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redi 28 février 2007

엉리 드 셩보르 (Henri de Chambord)

현재 셩보르 성은 국가의 소유인데, 그 직전 마지막 개인 소유자는 엉리 드 셩보르 (Henri de Chambord, 1820-1883)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르봉 (Bourbon) 왕가의 마지막 왕손이었고, 왕정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대놓고 프랑쓰의 왕 엉리 5세라 불렸지요. 하지만 1789년 이후로 프랑쓰의 정치 제체가 워낙 자주 바뀌고 혼란스럽다보니, 그가 실제로 왕위에 오를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국외로 피난 생활을 해야 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1870년, 제 2 제정 (Second Empire) 이 무너지고 제 3 공화정 (Troisième République) 이 들어서면서, 다시 왕정으로 돌아갈 움직임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이 때 국회의원들 대부분이 왕정파들이었기 때문에, 아직 새 공화국이 제대로 정착되기 전에 다시 왕정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정치인들 사이에 협상이 일어났고, 엉리 드 셩보르가 공식적으로 왕이 되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었었는데, 마지막에 가서 엉리가 국기 (drapeau national) 문제에 대해 완강한 거부를 보였습니다. 대혁명 이후로 프랑쓰의 국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기, 즉 파랑, 하양, 빨강의 세 세로줄이 있는 그 국기였는데, 엉리는 이 혁명기를 버리고 옛날 왕가의 상징인 흰색 국기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미 세 왕정, 두 제정, 세 공화정이 혁명기를 채택했었으므로, 이제는 개인의 정치적 의견이 무엇이든간에, 프랑쓰 사람이라면 이 국기가 프랑쓰를 대표하는 것으로 다들 믿고 있던 참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흰색 국기가 아니면 안된다고 펄펄 뛰니, 이걸 어쩌겠습니까 ?

재미있는 것은, 왕가의 후손인 엉리는 사실 상당히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지녔던 사람이고, 그와 협상에 들어갔던 국회의원들은 엄청나게 보수적인 왕정파 사람들이었는데, 결국 진보적인 사람이 전통적인 가치를 완강하게 밀고, 보수적인 사람들이 혁명의 상징을 옹호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결국은 흰색 국기 아니면 왕 안하겠다고 끝까지 버티는 바람에, 그럼 말어, 하고 협상이 끝났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쓰는 계속 제 3 공화국을 밀고 나가기로 했고, 그 후로는 지금까지 계속 공화국의 상태로 « 그럭저럭 » ^^ 유지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제 5 공화국)

오늘의 교훈 : 별 것 아닌 일로 고집 부리지 말자.
Moralité : Ne soyons pas entêtés pour rien !

mardi 27 février 2007

셩보르 성 (Château de Chambord)

쟉 드미 (Jacques Demy) 의 영화 뽀단의 상당 부분이 셩보르 성 (Château de Chambord) 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셩보르 성은 르와르 (Loire) 강가를 수놓고 있는 여러 작은 성들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성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이 성을 좋아하지 않지만 (ma préférence va au Château de Chenonceaux), 건축전문가들에 의하면 르네썽쓰 양식의 걸작이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이 성의 설계를 누가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건축가의 이름이 어떤 기록에도 남지 않은 것이지요.

