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연작 땅땅과 밀루의 모험 속에는 땅땅과 밀루 외에도 뗄레야 뗄 수 없는 두 명의 짝꿍이 등장합니다. 뒤뽕 (Dupond) 과 뒤뽕 (Dupont) 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은 형사들인데, 항상 땅땅이 다 해결해 놓은 사건에 뒤늦게 끼여들어 일을 조금 망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매우 흡사한 외모와 똑같은 옷차림에, 행동과 말투도 꼭 쌍둥이 같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보여주듯, 이들은 쌍둥이는 커녕 한 형제도 아닙니다. 이들을 한꺼번에 통칭할 때는 les Dupondt 이라고 부릅니다.
너무나 닮은 두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콧수염입니다. 뒤뽕 (Dupond) 은 이름의 끝자 D 를 90도 눕힌 모양의 콧수염을 하고 있고, 뒤뽕 (Dupont) 은 이름의 끝자 T 를 180° 뒤집은 모양의 콧수염을 하고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왼쪽에 있는 사람이 뒤뽕 (T),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뒤뽕 (D) 입니다.
땅땅의 만화가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고유명사들도 재미나게 번역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뒤뽕과 뒤뽕의 이름은 말장난적인 특성 상 어떻게 각 나라 말로 번역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영어 : Thomson and Thompson (톰쓴과 톰쓴)
독어 : Schulze und Schultze (슐츠와 슐츠)
에스빠냐어 : Hernández y Fernández (에르난데스와 페르난데스)
라띠나어 : Clodius et Claudius (끌로디우쓰와 끌라우디우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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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di 2 juin 2009
dimanche 31 mai 2009
땅땅 (Tintin)

땅땅은 아스떼릭쓰 및 뤼끼 뤽과 더불어 대표적인 불어 만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뤼끼 뤽과는 달리 땅땅은 100 % 벨직 만화이지만, 역시 프랑쓰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고, 대외적으로는 마치 프랑쓰 만화인 것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에르제 (Hergé) 가 쓰고 그린 이 만화 연작들의 정확한 제목은 땅땅과 밀루의 모험 (Les aventures de Tintin et Milou) 으로, 땅땅은 그 주인공 소년 — 또는 청년의 이름입니다. 땅땅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림으로만 보면 상당히 어려 보이는데, 하는 일을 보면 어른입니다. 그는 신문기자로 일하며, 독립적으로 삽니다. 가족은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문 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취재를 떠난 땅땅이 여러 사건과 음모, 그리고 모험에 휘말리는 것이 만화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 점에서 땅땅은 룰따비으와 매우 닮았습니다). 용감한 땅땅은 항상 정의를 위해 싸우는데, 그러다가 위기에 처하면, 영리한 강아지 밀루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빠져 나옵니다. 이데픽쓰와 더불어 프랑쓰에서 가장 유명한 강아지 중 하나인 밀루는 똑똑하고 주인에 대한 충실함에 있어서도 이데픽쓰에 뒤질 바가 없습니다.
밀루를 제외하면 땅땅은 의외로 친구가 별로 없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 여럿 등장하지만, 모두 나이가 많은 어른들입니다. 아독 선장 (Capitaine Haddock), 뚜른쏠 교수 (Professeur Tournesol), 뒤뽕과 뒤뽕 (Dupond et Dupont), 까스따피오르... 그 때문에, 땅땅의 실제 나이를 도대체 몇살 정도로 보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습니다. 또한 여자 성악가인 비엉꺄 꺄스따피오르 (Bianca Castafiore) 를 제외하면, 모두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어른들 뿐입니다. 여기서부터 땅땅을 동성애자로 보는 관점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땅땅의 세계와 에르제의 시각이 지나치게 식민주의적이고 때로는 인종차별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자주 있었습니다.
