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fichage des articles dont le libellé est histoire. Afficher tous les articles
Affichage des articles dont le libellé est histoire. Afficher tous les articles

lundi 24 janvier 2011

떵쁠리에의 저주 (Malédiction du templier)

떵쁠회의 마지막 수장 (grand maître) 이었던 쟉 드 몰레 (Jacques de Molay) 는 동료 몇몇과 함께 1314년 3월 18일 억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빠리의 노트르 담 앞마당에 마련되었던 화형대에서 불길에 휩싸여 죽어가며 쟉 드 몰레가 떵쁠회를 파탄으로 몰아 넣은 프랑쓰의 왕 필립 4세 르 벨과 이것이 모함임을 알면서도 도와 주지 않은 교황 끌레멍 5세를 저주했다고 합니다. 매우 놀랍게도, 쟉 드 몰레가 죽은지 꼭 한 달 만에, 즉 4월 19일 밤에, 교황 끌레멍 5세가 죽습니다. 또한 같은 해 11월 20일에 필립 4세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합니다.

또한 쟉 드 몰레는 필립 4세 뿐 아니라, 그 자손 대대로에게까지 화가 있으리라 예언했다고 하는데, 프랑쓰 왕위를 이은 필립의 큰 아들 루이 10세 르 위땅 (Louis X le Hutin) 이 2년 만에 갑작스럽게 죽고 맙니다. 루이 10세의 아들 졍 1세 (Jean Ier) 는 이미 루이 10세가 죽은 후 태어났기에, 태어나면서부터 프랑쓰의 왕위에 올랐으나, 5일 만에 숨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졍 1세의 삼촌이자, 루이 10세의 동생, 즉 필립 4세의 둘째 아들이 필립 5세 (Philippe V) 라는 이름으로 왕이 됩니다. 그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하여 여자들이 왕위를 잇지 못하게 하는 쌀릭법을 제정하기도 하였지만, 5년간의 통치 끝에 딸만 넷을 남긴 채 죽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후손 중 어느 누구도 왕위를 잇지 못하고 대신 동생, 즉 필립 4세의 셋째 아들인 샤를 4세 (Charles IV) 가 왕위에 오르지만, 그 역시 6년의 통치 후 아무 자식 없이 죽습니다. 이로써 필립 4세의 세 아들은 모두 왕위에 올랐지만 모두 비교적 단기간 내에 죽었으며, 이상하게도 아들만 왕이 될 수 있다는 법을 정한 후부터 아들은 전혀 태어나지 않아, 꺄뻬씨앙 (Capétiens) 직계 왕조는 프랑쓰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그 와중에 세 왕의 부인들, 즉 각각 마르그릿 드 부르고뉴 (Marguerite de Bourgogne), 쟌 드 부르고뉴 (Jeanne de Bourgogne), 그리고 블렁슈 드 부르고뉴 (Blanche de Bourgogne) 가 합동으로 젊은 귀족들을 끌어 들여 간통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이 세 왕비들은 모두 삭발을 당한 채 감금되어 살다가 처참하게 죽고 맙니다. 실제로 쟉 드 몰레가 화형대에서 저주를 내뱉었는지는 전혀 확인할 수 없으며, 이렇게 프랑쓰 왕가에 닥친 일련의 불운한 사건들이 훗날 사람들에게 그러한 저주가 있었다고 상상을 하게 한 듯 싶습니다. 특히 모리쓰 드뤼옹 (Maurice Druon, 1918-2009) 의 소설 저주받은 왕들 (Les Rois maudits) 이후로 이 사건은 매우 대중적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총 일곱 권의 대하소설인 이 연작은 프랑쓰에서 매우 큰 인기를 끌었고, 텔레비젼 씨리즈로도 두 차례나 만들어진 적이 있습니다 (1972, 2005).

꺄뻬씨앙의 직계 후손이 끊긴 이후, 프랑쓰의 왕권을 두고 많은 논란이 오고 간 후, 결국은 사촌 가문인 발르와 왕조의 필립 6세 (Philippe VI de Valois) 가 왕이 되는데, 이것을 시비 삼아 영국에서 프랑쓰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백여년간이나 지속되었으니, 정말로 쟉 드 몰레의 저주가 있었다면 아주 지독하고 긴 저주임에는 분명합니다. 백년 전쟁 말기가 되어서야 겨우 하늘에서 보냈다는 쟌 다르크 (Jeann d'Arc) 가 나타나 프랑쓰를 구원하지요. 그런데 쟌 다르크도 충실히 섬겼던 프랑쓰 왕의 버림을 받고, 모함에 몰려, 조작된 증거물들로 꾸며진 거짓 재판을 받은 후, 이단자로 낙인 찍혀 화형대에서 죽습니다. 백여년 전 쟉 드 몰레와 매우 비슷한 운명을 겪은 것이지요.

lundi 17 janvier 2011

떵쁠리에 (Templiers)

떵쁠리에들은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활동했던 기사 (chevalier) 이자 수사 (moine) 였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1차 십자군 전쟁의 성공으로, 유럽인들은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성지 순례가 다시 가능하게 되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험은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1118년, 위그 드 빵 (Hugues de Payns) 이라는 기사가 다른 여덟 명의 동료를 모아 « 그리스도의 작은 기사들 » (Pauvres chevaliers du Christ) 이라는 조직을 만듭니다. 이들은 유럽에서부터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항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안전하게 경호하는 역할을 했고, 이것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예루살렘의 왕 보두앙 2세 (Baudouin II de Jérusalem) 는 자기가 살던 궁의 일부를 이 가난한 기사들에게 내어줍니다. 보두앙 2세가 살던 궁전은 그 옛날 (기원전 10세기) 쌀로몽 왕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있었기에, 성전 즉 Temple 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하여 1119년부터 이들은 « 떵쁠의 기사 (chevaliers du Temple) » 또는 « 떵쁠리에 (Templiers) »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떵쁠리에들의 특징은 기사이면서 동시에 수사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한 데 있습니다. 창립된 지 꼭 십년 째 되던 해에 (1128), 이미 그 수가 매우 불어난 이 군사-종교적 조직은 트르와 공의회 (Concile de Troyes) 에서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수도회 인가를 받고, 고유한 규칙과 의상 등을 정합니다. 이후로 점점 더 번성한 떵쁠회 (Ordre du Temple) 는 예루살렘 왕국과 그 주변은 물론 유럽 각국에도 수많은 분원을 세웠습니다. 프랑쓰에만 삼천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빠리의 떵쁠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수도원 외에도 이들은 성과 군사적 요새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떵쁠회는 군사적 조직이긴 했지만,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싸움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떵쁠리에들 중에서도 일부 만이 말을 타고 칼과 창을 쓰는 기사였고, 다른 많은 떵쁠리에들은 수도원이 운영될 수 있도록 여러가지 다른 업무를 맡아 생활했습니다. 특히 씨또회 (Ordre de Cîteaux) 의 영향을 많이 받은 떵쁠회는 직접 농경지를 가꾸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일을 주요 임무로 생각했습니다. 떵쁠리에들의 이러한 검소한 모습과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용감한 모습, 그리고 순례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희생적인 모습 등이 복합되어, 떵쁠리에들은 많은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떵쁠리에들은 놀랍게도 은행가의 역할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어음이나 수표 등을 발명한 사람이 떵쁠리에들인 셈인데, 멀리 바다 건너 예루살렘까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이 몇 년에 걸치는 여행 기간 동안 현금을 들고 다니기가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에 있는 떵쁠 아무 곳이나 찾아가 자신들의 경비를 맡겼고, 대신 그것을 증명해 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후 빨레스띤에 도착한 다음 또다시 아무 떵쁠이나 찾아가 그 증서를 내밀면 그에 해당하는 현금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 씨스템은 반드시 유럽과 빨레스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 내에서도 활용되었으며, 또한 자신들의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용감한 군인인 동시에 검소한 떵쁠리에들에게 돈이나 보석, 보물을 맡기고 관리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심지어 프랑쓰의 왕도 자신의 개인 재산을 떵쁠리에들에게 맡겼으며, 여러 지방에서 거두는 세금 따위가 모두 빠리의 떵쁠에 도착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국세청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이 모든 것이 떵쁠리에들의 돈이 아니었지만, 점차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떵쁠리에들이 본연의 모습을 버리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더군다나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 끝에 결국은 유럽인들이 1291년 빨레스띤에서 철수하고 나서는, 더이상 떵쁠리에들은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원래 의무가 없어졌으니까요. 따라서 한때 많은 인기를 누리고 존경을 받았던 떵쁠리에들이 점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307년 10월 13일, 프랑쓰 전국의 모든 떵쁠리에들이 일제히 왕명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떵쁠리에들을 갑자기 체포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전국의 모든 떵쁠리에들을 동시에 체포했다는 것은, 이 사건이 매우 치밀하게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체포를 명한 필립 4세 르 벨 (Philippe IV le Bel) 은 부족한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 떵쁠리에들이 축적한 것으로 믿어지는 어마어마한 부를 빼앗을 생각이었습니다. 게다가 떵쁠리에들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도 부정적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치밀한 준비 끝에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때 교황으로 선출된 지 얼마 안 된 끌레멍 5세 (Clément V) 가 교회의 수사들을 함부로 잡아 들인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형식적인 반감을 표했지만, 끌레멍 5세도 사실은 애초에 프랑쓰 왕권의 힘으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그는 보르도의 주교였고, 처음으로 로마에 가기를 거부하고 아비뇽 (Avignon) 에 머문, 프랑쓰 출신의 교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문에 못이긴 떵쁠리에들이 스스로 죄를 고백하는 바람에 교황도 명목을 잃었습니다. 고문 끝에 자백한 떵쁠리에들의 죄상은 그리스도 모독, 우상 숭배, 성물과 성직 매매, 음란한 비밀 의식, 동성애, 등등 이루 말도 안되는 것들이었으며,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필립 르 벨과 그의 측근들은 이것을 합법적으로 통과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7여년에 걸친 재판 끝에 떵쁠회는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떵쁠회의 마지막 수장 쟉 드 몰레 (Jacques de Molay) 는 이단자의 선고를 받아 1314년 3월 18일 노트르 담 (Notre Dame)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집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떵쁠리에들을 화형시키거나 고문 끝에 죽였지만, 필립 4세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떵쁠의 재산은 위에서 말했듯 그들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위탁된 것이었으며, 떵쁠 고유의 재산은 떵쁠회가 해체된 후 오삐딸회 (Ordre de l'Hôpital) 를 비롯한 다른 수도원들에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떵쁠의 진짜 보물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믿는 전설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소설이나 영화, 놀이의 주제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시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떵쁠리에들이 실제로 은밀한 의식을 행하던 비밀 종교 조직이었으리라는 낭만적인 상상과, 쟉 드 몰레가 죽으면서 퍼부었다는 저주가 모두 들어맞으면서 떵쁠리에들은 일종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dimanche 9 janvier 2011

떵쁠 (Temple)

렁발 공주가 프랑쓰 왕가와 함께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낸 떵쁠의 탑 (Tour du Temple) 은 떵쁠의 집 (Maison du Temple) 을 구성하던 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떵쁠의 집은 중세에 떵쁠리에 (Templier) 들이 오늘날의 빠리의 3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세운 넓은 공간으로, 중세에는 거의 독립된 도시와도 같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떵쁠리에들은 십자군 전쟁 시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활동했던 수사이자 군인이면서, 은행가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애초에 떵쁠회 (Ordre du Temple) 는 예루살렘의 성전 (Temple) 이 있던 자리를 첫 본거지로 삼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는데, 크게 번성하여 유럽 도처에 분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을 떵쁠의 집이라 불렀지요. 빠리의 떵쁠도 그 중 하나로, 다른 떵쁠의 집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넓은 농지로 구성되었습니다. 흔히 떵쁠리에들을 군인이나 은행가로만 보지만, 실제로는 다른 수사들처럼 땅을 경작하는 일에도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따라서 농사에 관계된 여러 부속 건물들 (곳간, 마굿간 등등) 이 있었으며, 빠리의 떵쁠은 사각형의 거대한 탑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늪과 습지에 불과했던 이 지역은 빠리의 외곽으로서, 떵쁠리에들은 상당히 넓은 영토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을 성벽으로 둘러 쌓아 요새화 시켰습니다.

