와 슐츠)
에스빠냐어 : Hernández y Fernández (에르난데스와 페르난데스)
라띠나어 : Clodius et Claudius (끌로디우쓰와 끌라우디우쓰)

vendredi 30 janvier 2009

셩-젤리제 (Champs-Élysées)

자칭 타칭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la plus belle avenue du monde) 이라고 불리는 셩-젤리제는 빠리 중앙으로부터 서쪽을 향해 길게 뻗은 대로 (avenue) 를 말합니다. 정확한 행정 구역 이름은 avenue des Champs-Élysées 이며, 쁠라쓰 들 라 꽁꼬르드 (place de la Concorde) 와 쁠라쓰 샤를-드-골 (place Charles-De-Gaulle), 두 광장을 이어주는, 길이 약 2 킬로미터, 폭 약 70 미터의 길입니다. 빠리의 길들은 대부분 좁고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셩-젤리제처럼 곧고 넓은 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긴 하지만,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 이라는 것은 너무 광고문안적인 표현이 굳어진 것 아닌가 합니다. 혹시 옛날에는 더 아름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넓게 트인 길에 가로수가 끝이 안 보이게 줄지어 있고, 인도도 매우 넓어서 산책하기에 쾌적한 길이었을테니까요. 사실 이미 18세기에도 이 동네를 빠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역의 하나라고 묘사한 문서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점들, 은행들, 식당들, 여행사들이 너무 많이 들어 차 있어서, 과연 이 길만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예전에는 최고급 상점들 위주라 희귀성이라도 있었지만, 요즘은 전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체인 상표들이 셩-젤리제를 수 놓고 있습니다.

셩-젤리제에서 그나마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부위는 꽁꼬르드 광장부터 롱-쁘왕 데 셩-젤리제 (rond-point des Champs-Élysées), 즉 아브뉘의 한 중간 정도까지입니다. 여기도 물론 차도에는 차들이 씽씽 달리지만, 양 옆 인도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고, 인도의 폭이 거의 삼사백미터에 가깝도록 넓직하기 때문에 산책하는 맛이 있습니다. 물론 셩-젤리제의 나머지 부위도 빠리의 보도로서는 정말 넓은 편이지만, 관광객들로 미어 터지고, 소매치기들의 활약이 많으며, 잡상인들로 들끓기 때문에, 발디딜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셩-젤리제 — 또는 빠리 사람들이 줄여 말하듯 셩 (Champs) — 에 가면, 알 수 없는 흥분과 때로는 « 감동 » 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괜히 술렁이는 분위기 때문이겠지만요. 특히 11월 말부터 가로수에 성탄절 장식을 했을 때는 정말 엘리제 (Élysées) 들판 (champs) 에 온 듯한 기분도 듭니다. 엘리제 들판은 그리쓰 신화에서 영웅들과 착한 사람들이 죽은 후 가게 되는, 일종의 천국과 같은 장소를 말하지요. 여기서부터 이 길의 이름이 왔으며, 그 외에도 프랑쓰에는 엘리제라는 이름을 딴 장소나 명소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ex. Palais de l'Élysée).

아브뉘 데 셩-젤리제는 매년 7월 14일 군인들의 행진 장소로 쓰이고, 또 매년 여름 뚜르 드 프렁쓰 (Tour de France = 프랑쓰 일주 자전거 대회) 의 종착지로도 쓰이며, 그 외에도 특별한 행사들, 주로 화려한 축제 분위기의 행사들이 종종 열립니다. 공식적인 행사 외에도 나라에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빠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와 모여드는 곳도 셩-젤리제랍니다.

셩-젤리제의 성탄 장식

꽁꼬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위에서부터 개선문 쪽을 향해 바라 본
아브뉘 데 셩-젤리제source de cette photo

mercredi 28 janvier 2009

엘리제 궁 (Palais de l'Élysée)

오뗄 마띠뇽프랑쓰 수상의 공식 관저라면, 프랑쓰 대통령의 공식 관저는 엘리제 궁입니다. 엘리제 궁도 갈리에라 궁처럼, 사실 궁이라기 보다는 오뗄 빠르띠뀔리에라 보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오뗄 마띠뇽과 비슷한 시기 (1722) 에 완성된 이 집은 그 첫주인인 에브르 백작 (Comte d'Évreux) 의 이름을 따서 한동안 오뗄 데브르 (Hôtel d'Évreux) 라고 불렸으며, 바띨드 도를레엉 (Bathilde d'Orléans), 즉 부르봉 공작 부인의 소유이던 시절에는 오뗄 드 부르봉 (Hôtel de Bourbon) 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프랑쓰 혁명으로 재산을 많이 잃게 된 바띨드 도를레엉은 오방 (Hovyn) 이라는 상인과 손을 잡고, 자신의 저택 1층과 정원을 대중에게 공개하였습니다. 이 때 여기에 일반인들이 많이 드나들면서, 저택의 위치가 아브뉘 데 셩-젤리제 (avenue des Champs-Élysées) 와 가깝다하여, 엘리제 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엘리제 궁은 공식적으로는 제 2 공화국 시절부터 프랑쓰 대통령의 공식 거처로 지정되었으나, 대통령으로 뽑힌 나뽈레옹 3세가 황제로 둔갑하면서, 역사적으로 진짜 왕궁이었던 뛰일르리로 옮겨 가 버리는 바람에, 엘리제 궁이 실제 역할을 발휘하게 된 것은 1873년 이후부터입니다. 이후로는 지금까지 프랑쓰의 모든 대통령들이 엘리제 궁에서 집무를 보고 생활을 하나, 대통령 관저로서 적합치 않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엘리제 궁이, 위에서 말했듯 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작고, 관광객으로 들끓는 셩-젤리제 바로 옆, 상점들이 즐비한 좁고 긴 거리 (rue du faubourg saint-Honoré) 에 위치해 있는 데서 생기는 여러 안전 문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대통령이 뽑힐 때마다 이사 계획이 논의되다가도, 번번이 무산되고 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알 수가 없지요. 엘리제 궁 역시 문화유산의 날들 같은 드문 기회에 일반인의 구경을 허락합니다.