주변의 넓고 울창한 숲은 옛날에 왕의 사냥터로 쓰이기도 했다지만, 지금까지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희귀한 야생 동/식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답니다. 그런데 웬 희귀하지 않은 동물 한 종류가 침입을 했으니, 바로 비둘기 !!!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옛날 건축물들이 많은 프랑쓰에는 비둘기가 참 큰 문제입니다. 특히 셩보르 성은 워낙 꼬불꼬불하고 오밀조밀하게 생겨서 새들이 둥지를 틀기에 이상적이므로, 비둘기 수가 마구 늘어나기 시작했다지요. 그런 숨은 둥지들은 위치상 사람이 다가가기 힘들며, 성 전체에 덫을 설치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또 미관을 해치기도 하므로, 성 관리 측에서는 매 (faucon) 를 채용하기로 했습니다. 몇마리의 매들이 성 주위를 날라다니면서 비둘기들을 잡아 먹거나 죽이는 거지요. 물론 훈련사들이 있어서 언제든지 부르기만 하면 쪼로록 날아와서 훈련사의 팔에 앉습니다. 스핀 씨티 (Spin City) 의 어느 에삐조드에 의하면, 뉴욕 시에서도 비슷한 방법을 채용했었는데, 정작 비둘기의 수는 안 줄어들고 대신 뉴욕 시의 요크셔 강아지 수가 줄어들었다는...^^

그리고 셩보르 성의 중앙 입구에 들어가면 대형 나선형 계단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이 절대로 맞부딪히는 일이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알고보면 이것은 눈속임에 불과하고, 이것이 가능한 데에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지만, 여기서 설명해 버리면 재미없겠죠 ? 혹시 셩보르 성을 방문하게 되면 친구와 함께 꼭 시험해 보세요.^^



lundi 26 février 2007

당나귀 껍질 (Peau d'âne)

뻬로가 지은 동화 중 썽드리용과 상당히 비슷한 작품이 하나 더 있습니다 : 당나귀가죽 (Peau d'âne). 이 이야기는 썽드리용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은데, 프랑쓰에서는 매우 유명합니다. 여기서는 주인공 여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구두가 아니라 반지가 사용됩니다.

간단히만 소개하면, 어찌어찌하여 한 왕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의 반지를 얻게 되고, 그녀를 되찾기 위해 전국의 여자들을 모두 궁으로 불러 한 명씩 반지를 끼워보게 한 결과,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추하디 추한 뽀단, 즉 « 당나귀껍질 » 이라는 이름의 하녀가 그 반지의 소유자였더라는 얘기... 물론 그 앞뒤로 썽드리용과는 전혀 다르며, 상당히 복잡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줄거리가 더 있긴 하지만 여기서 다 설명할 필요는 없을 테구요. 썽드리용과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뽀단썽드리용 보다 더 먼저 발표되었으니, 굳이 영향의 방향을 정하자면 썽드리용뽀단의 영향을 받아서 씌어졌다고 말해야 겠지요 ?

그리고 산문인 썽드리용과는 달리 뽀단은 운문으로 쓰여졌습니다. 사실 오늘날 당나귀가죽을 아는 프랑쓰 사람들 중 17세기 운문 불어로 쓰여진 뻬로의 원작을 읽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온갖 종류의 동화책, 소설책, 그림책, 만화책, 신문 연재 만화, 종이 인형, 인형극, 카드 놀이, 영화, 만화 영화, 오뻬라 등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아녜쓰 바르다 (Agnès Varda) 가 17세기 부터 현대까지 당나귀껍질을 주제로한 다양한 매체의 각색판들을 수집해서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정말 놀랍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재미있고, 가장 잘 만들었고, 가장 유명한 각색판은 쟉 드미 (Jacques Demy) 의 동명 영화일 것입니다. 정말, 문학을 사랑하시는 분, 영화를 사랑하시는 분, 음악을 사랑하시는 분, 불어를 사랑하시는 분, 미술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이 영화 꼭 보셔야 합니다 !!! 이 영화에서 당나귀가죽의 아빠인 파란 나라의 왕 역을 맡았던 졍 마레 (Jean Marais)는 이런 말을 했지요 :

« 내가 백만장자라면 난 일을 그만 하겠다. 하지만 내가 백만장자더라도 난 이 영화만은 찍을 것이다. »
(Si j'étais milliardaire, je m'arrêterais de travailler, mais si j'étais miliardaire, je ferais quand même ce film).

dimanche 25 février 2007

Pantoufle de verre ou de vair ?