1450년 경의 떵쁠을 묘사한 그림

하지만 1312년 프랑쓰의 왕 필립 4세 르 벨 (Philippe IV le Bel) 과 교황 끌레멍 5세 (Clément V) 가 떵쁠회를 폐지시키면서, 떵쁠회의 재산과 소유지는 모두 오삐딸회 (Ordre de l'Hôpital) 로 넘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리의 떵쁠은 여전히 떵쁠이라 불리면서 여러 변화를 거치지요. 우선 빠리 시내가 커지면서 떵쁠이 빠리 시내의 일부가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여러 저택과 집들이 들어서고, 병원, 묘지, 정원 등이 생겨납니다. 거대한 떵쁠의 탑은 14세기 말에 잠시 감옥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16-17세기에는 군대의 무기고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는 문서보관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6세기 말에는 원래 있던 50 미터 높이의 떵쁠의 탑 (Grande Tour) 앞에 그 절반 정도 높이의 작은 탑 (Petite Tour) 을 덧붙여 세워, 문서보관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살기도 했습니다. 17세기에는 베르싸이으를 건축한 아르두앙-멍싸르 (Jules Hardouin-Mansart) 가 오삐딸회의 대원장을 위한 궁전 (Palais du Grand Prieur) 을 세웠으며, 이 건물은 18세기에 아르뜨와 백작 (comte d'Artois), 즉 루이 16세의 동생이자 훗날의 샤를 10세의 소유가 됩니다.

18세기의 떵쁠 탑을 묘사한 그림

비록 중세의 두껍고 투박하고 순전히 군사적인 보호를 목적으로 하던 성벽은 사라졌지만, 떵쁠은 여전히 보다 낮고 보다 얇은 벽으로 둘러쌓인 동네였습니다. 이 동네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딱 하나의 문 밖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꼬뮌 드 빠리는 왕정이 무너진 후 왕가를 떵쁠에 가두기로 했던 것입니다. 즉 통제를 하기가 쉬웠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왕가를 떵쁠로 이송한다고 했을 때, 그래도 프랑쓰의 왕실인데, 모두들 대원장의 궁에 머물게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꼬뮌 드 빠리는 작은 탑을 왕실의 거처로 정했습니다. 그나마도 큰 탑이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수리하는 동안만이었습니다. 따라서 작은 탑에서는 약 한 달 여간, 그리고 큰 탑으로 옮겨가서는 식구별로 최소 4개월에서 최대 3년 넘게까지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우선 루이 16세가 떵쁠을 가장 먼저 떠나긴 했지만, 이것은 1793년 1월 21일 기요띤에 목이 잘리기 위함이었지요. 다음으로 마리-엉뜨와넷이 1793년 8월에 꽁씨에르쥬리 (Conciergerie) 로 이감됩니다. 1794년 5월에는 루이 16세의 여동생 엘리자벳 (Élisabeth) 공주가 역시 기요띤 형을 당하고, 1795년 6월에는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살던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이 결핵으로 죽습니다. 유일한 생존자는 루이 16세의 첫째 딸 마리-떼레즈 (Marie-Thérèse) 로, 그녀는 1795년 12월 외스터라이히 제국에 잡혀 있던 네 명의 프랑쓰 포로와 교환됩니다. 

이후 세월이 바뀌면서 왕정주의자들이 떵쁠의 탑을 마치 순례지처럼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자, 황제가 된 나뽈레옹이 1808년 탑을 제거하게 합니다. 지금은 탑이 있던 자리를 표시해 주는 흔적 만이 길 위에 그려져 있습니다.

탑이 있던 자리의 한 쪽 모퉁이를 표시해 주는 3구 구청 앞의 흔적

lundi 15 novembre 2010

렁발 공주 (Princesse de Lamballe)

뽈리냑 부인이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의 관심을 독차지하기 전에 왕비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렁발 공주였습니다. 렁발 공주는 뽈리냑 부인보다 훨씬 지체 높은 귀부인이었으며, 뽈리냑 부인과는 달리 전혀 왕비의 권력을 악용하지 않았고, 모두가 왕가를 버린 뒤에도 마지막까지 왕비의 곁에 남아 있었으며, 결국에는 순전히 왕비의 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처참한 죽음을 당한, 그야말로 진정한 친구라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 « 렁발 공주 » 라 불리는 그녀의 본래 이름은 마리-떼레즈였으며, 싸브와-꺄리녕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Marie-Thérèse de Savoie-Carignan). 싸브와-꺄리녕 가문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문인 싸브와 가문의 한 일파로써, 당시에는 까리냐노 (Carignano) 라는 작은 공국을 다스렸으나, 훗날 이딸리아가 통일된 후, 이딸리아 왕들은 모두 이 가문에서 배출됩니다. 마리-떼레즈는 까리냐노의 왕자 루이-빅또르 (Louis-Victor) 의 딸로 1749년 9월 8일에 또리노 (Torino) 에서 태어났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 같은 날 빠리에서는 뽈리냑 부인이 태어났습니다. 즉, 마리-엉뜨와넷이 가장 사랑했던 두 친구는 생년월일이 같습니다.

그보다 거의 정확하게 2년 전, 즉 1747년 9월 6일에는 빠리에서 루이-알렉썽드르 드 부르봉 (Louis-Alexandre de Bourbon) 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루이 14세가 몽떼스뻥 부인 (Madame de Montespan) 으로부터 얻은 자식의 후손으로, 혼외 자식, 또는 우리 나라 식으로 치자면, 후궁의 태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르봉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왕자의 칭호를 받았으며, 브르따뉴 (Bretagne) 지방에 있는 도시 렁발 (Lamballe) 을 영지로 받아, 렁발 왕자 (Prince de Lamballe) 라 불렸습니다. 바로 이 사람과 1767년 결혼함으로써 꺄리녕 공주 (Principessa di Carignano) 는 렁발 공주 (Princesse de Lamballe) 가 된 것이지요.

이렇게 이중으로 공주의 자격을 지니기는 하였지만, 렁발 부인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던 렁발 왕자는 결혼한 지 겨우 1년 만에 죽고 말았으며, 그것도 다른 여자로부터 얻은 성병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렁발 공주는 19살에 과부가 되었지만, 착하고 온화한 성격을 지녔던 그녀는 이후로 시아버지를 모시며 자선 사업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770년 프랑쓰의 도팡 (dauphin) 에게로 시집 온 마리-엉뜨와넷을 만나게 되지요. 당시 렁발 공주는 21살, 도핀 (dauphine) 은 15살이었습니다. 갑자기 외국의 낯선 환경에서 살게된 어린 세자빈은 역시 외국에서 프랑쓰로 시집 온 렁발 공주에게서 친언니의 따뜻함을 느끼고, 두 사람은 곧 둘도 없는 사이가 됩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약 5년 정도 지속되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마리-엉뜨와넷은 렁발 공주에게서 싫증을 느낍니다. 물론 그녀에 대한 우정어린 마음은 기본적으로 지속되었지만, 나이 어린 세자빈에게 렁발 공주는 지나치게 순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경박하기로 유명했던 마리-엉뜨와넷은 더 재미나고 자극적인 것을 원했지요. 마침내 프랑쓰의 왕비가 되자, 마리-엉뜨와넷은 렁발 공주를 왕비전의 총감독 (surintendante de la maison de la reine) 으로 임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높은 직책이었고, 매우 많은 급여를 받는 지위였으며, 왕비의 모든 생활을 총괄하는 명예로운 자리였지만, 사실상 이 때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집니다. 대신 왕비는 뽈리냑 부인과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잘 알려진대로 뽈리냑 부인은 철없는 왕비의 즉각적인 즐거움만 부추기다가 오히려 그녀에게 큰 해만 입히고, 혁명이 일어나자 왕비를 두고 외국으로 도주합니다. 하지만 렁발 공주는 오히려 이 때부터 더욱 왕비 곁에 가까이 머물렀으며, 1789년 10월 6일, 왕실이 빠리로 끌려오게 되었을 때, 자진하여 왕가를 따라 함께 뛰일르리 (Tuileries) 로 옵니다.

뛰일르리에 갇혀 살았던 3여년간 왕비와 공주는 다시 예전의 우정을 되새기게 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더욱 우정을 굳혔습니다. 하지만 1791년 6월 20일, 왕실이 뛰일르리를 탈출했을 때, 렁발 공주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믿지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녀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마리-엉뜨와넷은 렁발 공주를 탈출 계획에서 멀리하려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에 의하면, 렁발 공주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꼼짝 못하고 갇혀 살아야 했던 왕비에 비해, 렁발 공주는 자유롭게 궁을 드나들 수도, 외국으로 여행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왕비의 심부름을 했습니다. 비밀리에 행해진 심부름이었기데 그 정확한 내용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탈출 준비와 연관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탈출에 실패한 후, 더욱 삼엄한 감시를 받는 왕비의 수족 역할을 렁발 공주가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번번이 왕비는 렁발 공주를 외국에 심부름 보내면서 돌아오지 말 것을 명했지만, 공주는 위험에 처해 있는 친구를 버리지 못해, 매번 빠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왕실이 겪는 모든 치욕을 함께 겪었지요.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특히 1792년 8월 10일 — 뛰일르리를 침입한 폭도들을 피하기 위해, 왕이 국회에 목숨을 보호해 달라고 무릎꿇어야 했던 날, 렁발 공주는 왕가와 함께했으며, 국회가 내어 준, 지붕이 낮은 서기실에서 3일을 왕가와 함께 보냅니다. 이 사건으로 국회는 왕권을 정지시키고, 8월 13일, 왕가를 폭동으로부터 보호한다는 핑계 하에 떵쁠 (Temple) 의 한 탑에 가둡니다. 이 때도 렁발 부인은 왕실을 따릅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8월 19일 밤에 꼬뮌 드 빠리 (Commune de Paris) 는 렁발 부인을 체포하여 포르쓰 감옥 (prison de la Force) 에 따로 가둡니다. 애초에 렁발 부인을 비롯하여 몇몇 시종을 허락한 것은 왕가를 잘 대접한다는 듯한 인상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을 뿐, 왕가의 운명을 손에 쥔 꼬뮌 드 빠리는 전혀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 의도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렁발 공주는 1792 년 8월의 마지막 열흘을 따로 격리된 채 보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가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날들이었죠. 9월초부터 빠리에는 훗날 9월 학살 (massacres de septembre) 이라 불리게 될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시민들이 빠리의 여러 감옥들을 돌며, 혁명에 비혐조적이라 여겨지는 사람들, 숭고한 혁명 정신에 흠이 될 사람들, 왕가에 우호적인 태도를 비친 사람들을 마음대로 판결하여 죽인 학살 사건이었습니다. 9월 2일부터 시작하여 때로는 5일까지, 때로는 6일이나 7일까지로 지속되었다고 보는데, 아무튼 이 며칠 동안 약 1 300 명의 죄수들이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이 때 가장 많이 죽은 사람들은 혁명 정부에 선서를 하지 않은 신부들 (prêtres réfractaires) 이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는 그다지 상관 없는 일반 범죄자들과 매춘부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뛰일르리에서 일한 적이 있었던 사람들, 근위대 병사들 등도 왕가와 친밀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으며, 감옥에 갇혔 있던 몇몇 귀족들이 특히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렁발 공주이지요.