이토록 땅땅은 그저 어린이들이 즐겨 보는 만화로 끝나지 않고, 다양한 문학적, 사회학적 해석과 논쟁을 낳을 만큼 수많은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이렇게 땅땅에 관심을 갖고 땅땅을 좋아하고, 땅땅의 알범은 물론, 땅땅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모으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 tintinophile. 이 때 -phile 은 « 좋아하는 » 을 뜻하는 접미사이지요.
1929년에 처음 출간된 땅땅 연작은 1983년 에르제의 죽음과 함께 끝을 맺었습니다. 몇몇 다른 만화가들과 달리 에르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만화를 이어서 그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미완성으로 남은 제 24권 땅땅과 알프-아르 (Tintin et l'Alph-Art) 가 마지막 알범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죽기 직전 에르제는 땅땅을 영화로 만드는 권한을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에게 팔았습니다. 땅땅은 이미 몇차례 영화로 만들어지긴 했는데, 사실 만화만한 재미는 없습니다. 스필버그는 현재 땅땅을 만들고 있는데, 정확하게 영화도 아니고, 정확하게 만화도 아닌, 둘을 약간 혼합한 일종의 합성 영상 형태로 제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스필버그가 에르제의 선을 얼마나 살리면서 영화의 잇점도 활용할지는 2011년이 되어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mardi 19 mai 2009
뤼끼 뤽 (Lucky Luke)

뤼끼 뤽은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인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정확히는 미국의 서부를 외로이 방황하는 카우보이의 이야기이지요. 그는 카우보이이지만 사실 보안관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그는 달똔 형제들과 끊임없이 만나게 되는데, 번번이 그들을 체포하여 감옥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달똔 형제들은 또 번번이 감옥에서 탈출하여 한 탕 하려다가 또다시 뤼끼 뤽과 마주치게 되는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달똔 형제들이 감옥을 매번 탈출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갖혀 있는 감옥을 지키는 개가 렁떵쁠렁 (Rantanplan) 이기 때문입니다. 렁떵쁠렁은 오벨릭쓰의 강아지 이데픽쓰와 땅땅 (Tintin) 의 강아지 밀루 (Milou) 와 더불어 매우 유명한 만화 속 강아지의 하나지만, 앞의 두 강아지와는 달리 매우 어리석은 개입니다. 뤼끼 뤽 만화에서 렁떵쁠렁은 « 서부에서 가장 멍청한 동물 (l'animal le plus bête de l'Ouest) », 또는 « 자연의 실수 (l'erreur de la nature) » 라 불립니다. 하지만 뤼끼 뤽은 그러한 렁떵쁠렁을 귀여워 해 줍니다.
뤼끼 뤽 만화에 등장하는 또다른 주요 동물로 뤼끼 뤽의 충실한 친구인 그의 말 (cheval) 죨리 점뻬르 (Jolly Jumper) 가 있습니다. 이 말은 렁떵쁠렁과는 정 반대입니다. 이 말은 매우 똑똑해서 안장을 직접 등에 얹거나 걷어 내기도 하고, 신발끈도 묶을 줄 알며 장기도 둘 줄 압니다. 또한 시도 읊을 줄 알고 철학적인 논의도 합니다. 이 말은 똑똑하기만 할 뿐 아니라, 서부에서 가장 빠른 말 (le cheval le plus rapide de l'Ouest) 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기차보다도 빠르지요.