뻬로 (Charles Perraul) 가 쓴 동화의 정확한 제목은 Cendrillon ou la petite pantoufle de verre (썽드리용 또는 작은 유리신) 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리신 한 짝이 결말을 이끌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은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그런데 자연주의 (naturisme) 작가들이나 실증주의 (positivisme) 철학가들은 유리로 구두를 만든다는 생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나 봅니다. 대표적으로 발작 (Honoré de Balzac) 과 리트레 (Émile Littré) 가, 이 구두를 만든 재료는 verre (유리) 가 아니라 vair 라는 설을 내세웠습니다. vair 는 petit-gris 라 불리는 특별한 종류의 다람쥐로부터 얻은 가죽으로, 은회색 빛이 나고, 보는 각도에 따라 짙은 색깔로도 보이고 옅은 색깔로도 보이는, 고급 모피였습니다.

사실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다른 나라의 전설들을 보면, 썽드리용이 신었던 신발이 특별히 유리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 훨씬 더 이치에 맞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이 동화에서 이치에 안 맞는 요소가 어디 유리 구두 뿐인가요 ?

아무튼, 이 예는 유난히 동음이의어 (homonyme) 가 많은 불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verrevair 외에도 vers (싯구의 단수), vers (싯구의 복수), ver (벌레의 단수), vers (벌레의 복수), vers (-를 향하여, 또는 -경에. 전치사), vert (초록색 또는 초록색의), verts (앞 단어의 복수) 등이 모두 똑같이 발음됩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프랑쓰 학교에서는 어릴 때부터 받아쓰기 (dictée) 를 엄청나게 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프랑쓰 사람들이 끊임없이 크고 작은 실수를 범합니다.

samedi 24 février 2007

재 (cendre)

기름진 화요일의 다음날을 재의 수요일 (mercredi des cendres) 이라고 합니다. 이 날 꺄똘릭 신자들은 실제로 머리에 재를 바릅니다. 옛날에는 아예 재를 뒤집어 썼다고 하는데, 요즘은 살짝 이마에 재를 바르는 듯 하다가 마는 정도지요. 어쨌건, 재를 바르는 이유는 인간은 한낱 잿가루에 불과한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랍니다.

« 재 » 를 불어로 cendre 라고 하는데, 여기서 비롯된 유명한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Cendrillon. 썽드리용은 샤를 뻬로 (Charles Perrault) 가 지은 동화의 주인공으로, 계모와 의붓언니들의 심술 때문에, 공주처럼 살다 말고 일약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하녀로 전락합니다. 하루 종일 괴롭힘을 당하고 난 썽드리용은 부엌의 난로가 옆에 쭈그리고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그 때문에 치마 뒤에 재가 묻어 있는 일이 잦았습니다. 이걸 보고 집안 사람들이 그녀를 Cul-cendron, 즉 « 재 묻은 엉덩이 » 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첫째보다는 조금 덜 사나운 둘째 언니 만이 Cul-cendron 보다는 Cendrillon 이라는 별명이 더 귀엽다 하여, 그녀를 썽드리용이라 부릅니다.

이 동화가 각 나라 말로 번역되면서, 이딸리아말로는 Cenerentola, 독어로는 Aschenputtel 이라 옮겨졌는데, 두 경우 모두 « 재 » 를 뜻하는 단어 (각각 cenere, Asche) 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오로지 Cinderella 라는 영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지요. 저는 이런 것이 매우 이해가 안 갑니다. 영어를 쓰다 쓰다 못해, 제 3 국의 인명과 지명 같은 고유명사까지도 모두 영어화시켜서 써야만 하는 것일까요 ? 국어를 사랑하고, 다른 외국어도 많이 공부합시다 !!!

vendredi 23 février 2007

사육제 (carnaval)

