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18세기까지는 현재의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 (bd. du Montparnasse) 와 불바르 라스빠이으 (bd. Raspail) 가 교차하는 지점 쯤에 작은 언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를 뚫으면서 깎여 없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도 이 언덕은 진짜 산은 아니었습니다. 1860년까지 몽빠르나쓰는 빠리의 외곽으로서, 그 지하는 수백년 동안 채석장으로 쓰였는데, 여기서 돌을 캐내고 난 후, 한 쪽 옆에다 필요 없는 흙과 자갈 등을 쌓아 놓기를 오랜 세월을 하다보니, 거의 작은 산을 이룰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 인공 흙더미에 옛날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빠르나쓰 산 (Mont Parnasse) 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웃기 위해 붙인 이름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제 값을 하게 되었습니다. 몽마르트르에서 살던 화가들과 시인들이 점차 빠리 시내와 보다 가까우면서 방값도 적당한 몽빠르나쓰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많은 외국인 망명객, 또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프랑쓰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몽빠르나쓰는 매우 다양한 색깔을 지닌 활기찬 동네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유명한 꺄페, 뮤직홀, 극장 등이 밀집되면서 몽빠르나쓰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몽빠르나쓰에서 살았던 유명한 사람들 중 몇몇 : 모딜리아니, 위트리요, 쑤띤, 브락, 샤걀, 삐까쏘, 루오, 끌레, 레제, 마띠쓰, 그리쓰, 부르델, 쟈꼬메띠, 뒤셩, 쟈꼽, 아뽈리네르, 썽드라르,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밀러, 파운드, 레, 콜더, 죠이쓰, 레닌, 트로츠끼, 싸띠, 미요, 오네게르. 오릭, 뿔랑크, 아라공과 트리올레, 싸르트르와 보브와르, 드미와 바르다...
몽빠르나쓰를 찾은 사람들의 국적은 각양각색이었지만, 20년대에는 특히 금주법을 피해서 도망온 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작가, 예술가, 지식인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자유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또 19세기 말에 프랑쓰 북서부를 연결하는 기차 노선이 생긴 이후로는 많은 브르따뉴 사람들이 몽빠르나쓰로 모여들었습니다. 몽빠르나쓰 역에 내린 이들은 멀리 가지 않고 이 주변에 정착한 것이지요. 브르따뉴 사람들은 프랑쓰 나머지와는 다르게 쎌트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색다른 분위기를 갖는데 한 몫 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시작된 재개발 계획 때문에 이런 전설적인 몽빠르나쓰의 자취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옛 몽빠르나쓰 역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59층짜리 몽빠르나쓰 빌딩이 들어섰으며, 그 옆에 약간 자리를 옮겨 빠리에서 유일하게 현대식 외관을 갖춘 기차역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현재는 역과 빌딩을 중심으로 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현대식 상업 시설과 사무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La tour Montparnasse et la gare Montparnasse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화가에서부터 조금만 멀어지면 몽빠르나쓰는 상당히 쾌적한 분위기를 주는 동네입니다. 대단한 관광거리는 없지만, 죽죽 뻗은 대로에 가로수가 울창한 넓은 인도, 종종 눈에 띄는 아르 데꼬 건물들, 여전히 밀집되어 있는 크렙 식당들 (크렙은 브르따뉴의 전통 음식), 유서 깊은 꺄페들과 크고 작은 연극 무대들, 호젓한 몽빠르나쓰 묘지... 이 모든 것들이 몽빠르나쓰를 여전히 매력적인 장소로 유지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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