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anche 8 août 2010

뽈리냑 부인 (Madame de Polignac)

뽈리냑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18세기 (1749-1793) 에 살았던 뽈리냑 부인일 것입니다. 본명이 욜렁드 드 뽈라스트롱 (Yolande de Polastron) 인 그녀는 1767 년 쥘 드 뽈리냑 (Jules de Polignac) 과 결혼함으로써 뽈리냑 백작부인 (comtesse de Polignac) 이 됩니다. 뽈리냑 가문은 매우 오래된 명문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욜렁드의 친정인 뽈라스트롱 가문도 비슷한 처지이긴 마찬가지였구요. 당시 가난한 귀족은 사실상 평민보다도 더 못한 처지일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더했지요. 가난한 남자 귀족들은 최후의 방책으로 군대에 가서 군인으로서의 경력이라도 쌓을 수 있었지만, 여자 귀족들은 아무 일이나 할 수도 없었으며,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품위가 있었으므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가난한 여자 귀족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자기 보다 좋은 형편의 귀족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넉넉치 못했던 뽈라스트롱 가문도 큰 딸 욜렁드를 명문가 뽈리냑에 시집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뽈리냑 가문 역시 당시에는 빚에 허덕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명문가의 백작부인으로서 욜렁드 드 뽈리냑은 베르싸이으궁을 몇 번 구경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드문 기회 중 한 번, 1775년의 어느 여름 날, 그녀는 왕비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의 눈에 띄는 행운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욜렁드는 스물여섯 살이었으며,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지만, 그녀의 몸가짐, 시선,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어리고 청순하며 온화하고 부드러워, 당대 사람들이 그녀를 두고 «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얼굴 (le plus charmant visage qu'on pût voir) » 이라거나 « 천상의 표정 (l'expression céléste) » 등으로 묘사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초상화를 보면, 설사 미화되었다 치더라도, 훗날 알려지게될 이기적이고 뻔뻔하고 악독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뽈리냑 부인의 초상
엘리자벳 비제-르브랑 (Elisabeth Vigée-Lebrun)
Château de Versailles


실제로 뽈리냑 부인은 매우 소박하고 겸손하고 얌전한 여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이 왕비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지요. 왕비는 직접 그녀에게 누구인지, 어째서 궁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뽈리냑 부인은 너무나 솔직하고 담담하게 집안 사정이 넉넉치 못하기 때문에 베르싸이으에 자주 올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의심했던 것과는 달리 이 때 뽈리냑 부인에게 다른 흑심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정말로 거의 어리석다 싶을 만큼 순진무구한, 베르싸이으의 거짓과 위선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가난한 시골 여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이 솔직한 한마디 이후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순진한 뽈리냑 부인과는 정반대로 거짓과 위선에 둘러싸인 삶을 사는 왕비 마리-엉뜨와넷은 천사 같은 여자의 입에서 나온 이 겸손한 고백에 완전 감동받았기 때문이지요. 이후로 뽈리냑 부인은 왕비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어, 그녀 자신은 물론, 그녀의 남편과 가족, 친척, 친구들 모두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가 멈출 줄 모르고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왕가는 국고를 열어 뽈리냑 집안의 빚을 모두 청산해 주었으며, 뽈리냑 집안의 일원들 모두에게 궁궐 내의 요직을 내주고, 따라서 이들은 베르싸이으에 정착해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1780년에는 쥘 드 뽈리냑이 공작에 봉해짐으로써, 욜렁드 역시 더이상 백작부인이 아닌 공작부인 (duchesse de Polignac) 으로 승격되며, 1782년부터는 왕손의 보호자 (gouvernante des enfants royaux) 역할을 맡게 됩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뽈리냑 부인과 그 일파가 누리는 이 모든 특권에 대해 많은 시샘과 비난이 몰아쳤지만, 그럴수록 왕비는 더욱 더 자신의 착하고 가난하고 연약한 친구를 보호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뽈리냑 부인에게 많은 권력을 쥐어 줍니다.