9월 3일 아침에 포르쓰 감옥의 마당에서 그녀는 약식으로 차려진 재판대에 불려 나와 왕을 고발하라는 다그침을 받았지만, 이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녀의 머리를 망치로 여러 차례 내려쳤다고 합니다. 아마 이로 인해, 그녀는 죽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망치에 머리를 맞아 죽는 것이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그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녀가 죽었는지 아직 살아있는지 상관도 하지 않은 채, 쓰러진 그녀의 몸을 강간했으니까요. 이후, 사람들은 그녀의 몸을 난도질했고, 가슴과 성기를 도려내었으며, 몸을 갈라 심장과 창자를 꺼내어 그것을 구워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건 사람들은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시체를 창에 꽂아 마치 인형처럼 가지고 다녔으며, 목은 따로 잘라 다른 창 끝에 꽂아 기념패처럼 과시했습니다. 술에 취한 대중들은 렁발 공주의 머리를 미용사에게 가져가 새로 가발을 씌우고 화장을 시킨 후, 떵쁠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왕실이 갇혀 있던 탑 밑에서 창을 치켜 들며, 왕비로 하여금 친구의 죽은 입술에 입맞추기를 요구했습니다. 다행히 떵쁠을 지키던 시청 직원들이 미리 덧창을 닫고, 흥분한 대중들을 저지하였습니다. 덕분에 왕비는 이 광경을 직접 보는 고통은 겪지 않아도 되었지만, 바로 창문 밖에 렁발 공주의 잘려진 목과 조각난 시체가 끌려다니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정신을 잃기에 충분했습니다.

오후 다섯시 무렵까지 웅성대던 군중들은 점차 흩어졌고, 렁발 공주의 시체는 무관심하게 버려졌습니다.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쟉 쁘왕뗄 (Jacques Pointel) 이라는 한 시민이 렁발 공주의 조각난 시체들을 모아 고아들이 묻히는 무덤에 묻어 주었고, 뒤늦게 며느리의 참상을 들은 렁발 공주의 시아버지가 그녀의 시신을 가족 묘지로 이전시켰습니다. 이후로 렁발 공주는 왕정파들에 의해서 순교자로 추앙되기도 하는데, 마리-엉뜨와넷이 신이 아닌 이상, 이런 표현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렁발 공주가 친구와의 우정, 자기가 섬기던 사람에 대한 충성을 목숨을 바쳐 지킨 것은 매우 고귀한 행동이었습니다.

dimanche 8 août 2010

뽈리냑 부인 (Madame de Polignac)

뽈리냑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18세기 (1749-1793) 에 살았던 뽈리냑 부인일 것입니다. 본명이 욜렁드 드 뽈라스트롱 (Yolande de Polastron) 인 그녀는 1767 년 쥘 드 뽈리냑 (Jules de Polignac) 과 결혼함으로써 뽈리냑 백작부인 (comtesse de Polignac) 이 됩니다. 뽈리냑 가문은 매우 오래된 명문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욜렁드의 친정인 뽈라스트롱 가문도 비슷한 처지이긴 마찬가지였구요. 당시 가난한 귀족은 사실상 평민보다도 더 못한 처지일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더했지요. 가난한 남자 귀족들은 최후의 방책으로 군대에 가서 군인으로서의 경력이라도 쌓을 수 있었지만, 여자 귀족들은 아무 일이나 할 수도 없었으며,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품위가 있었으므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가난한 여자 귀족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자기 보다 좋은 형편의 귀족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넉넉치 못했던 뽈라스트롱 가문도 큰 딸 욜렁드를 명문가 뽈리냑에 시집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뽈리냑 가문 역시 당시에는 빚에 허덕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명문가의 백작부인으로서 욜렁드 드 뽈리냑은 베르싸이으궁을 몇 번 구경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드문 기회 중 한 번, 1775년의 어느 여름 날, 그녀는 왕비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의 눈에 띄는 행운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욜렁드는 스물여섯 살이었으며,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지만, 그녀의 몸가짐, 시선,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어리고 청순하며 온화하고 부드러워, 당대 사람들이 그녀를 두고 «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얼굴 (le plus charmant visage qu'on pût voir) » 이라거나 « 천상의 표정 (l'expression céléste) » 등으로 묘사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초상화를 보면, 설사 미화되었다 치더라도, 훗날 알려지게될 이기적이고 뻔뻔하고 악독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뽈리냑 부인의 초상
엘리자벳 비제-르브랑 (Elisabeth Vigée-Lebrun)
Château de Versailles


실제로 뽈리냑 부인은 매우 소박하고 겸손하고 얌전한 여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이 왕비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지요. 왕비는 직접 그녀에게 누구인지, 어째서 궁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뽈리냑 부인은 너무나 솔직하고 담담하게 집안 사정이 넉넉치 못하기 때문에 베르싸이으에 자주 올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의심했던 것과는 달리 이 때 뽈리냑 부인에게 다른 흑심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정말로 거의 어리석다 싶을 만큼 순진무구한, 베르싸이으의 거짓과 위선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가난한 시골 여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이 솔직한 한마디 이후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순진한 뽈리냑 부인과는 정반대로 거짓과 위선에 둘러싸인 삶을 사는 왕비 마리-엉뜨와넷은 천사 같은 여자의 입에서 나온 이 겸손한 고백에 완전 감동받았기 때문이지요. 이후로 뽈리냑 부인은 왕비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어, 그녀 자신은 물론, 그녀의 남편과 가족, 친척, 친구들 모두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가 멈출 줄 모르고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왕가는 국고를 열어 뽈리냑 집안의 빚을 모두 청산해 주었으며, 뽈리냑 집안의 일원들 모두에게 궁궐 내의 요직을 내주고, 따라서 이들은 베르싸이으에 정착해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1780년에는 쥘 드 뽈리냑이 공작에 봉해짐으로써, 욜렁드 역시 더이상 백작부인이 아닌 공작부인 (duchesse de Polignac) 으로 승격되며, 1782년부터는 왕손의 보호자 (gouvernante des enfants royaux) 역할을 맡게 됩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뽈리냑 부인과 그 일파가 누리는 이 모든 특권에 대해 많은 시샘과 비난이 몰아쳤지만, 그럴수록 왕비는 더욱 더 자신의 착하고 가난하고 연약한 친구를 보호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뽈리냑 부인에게 많은 권력을 쥐어 줍니다.

오늘날, 뽈리냑 부인의 진짜 속마음이 어땠는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과연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던 것처럼 왕비의 순수한 우정을 이용만 해먹은 이기적인 악녀였을까요 ? 꼭 그렇다고만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 증언들, 왕비 자신의 편지들, 당대의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뽈리냑 부인이 대단한 야심을 품고 의도적으로 왕비에게 접근해서, 조금의 진심도 섞이지 않은 마음으로 겉으로만 왕비와 친한 척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위에서 이미 말했듯, 그녀는 상당히 순진하고 소박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고, 왕비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우정을 베풀자 그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가난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빚에 더이상 시달리지 않고 마음껏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러면서 점점 더 지위와 권세가 높아지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 생활에 익숙해 지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한 사람이 권력을 쥐게 되면 그 본인 보다도 주위에서 더 설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어찌보면 왕비와 뽈리냑 부인의 우정을 이용한 것은 뽈리냑 부인 자신보다도 뽈리냑 부인에게 빌붙어 어떻게든 권세를 누리고 싶어하는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왕비 뿐 아니라 왕 루이 16세 (Louis XVI) 역시 뽈리냑 부인에게서 매우 진실되고 아름다운 인품을 느껴, 그녀를 역시 친구로 여긴 점이나, 자신의 아이들의 교육과 보호를 기꺼이 뽈리냑 부인에게 맡긴 것, 왕비가 뽈리냑 부인의 아이들 역시 친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여러 차례 말한 점 등을 볼 때, 이들의 우정이 순전히 권력과 부에만 기반을 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뽈리냑 부인의 우정이 아무리 진실된 것이었다 해도, 그녀는 마리-엉뜨와넷과 왕가에게 큰 해를 끼쳤습니다. 왕실의 국고를 탕진한 것 외에도, 그녀는 왕비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함으로써, 그녀를 다른 귀족들로부터 고립시켰습니다. 마리-엉뜨와넷은 안그래도 궁궐의 온갖 허례허식을 귀찮아 하고 있었는데, 뽈리냑 부인이 더욱 그녀의 그러한 성향을 부추기는 바람에, 그녀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왕비로서의 의무 대부분을 저버리고 그저 마음에 맞는 젊은 친구들과 놀고 먹고 즐기는 데만 집중해서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왕비의 명예는 백성들 뿐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크게 실추했고, 이는 프랑쓰 혁명을 앞당기는 데에 한 역할을 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789년 7월 14일 빠리 시민들이 바스띠으 (Bastille) 를 공격함으로써 프랑쓰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겨우 이틀 뒤 뽈리냑 부인은 왕비를 버리고 국외로 도주합니다. 이 역시 뽈리냑 부인의 진심을 매우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었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릅니다. 당시에 많은 귀족들이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기미를 느끼고 프랑쓰를 떠나기 시작했고, 특히 루이 16세의 친동생들이 가장 선두가 되어, 형과 형수 및 조카들의 운명을 나몰라라 하고 저버렸습니다. 뽈리냑 부인은 사실 왕비 옆에 남아있겠다고 했지만, 왕과 왕비가 먼저 나서서 뽈리냑 가족에게 떠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물론, 명을 거역하면서라도 뽈리냑 부인이 왕비 옆에 남았더라면 좀 더 숭고한 우정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역시 일단 살고 보자는 주변의 재촉에, 약한 성격의 뽈리냑 부인은 왕 부부의 명에 조금 저항하다가 맙니다.

이후 뽈리냑 가족은 유럽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결국 왕비의 고향인 빈 (Vienne) 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왕비와 뽈리냑 부인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그 내용 역시 매우 감동적입니다. 뽈리냑 부인의 망명 생활은 별로 행복했던 것 같지 않으며, 특히 1793년 10월 16일 왕비가 기요띤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뽈리냑 부인 역시 큰 고통과 후회로 눈물 젖은 생활을 보내다 두 달이 채 못 된 12월 9일 숨을 거두고 맙니다.

samedi 17 juillet 2010

뽈리냑 가문 (Maison de Polignac)

아르나웃 까딸란 (Arnaut Catalan) 의 깐쏘 Anc per null temps no.m donet iai, PC 27,4베아트리쓰 드 싸브와 (Béatrice de Savoie) 에게 바쳐진 노래 (canso) 일 뿐 아니라, 또 한 명의 후원자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가장 마지막 또르나다 (tornada) 에서 언급되고 있는 « Seinh'en vescoms de Polinhac », 즉 뽈리냑 자작이 그 사람입니다. 이 뽈리냑 자작이 정확히 누구인가에 대해서 몇가지 의견이 있었지만, 알려진 정보가 너무 적고, 그나마도 서로 모순되고 있기에, 명확히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르나웃 까딸란의 작품들을 편집한 페루쵸 블라지 (Ferrucio Blasi) 는 에라끌 3세 드 뽈리냑 (Eracle III de Polignac) 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의 주장은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말하길 에라끌 드 뽈리냑은 1201년에 죽었으며, 이 깐쏘는 1220년 이후에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무렵에 아르나웃은 어린 에라끌을 만났을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 어느 부분에선가 착각을 일으킨 듯 합니다. 참고로 1220년 경에 뽈리냑의 공식적인 자작으로 있었던 사람은 뽕쓰 5세 (Pons V) 입니다.