죨리 점뻬르의 주인 뤼끼 뤽 역시 매우 빠른 사람입니다. 그의 별명은 « 자기 그림자보다 더 빨리 총을 쏘는 사나이 (l'homme qui tire plus vite que son ombre) ». 뤼끼 뤽은 그동안 종이 만화 (bande dessinée) 외에도 수많은 만화 영화 (dessin animé), 그리고 실제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들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올해에도 새로운 뤼끼 뤽 영화가 나올 예정이라네요. 이번에는 졍 뒤쟈르당 (Jean Dujardin) 이 주인공 역을 맡는다고 합니다. 뒤쟈르당은 만화 속 뤼끼 뤽과는 별로 닮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카우보이 역할에 잘 어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mardi 24 mars 2009
달똔 형제들 (Les Dalton)
죠 다쌍은 관따나메라 몇 년 뒤 달똔 형제들 이라는 재미있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기서 달똔 형제들이란 실존했던 네 명의 인물, 즉 로버트, 그랫, 빌, 에멧 (Robert, Grat, Bill, Emmet) 을 가리킵니다. 달똔 (또는 미국식으로, 돌튼) 집안의 이 네 형제는 1890 년대 초반, 미국 남부에서 은행과 기차 강도로 악명 높았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프랑쓰에서는 사실 더 유명한 달똔 형제들이 있습니다. 각각 죠, 윌리암, 작, 아브렐 (Joe, William, Jack, Averell) 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네 명의 달똔 형제는 고씨니 (René Goscinny) 와 모리쓰 (Morris) 의 만화 뤼끼 뤽 (Lucky Luke) 에 자주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들입니다.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연작 만화에서 네 명의 달똔 형제는 진짜 실존했던 달똔 형제들의 사촌들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들은 끊임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싶어하지만 멍청하기 때문에 번번이 감옥에 갇히고 말죠. 하지만 번번이 감옥에서 탈출해 나와 카우보이 뤼끼 뤽과 맞부닥치고, 또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합니다.
1946년부터 발행된 뤼끼 뤽 연작은 프랑쓰와 벨직 등 불어권 국가에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죠 다쌍이 이 노래를 불렀을 때 (1967) 도 멍청한 달똔 형제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사실은 실존 달똔 형제들에 대한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결국 많은 사람들은 만화 속의 달똔 형제들 이야기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창법이나 가사를 볼 때, 이미 노래의 작가들 (Dassin, Rivat, Thomas) 도 의도적으로 그러한 혼돈을 꾀한 것 같습니다. 아래의 비디오를 보아도, 모리쓰가 그린 그림과 비슷하게 생긴 네 명의 달똔 형제들이 등장합니다.
죠 다쌍이 부르는 달똔 형제들 (Les Dalton)

죠 다쌍이 부르는 달똔 형제들 (Les Dalton)
dimanche 25 janvier 2009
갈리에라 궁 (Palais Galliera)
도쿄 궁 바로 맞은 편에는 갈리에라 궁이 있습니다. 샤이오 궁이나 도쿄 궁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 역시 왕궁으로 쓰였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앞의 두 궁에 비하면 보다 구체제와 관련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갈리에라 궁은 갈리에라 공작부인이었던 마리아 브리뇰레-쌀레 (Maria Brignole-Sale, 1812-1888) 가 19세기 말에 빠리 서쪽에 짓게한 개인 저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의 개인 저택은 palais 보다는 hôtel particulier 라고 칭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이 건물은 palais 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사실 크기도 궁이라고 하기에는 좀 자그마합니다.