삼색기가 휘날리는 엘리제 궁의 정문source de la photo

lundi 26 janvier 2009

오뗄 마띠뇽 (Hôtel Matignon)

마리아 브리뇰레-쌀레 (Maria Brignole-Sale) 는 갈리에라 궁 외에도 빠리 시내에 또하나의 화려한 오뗄 빠르띠뀔리에 (hôtel particulier) 를 소유했었습니다. 그 첫 소유자였던 쟉 드 마띠뇽 (Jacques III de Matignon) 의 이름을 따서 오뗄 마띠뇽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1725년에 완성된 이래, 상속과 판매를 통해 끊임없이 주인을 바꾼 뒤, 1848년 라파엘레 데 페라리 (Raffaele de Ferrari) 의 소유가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갈리에라 공작 (duc de Galliera) 이며, 마리아 브리뇰레-쌀레의 남편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며, 빠리에서 리용을 거쳐 마르세이으까지 가는 철도를 놓기도 한 갈리에라 부부는 갈 곳 없는 필립 도를레엉 (Philippe d'Orléans) 과 그 가족들에게 오뗄 마띠뇽의 1층을 내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쓰는 꼬뮌 드 빠리를 거친 후 제 3 공화국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왕위 계승자 (prétendant au trône) 임을 자칭하는 필립 도를레엉은 자신의 조상들과는 달리, 왕궁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필립 도를레엉의 맞딸 아멜리 도를레엉 (Amélie d'Orléans) 이 뽀르뛰갈의 인판떼 까를로쓰 (Carlos ou Charles) 와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갈리에라 부인은 1886년 5월 14일, 오뗄 마띠뇽에서 매우 성대한 잔치를 열었고, 여기에는 삼천여명의 귀족들과 왕정파들이 초대받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오뗄 마띠뇽이 위치해 있는 뤼 드 바렌 (rue de Varenne) 이 마차와 자동차로 미어 터졌는데, 하필 그 때 죠르쥬 끌레멍쏘 (Georges Clemenceau) 의 차 역시 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급진 좌파 국회의원으로 이름을 얻고 있던 끌레멍쏘는 호사스럽게 차려 입은 왕정주의자들이 오뗄 마띠뇽 앞에 길게 줄을 지어 늘어 서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추방법을 제안하게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또는 이 때의 차막힘에 휘말려 든 것은 끌레멍쏘의 차가 아니라 당시 국무총리였던 샤를 드 프레씨네 (Charles de Freycinet) 의 차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전설적인 일화를 떠나, 그 다음날부터 신문들, 특히 르 피갸로 (Le Figaro) 같은 우파 신문들이 오뗄 마띠뇽에서 있었던 왕정주의자들의 모임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제 3 공화국 정부는 추방법의 통과를 급하게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했듯, 추방법으로 오를레엉 일가가 망명길에 오르게 되자, 갈리에라 부인은 갈리에라 궁과 자신의 예술품을 프랑쓰에 기여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대신 갈리에라 궁은 빠리 시에, 예술품은 제노바 시에, 오뗄 마띠뇽은 외스터라이히의 황제에게 기증하고 죽습니다.

외스터라이히 측은 오뗄 마띠뇽을 잠시 재불 대사관으로 사용했으나, 1차 대전의 발발로, 두 나라는 적군이 되며, 프랑쓰는 오뗄 마띠뇽을 적군의 재산으로 압수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수많은 교섭 끝에, 오뗄 마띠뇽은 1922년부터 프랑쓰 국가의 소유가 되며, 1935년 이후로는 국무총리의 공식 관저가 됩니다. 1958년부터는 제 5 공화국의 출범으로 정부 체제가 조금 바뀌게 되어, 국무총리 (président du Conseil) 대신 수상 (premier ministre) 이 내각의 우두머리가 되고, 오뗄 마띠뇽은 지금까지도 프랑쓰 수상의 사무실이자 그 가족들이 먹고 살고 자는 숙소로 쓰이고 있습니다.

오뗄 마띠뇽은 대부분의 다른 오뗄 빠르띠뀔리에와 마찬가지로 넓은 뒷정원을 가지고 있는데, 빠리 시내에서 대중에게 개방된 공원들을 제외하면 가장 넓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6년 수상으로 임명된 레몽 바르 (Raymond Barre) 이래 역대 모든 수상들은 이 정원에 자신이 원하는 나무를 한 그루씩 심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물론 평소에는 오뗄 마띠뇽과 그 정원은 일반인에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유산의 날들이나 하얀 밤 같은 특별한 행사 때는 개방되기도 합니다.

Hôtel Matignon
source de la photo

jeudi 15 janvier 2009

도쿄 궁 (Palais de Tokyo)

불어 palais 는 흔히 « 궁 » 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이 항상 « 왕궁 » 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palais 는 왕궁은 물론, 그에 준할 만큼 « 크고 화려한 건축물 » 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의 하나가 여러 박물관을 품고 있는 샤이오 궁입니다. 그리고 샤이오 궁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도쿄 궁이라 불리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 궁 역시 1937년의 세계 박람회를 치루기 위해 지어졌으며, 샤이오 궁처럼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Palais de TokyoSource de la photo

현재 도쿄 궁은 현대 미술관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에는 사실 두 개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하나는 빠리 시에서 운영하는 빠리시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이고, 또하나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현대 창작의 장 (Site de création contemporaine) 입니다. 빠리시립 현대 미술관썽트르 뽕삐두 (국립) 와 함께 프랑쓰의 주요 현대 미술관의 하나이며, 현대 창작의 장은 이러한 박물관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실험적인 현대 미술, 그리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예술 (상업용 디자인, 의상, 비데오 놀이 등) 에까지 개방된 전시 공간입니다.

도쿄 궁이라는 이름은 물론 일본의 수도로부터 왔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 건물이 위치한 길의 이름이, 궁이 건축되던 1937년 당시에는 avenue de Tokio 였기 때문에 붙었습니다. 이 길의 이름은 현재는 avenue de New York 입니다. 아브뉘의 이름이 de Tokio 에서 de New York 으로 바뀐 때는 바로 1945년 ! 이것은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2차대전시 일본은 프랑쓰의 적이었고, 미국은 프랑쓰가 독일군에게서 해방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나라였지요. 그 때문에 길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건물의 이름은 어쩌다 보니 그대로 남았습니다. 다만 현재는 철자가 조금 바뀌어 de Tokyo 라고 씁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에는 일본의 수도명을 Tokio 라 쓰는 것이 유럽 여러 나라에서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lundi 29 septembre 2008

바르바리 오르간 (orgue de Barbarie)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이지만, 프랑쓰에서는 간혹 길거리에서 바르바리 오르간을 볼 수 있습니다. 바르바리 오르간은 특별한 종류의 이동식 오르간으로, 나무 상자에 손잡이가 하나 달린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크기는 어깨에 멜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피아노만한 것까지 다양합니다. 대개 알록달록, 어찌보면 유치하고 촌스런 그림으로 치장된 바르바리 오르간은 겉으로 볼 때는 건반도 없고, 관도 없기 때문에 과연 오르간이라 부르는 것이 적당한지 의심이 되지만, 사실은 상자 안에 일련의 관이 숨겨 있고, 여기에 바람을 통과시켜 소리를 내게 하는, 즉 오르간과 같은 원리에 의한 악기가 맞습니다. 하지만 건반은 정말 없으며, 대신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면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반드시 바르바리 오르간 전용 특수 악보가 있어야 합니다. 특수 악보란, 음표가 그려진 악보가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구멍이 빼곡히 뚫려진 두꺼운 종이 (carton perforé) 로서, 이것을 오르간의 정해진 틈에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구멍의 위치와 길이에 따라 다양한 음이 산출되게끔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사 음악을 외우고 있다 해도, 이 악보가 없으면 바르바리 오르간은 연주할 수 없으며, 원하는 곡 마다 일일이 따로, 구멍을 뚫은 개별 악보를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물론 오르간을 만든 업체에서 악보도 만들어 함께 팝니다. 그 중 한 업체의 싸이트에 가서 재밌는 사진들도 보시고 악기의 소리도 직접 들어보세요.