따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아르나웃이 찬양하고 있는 뽈리냑은 뽕쓰 5세라고 생각하지만, 누가 되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뽈리냑 가문이 중세 때부터 이미 음악과 문학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유명하고 오래된 프랑쓰의 귀족 가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집안은 870년 경부터 뽈리냑 (Polignac) 을 다스리기 시작하여 1385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때에 마지막 상속녀였던 자작부인 발쀠르쥬 (Valpurge de Polignac) 의 사망으로 결국 맥이 끊기 맙니다.

하지만 발쀠르쥬 드 뽈리냑은 기욤 드 샬렁쏭 (Guillaume de Chalençon) 과 결혼했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삐에르-아르멍 (Pierre-Armand) 은 샬렁쏭의 백작인 동시에 뽈리냑의 자작이었습니다. 그는 오래된 명문인 어머니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해서인지, 두 이름을 합하여 샬렁쏭 드 뽈리냑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가문의 이름은 결국 뽈리냑으로 축소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실은 샬렁쏭인 이 집안을 두번째 뽈리냑 가문이라고 부릅니다.

두번째 뽈리냑 가문 (2e maison de Polignac) 은 별다른 문제없이 아들에서 아들로 수백년간 이어져 내려오면서 자작 (vicomte) 에서 백작 (comte) 으로, 백작에서 공작 (duc) 으로 그 지위를 높이는 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으로 뽈리냑 공작의 작위를 받은 사람은 쥘 (Jules de Polignac) 인데, 그 사람 본인보다는 그의 부인인 욜렁드 드 뽈라스트롱 (Yolande de Polastron) 이 왕비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남편에게 공작의 칭호가 내려진 것도 욜렁드가 공작부인이 되게 해주려는 왕비의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뽈리냑 가문은 엄청난 부와 권세를 누렸으나, 프랑쓰 혁명으로 그 영화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지요. 하지만 쥘 드 뽈리냑과 욜렁드 드 뽈라스트롱의 큰아들 쥘 2세 (Jules II) 드 뽈리냑은 왕정이 복귀된 후 샤를 10세 (Charles X) 정부의 수상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 두번째 쥘 드 뽈리냑의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자칭 뽈리냑 공작 (9대) 이라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물론 법적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쥘 드 뽈리냑과 욜렁드 드 뽈라스트롱의 두번째 아들, 즉 쥘 2세의 동생인 멜끼오르 드 뽈리냑 (Melchior) 의 후손 중에는 삐에르 (Pierre)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후손은 오늘날 법적으로 유효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귀족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바로 모나꼬의 왕자 (Prince de Monaco) 입니다. 1920년 삐에르 드 뽈리냑은 모나꼬의 상속녀인 샤를롯 그리말디 (Charlotte Grimaldi) 와 결혼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아내의 이름을 택합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태어난 레니에 3세 (Rainier III) 가 모나꼬의 왕좌에 올랐지요. 현재는 레니에 3세와 미국의 여배우 그레이쓰 켈리 (Grace Kelly) 사이에서 태어난 알베르 2세 (Albert II) 가 모나꼬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레니에와 알베르의 성은 공식적으로는 그리말디이지만, 부계 혈통으로 따지자면 사실상 이들은 뽈리냑 사람들이지요. 또한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사실은 샬렁쏭 사람이구요. 물론 모계 혈통으로 보자면 알베르 2세에게 저 옛날 아르나웃 까딸란이 노래했던 그 뽈리냑 자작의 피가 한 방울 쯤은 섞여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mardi 13 avril 2010

Tant es d'Amor honratz sos senhoratges, d'Aimeric de Belenoi, PC 9,21

Édition et traduction : Maria DUMITRESCU, Poésies du troubadour Aimeric de Belenoi, Paris, 1935 : 126-131.

I
Tant es d'Amor honratz sos senhoratges,
Que non hi cap negus malvatz usatges ;
E quar N'Albertz es de domnas salvatges,
Non tanh, quon fals remanha entre lor ;
Qu'ieu fui e son lo lur fizels messatges.
Et enansiei lur pretz e lur valor,
E non hi trop ni destrics ni dampnatges —
Anz suy honratz quar chan per lur amor.

II
Ja mais N'Albertz non deu chantar d'amia,
Que reneguat a tota cortezia ;
E, quar donas apella de bauzia,
Be.l deuri'hom penre com traïdor.
E dic vos be, si la forsa fos mia,
Ja no.y agra nulh enemic pejor ;
Qu'om non es pros, si en donas no.s fia —
Mas avols hom s'o ten a gran folhor.

III
La lur amors es bona, e non greva :
Quar, si falhi premeiramen Na Eva,
La Maire Dieu nos en fetz patz e treva,
Per que d'aisso nos non em peccador ;
Ans val ben tan totz hom qu'ab elhas treva,
Que entre.ls bos lo ten hom per melhor.
Tals las lauza, no sap d'amor que.s leva —
Per que no.s tanh que n'aya mais dolor.

IV
E quar mentau duguessa ni regina
Que.l fezesson de lur amor aizina,
Venjes las en la pros comtessa fina
De Proensa, on a tota valor.
De Saluza la bella N'Ainezina
Fassa est clam a son entendedor,
La comtessa Biatritz, sa cozina,
Si.l ve camjar en nulh'autra color.

V
Si.l Salvatga es tan pros d'Auramala,
Cum N'Albertz ditz, non er mais dins sa sala,
Que no ss'o tengu'az anta ni a tala.
E si ja mais ve lieys ni sa seror
E no l'en fan tornar en un'escala,
No son filhas d'en Conrat, lo senhor :
Quar qui ferra la lur amor sotz l'ala,
Aver en deu ardimen e paor.

VI
Pero, si.l ve la pros domna de Massa,
Cylh que conquer totz jorns pretz et amassa,
E no.l bat tan, entro que.n sia lassa,
Ja no.l sal Dieus son leyal amador,
Ni no sia loncs temps fresca ni grassa,
Ni non tenha son amic em pascor,
Quar es lo joys que tot autre joy passa
D'aquest secgle, et ab mais de doussor.

VII
Per las autras e per la pro comtessa
De.l Carret, vuelh que sia senhoressa
De N'Albertet una velha sotzmessa
D'avol home, quar a dig mal de lor.
E se l'a ja domna e mal no.l pessa,
Dentre las pros s'en an estar alhor :
Quar ges no.s tanh que neguna l'aguessa
Prestat d'invern son avol cobertor.

VIII
Domnas totas li fan don e promessa
De tot son mal, quar a dig mal d'amor.

************************************
I. Le royaume de l'Amour est si honorable, qu'il ne s'y trouve place pour aucun mauvais usage ; et, puisque Messire Albert déteste les femmes, il ne doit pas, lui, un félon, demeurer parmi elles. Moi, j'ai été, et je suis leur fidèle messager, j'ai exalté leur mérite et leur valeur, et je n'y trouve ni ennuis ni dommages ; au contraire, je suis honoré de chanter pour leur amour.

II. Jamais plus Messire Albert ne doit chanter son amie, car il a renié toute courtoisie ; et, puisqu'il accuse de tromperie les femmes, on devrait bien le pendre, comme traître. Je vous le dis en vérité, si j'en avais le pouvoir, jamais il n'aurait de pire ennemi [que moi] ; car l'homme n'est pas noble, s'il ne se fie aux femmes, mais un homme vil considere [sic] cela comme une grande folie.

III. Leur amour est doux, il ne cause pas de peine : car si, au commencement, Dame Eve faillit, la Mère de Dieu obtint pour nous trève [sic] et paix ; de sorte que nous ne sommes pas pécheurs à cause de cette faute. Au contraire, tout homme qui les fréquente acquiert une telle valeur, qu'on le tient pour le premier parmi les gens de bien. Tel les loue, sans savoir ce que l'amour lui prépare (?) ; il ne faut donc pas qu'il en résulte jamais de douleur pour lui.

IV. Et puisqu'il parle de duchesse et de reine qui lui auraient fait don de leur amour, que la noble et valeureuse comtesse de Provence, qui possède toutes les qualités, les venge de lui. Que la comtesse Béatrice, cousine de la belle Agnès de Saluces, réclame cela de son admirateur, si elle lui voit changer d'opinion.

V. Si Selvaggia d'Auramala est aussi noble que le dit Messire Albert, il n'entrera jamais plus dans son salon sans qu'elle considère cela comme une honte et un préjudice à son égard. Si jamais il vient les voir, elle et sa sœur, et qu'elles ne le fassent jeter en bas de l'escalier, elles ne sont pas les filles de Conrad, le Seigneur ; car celui qui frappera leur amour sous l'aile doit en avoir peur et hardiesse (?).

VI. Cependant, si la noble dame de Massa, celle qui acquiert et amasse chaque jour plus de mérite, le voit et ne le frappe jusqu'à ce qu'elle en soit lasse : que Dieu ne protège pas son amant sincère ; qu'elle ne soit plus longtemps fraîche et épanouie ; qu'elle n'ait plus d'ami au printemps, car cela, c'est la joie qui surpasse toute autre en ce monde, et celle qui a la plus grande douceur.

VII. Au nom des autres dames et de la noble comtesse de Carret, je souhaite qu'une vieille servante d'homme de rien soit la souveraine de Messire Albertet, parce qu'il les a calomniées. Et si jamais une dame l'accueille (?) et si elle ne pense pas de mal de lui, qu'elle ne paraisse plus parmi les dames nobles : car il ne faut pas qu'une seule femme lui prête, en hiver, sa vile couverture.

VIII. Toutes les dames lui accordent et lui souhaitent tous les maux, car il a médit de l'amour.

dimanche 11 avril 2010

En amor trob tantz de mals seignoratges, d'Albertet de Sisteron, PC 16,13

Édition et traduction : Jean BOUTIÈRE, « Les poésies du troubadour Albertet », Studi medievali 10, 1937 : 43-47.

I
En amor trob tantz de mals seignoratges,
tantz loncs desirs e tantz malvatz usatges,
per q'ieu serai de las dompnas salvatges,
e no.is cuidon oimais q'eu chant de lor ;
qu'eu ai estat lor hom e lor mesatges
et enanssat lor pretz e lor valor,
e re no.i trob mas destrics e dampnatges ;
gardatz s'ieu dei oimais chantar d'amor.

II
D'amor non chan ni vuoill aver amia
bella ni pro ni ab gran cortesia,
c'anc no.i trobiei mas engan e bauzia
e fals semblan messongier trahidor ;
e qand ieu plus la cuich tener per mia,
adoncs la trob plus salvatg'e pejor ;
doncs ben es fols totz om q'en lor si fia ;
et ieu agui ma part en la follor.

III
Era vejatz de lor amor, si greva :
qe.ill primieira sap hom qe fo na Eva,
que fetz a Dieu rompre covenz e treva,
don nos em tuich enqeras pechador ;
per que fai mal totz hom c'ab ellas treva,
puois c'om no.n pot conoiser la meillor ;
tals las lauza, no sap d'amor qe.is leva,
ni anc no.n ac joi, pena ni dolor.

IV
El mon non a duquessa ni reïna,
si.m volia de s'amor far aizina,
q'ieu la preses, ni la comtessa fina
de Proensa, c'om ten per la genzor ;
de Salussa no vuoil que n'Agnesina
mi retenga per son entendedor,
ni.l comtessa Biatritz, sa cosina,
de Vianes, ab la fresca color.

V
Si Salvatga, la bella, d'Auramala,
qe de bon pretz a faich palaitz e sala,
non s'o tenga ad orguoill ni a tala,
non amarai ni lieis ni sa seror,
si tot de pretz son en l'aussor escala
e son fillas d'en Colrat, mon seignor ;
pero s'amors m'agra ferit sotz l'ala,
s'amar degues, mas no.n ai ges paor.

VI
Si n'Azalais de Castel e de Massa,
que tot bon pretz vol aver et amassa,
m'en pregava, tota.n seria lassa
anz que m'agues conquis per amador.
Dieus ! qui la ve com el'es fresca e grassa,
sembla rosa novella de pascor,
e siei beill huoill lanson cairel que passa
lo cors e.l cor, mesclat ab gran doussor !