오늘날, 뽈리냑 부인의 진짜 속마음이 어땠는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과연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던 것처럼 왕비의 순수한 우정을 이용만 해먹은 이기적인 악녀였을까요 ? 꼭 그렇다고만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 증언들, 왕비 자신의 편지들, 당대의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뽈리냑 부인이 대단한 야심을 품고 의도적으로 왕비에게 접근해서, 조금의 진심도 섞이지 않은 마음으로 겉으로만 왕비와 친한 척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위에서 이미 말했듯, 그녀는 상당히 순진하고 소박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고, 왕비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우정을 베풀자 그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가난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빚에 더이상 시달리지 않고 마음껏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러면서 점점 더 지위와 권세가 높아지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 생활에 익숙해 지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한 사람이 권력을 쥐게 되면 그 본인 보다도 주위에서 더 설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어찌보면 왕비와 뽈리냑 부인의 우정을 이용한 것은 뽈리냑 부인 자신보다도 뽈리냑 부인에게 빌붙어 어떻게든 권세를 누리고 싶어하는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왕비 뿐 아니라 왕 루이 16세 (Louis XVI) 역시 뽈리냑 부인에게서 매우 진실되고 아름다운 인품을 느껴, 그녀를 역시 친구로 여긴 점이나, 자신의 아이들의 교육과 보호를 기꺼이 뽈리냑 부인에게 맡긴 것, 왕비가 뽈리냑 부인의 아이들 역시 친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여러 차례 말한 점 등을 볼 때, 이들의 우정이 순전히 권력과 부에만 기반을 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뽈리냑 부인의 우정이 아무리 진실된 것이었다 해도, 그녀는 마리-엉뜨와넷과 왕가에게 큰 해를 끼쳤습니다. 왕실의 국고를 탕진한 것 외에도, 그녀는 왕비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함으로써, 그녀를 다른 귀족들로부터 고립시켰습니다. 마리-엉뜨와넷은 안그래도 궁궐의 온갖 허례허식을 귀찮아 하고 있었는데, 뽈리냑 부인이 더욱 그녀의 그러한 성향을 부추기는 바람에, 그녀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왕비로서의 의무 대부분을 저버리고 그저 마음에 맞는 젊은 친구들과 놀고 먹고 즐기는 데만 집중해서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왕비의 명예는 백성들 뿐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크게 실추했고, 이는 프랑쓰 혁명을 앞당기는 데에 한 역할을 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789년 7월 14일 빠리 시민들이 바스띠으 (Bastille) 를 공격함으로써 프랑쓰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겨우 이틀 뒤 뽈리냑 부인은 왕비를 버리고 국외로 도주합니다. 이 역시 뽈리냑 부인의 진심을 매우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었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릅니다. 당시에 많은 귀족들이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기미를 느끼고 프랑쓰를 떠나기 시작했고, 특히 루이 16세의 친동생들이 가장 선두가 되어, 형과 형수 및 조카들의 운명을 나몰라라 하고 저버렸습니다. 뽈리냑 부인은 사실 왕비 옆에 남아있겠다고 했지만, 왕과 왕비가 먼저 나서서 뽈리냑 가족에게 떠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물론, 명을 거역하면서라도 뽈리냑 부인이 왕비 옆에 남았더라면 좀 더 숭고한 우정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역시 일단 살고 보자는 주변의 재촉에, 약한 성격의 뽈리냑 부인은 왕 부부의 명에 조금 저항하다가 맙니다.

이후 뽈리냑 가족은 유럽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결국 왕비의 고향인 빈 (Vienne) 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왕비와 뽈리냑 부인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그 내용 역시 매우 감동적입니다. 뽈리냑 부인의 망명 생활은 별로 행복했던 것 같지 않으며, 특히 1793년 10월 16일 왕비가 기요띤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뽈리냑 부인 역시 큰 고통과 후회로 눈물 젖은 생활을 보내다 두 달이 채 못 된 12월 9일 숨을 거두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