그 어떤 음악적 기량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옛부터 바르바리 오르간은 매우 대중적인 악기였습니다. 유랑 가수와 거리의 악사들이 시장터나 관광지 등에서 이 악기를 연주하거나,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러, 끼니를 벌곤 했지요. 지금도 일종의 민속 풍경으로서 조금 남아 있긴 하나, 점점 보기가 힘들어집니다.

악기의 이름은 이 악기의 발명가 죠반니 바르베리 (Giovanni Barberi) 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마도 이 특이한 악기가 « 낯선 이국 » (= barbarie) 으로부터 왔으리라는 생각과 발명가의 이름이 겹쳐지면서, 혼동이 생긴 것 같습니다. 바르바리 오르간은 사실 이국에서 온 것이 맞긴 하지만,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이딸리아 모데나 (Modena = Modène) 에서 18세기 초에 발명되었습니다. 그 후 이딸리아 보다도 유난히 프랑쓰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프랑쓰에서는 특히 Limonaire 라는 상표가 바르바리 오르간을 만드는 대표적인 업체로 유명해지면서 limonaire 라는 단어도 생겨났습니다. 엄격히 따지면 리모네르는 보다 큰 규모의 바르바리 오르간이라고 하는데, 일상 용어에서는 사실 두 명칭이 동의어로 쓰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Barbarie 는 철자가 변하면서까지도 고유명사라는 생각이 뚜렷하여 대문자로 남은데 비하여, limonaire 는 상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일반명사화되어 소문자로 쓰입니다.

빠리의 떼르트르 광장에서 바르바리 오르간을 연주하는 한 거리 예술가

mardi 19 août 2008

빠르나쓰 (Parnasse)

빠리의 몽빠르나쓰가 1차대전 이후 세계적인 예술의 중심지가 되기 이전, 이미 프랑쓰 문화계에서는 빠르나쓰라는 명칭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빠르나쓰는 19세기 후반, 지나치게 감성적인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특히 시 분야에서 활발했습니다. Parnasse 라는 이름은 물론 Montparnasse 와 마찬가지 어원을 가지고 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Le Parnasse contemporain (현대의 빠르나쓰) 이라는 시집의 제목에서 왔습니다. 약 십여년에 걸쳐 (1866-1876) 모두 세 권으로 나뉘어 발표된 이 시집은 거의 육백여편에 가까운 시를 수록하고 있으며, 빠르나쓰 운동의 선구자인 떼오필 고띠에 (Théophile Gautier) 부터 시작하여, 총 99명의 시인이 참여했습니다. 이 99명의 시인을 parnassiens 이라고 칭하는데, 그 대다수는 사실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다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빠르나씨앙 중에는 르꽁뜨 들 릴 (Charles Leconte de Lisle), 프렁쓰 (Anatole France),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베를렌 (Paul Verlaine), 말라르메 (Stéphane Mallarmé) 등 매우 유명한 시인들도 있었습니다.

사람 수가 99명이나 되느니 만큼, 게다가 방금 인용한 이름들처럼, 독자적인 명성을 떨칠 만큼 개성이 뚜렷한 시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빠르나쓰 운동을 단 한 마디로 규정짓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빠르나씨앙들은 모두 지나친 낭만성을 배제하고 엄격한 형식미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들은 시의 내용이나 의미보다는 어려운 운율과 각운, 특이한 음절수를 가진 싯구와 희귀한 단어 등을 찾는 데에 몰두했으며, 고띠에가 주장한 « 예술을 위한 예술 » (l'art pour l'art) 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빠르나씨앙들에 의하면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지 다른 무엇을 위해서 소용된다면 그것은 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회 문제에 작가가 참여하거나, 예술가가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것 등에 반대했으며, 개인 감정을 드러내거나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상당히 비개성적이 되었으며, 현실을 외면하려 했기에, 자연스럽게 먼 시대, 먼 장소 (예를 들면 고대 에집트) 를 동경하거나, 아니면 때와 장소를 아예 알 수 없거나, 그런 것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는 주제 - 한마디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내용을 다룹니다. 중요한 것은 시를 읽었을 때 소리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과 조화이지요. 형식미에 치중했다는 점에서 빠르나씨앙들의 시는 상당히 음악적인 데가 있으며, 실제로 이들은 음악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예술이라고 추앙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빠르나씨앙들의 시는 번역해서 읽으면 별로 흥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다른 시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비록 르 빠르나쓰 꽁떵뽀랑에 발표된 작품은 아니지만, 그냥 맛보기로, 베를렌의 달빛의 한 구절을 감상해 보세요. 빠르나쓰 시와 비슷한 분위기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빠르나씨앙들과 모든 점에서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주장 중 마음에 드는 것 한가지는, 진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피나는 노력 끝에만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술가가 자신의 즉각적인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기만 하면 예술 작품이 된다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영감을 받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식의, 극도로 낭만적인 생각들이 퍼져 있었는데, 빠르나씨앙들은 이런 생각들에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예술도 다른 기술처럼 차근차근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며, 많은 정성과 공을 들여, 갈고 닦고, 고치고 다듬어야만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답니다.