VII
Si.m donava s'amor la pros comtessa,
cill del Carret, q'es de pretz seignoressa,
non faria per lieis un'esdemessa
(gardatz s'ieu dic gran orguoill o follor !)
que jes mos cors plus en dompnas non pessa ;
oimais lor er a percassar aillor,
q'ieu no vuoill jes que neguna m'aguessa
colgat ab se desotz son cobertor.

VIII
Dompnas, oi mais non vuoill vostra promessa
ni non serai de vos entendedor.

IX
Seign'en Colrat, grans es vostra despessa,
don poj'ades e creis vostra lauzor.

********************************
I. Je trouve en amour tant de mauvaises seigneuries, tant de longs désirs et tant de mauvais usages que je me tiendrai [dorénavant] à l'écart des femmes ; et que l'on n'aille pas croire que désormais je chanterai à leur sujet ! Car j'ai été [autrefois] leur homme lige et leur messager, et [malgré cela] je ne trouve auprès d'elles qu'ennuis et dommages. Voyez si désormais je dois chanter l'amour !

II. Je ne chante plus l'amour ; je ne veux plus avoir d'amie belle, noble et pleine de courtoisie, car je n'ai jamais trouvé auprès d'une telle femme que fausseté et tromperie, faux semblants mensongers et traîtres ; et c'est au moment où je crois le plus en être le maître, que je la trouve plus étrangère pour moi et pire [que par le passé]. Aussi, bien fous sont les hommes qui se fient aux femmes ; et j'ai participé, moi aussi, à cette folie.

III. Voyez à présent comme leur amour est préjudiciable : on sait que c'est dame Eve qui, la première, fit rompre à Dieu conventions et accord, et c'est pourquoi aujourd'hui encore nous sommes tous pécheurs. Aussi a-t-il bien tort, tout homme qui les fréquente, car il est impossible de reconnaître quelle est la meilleure. Si quelqu'un les loue, c'est qu'il ignore que l'amour est inconstant, et qu'il n'a jamais reçu de l'amour ni joie, ni peine, ni douleur.

IV. Il n'y a pas au monde de duchesse ni de reine dont je serais disposé, si elle me l'offrait, à accepter l'amour : pas même la noble comtesse de Provence, que l'on tient pour la plus charmante ; et je ne veux pas que dame Agnésine de Saluces me prenne pour « amant », non plus que sa cousine, la comtesse Béatrice de Viennois, au teint frais.

V. Si Selvaggia, la belle d'Auramala, qui a fait un palais et une salle de noble valeur, ne doit pas considérer [mes paroles] comme une marque d'orgueil et un affront, [je déclare que] je n'aimerai ni elle, ni sa sœur, bien qu'elles aient atteint toutes deux le plus haut degré de la valeur et qu'elles soient les filles de mon seigneur Conrad ; si j'avais dû aimer, leur amour m'aurait frappé sous l'aile (au cœur) ; mais cela n'est nullement à craindre.

VI. Si dame Adélaïde de Castel et de Massa, qui rassemble et amasse tout ce qui est noble prix, me priait d'amour, elle serait bien fatiguée avant de m'avoir conquis comme amoureux ; [et cependant] Dieu ! qui ne voit comme elle est fraîche et potelée : elle ressemble à une rose nouvelle du printemps ; et ses beaux yeux lancent un trait qui traverse le corps et le cœur avec une douceur extrême !

VII. Si elle me donnait son amour, la noble comtesse del Carret, qui est la souveraine de prix, je ne ferais pas, pour l'avoir, le moindre effort ; voyez si je suis orgueilleux et fou dans mes paroles ! Car mon cœur ne pense plus aux femmes : dorénavant, il leur faudra chercher ailleurs ; je ne veux pas que quelqu'une [de celles-ci] me tienne couché avec elle, sous sa couverture.

VIII. Femmes, dorénavant je ne veux plus de vos promesses et je ne serai plus amoureux de vous.

IX. Seigneur Conrad, grandes sont vos dépenses ; aussi votre réputation s'élève-t-elle et s'accroît-elle chaque jour.

jeudi 8 avril 2010

베아트리쓰 드 싸브와 (Béatrice de Savoie)

베아트리쓰 드 싸브와는 싸브와의 백작 또마 1세 (Thomas Ier) 와 마르그릿 드 쥬네브 (Marguerite de Genève)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또는 1920년에 프로벙쓰의 백작인 레몽-베렁제 5세 (Raymond-Bérenger V) 와 결혼하여 마르그릿, 엘레오노르, 썽씨, 베아트리쓰, 네 자매를 차례차례 낳았습니다. 그녀가 낳은 네 딸이 모두 왕비가 되는 바람에 그녀는 네 왕의 장모가 된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 사실을 제외하면 그녀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1245년, 남편이 죽고 막내딸 베아트리쓰가 나라를 상속받자, 어머니 베아트리쓰는 고향인 싸브와로 돌아가 거기서 1265년 또는 1266년까지 살았고, 1264년에는 싸브와의 백작으로 있던 남동생 삐에르 2세 (Pierre II) 를 대신하여 잠시 싸브와의 섭정으로 있었다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비록 구체적인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베아트리쓰 드 싸브와는 당대 트루바두르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프로벙쓰 궁정이 여러 트루바두르들을 후원했기 때문에 이들은 당연히 후원자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프로벙쓰의 백작 부인 베아트리쓰 드 싸브와를 찬미하는 옥어 노래가 약 스무 곡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Albertet de Sisteron
En amor trob tantz de mals seignoratges, PC 16,13

Aimeric de Belenoi
Tant es d'Amor honratz sos senhnoratges, PC 9,21
Nulhs hom en re no falh, PC 9,13a = 392,26

Elias de Barjols
Pus vey que nulh pro no.m te, PC 132,11
Morir pogr'ieu, si.m volgues, PC 132,9
Ben deu hom son bon senhor, PC 132,4
Amors, be.m platz e.m sap bo, PC 132,2
Bon'aventura don Dieus, PC 132,6

Arnaut Cataln
Amors, ricx fora s'ieu vis, PC 27,3
Ben es razos qu'eu retrja, PC 27,4a
Anc per null temps no.m donet iai, PC 27,4
Lanqan vinc en Lombardia, PC 27,6

Falquet de Romans et Blacatz
En chantan voill qe.m digatz, PC 156,4 = 97,2

Peire Guilhem (de Toulouse ou de Luserna) et Sordel
En Sordel, que vos es semblan, PC 344,3a = 345,1 = 437,15

Bertran d'Alamanon et Guigo de Cabanas
Vist hai, Bertran, pos no.us uiron mei oill, PC 76,24 = 197,3

Peire Bremon Ricas Novas
Tuit van chanso demandan, PC 330,19

Bertran d'Alamanon
Mout m'es greu d'En Sordel, car l'es faillitz sos senz, PC 76,12

dimanche 4 avril 2010

프로벙쓰의 네 공주 (4 princesses de Provence)

지금은 프로벙쓰 (Provence) 가 따뜻하고 아름답고 살기 좋고 맛있는 게 많은, 프랑쓰의 대표적인 지방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중세에는 프로벙쓰는 프랑쓰의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신성로마제국 (Saint Empire romain) 에 속해 있었지만, 이 제국이라는 것이 상당히 이론적인 나라에 불과했으며, 제국의 황제도 별로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거의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프로벙쓰의 백작은 자기 나라를 사실상 독립적으로 다스렸습니다. 블렁슈 드 꺄스띠으 (Blanche de Castille) 가 프랑쓰를 좌지우지하던 무렵 프로벙쓰의 백작은 레몽-베렁제 5세 (Raymond-Bérenger V) 였는데, 그와 그의 아내 베아트리쓰 드 싸브와 (Béatrice de Savoie) 에게는 연달아 네 명의 딸만 태어났습니다. 프로벙쓰의 미래를 염려하는 백작 부부에게 —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 신하였던 로메 드 빌뇌브 (Romée de Villeneuve) 가 네 공주는 네 명의 왕비가 되어 프로벙쓰의 이름을 드높일 것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전설인지, 사실이라면 로메 드 빌뇌브가 어찌하여 그러한 예언을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

우선 장녀 마르그릿 (Marguerite) 은 프랑쓰의 왕 루이 9세 (Louis IX) 와 결혼하여 프랑쓰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1234).

둘째딸 엘레오노르 (Éléonore) 는 영국의 왕 엉리 3세 (Henri III) 와 결혼함으로써, 영국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1236).

셋째 썽씨 (Sancie) 는 리샤르 드 꼬르누아이으 (Richard de Cornouailles) 와 결혼하였습니다 (1243). 이 사람은 바로 위에서 말한 영국왕 엉리 3세의 동생으로써, 결혼 당시는 콘월 (Cornwall) 의 백작이었습니다. 하지만 1257년, 로마인의 왕 (roi des Romains) 으로 선출됩니다. 로마인의 왕으로 뽑히면 장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불행히도 리샤르는 황제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고, 황제건 로마인의 왕이건 모두 실질적인 권력보다는 형식적인 호칭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공식적으로 썽씨는 로마인의 왕비 (reine des Romains) 가 됩니다.

원해서든 아니든, 세 딸을 모두 막강한 가문에 시집보내게 된 레몽-베렁제는 프로벙쓰가 프랑쓰나 영국이라는 두 강국 중 하나에게 합병될 것을 우려하여, 막내딸 베아트리쓰 (Béatrice) 에게 지위와 영토를 상속시킵니다. 따라서 1245년 레몽-베렁제가 사망하자 베아트리쓰는 11살의 나이에 프로벙쓰의 백작부인 (comtesse de Provence) 으로 즉위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듬해에 베아트리쓰도 프랑쓰의 왕자 샤를 덩쥬 (Charles d'Anjou) 와 결혼하고 맙니다. 샤를 덩쥬는 프랑쓰의 왕 루이 9세의 동생으로써, 결국 네 명의 자매는 둘씩 둘씩 두 형제와 결혼한 셈이 되었습니다. 애초에 마르그릿을 통해 프로벙쓰를 합병하려던 블렁슈 드 꺄스띠으는 또다른 아들 샤를을 베아트리쓰와 결혼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프로벙쓰에 대한 그녀의 야심을 드러낸 것이죠. 실제로 프로벙쓰의 상속녀와 결혼함으로써 샤를은 프로벙쓰 백작 (comte de Provence) 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샤를이 1266년 씨칠리아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베아트리쓰 역시 씨칠리아의 왕비 (reine de Sicile) 가 됩니다. 이로써 예언대로 네 명의 공주는 네 명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한편 프로벙쓰는 베아트리쓰 드 프로벙쓰와 샤를 덩쥬의 아들 샤를 2세에게 물려지게 됩니다. 이후로 번번이 프랑쓰의 왕자들이 프로벙쓰 백작의 지위에 오르다가 결국 1481년 프랑쓰의 왕 루이 11세는 아예 프로벙쓰를 프랑쓰 왕국으로 귀속시켜 버립니다.

mercredi 24 mars 2010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 (Marguerite de Provence)

