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udi 2 août 2007

성녀 쟌 다르크 (Sainte Jeanne d'Arc)

프랑쓰의 역사와 관련된 성인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중 하나는 바로 성녀 쟌 다르크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백년 전쟁 후반기 무렵, 평범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이 시골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프랑쓰를 구하라는 하늘의 목소리를 여러 차례 듣고는 혜성처럼 나타나 전쟁의 판도를 뒤집어 엎었죠.

그녀가 실제로 천사와 성인들의 목소리를 들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여러 사건들이 많은 증인들 앞에서 행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그녀가 처음 프랑쓰의 왕 샤를 7세 (Charles VII) 를 만나러 왔을 때, 궁정에서는 그녀를 시험해 보고자, 가짜 왕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쟌은 곧 그가 가짜임을 알아차렸을 뿐 아니라, 군중 틈에 변장하고 숨어 있던 진짜 왕을 대번에 발견했다고 합니다. 또, 쟌의 첫번째 전투는 오를레엉 (Orléans) 에서였는데, 아무런 군사적 교육을 받은 적이 없던 이 열일곱살의 아가씨는 일곱달 이상 포위되어 있던 오를레엉을 7일 만에 해방시켰습니다. 그 후 그녀는 지휘하는 전투마다 승승장구하여, 샤를 7세를 랑쓰 (Reims) 까지 수위해 가, 프랑쓰의 왕으로 축성시키는데 성공하지요. 당시 프랑쓰는 수도를 포함하여 북부 절반을 영국군에게 빼앗긴 상태였으며, 랑쓰 역시 적군의 손아귀에 있었기에, 샤를 7세는 7년이 지나도록 축성을 받지 못한 채로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왕이 아니라 자주 도팡이라 불렸습니다.) 쟌은 오를레엉의 승리와 랑쓰의 축성을 비롯하여, 자신의 앞날의 주요 사건들을 미리 예견했으며, 자신이 포로로 잡힐 날짜와 장소 역시 미리 예고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이 정말 그녀가 하늘이 보낸 사람인 탓인지, 순전히 우연의 일치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지만, 그녀의 용기와 자신감,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신념은 상당히 감동적인 데가 있습니다. 난 열 일곱 살에 뭘했나 생각해 보면, 참...

쟌 다르크가 활동한 기간은 총 1년 남짓 (1429년 5월-1430년 5월) 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백년 전쟁은 그녀가 영국군에 의해 화형당한 (1431년 5월 29일) 후로도, 이십여년간 더 지속되지만, 쟌 다르크에 의해 사기를 얻은 프랑쓰군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하여, 잃었던 땅의 거의 전부를 되찾았습니다.

따라서 쟌 다르크는 프랑쓰에서 매우 중요하고 « 인기있는 »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신비스러운 삶과, 프랑쓰를 구했지만 프랑쓰로부터 버림받은 그녀의 극적인 운명 역시 많은 관심을 일으키는데 한 몫 했겠지요 ? 쟌 다르크의 삶의 무대가 되었던 주요 장소들, 동레미, 오를레엉, 빠떼 (Patay), 랑쓰, 루엉 (Rouen) 등등은 물론,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라도, 프랑쓰 도처에는 그녀를 기리는 광장, 길, 동상 등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또한 바띠껑 (Vatican) 이 그녀를 성인으로 인정하고 나서는, 그녀에게 바쳐진 성당들이 거의 각 도시마다 하나씩은 생겨났고, 그렇지 않은 성당들이라도 반드시 쟌 다르크의 동상이나 그림 한 점 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성모 마리아 (Vierge Marie) 와 대천사 미꺄엘 (Archange saint Michel) 과 함께 프랑쓰 전체의 수호 성인이기도 합니다.

빠리 1구, 성-으스따슈 (Saint-Eustache) 성당의 쟌 다르크 동상

빠리 8구, 마들렌 (Madeleine) 성당의 쟌 다르크

루브르 궁과 뛰일르리 정원 사이에 위치한
금으로 떡칠^^을 한 쟌 다르크 동상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숭배가 지나치다 못해 왜곡되어, 쟌 다르크는 오늘날 프랑쓰 극우파 (FN) 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극우파들은 매년 5월, 빠리의 루브르 앞 쟌 다르크의 동상 앞 (윗사진) 에 모여, 꽃을 헌사하고, 무릎 꿇고 참배하며, 쟌 다르크의 정신을 이어받아, 외국인들의 손에서 프랑쓰를 구하겠다는 맹세를 다집니다.

하지만 쟌 다르크를 국민적 영웅으로 보는 시각은 19세기 이후로 생겨난 개념으로, 정작 중세 사람들은 백년이 넘도록 전쟁을 하면서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습니다. 백년 전쟁 훨씬 이전부터 영국의 왕과 귀족들은 프랑쓰 내부에 합법적으로 물려받은 영토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영국 왕실과 프랑쓰 왕실은 수많은 결혼을 통하여 거의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고, 부르고뉴파는 비록 프랑쓰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지지하는데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프랑쓰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 (Isabeau de Bavière) 는 친아들 샤를 7세 대신 사위인 영국왕 헨리 5세 (Henry V) 가 프랑쓰의 왕위를 물려받는 조약을 맺기도 했습니다 (traité de Troyes, 1420).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나라에서는 한 언어, 즉 불어를 사용했지요.

하지만 백년 전쟁 이후로 국민성이라는 개념이 두 나라에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며, 영국에서 불어의 공식적인 사용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같은 기간 동안이었습니다.

2 commentaires:

Anonyme a dit…

근데, 왜 잔다르크는 버림 받은거지? 예수랑 비슷한 처지였나?
거기 이제 날씨 따뜻해졌니?

ange dubitatif a dit…

원래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 자기한테 도움이 되면 마음껏 이용하다가, 더이상 필요 없어지면 나몰라라 하는 심정... 쟌 다르끄가 영국군에게 팔아 넘겨지고 나서, 그녀 덕분에 왕이 된 샤를 7세는 그녀를 구하려는 어떤 군사적, 경제적 노력도 하지 않았대요. 왜냐면, 이제 벌써 공식적인 왕이 되었고, 군사들도 사기가 충천해서 잘 싸워주고 있으니, 굳이 비싼 몸값 지불하면서 여자 포로 한 명을 다시 사들일 필요가 뭐 있나 하는 생각이었겠죠... 인생의 씁쓸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