빠르나쓰 운동은 상징주의 (symbolisme) 를 낳는데 한몫 했습니다. 비록 상징주의는 빠르나쓰가 지나치게 형식미에만 집중한다고 비난하기는 했지만, 사실 빠르나쓰와 많은 특징들을 공유합니다. 베를렌, 보들레르, 말라르메 등이 빠르나쓰앙인 동시에 상징주의 시인인 것도 그런 까닭이지요. 그리고 또다른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 랑보 (Arthur Rimbaud) 는 어린 시절 바로 르 빠르나쓰 꽁떵뽀랑을 읽고 시인이 되기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samedi 16 août 2008

몽빠르나쓰 (Montparnasse)

몽빠르나쓰는 빠리 중심에서 약간 남쪽, 대략 6구와 14구, 15구가 만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네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그리쓰의 유명한 빠르나쏘쓰 산에서부터 온 것인데, 이 산은 특히 아뽈롱과 뮈즈들의 거처, 즉 문화와 예술의 근원지로 간주되곤 하지요.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빠리의 몽빠르나쓰 일대에 산은 커녕 도무지 낮은 경사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빠리 사람들이 몽마르트르 (Montmartre)몽 쌍뜨-쥰비에브 (Mont Sainte-Geneviève) 처럼, 산 같지도 않은 걸 산이라고 부르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

사실은 18세기까지는 현재의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 (bd. du Montparnasse) 와 불바르 라스빠이으 (bd. Raspail) 가 교차하는 지점 쯤에 작은 언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를 뚫으면서 깎여 없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도 이 언덕은 진짜 산은 아니었습니다. 1860년까지 몽빠르나쓰는 빠리의 외곽으로서, 그 지하는 수백년 동안 채석장으로 쓰였는데, 여기서 돌을 캐내고 난 후, 한 쪽 옆에다 필요 없는 흙과 자갈 등을 쌓아 놓기를 오랜 세월을 하다보니, 거의 작은 산을 이룰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 인공 흙더미에 옛날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빠르나쓰 산 (Mont Parnasse) 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옛날에 몽빠르나쓰가 있던 교차로
(멀리, 유명한 꺄페 라 로똥드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 비웃기 위해 붙인 이름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제 값을 하게 되었습니다. 몽마르트르에서 살던 화가들과 시인들이 점차 빠리 시내와 보다 가까우면서 방값도 적당한 몽빠르나쓰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많은 외국인 망명객, 또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프랑쓰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몽빠르나쓰는 매우 다양한 색깔을 지닌 활기찬 동네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유명한 꺄페, 뮤직홀, 극장 등이 밀집되면서 몽빠르나쓰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몽빠르나쓰에서 살았던 유명한 사람들 중 몇몇 : 모딜리아니, 위트리요, 쑤띤, 브락, 샤걀, 삐까쏘, 루오, 끌레, 레제, 마띠쓰, 그리쓰, 부르델, 쟈꼬메띠, 뒤셩, 쟈꼽, 아뽈리네르, 썽드라르,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밀러, 파운드, 레, 콜더, 죠이쓰, 레닌, 트로츠끼, 싸띠, 미요, 오네게르. 오릭, 뿔랑크, 아라공과 트리올레, 싸르트르와 보브와르, 드미와 바르다...

몽빠르나쓰를 찾은 사람들의 국적은 각양각색이었지만, 20년대에는 특히 금주법을 피해서 도망온 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작가, 예술가, 지식인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자유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또 19세기 말에 프랑쓰 북서부를 연결하는 기차 노선이 생긴 이후로는 많은 브르따뉴 사람들이 몽빠르나쓰로 모여들었습니다. 몽빠르나쓰 역에 내린 이들은 멀리 가지 않고 이 주변에 정착한 것이지요. 브르따뉴 사람들은 프랑쓰 나머지와는 다르게 쎌트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색다른 분위기를 갖는데 한 몫 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시작된 재개발 계획 때문에 이런 전설적인 몽빠르나쓰의 자취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옛 몽빠르나쓰 역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59층짜리 몽빠르나쓰 빌딩이 들어섰으며, 그 옆에 약간 자리를 옮겨 빠리에서 유일하게 현대식 외관을 갖춘 기차역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현재는 역과 빌딩을 중심으로 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현대식 상업 시설과 사무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La tour Montparnasse et la gare Montparnasse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화가에서부터 조금만 멀어지면 몽빠르나쓰는 상당히 쾌적한 분위기를 주는 동네입니다. 대단한 관광거리는 없지만, 죽죽 뻗은 대로에 가로수가 울창한 넓은 인도, 종종 눈에 띄는 아르 데꼬 건물들, 여전히 밀집되어 있는 크렙 식당들 (크렙은 브르따뉴의 전통 음식), 유서 깊은 꺄페들과 크고 작은 연극 무대들, 호젓한 몽빠르나쓰 묘지... 이 모든 것들이 몽빠르나쓰를 여전히 매력적인 장소로 유지해 주고 있습니다.

mercredi 30 juillet 2008

몽마르트르 (Montmartre)

몽마르트르는 빠리 북쪽의 산 이름이자, 그 산을 둘러싸고 있는 동네의 이름입니다. 사실 산 (mont) 이라기 보다는 작은 언덕 (butte, colline) 이지만, 땅이 매우 평평한 빠리에서는 어쨌거나 가장 높은 장소입니다. 물론 에펠탑 (Tour Eiffel) 이나 몽빠르나쓰 빌딩 (Tour Montparnasse) 같이, 인간이 세운 더 높은 건물들도 있지만, 자연 지형 중에서는 몽마르트르가 빠리의 최고 지점입니다. 그 정상에서부터 내려다보면 빠리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몽마르트르 정상에서 내려다 본 빠리
(vue sur Paris)

Montmartre 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빠리의 최초의 주교였던 성 드니가 3세기 무렵 이 언덕에서 순교를 당한 후 순교자의 산 (Mons martyrum)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이미 그보다 훨씬 이전 로마 시대부터 전쟁의 신 마르쓰에게 바쳐진 산 (Mons Martis) 이었다는 설입니다. 아마도 결국은 두 이름이 혼합되어 현대 불어의 Montmartre 로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몽마르트르가 빠리의 일부가 된 것은 그다지 오랜 일이 아닙니다. 1860년까지 몽마르트르는 빠리와는 별개의 독립된 도시로서, 그 때까지는 주민의 수도 적었고, 나무와 밭이 우거진 진짜 산 다운 산이었답니다. 지금은 집과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차서, 산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마르트르는 어딘가 모르게 시골스런 분위기가 납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성심 성당떼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 정도만 보고 돌아가는데, 몽마르트르를 구석구석 걸으면서 둘러보면 매력적인 장소가 정말 많습니다. 이 때,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다녀도 나쁠 것은 없으나, 사실 좋은 안내책과 지도를 가지고 산책하는 것을 권합니다. 왜냐하면 좁은 골목길, 가파른 층계, 숨겨진 정원, 유명한 예술가들의 집, 등등은 사실 쉽게 눈에 띄지 않거든요.