블렁슈 드 꺄스띠으가 아들 루이 9세에게 보인 모성애는 약간 소유욕적인 면모가 없지 않은데, 특히 며느리와의 관계에서 그것이 잘 드러납니다. 아들이 성인 (adulte) 이 된 이후로도 여전히 어린애 취급을 하며 정사를 직접 주관하던 블렁슈는 1234년 루이 9세가 스무살 되던 해에 어쩔 수 없이 짝을 찾아주기로 합니다. 프랑쓰에 새로운 왕비가 있어야 하니까요. 아버지 루이 8세는 열세 살에 결혼했고, 할아버지 필립 오귀스뜨는 열다섯 살에 결혼한 것에 비하면, 루이 9세는 꽤 늦게 결혼한 셈입니다. 이 때 블렁슈가 아들의 아내감으로 선택한 여자는 프로벙쓰의 공주였던 마르그릿이었습니다. 1221년에 프로벙쓰의 백작 레몽-베렁제 5세 (Raymond-Bérenger V) 와 베아트리쓰 드 싸브와 (Béatrice de Savoie) 사이의 장녀로 태어난 마르그릿은 결혼 당시 13살이었습니다. 열세 살이면 당시로서는 결혼 적령기이도 했지만, 블렁슈가 그녀를 선택한 진짜 이유는 남편이 될 루이와 나이차가 일곱 살이나 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미 성인이 된 루이가 마르그릿을 여자로 보기보다는 그저 어린 아이로 볼 것이라는 기대였죠. 그리고 열세 살 짜리 며느리라면 시어머니의 말에도 고분고분할 것이었고, 블렁슈의 권위에 감히 대들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현직 왕 루이 9세가 아내를 맞이하면 그의 비가 공식적인 왕비가 되니까, 블렁슈 자신은 뒷자리로 물러나야 마땅할 것이었습니다. 공식석상에서 현직 왕비에게 자리를 내 주는 것보다도 블렁슈는 사석에서 아들에게 미치는 자신의 영향력이 며느리 때문에 줄어들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프로벙쓰는 아직 프랑쓰령이 아니었는데, 정략결혼을 통해 이 지역을 합병하려는 정치적 속셈도 물론 숨어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블렁슈의 계산 중 단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루이와 마르그릿은 처음에는 좀 어색한 사이였지만, 그건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정략결혼해야 하던 사이로서는 당연한 것일테고, 오히려 곧 금실좋은 잉꼬부부가 됩니다. 마치 블렁슈 자신과 루이 8세 사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훗날 성인 (saint) 으로 추앙될 루이 9세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왕비의 거처를 드나들어서, 어머니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합니다.

또한 한낱 어린 아이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따라서 아무런 정치적 판단력도, 자신의 뚜렷한 주관도 없을 것이기에 쉽게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는 매우 똑똑하고, 다방면에 지식이 풍부했으며, 의지가 분명했고, 시어머니의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마르그릿은 루이 9세와 블렁슈 자신 만큼이나 신심 깊은 생활을 하였기에, 도덕성 측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었으며, 19세 되던 해부터 시작하여 무려 열 한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왕비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 즉 프랑쓰의 후손을 잇는 임무도 쉽게 완성한 것입니다.

또한 마르그릿의 아버지 레몽-베렁제는 프로벙쓰가 마르그릿의 결혼과 함께 프랑쓰로 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장녀가 아닌 막내딸에게 영토를 상속시킵니다.

따라서 블렁슈는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로부터 얻으려던 것을 사실상 단 하나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jeudi 18 mars 2010

블렁슈 드 꺄스띠으 (Blanche de Castille)

루이 8세의 왕비였던 블렁슈 드 꺄스띠으 (1188-1200-1252) 는 프랑쓰 역사상 최초의 여자 섭정 (régente) 이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섭정 기간 (régence) 을 가졌습니다. 첫번째는 남편 루이 8세가 갑자기 죽고 아들 루이 9세가 아직 어린 시절이었을 때, 또 한번은 루이 9세가 성인 (adulte) 이 된 후에 십자군 전쟁을 떠나있던 기간이었습니다.

꺄스띠야 (Castilla = Castille) 의 인판따였던 블랑까 (Blanca = Blanche) 는 열 두 살의 나이에 훗날 프랑쓰의 왕이 될 루이 8세와 결혼하게 되어 프랑쓰로 옵니다. 그리고 이 어린 부부는 남매처럼 함께 자라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믿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실상 유럽 왕가의 정략 결혼 중에서 이렇게 행복한 결혼은 역사를 통틀어서 별로 찾아 보기 힘들지요. 오랜 세월을 왕세자로만 보냈던 루이 8세는 왕이 되자마자 알비 십자군 전쟁을 치루러 왕궁을 떠났으므로, 블렁슈는 사실상 이미 남편이 살아 있던 시절부터 빠리에 머물면서 실질적인 정치를 했습니다. 물론 아내를 완전히 믿는 남편의 허락 하에 그러했던 것이지요.

루이 8세가 왕이 된지 3년 만에 숨을 거두면서 어린 아들 루이 9세의 섭정으로 그 어머니인 블렁슈 드 꺄스띠으를 지칭함으로써 그녀는 공식적으로 프랑쓰의 최고 권력을 쥐게 됩니다. 그 이전에도 프랑쓰에 섭정이 있었던 적은 두어번 있었으나, 여자에게 섭정권을 준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블렁슈는 1226년 루이 8세가 숨을 거둔 때부터 1235년 루이 9세가 성인 (adulte) 으로 공표될 때까지 9년간 프랑쓰를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이미 남편이 죽기 전부터 정치에 참여했고, 아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에, 그녀가 실권을 행사한 기간은 더 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세력을 제대로 정착시키지도 못한 채 루이 8세가 죽고, 어린 아이가 왕이 되고, 여자가 권력을 잡게 되자, 여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또는 이 틈을 타 대세를 뒤집어 보려던 귀족들이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정치술과 판단력, 결단력이 매우 뛰어났던 블렁슈는 모든 반란을 다 진압하고 왕권을 오히려 강화시켰습니다. 그녀는 또한 남편이 참여했던 알비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지어 뚤루즈 백작령 (comté de Toulouse) 의 절반 이상을 프랑쓰령으로 합병하였습니다.

루이 9세와 블렁슈 드 꺄스띠으의 관계는 매우 애틋했던 것 같습니다. 블렁슈는 장남 (엄격히는 장남이 아니지만 위의 세 형이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으므로) 루이 9세를 다른 아들들 보다 끔찍히 여겼던 것 같고, 매우 신심 깊고 곧은 성격이었던 루이 9세는 어머니를 무척 공경했습니다. 그리하여, 성장한 루이 9세는 독자적으로 정치를 하면서도 어머니의 의견을 자주 참고했고, 1248년 제 7 차 십자군 전쟁을 떠나면서는 공식적으로 블렁슈 드 꺄스띠으를 프랑쓰의 섭정으로 임명합니다. 이 때 블렁슈의 나이는 60살이었지요. 그런데 에집트로 떠났던 루이 9세가 결국 그곳에서 포로로 잡히고 맙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쓰에서는 목동들의 반란 (révolte des pastoureaux) 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가난한 목동들, 초라한 농민들이 왕을 구하러 가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면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특권층에 대한 봉기로 돌변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아들을 구하러 가겠다는 백성들의 열정에 감동받았던 블렁슈는 이것이 반란으로 돌아서자 엄하게 진압합니다.

번번이 그녀의 섭정 기간마다 반란이 있었고 그걸 성공적으로 다스렸기에, 블렁슈 드 꺄스띠으는 무섭고 냉정하고 표독한 여자로 그려지기도 했고, 남편과 아들로부터 왕권을 빼았을 정도로 권력을 좋아한 여자라는 인상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으며, 며느리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와의 관계 때문에 악독한 시어머니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녀가 상당히 현실적인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매우 균형있게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평가합니다. 싫든 좋든 그녀는 프랑쓰 최초의 여왕이라 할 만합니다. 쌀릭법 때문에 여자는 왕이 될 수 없었던 프랑쓰에서 그녀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 없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목동들의 반란을 진압한지 얼마 되지 않아 블렁슈는 64살의 나이에 숨을 거둡니다. 십자군 전쟁을 떠난 루이 9세, 그녀가 집착에 가까울 만큼 사랑했던 아들은 다시 보지 못한 채 말이지요.

dimanche 7 février 2010

루이 8세 르 리옹 (Louis VIII le Lion)

필립 오귀스뜨이자벨 드 에노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 8세 (1187-1223-1226) 는 아버지와 사뭇 다른 삶을 산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필립 오귀스뜨는 14세에 왕으로 축성되었는데 반해, 루이 8세는 36세에 즉위하였습니다 (1223). 당시에 열 네 살이면 성인으로 인정받고, 평균 수명이 대략 서른 살 전후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루이 8세는 정말 늦은 나이에 왕이 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왕으로 3년 밖에는 재위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43년을 통치한 것에 비하면 정말 짧은 기간이죠. 또한 필립 오귀스뜨가 세 명의 왕비를 차례차례, 또는 동시에 두면서 심각한 정치 문제로까지 대두될 만큼 상당히 복잡한 부부관계를 가졌던 데 비해, 루이 8세는 열 세 살에 맞이한 신부 블렁슈 드 꺄스띠으 (Blanche de Castille) 와 평생을 서로 믿고 의지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필립 2세가 그렇게 여러 부인들과의 사이에서도 루이 8세 자신을 제외하면 별다른 후사를 못얻었는데 비해, 루이 8세와 블렁슈 드 꺄스띠으는 열 한 명의 자녀를 보았습니다 (그 중 루이 9세).

너무 대단했던 아버지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늘 속에 묻혀 있긴 하지만 사자 (Lion) 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루이 8세 역시 상당히 용맹스럽고 야심이 많았던 왕이었습니다. 물론 직접 통치 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루이 8세의 업적은 대부분 왕세자 시절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필립 오귀스뜨가 영국과 싸우던 시절, 루이 8세도 아버지를 도와 여러 차례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심지어 땅 없는 졍 (Jean sans Terre) 을 물리치고 영국의 왕위에 오르려고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프랑쓰 왕이 된 후 여러 영국 영토를 빼앗았으며, 또한 알비 십자군 전쟁 (croisade albigeoise) 에도 참여하여 옥씨따니 중 일부, 특히 오늘날의 렁그독 (Languedoc) 지역을 프랑쓰령으로 차지했습니다. 바로 이 알비 십자군 전쟁 중 이질 (dysenterie) 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루이 8세는 좀 더 오래 살았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프랑쓰의 역사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 수 없겠지만, 그의 이른 죽음 덕분에 또하나의 대단한 인물이 프랑쓰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바로 그의 아내였던 블렁슈 드 꺄스띠으 !

jeudi 4 février 2010

필립 오귀스뜨의 세 왕비 (3 reines de Philippe Auguste)

필립 오귀스뜨는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세 명의 비를 두었었는데, 첫번째를 제외하면 나머지 둘은 실제로 왕비라고 불러도 좋을지,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필립 2세의 첫번째 왕비는 이자벨 드 에노 (Isabelle de Hainaut) 였습니다. 어찌보면 그녀는 가장 평범한 왕비다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노의 백작 보두앙 5세 (Baudouin V) 와 플렁드르의 백작부인이었던 마르그릿 달자쓰 (Marguerite d'Alsace), 즉 두 세력가 집안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정략 결혼을 하고, 외국에 시집와서 공식적으로는 왕비의 대접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내야 했으며, 특히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들을 하나 낳고는 일찍 죽었습니다. 사실 프랑쓰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몇몇 개성이 강한 여자들을 제외하면, 많은 왕비들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혼을 했을 때 이자벨의 나이는 열 살이었고, 남편 필립의 나이는 열 다섯 살이었으므로, 결혼하고도 칠여년간 아이가 없었다는 것은 요즘 시각으로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 나라 사극을 봐도 비슷하지만,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하면 거의 왕실에서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기 쉽상이지요. 그 자신도 외아들이었던 필립 오귀스뜨는 이자벨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비난도 많이 했고, 그녀가 친정에 별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녀는 1187년에 왕자를 하나 낳고, 그 왕자는 훗날 필립 오귀스뜨를 이어 루이 8세 (Louis VIII) 가 되지요. 3년 뒤 이자벨은 또한번 해산을 하다가 결국은 스무 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고, 그 때 태어난 쌍동이 왕자들 역시 모두 일찍 죽습니다.