우리 말로 « 사육제 » 라고 하는 carnaval 이 며칠 전 끝났습니다. 꺄르나발은 엄격히 말하면 주의 공현 축일 (Épiphanie, 1월 6일) 부터 기름진 화요일 (mardi gras, 2월 중하순) 까지의 기간을 의미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의미가 약간 변화하여, 기간 자체 보다는, 이 기간 동안 열리는 다양한 축제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축제를 여는 것이 전통이 된 것은, 이 기간이 끝나면 금육과 절제의 기간인 사순절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전에 마음껏 먹고 신나게 놀자라는 생각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carnaval 이라는 말 자체도 « 고기를 금한다 » 는 뜻입니다. 불어의 이 단어는 이딸리아어 carnevale 에서 왔는데, 이 말은 carne (고기, 살) + levare (없애다, 탈취하다)의 합성어입니다. 옛날에는 유럽 곳곳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다양한 꺄르나발이 많이 있었지만, 꺄똘릭 교회의 전통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면서, 이제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사실 현대에 « 앞으로 사십일간 고기를 안 먹겠다, 대신 미리 잔뜩 먹어두자 »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 그리하여 이제는 몇몇 정말 크고 화려한 꺄르나발만이 종교적 의미와는 거의 동떨어진 채 열리고 있습니다. 니쓰의 꺄르나발, 베네치아의 꺄르나발, 리오 데 쟈네로의 꺄르나발 등등.

원칙적으로 꺄르나발은 기름진 화요일 (mardi gras) 날 절정에 이르는 동시에 끝이 납니다 (현재는 예외도 있음). 이 날은 매년 날짜가 달라지지만 항상 화요일입니다. 올해에는 2월 20일었습니다. 이 날을 기름진 화요일이라 부르는 것은 역시 위에서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 기름지고 풍요롭게 먹고 마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나면 이튿날인 재의 수요일 (mercredi des cendres) 부터는 사십일간 금식을 해야하니까요.

이 사십일의 기간은 불어로 carême 이라 합니다. 이 말은 라띠나어 quadragesima 가 차차 변형된 것으로, « 40번째의 » 라는 뜻입니다. 즉 현대 불어 quarantième 과 같은 뜻이죠. 뭐가 사십번째냐 하면, 부활절로부터 사십번째 이전 날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세어보면 알 수 있지만,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사이의 정확한 날짜 수는 40이 아니라 46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여섯번의 일요일을 빼면 된다고 답하기도 하는데, 이건 뒤늦게 제안한 해결책이 우연히 맞아 들은 것일 뿐, 정확한 이론은 아닙니다. 애초에는 일요일까지 다 쳐서 정확하게 사십일이었거든요.

어쨌건 오늘이 금요일이니 사순절이 시작된지 삼일 되었네요. 그럼 다들 금식 열심히 하세요. ^^

jeudi 22 février 2007

Jan Fabre

J'ai été à la dernière expo de Jan Fabre. J'ai beaucoup aimé. Surtout cette installation nommée Le Carnaval des chiens errants morts. Ce sont des vrais chiens errants morts, qui sont empaillés et mis en espace dans une ambiance de fête. Ils portent un petit chapeau conique et ils sont entourés de plein de confetti et de guirlandes multicolores. Certains sont couchés par terre, mais certains volent. Avec leur cône, on dirait des licornes. C'est plutôt joli et joyeux, si on ne prend pas en compte le fait qu'ils sont des pauvres petits chiens morts. Quand on y pense, c'est un peu triste, mais je n'ai pas trouvé cette idée morbide ou sinistre. Ni dérangeante ni provocante non plus. J'ai ressenti plutôt de la poésie, de la tendresse, de la mélancolie, de la bienveillance. Je trouve que c'est très bien qu'au moins après leur mort, on veut leur organiser une petite fête. Les chiens abandonnés sont une des choses qui m'attristent et qui me révoltent le plus au monde.