갈리에라 부인은 이 궁에 자신이 수집한 예술 작품들을 보관할 예정이었으며, 사망시, 건물과 예술품 모두를 프랑쓰에 기증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추방법 (loi d'exil) 이 공표되자, 마음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추방법이란 이전의 왕족과 황족 및 그 직계 후손들이 프랑쓰 공화국에 체류하는 것을 금지할 목적으로, 1886년에 만들어진 법입니다. 이딸리아의 귀족부인이었던 마리아 브리뇰레-쌀레는 사실상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지만, 왕정에 호의적이었고, 필립 도를레엉 (Philippe d'Orélans, 당시 프랑쓰 왕위 요구자) 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기에, 오를레엉 가문을 쫓아낸 프랑쓰에 자신의 재산을 기증할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궁 만은 결국 — 프랑쓰가 아닌 — 빠리 시에 기증하고 죽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건물은 빠리 시의 시립 의상 박물관 (Musée de la mode et du costume) 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갈리에라 부인은 이 궁에 자신이 수집한 예술 작품들을 보관할 예정이었으며, 사망시, 건물과 예술품 모두를 프랑쓰에 기증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추방법 (loi d'exil) 이 공표되자, 마음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추방법이란 이전의 왕족과 황족 및 그 직계 후손들이 프랑쓰 공화국에 체류하는 것을 금지할 목적으로, 1886년에 만들어진 법입니다. 이딸리아의 귀족부인이었던 마리아 브리뇰레-쌀레는 사실상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지만, 왕정에 호의적이었고, 필립 도를레엉 (Philippe d'Orélans, 당시 프랑쓰 왕위 요구자) 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기에, 오를레엉 가문을 쫓아낸 프랑쓰에 자신의 재산을 기증할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궁 만은 결국 — 프랑쓰가 아닌 — 빠리 시에 기증하고 죽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건물은 빠리 시의 시립 의상 박물관 (Musée de la mode et du costume) 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jeudi 15 janvier 2009
도쿄 궁 (Palais de Tokyo)
불어 palais 는 흔히 « 궁 » 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이 항상 « 왕궁 » 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palais 는 왕궁은 물론, 그에 준할 만큼 « 크고 화려한 건축물 » 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의 하나가 여러 박물관을 품고 있는 샤이오 궁입니다. 그리고 샤이오 궁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도쿄 궁이라 불리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 궁 역시 1937년의 세계 박람회를 치루기 위해 지어졌으며, 샤이오 궁처럼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 도쿄 궁은 현대 미술관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에는 사실 두 개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하나는 빠리 시에서 운영하는 빠리시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이고, 또하나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현대 창작의 장 (Site de création contemporaine) 입니다. 빠리시립 현대 미술관은 썽트르 뽕삐두 (국립) 와 함께 프랑쓰의 주요 현대 미술관의 하나이며, 현대 창작의 장은 이러한 박물관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실험적인 현대 미술, 그리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예술 (상업용 디자인, 의상, 비데오 놀이 등) 에까지 개방된 전시 공간입니다.
도쿄 궁이라는 이름은 물론 일본의 수도로부터 왔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 건물이 위치한 길의 이름이, 궁이 건축되던 1937년 당시에는 avenue de Tokio 였기 때문에 붙었습니다. 이 길의 이름은 현재는 avenue de New York 입니다. 아브뉘의 이름이 de Tokio 에서 de New York 으로 바뀐 때는 바로 1945년 ! 이것은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2차대전시 일본은 프랑쓰의 적이었고, 미국은 프랑쓰가 독일군에게서 해방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나라였지요. 그 때문에 길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건물의 이름은 어쩌다 보니 그대로 남았습니다. 다만 현재는 철자가 조금 바뀌어 de Tokyo 라고 씁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에는 일본의 수도명을 Tokio 라 쓰는 것이 유럽 여러 나라에서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도쿄 궁은 현대 미술관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에는 사실 두 개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하나는 빠리 시에서 운영하는 빠리시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이고, 또하나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현대 창작의 장 (Site de création contemporaine) 입니다. 빠리시립 현대 미술관은 썽트르 뽕삐두 (국립) 와 함께 프랑쓰의 주요 현대 미술관의 하나이며, 현대 창작의 장은 이러한 박물관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실험적인 현대 미술, 그리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예술 (상업용 디자인, 의상, 비데오 놀이 등) 에까지 개방된 전시 공간입니다.