이자벨 드 에노가 죽은지 약 3년 뒤, 필립 오귀스뜨는 단마크 왕의 딸과 새로 결혼을 합니다. 이 두번째 왕비의 이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프랑쓰식으로 이정부르 (Isambour) 라고도 부르고, 단마크 식으로 잉게보르크 (Ingeborg) 또는 잉게부르게 (Ingeburge) 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옛날에는 아무리 귀족이라도 여자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낯선 외국 이름이었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철자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스껑디나비 출신의 공주가 프랑쓰의 왕비가 된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째서 그녀가 필립 오귀스뜨의 새로운 왕비로 선택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필경 정치적인 이유겠지만, 아무튼 이정부르 드 단마르크 (Isambour de Danemark) 는 1193년 8월 14일 당시 유럽 최고의 왕과 결혼식을 올리고 프랑쓰의 왕비로 축성을 받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다음날 필립 오귀스뜨는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합니다. 도대체 신혼 첫날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 아무도 모르지요. 왕비의 몸이 비늘로 덮여 있는 마녀였다 식의 희귀한 소문부터 시작해서 정치적 또는 외교적 이유까지 별별 상상이 난무했지만, 지금까지도 역사학자들은 필립 오귀스뜨의 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결혼한 다음날부터 이정부르는 왕궁에서 살기는 커녕, 빠리 동쪽의 성 모르 수도원 (Abbaye de Saint-Maur) 에 사실상 감금됩니다. 하지만 교황청은 이 이유 없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필립은 필립대로 교황에게 질 수 없었죠. 그때문에 이 결혼을 둘러싼 논쟁은 1201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8년간 이정부르는 프랑쓰의 정식 왕비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외로운 삶을 삽니다.

교황 쎌레스땅 3세 (Célestin III) 가 이정부르와의 결혼이 유효하다고 공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오귀스뜨는 이것을 무시하고 1196년 아녜쓰 드 메라니 (Agnès de Méranie) 와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립니다. 오늘날은 모라비 (Moravie) 라고 불리는 체끼 (Tchéquie) 동쪽의 공국, 메라니의 공주였던 아녜쓰는 세 명의 왕비 중 가장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필립 오귀스뜨는 왕비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그녀를 사랑했으며, 두 사람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쎌레스땅 3세가 죽고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이노썽 3세 (Innocent III) 는 교황의 말을 무시하고 이중 결혼 상태로 살고 있는 프랑쓰 왕을 가만둘 수 없었습니다. 여러 차례 이정부르의 지위를 되살리고 아녜쓰와 결별하라는 지시를 했지만 필립 오귀스뜨가 여전히 귀머거리 행세를 하자, 이노썽 3세는 결국 1200년, 프랑쓰 전체에 성무집행금지령 (interdit) 을 내립니다. 성무집행금지령은 한 나라 또는 한 지역 전체가 파문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미사를 비롯하여 결혼식, 장례식 등등 그 어떤 종교 행위도 행해지지 못하도록 하는 큰 벌이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국민이 천주교를 믿던 나라에서 이것은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지요. 결국 약 아홉개월을 버틴 끝에 필립 오귀스뜨도 항복할 수 밖에는 없었으며, 금지령은 철회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이정부르가 진짜 그리고 유일한 프랑쓰의 왕비로 인정되었습니다. 더군다나 1201년, 아녜쓰 드 메라니가 해산 중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로써 필립 오귀스뜨의 두 아내 문제는 해결된 듯 보였으나, 1205년 그는 또다시 이정부르와의 결혼을 무산시키려는 재판을 시작하고, 1212년이 되서야 모든 노력을 포기합니다. 이후 필립은 1223년에 죽고, 이정부르는 1226년에 죽습니다. 열아홉의 나이에 낯선 나라에 시집와서, 33년 동안 단 하루도 아내로서도, 왕비로서도 살지 못했던 이정부르의 삶도 참 불행한 것은 사실이나, 또 필립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게도 싫은 여자와 삼십년을 묶여 지내야했던 것도 고역이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dimanche 17 janvier 2010

필립 오귀스뜨 (Philippe Auguste)

필립 2세 (Philippe II) 또는 필립 오귀스뜨프랑쓰의 영토 확장과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한 왕입니다. 루이 7세 (Louis VII) 가 세 번의 결혼 끝에 얻은 유일한 아들인 필립은 태어나면서부터 왕위를 잇는 것이 확정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아버지의 살아 생전에 이미 왕으로서 축성을 받았습니다 (1179). 비록 바로 그 다음 해에 루이 7세가 사망하긴 하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프랑쓰는 공식적으로 두 명의 왕이 다스린 셈이 되지요. 축성을 받았을 때 필립의 나이는 14살이었으며, 15살부터는 단독으로 프랑쓰의 왕 필립 2세가 됩니다.

당시의 프랑쓰 및 유럽의 정치 체제는 봉건주의 (féodalisme) 로서, 이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론적으로는 많은 귀족들이 프랑쓰의 왕에게 복종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귀족들은 매우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영지를 다스렸습니다. 따라서 프랑쓰 왕의 직접적인 권한은 오늘날 빠리와 일-드-프렁쓰 (Île-de-France) 를 둘러싼 극히 작은 지방에 밖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지요. 특히 영국의 왕은 이론적으로 프랑쓰 왕의 신하였으나, 영국 섬은 물론 프랑쓰 내에 그보다 더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쓰의 남서쪽, 북서쪽, 북쪽 등등이 모두 영국 왕의 영지였지요. 따라서 프랑쓰는 상당히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필립 2세가 단독으로 다스리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자벨 드 에노 (Isabelle de Hainaut) 와의 결혼이었고, 이 공주는 결혼 선물로 아르뜨와 (Artois) 지방을 필립에게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영토 확장을 시작한 필립 오귀스뜨는 계속해서 술책과 정책, 전쟁과 외교를 통하여 프랑쓰의 영토를 넓히는데 일생을 바칩니다. 특히 프랑쓰 내의 영국 영토를 빼았기 위해 그는 영국 왕자들이 그들의 아버지인 엉리 2세 (Henri II) 에게 일으킨 반란을 후원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엉리 2세의 아들 리샤르 (Richard) 가 영국의 왕이 되자, 이번엔 그와 그의 동생인 졍 (Jean) 사이를 이간질 시켰습니다. 또한 후사없이 죽은 리샤르를 뒤이어 졍이 왕이 되자, 그가 프랑쓰 내에 소유했던 영토를 하나하나 다 빼앗았습니다. 그 때문에 졍은 흔히 졍 썽 떼르 (Jean sans Terre) 즉 « 땅없는 졍 »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엉리 2세와 리샤르, 졍 등은 모두 프랑쓰 출신인 쁠렁따쥬네 가문의 사람들로, 불어와 옥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비록 영국이라는 섬의 일부를 다스리기는 했지만 영어를 전혀 몰랐으며, 영국의 왕인 동시에 노르멍디 공작, 엉주 백작, 멘 공작, 쁘와뚜 백작, 아끼뗀 공작으로써, 대부분 프랑쓰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프랑쓰에 묻혔습니다.)

영국의 왕으로부터 빼앗은 땅 이외에도 필립 2세는 여러 지역을 차지하여 오귀스뜨 (Auguste) 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가 죽을 무렵 (1223) 에는 프랑쓰 왕의 소유지가 현대 프랑쓰의 거의 3분의 2 정도가 될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렇게 영토가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오귀스뜨는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 왕국 전체를 통일적으로 다스리는 데 성공했으며, 도시 시민들 (bourgeois) 을 장려함으로써, 봉건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필립 오귀스뜨는 또한 수도 빠리를 확장시키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도 많은 정성을 들였습니다. 진흙 바닥이었던 빠리의 길은 돌로 포장이 되었고,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성벽이 축조되었습니다. 바로 이 성벽을 쌓으면서 루브르 (Louvre) 궁도 지어졌습니다. 또한 빠리의 중앙에 거대한 시장을 만든 것도 바로 이 왕으로, 이 시장은 1969년까지 지속되었고, 빠리의 여러 학교들을 모아 공식적으로 빠리 대학 (Université de Paris) 의 지위를 준 것도 필립 2세였습니다.

현재도 남아 있는 필립 오귀스뜨의 성벽의 유적
(Reste de l'enceinte Philippe Auguste)

dimanche 20 décembre 2009

달 이름의 유래 (nom des mois)

불어에서 매달매달의 이름은 모두 라띠나어에서 유래하였는데,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은 로마 시대에는 새해가 3월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학년제와 비슷하다 할 수 있겠지요. 3월부터 시작하여 그 어원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mars : 3월은 라띠나어로 martius 라 했고, 로마 신화 속의 군신 마르쓰 (Mars) 를 기념하는 달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avril : 4월은 라띠나어 aprilis 로부터 유래했는데, 이 라띠나어의 뜻은 모호합니다. 이미 로마시대부터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그리쓰의 여신 아프로딧 (Aphrodite) 을 기념하는 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고, 또다른 사람들은 라띠나어 동사 aperire, 즉 « 열다 » 에서 기원했다고 보았습니다. 4월은 사실상 봄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꽃들이 만개하고 모든 생명이 새로 솟는 만큼 열리다 라는 동사에서 그 어원을 찾은 것도 이해는 갑니다. 또다른 주장은 라띠나어 형용사 apricus 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이 형용사는 « 양지바른, 해가 잘 드는, 햇빛을 좋아하는 » 이라는 뜻인데, 역시 봄의 시작과 관계가 있는 해석입니다.

mai : 5월을 가리키는 말은 라띠나어 maius 에서 왔으며, 이 말은 그리쓰와 로마 신화 속의 여신 마이아 (Maia) 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juin : 6월은 라띠나어 iunius 에서 비롯되었고, 이 단어는 로마의 여신 유노 (Juno) 를 기념하는 달입니다.

juillet : 7월을 칭하는 이름은 라띠나어 iulius 가 변해서 된 말인데, 이것은 율리우쓰 까에싸르 (Julius Caesar) 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원래 애초에는 이 달의 이름은 quintilis 였으며, 그저 « 다섯번째 달 » 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새해가 3월부터 시작하므로 7월은 다섯번째 달이 맞지요. 그러던 것을 아우구스뚜쓰 (Augustus) 황제가 까에싸르를 기념한다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바꾼 것입니다.

août : 8월도 7월과 비슷한 현상을 겪었습니다. 원래 8월의 이름은 sextilis, 즉 여섯번째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뚜쓰의 후계자였던 띠베리우쓰 (Tiberius) 가 양아버지이자 선임 황제였던 아우구스뚜쓰를 기념한다하여 augustus 라고 달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단어가 차차 변하고 줄어, 불어에서는 août 이 되었습니다. août 은 발음이 조금 문제가 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셔요.

septembre : 9월의 이름은 라띠나어 september 에서 왔으며, 이 단어는 그저 일곱번째 달이라는 뜻입니다. 역시 3월을 시작으로 보았을 때 이야기이지요. 불어 숫자 sept (7) 을 생각해 보면, 같은 어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octobre : 10월도 9월과 마찬가지 원칙입니다. 라띠나어 october 는 여덟번째 달이라는 뜻이며, 불어 huit (8) 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novembre : 11월 역시 아홉번째 달이라는 뜻의 라띠나어 nouember 에서 왔습니다. 불어 neuf (9) 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décembre : 12월을 칭하던 라띠나어 december 는 열번째 달이라는 뜻이며, 현대 불어 dix (10) 도 같은 어원입니다.

janvier : 1월은 조금 더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초창기의 로마력은 데껨베르로서 한 해가 끝났으며, 나머지 육십여일은 날짜를 세지 않았다고 합니다. 농경 시대에는 겨울 동안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저 3월의 꺌렁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지요. 하지만 누마 뽐삘리우쓰 (Numa Pompilius) 라는 왕 (기원전 8-7세기) 이 달력을 개편하면서 1월과 2월을 연말에 추가했습니다. 어쨌거나 1월의 이름은 라띠나어 januarius 에서 왔으며, 이 달은 로마의 신 야누쓰 (Janus) 를 기념합니다.

février : 2월은 라띠나어 februarius 에서 온 이름인데, 이 단어는 동사 februare, 즉 « 정화하다, 순화하다 » 라는 뜻입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은 애초에는 야누아리우쓰와 페브루아리우쓰의 순서가 서로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즉 누마 뽐삘리우쓰가 달력을 개편했을 때는 데껨베르에 이어지는 달 이름을 페브루아리우쓰라 불렀고, 그 뒤에 오는 달을 야누아리우쓰라 불렀으며, 이러한 관습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450년 경, 두 달의 이름을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153년부터 1월 1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게 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랍니다.

dimanche 20 septembre 2009

héraut « 사자 »

héros 의 h 가 유성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héraut 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프렁씩어 heriwald 에서 유래한 héraut 는 1180년 경부터 불어에서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제르마닉 계열의 어원을 가지고 있는 만큼, 애초에는 h 가 발음되었을 것입니다. 1300년 경부터 héros 가 불어에 도입되었으므로, 이 때 héros 는 기존 어휘인 héraut 를 흉내내어 발음되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현대 불어에서 두 단어는 정확하게 똑같이 소리납니다.

héraut 라는 것은 중세 기사 (chevalier) 체제의 한 계급으로서, 왕이나 영주 등의 메싸쥬 (message) 를 전달하거나, 공식적인 선언문 등을 공표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중요한 행사나 의식 따위에서 순서를 알리고 진행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흔히 나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하지요.