Il y avait aussi des dessins de larmes. C'était des petits dessins simples sur du papier mouillé des larmes de l'auteur. Celui-ci note chaque fois quand il a pleuré et pour quelle raison (oignons, irritation, relation personnelle, etc.) C'était intéressant comme idée, et ces petites esquisses sont, du reste, assez jolies, mais quant au rôle ou au sens de larmes, je reste dubitatif. En tout cas, d'après ce que j'ai lu, Fabre avait déjà utilisé du sang et du sperme !


Il y avait aussi quelques autres sculptures, notamment une série de têtes d'oiseaux, intitulée Les Messager de la mort décapités, qui est aussi le titre globale de l'exposition. Mais le reste ne m'a pas beaucoup touché. Mais dans l'ensemble, j'ai bien aimé.

(Les photos proviennent du site de la Galerie Daniel Templon)

PomQ

mercredi 21 février 2007

Hurlevent

Hier, j'ai enfin regardé Hurlevent de Jacques Rivette. C'est un film que j'ai depuis longtemps aspiré à voir. Comme aucun des films adaptés du roman d'Emily Brontë ne m'a jusqu'ici jamais bouleversé, j'espérais que Rivette y réussirait, avec sa vision des choses inhabituelle, et en plus Lucas Belvaux en rôle de Heathcliff ! Mais à cause de cette longue attente peut-être, je suis très déçu. C'est un film trop classique, trop linéaire, trop « normal » pour être de Rivette. L'adapation suit très fidèlement la grande ligne du roman même si le lieu et le temps sont transposés en Provence de 1931. (D'ailleurs, j'aimerais savoir pourquoi cette époque.) Mêmes les noms des personnages sont quasiment identiques : Catherine => Catherine, Isabelle => Isabelle. Soit, mais Heathcliff en Roch fait franchement sourire.

Tout en suivant de près le roman, le film ne transmet pas l'ambiance obscure du livre. Et à mon avis, il ne propose pas non plus un autre point de vue intéressant. Pour une fois j'aurais bien aimé voir une interview du réalisateur ou autre chose du même genre pour connaître l'intention des auteurs, mais le DVD ne contient que le film.

Le jeu des acteurs sont un peu bizarre. On dirait qu'ils jouent à la théâtrale. La diction et le geste sont exagérés. Mais comme on n'est pas au théâtre, très souvent, on ne les entend pas. Mais ce n'est probablement qu'une question de technique et de budget, car ça se voit que le film est fait avec peu de moyen. Donc, ce n'est pas grave en soi, mais c'est assez gênant toutefois.

Sinon, voir Lucas Belvaux tout jeune était marrant. Mais franchement je le préfère aujourd'hui qu'à l'époque.

pomme + Q

lundi 19 février 2007

Bofinger

Il y a quelques jours, j'ai mangé chez Bofinger. Bien que j'habite tout près, c'est la première fois que je suis allé dans cette fameuse brasserie. L'intérieur était grand et spacieux, beaucoup plus que je ne l'aie imaginé. L'ambiance était chaleureuse et animée et, comme le dit le critique de Télérama, elle évoque quelques scènes des films de Claude Sautet. Il y a un grand escalier en colimaçon au milieu, et apparement il y a une coupole avec des vitraux de style art nouveau, mais je n'ai pas bien vu. Malheureusement je n'ai pas pris de photos de la salle, mais on peut voir une vue panoramique du restaurant sur le site de Bofinger.


J'ai pris en entrée des huîtres, qui étaient bonnes et frâiches. Elles l'étaient naturellement, mais pour moi qui n'en ai pas goûté depuis très longtemps, elles semblaient encore davantage.



Mon ami avec qui je suis allé au restaurant, lui, a pris une charlotte de homard à la sauce au whisky.




En plat, j'ai pris un tournedos de saumon. C'était un bon morceau, gros et épais, et bien grillé à l'extérieur et juste à point à l'intérieur. Avec des petits légumes et la sauce, il était certes bon, mais somme toute, ce n'était qu'un saumon. Contrairement aux huîtres, comme j'en mange assez souvent, je n'ai pas trouvé ça particulièrement original.