몽마르트르의 여기저기

그런데 몽마르트르를 처음에는 우습게 보았다가도 이렇게 걸어다녀 보면 꽤 경사가 심한 산이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면 몽마르트로뷔쓰 (Montmartrobus) 라는 버쓰를 타는 것도 좋습니다. 이 버쓰는 빠리의 일반 시내 버쓰와 똑같은데 다만 몽마르트르 산동네 만을 운행하는 노선입니다. 보통 버쓰나 지하철 타는 표를 한 장 내고 타거나, 아니면 정기권이 있는 사람들은 수십번 마음껏 탈 수 있습니다. 이 버쓰는 몽마르트르의 유명 관광지들은 물론, 꼬불꼬불하고 좁고 가파른 길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기 때문에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jeudi 24 juillet 2008

뛰일르리 (Tuileries)

1871년의 꼬뮌의 진압 동안 빠리시는 많은 인명을 잃었을 뿐 아니라, 여러 유적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흔히 말하기로는, « 악독한 » 꼬뮈나르들이 스스로 빠리의 명소에 불을 지르고 폭파시켰다고 하는데, 요즘은 조금 다른 견해들도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빠리 시민군이 뛰일르리 궁이나 시청, 대법원 같은 기념비적 장소들을 방어 요지로 삼은 것은, 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런 장소들이 꼬뮌 드 빠리의 주요 행정기관이었으므로,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꼬뮈나르들에게는 당연한 의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는, 정부군이 이런 유적지들을 파괴시키면서까지 밀고 들어오지는 감히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으리라는 것이죠. 하지만 정부군은 문화 유산의 파괴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결국 시민군도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열세에 몰리다보니, 시간을 벌기 위해, 의도적인 화재를 일으키는 일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다보니 오늘날 과연 어느쪽 군대가 역사적 장소의 파괴에 더 큰, 또는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영원히 사라진 대표적인 건물이 바로 뛰일르리 궁 (Palais des Tuileries) 입니다. 뛰일르리는 옛날에 기와 (tuile) 를 굽던 장소에 지어진 궁으로, 현재의 루브르 궁과 뛰일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이 만나는 경계에, 남북으로 길게 세워졌던 건물입니다. 이 궁은 1564년, 프랑쓰의 왕비이자 섭정이었던 꺄트린 드 메디씨쓰 (Catherine de Médicis) 의 명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한 후로, 종종 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지만, 왕실이 베르싸이으로 이주한 후는 거의 버림받은 상태였습니다. 왕실이 다시 뛰일르리로 돌아온 것은 1789년 10월 6일로, 이 날 빠리의 여자들은 손에 부엌칼과 곡괭이를 들고 베르싸이으까지 찾아가서, 억지로 왕과 왕비를 빠리로 끌고 왔습니다. 이후로 뛰일르리는 체제가 무엇이든 간에 프랑쓰 정부의 중심이 됩니다.

우선 루이 16세는 비록 감시받는 상태로나마 1792년까지 뛰일르리에서 입헌왕정을 유지했으며, 그가 사형된 후로는 혁명 정부가 뛰일르리에 자리잡습니다. 나뽈레옹 역시 집정관 (consul) 시절이나 황제 (empereur) 시절이나, 뛰일르리 궁을 본거지로 삼았고, 왕정 복귀가 된 후로는 루이 16세의 두 동생,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차례차례 뛰일르리 궁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들어선 7월 왕정 (Monarchie de juillet) 의 주인공 루이-필립 역시 뛰일르리에 왕실을 차렸으며, 그 역시 밀려났을 때는 프랑쓰 최초의 대통령 (président) 으로 뽑힌 루이-나뽈레옹 보나빠르뜨가 뛰일르리를 대통령 관저로 삼았습니다. 곧이어 그가 나뽈레옹 3세로 등극하면서 뛰일르리는 나뽈레옹 1세 때처럼, 황제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제 2 제정이 무너진 후, 뛰일르리궁은 꼬뮌의 차지가 되었으며, 결국 1871년 피의 주간 때 이 궁전은 꼬뮈나르들이 저지른 화재에 의해 장장 3일간을 탔다고 합니다.

하지만 뛰일르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이 때가 아닙니다. 이 때의 화재는 나무로 장식된 뛰일르리의 내부만 태웠지, 돌로 만들어진 골격과 외부는, 그을림을 제외하고는, 거의 피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꼬뮌이 몰살된 후 제 3 공화국 정부는 뛰일르리를 재건하려는 계획도 여러번 가졌습니다. 하지만 여러번의 업치락 뒷차락 끝에 결국 1883년에 아직도 버티고 서 있던 뛰일르리 본궁을 깨끗이 철수시켰습니다.

하지만 뛰일르리를 구성하던 몇몇 부속 건물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선 뛰일르리 궁과 루브르 궁을 연결하던 두 건물 (플로르 관과 마르썽 관) 은 그대로 있으며, 뛰일르리 궁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꺄루젤 개선문 역시 굳건히 서 있습니다. 또 뛰일르리 정원에는 나뽈레옹 3세가 사용하던 손바닥 놀이장 (Jeu de paume) 이, 그 맞은편에는 똑같이 생긴 온실 (Orangerie) 이, 지금은 모두 박물관으로 변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뛰일르리 궁이 사라진 바람에, 오늘날의 관광객들은 루브르 마당부터 꽁꼬르드 광장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드넓은 정원을 산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정원을 산책하고 나면 꼭 신발과 바지 밑자락이 뽀얗고 고운 흙먼지로 뒤덥히는데, 그것을 보면서, 이 정원의 흙으로 원래는 기와를 구웠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꺄루젤 개선문 (Arc de triomphe du Carrousel)
왼쪽부터 꺄루젤 개선문, 마르썽 관, 루브르 궁
(Arc de triomphe du Carousel, Pavillon de Marsan, Louvre)

오른쪽부터 꺄루젤 개선문, 플로르 관, 루브르 궁
(Arc de triomphe du Carrousel, Pavillon de Flore, Louvre)

뛰일르리 정원의 손바닥 경기장
(Jeu de paume du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의 온실 (Orangerie du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
멀리에 오벨리스크와 에뜨왈 개선문이 보입니다.

samedi 12 juillet 2008

마리안 (Marianne)

프랑쓰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을 상징하는 여러 징표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마리안입니다. 마리안은 젊은 여자의 얼굴, 또는 어깨나 가슴 정도까지를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물로서, 반드시 프리지의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서양 문화에서는 추상적인 개념 (자유, 사랑, 아름다움, 정의, 희망, 등등) 을 흔히 여자의 모습으로 의인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프랑쓰에 왕정 (royauté) 이 무너진 후, 공화정 (république) 이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상징하기 위하여 마리안이라는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Marianne 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원인은 분명치 않으나, Marie, Anne 또는 Marie-Anne 등이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대표적으로 흔했던 여자 이름들이었기에, 아마도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굳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프랑쓰에서는 마리안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개는 공공 업무를 보는 시청, 구청, 기타 관공서들에 마리안 흉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프랑쓰 정부가 발행하는 모든 문서에는 마리안과 삼색기를 가지고 만든 로고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림). 프랑쓰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우표들은 모두 마리안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돈에도 마리안이 그려져 있습니다. 전에 아직 프랑쓰의 화폐가 프렁 (franc) 이었을 때는 물론, 외로 (euro) 화가 된 지금도 동전들의 뒷면에는 마리안이 새겨져 있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외로 동전들의 앞면은 모두 같은 모양이되, 뒷면은 자국의 특징을 살려 디자인할 수 있게끔 되어있지요. 또 프랑쓰의 유명한 정치/시사 주간지로 마리안이라는 제목을 가진 잡지도 있습니다.