이렇게 항상 어떤 일의 알림을 맡았었기 때문에, 오늘날 héraut 는 « 선구자, 전조 » 등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하지만 중세에 에로의 중요한 임무는 기사들의 문장 (blason) 을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귀족들은 자신이 속한 가문을 대표하는 문장을 방패와 깃발 등에 그려서 가지고 다녔는데, 기사들의 경기 (tournoi) 나 귀족들의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일일이 확인하고 어떤 가문의 누구인가를 재빠르게 파악하여 선포하는 것이 에로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문장을 연구하는 학문을 héraldique 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mardi 28 juillet 2009

제물포의 영웅들 (Les héros de Chemulpo)

오페라의 유령, 룰따비으 연작 등 많은 소설을 지은 갸스똥 르루 (Gaston Leroux) 는 그외에도 특이한 저작 하나를 남겼는데, 제목이 제물포의 영웅들 입니다. 졍르를 명쾌히 정의하기 힘든 이 책은 일종의 보고서 또는 증언록이라 말할 수 있는데, 거기에 약간의 소설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오페라의 유령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빛이 바랜 느낌이 풀풀나고, 독창성이나 창조성이 돋보이기 보다는 그 유치함에 절로 살며시 미소가 떠오르게 되는, 그런 책입니다.

제목만 보면 100여년 전에 살았던 프랑쓰의 작가 르루가 한국을 알고 있었나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책을 몇 쪽만 읽고 나면, 한국은 전혀 그의 관심이 아니었음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제목의 제물포 는 인천을 가리키는 게 맞지만, 영웅들 이란 제물포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러시아 장교와 군인들을 칭송하는 용어인 것입니다. 1904 년 일본 측의 공격으로 우리 나라 인천 앞바다에서 일어난 제물포 전투는 러일전쟁의 시작이 되었으며, 당시 극동 지역에 주둔해 있던 많은 서구 세력들에게 목격되어 상당한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 특히 선전포고도 없이 국제법을 어기면서, 중립지역이었던 제물포에서 러시아를 공격한 일본군의 만행에 많은 사람들이 놀란 듯 합니다. 그렇다면 르루도 그 중 한 명으로 한국에 와 있었던 것일까요 ? 그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기자였으니까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아니었습니다. 르루는 제물포 전투에서 살아 남아 돌아오던 러시아 군인들을 쒸에즈 운하 (Canal de Suez) 의 싸이드 항 (Port Saïd) 에서 만나, 그들의 배를 함께 얻어타고 마르쎄이으로 돌아오면서 군인들을 면담한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러시아인들의 증언을 옮긴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면서 증언에 보다 생동감을 주려 했는지, 대화체와 소설적인 서술법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르루가 한국에 온 것도, 한국에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약간 아쉽지만, 그래도 책이 당시의 상황을 충실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은 역사 자료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소설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가미되어 있어서, 어딘가 모르게 공정성, 정확성이 떨어집니다. 저는 동양 근대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책이 얼마나 정확하고 중요한 자료인지 엄밀히 판단할 수는 없으나, 책의 시작부터 르루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애를 태우다가 어렵사리 싸이드 항에 도착하여 러시아인들을 만나게 된 것인지부터 시작하여, 책의 구성, 문체, 모든 것에서 당시 전투의 심각성보다는 그저 르루 본인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영웅으로 떠받드는 러시아 군인들에 대한 찬미와 칭송이 지나치게 두드러진 것 같아, 읽기가 거북했습니다.

또한 이 책에는 죠안쏜 (Ar. Johanson) 이라는 사람이 르루의 글을 묘사한 그림이 여러 장 함께 실려 있습니다. 글을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핑계 하에, 이렇게 그림이나 삽화를 삽입하는 것이 당시에는 상당히 보편적인 관습이긴 했지만, 오늘날에는 어딘가 모르게 유치하고 어설프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마디로, 눈길을 끄는 제목과는 달리, 저에게는 그다지 흥미롭지 못한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극동의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 의미있는 자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lundi 26 janvier 2009

오뗄 마띠뇽 (Hôtel Matignon)

마리아 브리뇰레-쌀레 (Maria Brignole-Sale) 는 갈리에라 궁 외에도 빠리 시내에 또하나의 화려한 오뗄 빠르띠뀔리에 (hôtel particulier) 를 소유했었습니다. 그 첫 소유자였던 쟉 드 마띠뇽 (Jacques III de Matignon) 의 이름을 따서 오뗄 마띠뇽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1725년에 완성된 이래, 상속과 판매를 통해 끊임없이 주인을 바꾼 뒤, 1848년 라파엘레 데 페라리 (Raffaele de Ferrari) 의 소유가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갈리에라 공작 (duc de Galliera) 이며, 마리아 브리뇰레-쌀레의 남편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며, 빠리에서 리용을 거쳐 마르세이으까지 가는 철도를 놓기도 한 갈리에라 부부는 갈 곳 없는 필립 도를레엉 (Philippe d'Orléans) 과 그 가족들에게 오뗄 마띠뇽의 1층을 내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쓰는 꼬뮌 드 빠리를 거친 후 제 3 공화국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왕위 계승자 (prétendant au trône) 임을 자칭하는 필립 도를레엉은 자신의 조상들과는 달리, 왕궁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필립 도를레엉의 맞딸 아멜리 도를레엉 (Amélie d'Orléans) 이 뽀르뛰갈의 인판떼 까를로쓰 (Carlos ou Charles) 와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갈리에라 부인은 1886년 5월 14일, 오뗄 마띠뇽에서 매우 성대한 잔치를 열었고, 여기에는 삼천여명의 귀족들과 왕정파들이 초대받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오뗄 마띠뇽이 위치해 있는 뤼 드 바렌 (rue de Varenne) 이 마차와 자동차로 미어 터졌는데, 하필 그 때 죠르쥬 끌레멍쏘 (Georges Clemenceau) 의 차 역시 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급진 좌파 국회의원으로 이름을 얻고 있던 끌레멍쏘는 호사스럽게 차려 입은 왕정주의자들이 오뗄 마띠뇽 앞에 길게 줄을 지어 늘어 서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추방법을 제안하게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또는 이 때의 차막힘에 휘말려 든 것은 끌레멍쏘의 차가 아니라 당시 국무총리였던 샤를 드 프레씨네 (Charles de Freycinet) 의 차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전설적인 일화를 떠나, 그 다음날부터 신문들, 특히 르 피갸로 (Le Figaro) 같은 우파 신문들이 오뗄 마띠뇽에서 있었던 왕정주의자들의 모임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제 3 공화국 정부는 추방법의 통과를 급하게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했듯, 추방법으로 오를레엉 일가가 망명길에 오르게 되자, 갈리에라 부인은 갈리에라 궁과 자신의 예술품을 프랑쓰에 기여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대신 갈리에라 궁은 빠리 시에, 예술품은 제노바 시에, 오뗄 마띠뇽은 외스터라이히의 황제에게 기증하고 죽습니다.

외스터라이히 측은 오뗄 마띠뇽을 잠시 재불 대사관으로 사용했으나, 1차 대전의 발발로, 두 나라는 적군이 되며, 프랑쓰는 오뗄 마띠뇽을 적군의 재산으로 압수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수많은 교섭 끝에, 오뗄 마띠뇽은 1922년부터 프랑쓰 국가의 소유가 되며, 1935년 이후로는 국무총리의 공식 관저가 됩니다. 1958년부터는 제 5 공화국의 출범으로 정부 체제가 조금 바뀌게 되어, 국무총리 (président du Conseil) 대신 수상 (premier ministre) 이 내각의 우두머리가 되고, 오뗄 마띠뇽은 지금까지도 프랑쓰 수상의 사무실이자 그 가족들이 먹고 살고 자는 숙소로 쓰이고 있습니다.

오뗄 마띠뇽은 대부분의 다른 오뗄 빠르띠뀔리에와 마찬가지로 넓은 뒷정원을 가지고 있는데, 빠리 시내에서 대중에게 개방된 공원들을 제외하면 가장 넓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6년 수상으로 임명된 레몽 바르 (Raymond Barre) 이래 역대 모든 수상들은 이 정원에 자신이 원하는 나무를 한 그루씩 심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물론 평소에는 오뗄 마띠뇽과 그 정원은 일반인에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유산의 날들이나 하얀 밤 같은 특별한 행사 때는 개방되기도 합니다.

Hôtel Matignon
source de la photo

dimanche 25 janvier 2009

갈리에라 궁 (Palais Galliera)

도쿄 궁 바로 맞은 편에는 갈리에라 궁이 있습니다. 샤이오 궁이나 도쿄 궁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 역시 왕궁으로 쓰였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앞의 두 궁에 비하면 보다 구체제와 관련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갈리에라 궁은 갈리에라 공작부인이었던 마리아 브리뇰레-쌀레 (Maria Brignole-Sale, 1812-1888) 가 19세기 말에 빠리 서쪽에 짓게한 개인 저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의 개인 저택은 palais 보다는 hôtel particulier 라고 칭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이 건물은 palais 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사실 크기도 궁이라고 하기에는 좀 자그마합니다.

갈리에라 부인은 이 궁에 자신이 수집한 예술 작품들을 보관할 예정이었으며, 사망시, 건물과 예술품 모두를 프랑쓰에 기증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추방법 (loi d'exil) 이 공표되자, 마음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추방법이란 이전의 왕족과 황족 및 그 직계 후손들이 프랑쓰 공화국에 체류하는 것을 금지할 목적으로, 1886년에 만들어진 법입니다. 이딸리아의 귀족부인이었던 마리아 브리뇰레-쌀레는 사실상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지만, 왕정에 호의적이었고, 필립 도를레엉 (Philippe d'Orélans, 당시 프랑쓰 왕위 요구자) 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기에, 오를레엉 가문을 쫓아낸 프랑쓰에 자신의 재산을 기증할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궁 만은 결국 — 프랑쓰가 아닌 — 빠리 시에 기증하고 죽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건물은 빠리 시의 시립 의상 박물관 (Musée de la mode et du costume) 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갈리에라 궁source de la ph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