Mon ami, en revanche, a pris une choucroute de la mer, qui est beaucoup plus originale et semblait appétissante, comme cette photo.


Le dessert était assez décevant. Mon ami a pris une crème brûlée à l'orange, mais elle était entièrement froide. Il n'y avait pas ce contraste entre la crème froide et la croûte chaude. On dirait qu'elle a déjà été faite depuis longtemps. Et puis, elle n'avait pas vraiment de note d'orange. Moi, j'ai pris un vacherin glacé à la vanille et au cassis avec meringue et coulis. Sur la carte, il semblait être idéal pour moi, mais en réalité, c'était juste deux boules de glace, une à la vanille, une au cassis, noyées sous la crème chantilly écœurante. Les morceaux de meringue aussi avaient un goût bizarre. Pourtant je dirais que les glaces sont artisanales.

En conclusion, les plats sont bons sans être exceptionnels, et finalement ce que j'ai aimé le plus, c'est plutôt l'ambiance, le service, la salle, la décoration. Notre table était en effet grande et située suffisamment loin des autres. Dans les petits restaurants, les tables sont trop petites et trop serrées. Ici, ce n'était pas le cas. Et évidemment, les linges étaient de vrais tissus et propres. Globalement, c'était un bon restaurant.

jeudi 15 février 2007

백년 전쟁 (Guerre de Cent Ans)

프랑쓰영국 사이의 백년 전쟁쌀릭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ou Edouard III) 가 쌀릭법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이 전쟁의 기원이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3세는 에드워드 2세와 이자벨 드 프렁쓰 (Isabelle de France)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이자벨이 프랑쓰왕 필립 4세 르 벨 (Philippe IV le Bel) 의 딸이었으므로, 그는 프랑쓰 왕의 외손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1337년, 자기도 프랑쓰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고, 여자를 통한 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쓰는 여기에 반대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1453년까지 계속되었지요. 마지막 전투는 1453년에 끝났지만, 사실상 평화 조약은 1475년에야 맺어졌으니 공식적으로 이 전쟁은 138년간 지속된 것입니다. 이 전쟁의 거의 말기에 가서 쟌 다르크의 등장으로 승리는 결정적으로 프랑쓰의 것이 됩니다.

mardi 13 février 2007

쌀릭법 (loi salique)

프렁족은 다시 여러 분파로 나뉘는데, 그 중 쌀리앙 (Saliens) 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습을 모아 놓은 법전을 쌀릭법 (loi salique) 이라고 하는데, 이 중 한 항목에 의하면, 여자들은 선조들의 영토를 이어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프랑쓰의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명의 여왕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 법칙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라고해서 특별히 여자들이 왕이 되는 것에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들이 전혀 없을 때는 딸이 왕권을 이어 받은 경우들이 종종 있곤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쓰에서만은 죽은 왕의 친딸 보다는 삼촌, 사촌, 아니면 그 이상으로 먼 친척이라도, 반드시 남자 중에서 왕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설사 친딸에게 아들이 있다고 해도, 그 역시 상속에서 제외됩니다. 즉 쌀릭법은 외가쪽 친척은 여자건 남자건 무조건 배제시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조선 왕조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 이전에는 여왕이 있기도 했던데 비해서, 프랑쓰에서는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여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쌀릭법이 프랑쓰 왕가에서 선조들의 전통으로 엄격하게 존중된 법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법이 집성된 건 508년인데 수세기동안 까맣게 잊어먹고 있다가 1316년이 되어서야 갑자기 이 법의 정통성을 주장했으니까요. 이것은 필립 5세 (Philippe V) 가 조카인 쟌 (Jeanne) 을 몰아내고 자기가 왕이 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당시의 법학자들로 하여금 억지로 이 오래된 법을 파내어 적용시키게 한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필립 5세 자신도 딸만 남기고 죽었습니다. 결국 아빠가 제정한 법 때문에 네 딸 중 아무도 왕위를 물려받지 못했지요. 이후로는 이 법이 정말로 엄격한 국법이 되어 번번이 공주들을 왕권에서 배제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는 프랑쓰에 단 한 번도 여왕이 존재한 적이 없지만, 사실상으로는 몇몇 왕비들이 활발하게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기회를 잡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외국과의 전쟁으로 오래 동안 부재 중일 때라든지, 아들이 직접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든지 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로, 이런 때에는 주로 왕비가 섭정 (régente) 으로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국가 업무를 다스렸지요. 블렁슈 드 꺄스띠으 (Blanche de Castille, 1188-1200-1252) 나 꺄트린 드 메디씨쓰 (Catherine de Médicis, 1519-1533-1589) 가 대표적인 예로, 그녀들은 웬만한 왕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들입니다.