최근 십여년간의 프랑쓰 우표들 (오래된 순)
(Les photos des timbres proviennet d'ici.)

프랑쓰의 몇몇 동전 (가장 왼쪽은 프렁, 나머지 둘은 외로)


그런데 이런 그림들이 모두 마리안은 아닙니다. 마리안은 반드시 프리지의 모자를 쓰고 있어야 하며, 최대 가슴까지만 표현된 그림을 말합니다. 동전에 새겨진 그림 중 전신이 다 드러난 여자는 마리안의 일종이긴 하지만, 씨뿌리는 여자 (La Semeuse) 라고 부릅니다. 역시 프리지의 모자를 쓴 이 여자는 바람을 마주보며 걸어가면서 대지에 씨앗을 뿌리는 모습으로 구현됩니다. 이것은 아무리 힘든 역경이 있어도 자기의 임무를 꿋꿋이 다하는,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심는 여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들라크르와의 유명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역시 프리지의 모자를 쓰고 있으나, 전신이 다 드러나 있으므로, 마리안이라 부르지 않고 자유라고 부릅니다. 이 그림 역시 옛날에 프렁화 지폐에 사용되었습니다.

Eugène Delacroix,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1830)
huile sur toile, 260 x 325 cm
Paris, Musée du Louvre
들라크르와의 얼굴과 그의 작품이 수놓인 100 프렁짜리 옛 지폐
(source de la photo)

프랑쓰가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여신 상 역시 마리안을 기초로 디자인되었으나, 전신이 다 드러나기에, 게다가 프리지의 모자도 쓰고 있지 않기에 La Liberté éclairant le monde (세상에 빛을 밝히는 자유) 라 명해졌습니다.

지금까지의 사진들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이 모든 마리안들이 다 똑같은 모습,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행사나 기회가 있을 때, 아니면 그저, 미리 만들어 놓은 그림이나 조각이 동이 나서 새로 만들어야 할 때, 정부는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마리안의 도안을 주문하고, 때로는 아예 마리안의 모델을 지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 년에 한번씩 유명한 여자들이 마리안의 모델로 지정되곤 합니다. 지금까지 마리안의 모델이 되었던 여자들 중에는 브리짓 바르도 (Brigitte Bardot), 꺄트린 드뇌브 (Catherine Deneuve), 미레이으 마띠으 (Mireille Mathieu), 이네쓰 들 라 프레썽쥬 (Inès de la Fressange), 레띠씨아 꺄스따 (Lætitia Casta) 등이 있습니다. 사실 특별히 공화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라기 보다는, 뽑힐 당시 대중적인 인기가 많았고, 국외에도 프랑쓰의 미를 대표하는 인물로 어느 정도 알려졌으며, 주로 예술, 연예 계열에 종사하는 여자들입니다. 하지만 바르도나 마띠으처럼 훗날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문제가 된 사람들도 있고, 또 꺄스따는 프랑쓰 공화국을 대표하는 여자로 뽑히자마자, 프랑쓰가 세금을 너무 많이 징수해서 싫다고, 낼름 영국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가장 최근에 뽑혔던 에블린 또마 (Evelyne Thomas) 라는 여자는 매우 저속한 방송의 사회자였습니다. 대중들의 호기심만 도발하는 데 집중하던 이 여자는 아름다움이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고, 국제적인 지명도는 전혀 없었으며, 인기가 떨어지자 방송국에서도 잘려 종적을 감췄습니다.

이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자, 유명인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 마리안을 뽑자는 얘기도 많고, 또 흑인, 아랍인, 동양인 등 프랑쓰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을 마리안으로 내세우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리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극히 드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평범한 국민들 중에서 마리안을 뽑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화국 정신일텐데, 불행히도 프랑쓰는 아직도 백인 중심, 그리고 예쁜 여자 중심, 그리고 돈많고 유명한 사람 중심의 사회인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lundi 7 juillet 2008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Roi aux oreilles de cheval)

트리스떵과 이즈의 이야기에는 유리 장갑 말고도 또다른 유명한 일화 하나가 더 들어 있습니다. 베룰이 저술한 판에 의하면, 꼬르누아이으 (Cornouaille) 의 왕 마르크 (Marc) 는 프로쌍 (Frocin) 이라는 난장이를 광대처럼 두고 있는데, 이 난장이가 바로 마르크에게 트리스떵과 이즈의 관계를 고자질한 장본인이며, 두 사람을 함정에 몰아 넣기도 합니다. 흉칙하고 못생겼으며, 교활하고 음흉한 성격에다가, 괴이한 마술까지 부릴 줄 아는 이 난장이를 궁정 사람들은 모두 싫어하지만, 질투에 눈이 먼 왕은 그를 크게 신임하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난장이가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 한 가지를 알고 있었기에, 왕은 그에게 조종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르크의 부끄러운 비밀이란, 바로 그가 매우 길고 뾰족하고 털이 난 귀를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프로쌍은 한동안 이 비밀을 굳게 지켰으나, 다른 간신들의 재촉이 있자, 입이 근질근질하여 결국은 그들에게 비밀을 털어 놓습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비밀을 지킨 행세를 하기 위하여, 대놓고 얘기하지 않고, 산사나무 (aubépine) 밑을 파서 얼굴을 묻고, 거기다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이 소리는 뿌리를 타고 나무의 몸통으로 올라와 사방으로 울려 퍼졌고, 나무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의 간신은 마르크 왕의 비밀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이 일화는 그리쓰 신화에 등장하는 미다쓰 왕의 전설과 매우 흡사하고,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나라의 어느 왕에 얽힌 전설이라고도 어디서 들었던 것도 같은데, 사실 각 나라마다 비슷비슷한 옛날 이야기가 구전되 오는 일이 종종 있지요 (콩쥐팥쥐와 썽드리용). 마르크의 경우는 순전히 그의 이름 때문에 이런 일화가 생겨났으리라는 짐작을 쉽게 해 볼 수 있습니다. 쎌트 계열 언어들에서 Marc 또는 Marc'h 는 고유명사로는 사람 이름이지만, 보통 명사로는 바로 « 말 » 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베룰은 트리스떵과 이즈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에서 그저 이 일화를 지나가듯 이야기하고 그만이지만, 프랑쓰의 브르따뉴 지방에는 마르크와 그의 귀를 주제로 하는 보다 복합적인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흔히 말해지기를 브르따뉴는 마르크와 트리스떵의 고향이기 때문이지요. 마르크는 원래 현재 프랑쓰의 북서부 브르따뉴의 일부인 꼬르누아이으의 왕이었는데, 이 말 귀 사건이 드러나고 나서, 영국 섬으로 건너가 거기서 자신의 사촌인 아르뛰르 (Arthur) 왕에게 남서부의 작은 왕국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왕국도 꼬르누아이으라 이름지었습니다. 현대 불어에서는 원래 꼬르누아이으는 Cornouaille, 영국에 새로 생긴 꼬르누아이으는 Cornouailles 라고 합니다. 하지만 s 는 발음되지 않기 때문에, 두 지명을 귀로 들어서는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단어는 현대 영어에서 Cornwall 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전설일 뿐, 마르크라는 왕이 실존했던 인물인지, 정말로 브르따뉴 출신인지, 귀가 유난히 길었는지, 아일랜드의 공주와 결혼을 했었는지, 그 공주가 시조카와 사랑에 빠졌었는지, 등등은 모두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프랑쓰의 꼬르누아이으와 영국의 콘월 두 지명이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lundi 31 mars 2008

데 므완, 모빌, 쁠락민 (Des Moines, Mobile, Plaquemine)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 미국의 많은 지명이 불어에서 왔는데, 이들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1° 순수 불어에서 온 지명들 ;
2° 원주민어를 불어화 시킨 지명들.

Des Moines, Mobile, Plaquemine 은 과연 어느 범주에 속할까요 ? 전형적인 불어처럼 보이지만, 이 세 지명은 사실은 원주민어에서 왔습니다.

아이오와 주의 수도인 데 므완 (Des Moines) 의 이름은 이로끄와 족의 일파인 므왕게나 또는 므왕궤나 부족의 이름을 프랑쓰 사람들이 자기네 식으로 발음하던 것이 차차 변형되어 굳어진 것입니다. Iowa 라는 명칭도 프랑쓰어를 통해서 왔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프랑쓰 사람들이 정착했으며, 그 중에는 선교를 위해 파견된 신부들과 수사들 (moines) 도 많았습니다. 그 때문에 불어 des moines 과 더욱 닮은 형태가 된 것일 수도 있겠지요.

아마도 조상 중에 수사가 있었기에 Le Moyne 이란 성을 가진 졍-바띠스뜨 르 므완 드 비앙빌 (Jean-Baptiste Le Moyne de Bienville) 은 1702년 모빌 (Mobile) 이란 도시를 세웁니다. 현재는 알라바마 주에 속하지만 애초에 모빌은 옛 루이지안의 수도로서 설립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이 도시명이 불어 형용사 mobile (움직이는) 에서 온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현대 영어에서도 [모빌] 로 발음하지만, 사실 이 지명은 그 주변에 살던 원주민 모빌 부족의 이름에서 온 것입니다.

Des MoinesMobile 이 고유명사로부터 기원한데 비해, 루이지안 주의 도시명 Plaquemine 은 일반명사에서 왔습니다. 불어 plaquemine 은 과일 « 감 » 을 가리키는데, 프랑쓰에는 없던 이 과일을 미대륙에서 발견한 프랑쓰 사람들은 원주민어 삐아끼민 을 흉내내어 plaquemine 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불어로 굳어진 것이 1719년인데, 그 얼마후 (18세기 중반 무렵) 현재의 쁠락민 시에 정착한 사람들이 감나무가 많은 지역이라해서 Plaquemine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세 지명은 Lemon Fair, Bob Ruly, Low Freight, Siskiyou 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어에서 출발한 이 지명들이 오늘날 그 원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하여, 전형적인 영어의 모습을 띄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Des Moines, Mobile, Plaquemine 은 원주민어에서 출발하였지만, 원래 형태를 완전히 잃고, 전형적인 불어 단어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런데다가 미국의 지명으로 굳어졌으니, 한 단계 더 나아간 셈이지요.

samedi 29 mars 2008

여섯 개의 조약돌 (Siskiyou)

미국 서부 꺌리포르니 (Californie) 주와 오레공 (Oregon)  주 사이에는 Siskiyou 라는 산맥이 있습니다. 이 지명은 Lemon Fair, Bob Ruly, Low Freight 과 마찬가지로 불어 six cailloux, 즉 « 여섯 개의 조약돌 » 이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한 것입니다. 왜 여섯 개의 조약돌 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정들이 있습니다 : 여섯 개의 바위가 있었다, 원주민 지명을 불어로 번역한 것이다, 또는 원주민어를 프랑쓰 사람들이 잘못 발음한 것이다, 등등...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산은 실제로 돌이 많은 산이라고 합니다 (베르몽과는 반대로).

씨쓰끼유보다 좀 더 동쪽에, 미국 중서부부터 시작하여 꺄나다까지 뻗어 있는 산맥 역시 바위가 많다 하여, 그 첫 발견자인 삐에르 말레와 뽈 말레 (Pierre et Paul Mallet), 두 형제에 의하여 Montagnes Rocheuses 라 이름지어졌습니다 (1741년). 훗날 이 지명은 영어로 번역되어, Rocky Mountains 가 되었습니다.

로슈즈 산맥 중 바위의 빛깔이 특별히 노르스름한 장소가 있는데, 그 때문에 프랑쓰 사람들이 이 지역을 Roche Jaune, 즉 « 노란 바위 » 라 불렀습니다. 이 명칭 역시 나중에 영어로 번역 되어 Yellowstone 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르껑싸쓰 주의 수도 이름, Little Rock 역시 불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1722년 졍-바띠스뜨 베나르 들 라 아르쁘 (Jean-Baptiste Bénard de la Harpe) 가 이 지역을 발견하였을 때는 Petite Roche 즉 « 작은 바위 » 라고 명했었습니다.

또한 미쑤리 주에는 Roche Percée (구멍난 바위) 라는 지명이 있는가 하면, 일리느와 주에는 Prairie du Rocher (바위의 들판) 라는 마을이 있으며, 오레공 주에는 Dalles (돌판) 이라는 도시가, 루이지안에는 Caillou (조약돌) 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꺄나다의 서부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지형을 뜻하는 단어 butte 역시 불어 butte 으로부터 왔습니다. 불어에서 이 단어는 « 언덕, 작은 산 » 을 뜻하는 말인데, 북미에서는 « 허허 벌판에 솟아 있는 고립된 돌산 » 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Butte 이라는 이름의 여러 도시와 지역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몽따나, 아리조나, 네브라스꺄, 꼴로라도, 꺌리포르니, 이다오...)