dimanche 11 février 2007

프렁쓰 (France)

제일 먼저 France 라는 말의 어원부터 알아보도록 하지요. 프랑쓰 말로는 [프렁쓰]에 더 가깝게 발음되는 이 국명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 이 말은 대부분의 불어 어휘와 마찬가지로, 라띠나어 (lingua latina 또는 langue latine) Francia [프란끼아] 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럼 라띠나어 Francia 는 어디서 왔을까나요 ? 이것은 프렁족 (Francs) 의 이름으로부터 왔습니다. 결국 « 프렁들의 나라 » 라는 뜻이지요.

프렁족은 5세기 무렵에 로마 제국을 침략해서 무너뜨린 제르마닉 (germanique) 민족의 일파이지만, 이미 기원후 2세기, 또는 그 이전부터 현재의 프랑쓰 땅에 조금씩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3세기에는 로마의 허락 하에 대거 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4세기에는 로마인들이 버리고 떠난 땅을 경작할 권리를 얻으면서, 이들은 현재의 프랑쓰 북동부, 벨직과 국경을 이루는 므즈 (Meuse) 강 근처에 완전히 정착합니다. 흔히 제르마닉 민족의 침략이 매우 군사적이었던 것처럼 얘기되지만, 프렁족의 경우 이렇게 여러 세기에 걸쳐 비교적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프랑쓰의 첫 왕조인 메로방지앙 (Mérovingiens) 이 나왔지요.

Francia 라는 명칭은 오존 (Ausone) 이나 아미앙 마르쎌랑 (Ammien Marcellin) 같은, 기원후 3세기 무렵의 작가들의 저작에서 처음 확인되기는 하지만, 이미 2세기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이 말은 위에서 말한, 극히 제한된 프랑쓰의 북동부 지역 만을 지칭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메로방지앙들의 점위 지역이 보다 넓게 확장되면서, 6세기에는 현재 프랑쓰의 북부 거의 전역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쓰 남부는 13세기까지 다른 언어 (옥어), 다른 문화를 가지고, 정치적으로도 비교적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었지만, 결국 북부에 합병되고 말았습니다.

Voilà, maintenant vous savez d'où vient le mot France.

Bienvenue

프랑쓰의 언어와 문화, 역사와 일상에 대한 블로그를 시작하려 합니다. 가능한 자주, 이상적으로는 최소한 하루에 하나씩의 짤막한 메싸쥬를 쓰고 싶지만, 그건 앞으로 두고 봐야겠지요. 불어를 공부하시는 분들, 프랑쓰에 관심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Bienvenue dans mon nouveau blog sur la culture française. Je parlerai des sujets aussi vastes que la langue, l'histoire et la vie quotidienne. L'idéal serait de publier au moins un message par jour, mais on verra cela au fur et à mesure. J'espère que cette modeste contribution sera utile à ceux qui étudient la langue française ainsi qu'à tous ceux qui s'intéressent à la Fr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