뷧 (butte)


또한 미쉬간 주의 지방이자 도시인 Lapeer 역시 불어 la pierre 가 변화를 거친 이름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그저 « 돌 ». 남 다꼬따 (Dakota du Sud ou South Dakota) 주의 수도 역시 Pierre 이지만, 이것은 « 돌 » 을 뜻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삐에르 슈또 (Pierre Chouteau) 의 이름으로부터 왔습니다. 슈또 집안은 일찍이 미국에서 모피와 가죽 거래를 시작한 프랑쓰 출신의 가문으로, 미국에는 여러 곳에 Chouteau 라는 지명도 많습니다. 그 가족의 일원이었던 삐에르는 현재 남 다꼬따의 수도가 된 장소에 정착하여 자신의 모피 시장을 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플로리드 (Floride ou Florida) 주에는 Sable 이라는 장소가, 그리고 미국 도처에는 Au Sable 이라는 지명들이, 뉴욕 주에는 Ausable 이라는 강이 있습니다. sable 은 « 모래알 » 의 뜻으로, 왜 이러한 이름을 주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필경 애초에는 복수로 썼을텐데 (Sables, Aux Sables), 시간이 흐르다보니 마치 단수형태처럼 변했으며, 아예 한 단어로 붙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Vermont 처럼).

jeudi 27 mars 2008

낮은 운송비 = 찬 물 (Low Freight = L'eau froide)

알라스꺄에는 Low Freight 이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습니다. freight 이 애초에는 특별히 물길을 통한 운송과 관련된 말이기는 했지만, 과연 호수 이름에 « 낮은 운송(비) » 라는 이름을 준 이유가 무엇일까요 ? 이것은 사실은 Lemon FairBob Ruly 처럼 전혀 엉뚱한 어원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순수한 영어처럼 보이는 Low Freight 은 알고 보면 불어 L'eau froide 가 변형된 말입니다. 알라스꺄에 있는 호수이기 때문에 프랑쓰 사람들이 그저 « 찬 물 » 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프랑쓰 사람들은 미국 도처에 Eau Claire, 또는 복수로 Eaux Claires, 즉 « 맑은 물 » 이라는 지명들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위스꼰씬에는 재미있게도 Trempealeau 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trempé à l'eau, 즉 « 물에 젖은 » 이라는 뜻입니다.

eau 라는 단어가 직접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물과 관련된 많은 불어 지명을 미국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보았듯, 미씨씨삐를 비롯한 주요 강들의 이름이 그러하며, 다섯 개의 거대한 호수들의 이름도 예외없이 프랑쓰 사람들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 중 쒸뻬리외르 호수 근처에 있는 오늘날의 미네조따 주는 애초에 프랑쓰 사람들에 의하여 Pays de Mille Lacs, 즉 « 천 개의 호수가 있는 지방 » 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때의 흔적으로, 미네조따에는 Milles Lacs 이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습니다. 단 하나의 호수인데 Mille Lacs 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순이지만, 영어로는 Mille Lacs Lake 라 부르니, 번역하면 « 천 개의 호수 호수 » 가 되는 재밌는 이름입니다.

실제로 크고 작은 호수가 많은 미네조따에는 Lac qui Parle 이라는 호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 말하는 호수 » 라는 뜻이지요. 그런가하면 꼴로라도에는 Fontaine qui Bouille 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bouillebouillir 동사 (끓다, 거품나다, 요동치다) 의 변화형으로, fontaine qui bouille 는 사실 현대 불어 문법에는 맞지 않는 표현이지만 (fontaine qui bout 라고 해야 옳음), « 끓는 샘 » 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것 같습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유난히 재잘재잘 거리거나, 뽀글뽀글 거리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겠지요.

또한 몇몇 주 (오하이오, 알라바마...) 에는 Belle Fontaine, 즉 « 아름다운 샘 » 이라는 지명이 있으며 , 위스꼰씬과 미네조따에는 Fond du Lac (호수의 바닥) 이라는 지명이 흔합니다. 한편 껑싸쓰 주에는 Marais des Cygnes (백조의 연못) 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 연못이 아니라, 미쑤리 강의 지류 중 하나입니다. 역시 미쑤리 강으로 합류되는 Platte 강은 이미 보았듯, 깊이가 너무 낮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다른 재밌는 이름으로, 루이지안 주에는 Fausse Rivière, 즉 « 가짜 강 » 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강인줄 알고 보니 호수였기에 붙은 이름이며, 오레곤 주에는 Malheur, 즉 « 불행 » 이라는 이름의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이 물난리를 일으켰거나, 이 강 근처에서 불행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인 듯 싶습니다.

오레곤 주에는 또한 Des Chutes 이라는 강이 있습니다. chute 은 « 폭포 » 를 뜻하는데, 이 강은 실제로 컬럼비아 강으로 합류되는 지점에서 니아갸라 폭포에 버금가는 거대한 폭포들을 이루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댐의 건설로 이 폭포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 댐의 이름 역시 불어 Dalles (돌판) 입니다.

니아갸라 폭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께벡의 창설자이기도 한 싸뮈엘 드 셩쁠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604년). Niagara 는 이로끄와 말로 « 해협 » 을 뜻하는 단어를 불어로 표기한 것으로, 니아갸라 강은 에리에와 옹따리오, 두 거대한 호수를 상대적으로 좁은 물길을 통해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쌍뜨-끌레르 호수 (Lac Sainte-Claire) 와 에리에 호수를 이어주는 강 역시 Détroit, 즉 « 해협 » 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결국 NiagaraDétroit 는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인 것입니다. 미쉬간 주의 도시 데트르와는 바로 이 데트르와 강을 중심으로 엉뜨완 드 꺄디약 (Antoine de Cadillac) 이 1701년 설립하였습니다. (데트르와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자동차, 꺄디약의 상표명은 바로 이 데트르와시 설립자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꺄디약에 앞서 마르껫은 1668년, 미쉬간 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Sault Sainte-Marie 를 세웠습니다. 옛 불어 sault 또는 현대 불어 saut 는 « 폭포 » 를 뜻하는 또다른 단어로, 이 도시는 쒸뻬리외르 호수와 위롱 호수를 이어주는 쌍뜨-마리 강의 폭포를 중심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지요. 그런데 훗날 이 강을 경계로 꺄나다와 미국의 국경이 나누어지는 바람에, 도시가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났습니다. 따라서 현재는 미쉬간 주에 쏘 쌍뜨-마리가 하나 있고, 꺄나다의 옹따리오 주에도 쏘 쌍뜨-마리가 하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