도쿄 궁이라는 이름은 물론 일본의 수도로부터 왔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 건물이 위치한 길의 이름이, 궁이 건축되던 1937년 당시에는 avenue de Tokio 였기 때문에 붙었습니다. 이 길의 이름은 현재는 avenue de New York 입니다. 아브뉘의 이름이 de Tokio 에서 de New York 으로 바뀐 때는 바로 1945년 ! 이것은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2차대전시 일본은 프랑쓰의 적이었고, 미국은 프랑쓰가 독일군에게서 해방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나라였지요. 그 때문에 길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건물의 이름은 어쩌다 보니 그대로 남았습니다. 다만 현재는 철자가 조금 바뀌어 de Tokyo 라고 씁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에는 일본의 수도명을 Tokio 라 쓰는 것이 유럽 여러 나라에서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mercredi 3 décembre 2008
리꺄르도의 무덤 (tombeau de Ricardo)
따로의 정원이 니끼 드 쌍-팔 (Niki de Saint-Phalle) 의 필생의 대작이기는 하나, 사실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그녀의 작품은 빠리의 스트라빈스끼 연못일 것입니다. 비록 쌍-팔의 작품이 세계 도처에 설치되어 있기는 하나, 빠리가 워낙 국제적인 관광 도시인 까닭이지요. 더군다나 많은 관람객을 모으는 뽕삐두 쎈터 바로 옆에 있는 관계로, 빠리를 방문한 전세계의 관광객들에게 이 연못은 꽤 친숙합니다.
그런데 빠리에는 니끼 드 쌍-팔의 작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하여 훨씬 덜 알려진 이 조각은 사실 예술 작품으로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라, 리꺄르도 므농 (Ricardo Menon) 이라는 친구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개인적인 조각입니다. 리꺄르도 므농은 1977년 이후로 십여년간, 쌍-팔의 조수이자 비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녀에게 더없이 소중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듬해부터 시작된 따로의 정원의 건축에도 그는 활발히 참여했지요.
하지만 1986년, 그는 개인적인 예술가로 독립하고자, 니끼와 따로의 정원을 떠나, 빠리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 후 채 3년이 못되어 씨다로 사망하고 맙니다. 1952년 출생이니, 서른 일곱의 나이에 죽은 것입니다. 씨다 퇴치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쌍-팔은 이미 몇년전 AIDS: You Can't Catch It Holding Hands (en français, Le sida, tu ne l'attraperas pas, 1986) 라는 책을 쓰기도 했는데, 므농이 죽은 후 필립 매튜스 (Philippe Matthews) 와 공동 감독으로 이 책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필립은 니끼가 첫남편 해리 매튜스로부터 얻은 아들). 또한 그녀는 빠리의 몽빠르나쓰 묘지에 마련된 리꺄르도의 무덤을 장식할 기념비를 조각했습니다. 커다란 고양이의 모습을 한 이 조각은 쌍-팔의 작품답게,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의 모자익으로 장식되어 있어, 몽빠르나쓰 묘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무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밝은 느낌에도 불구하고, 쌍-팔이 자필로 쓴 비문을 읽으면 인생의 허무함을 상기하게 됩니다 : « 젊고, 사랑받고, 아름다왔으나, 너무나 일찍 죽은 우리의 절친한 친구 리꺄르도를 위하여 ».
그런데 빠리에는 니끼 드 쌍-팔의 작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하여 훨씬 덜 알려진 이 조각은 사실 예술 작품으로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라, 리꺄르도 므농 (Ricardo Menon) 이라는 친구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개인적인 조각입니다. 리꺄르도 므농은 1977년 이후로 십여년간, 쌍-팔의 조수이자 비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녀에게 더없이 소중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듬해부터 시작된 따로의 정원의 건축에도 그는 활발히 참여했지요.
하지만 1986년, 그는 개인적인 예술가로 독립하고자, 니끼와 따로의 정원을 떠나, 빠리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 후 채 3년이 못되어 씨다로 사망하고 맙니다. 1952년 출생이니, 서른 일곱의 나이에 죽은 것입니다. 씨다 퇴치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쌍-팔은 이미 몇년전 AIDS: You Can't Catch It Holding Hands (en français, Le sida, tu ne l'attraperas pas, 1986) 라는 책을 쓰기도 했는데, 므농이 죽은 후 필립 매튜스 (Philippe Matthews) 와 공동 감독으로 이 책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필립은 니끼가 첫남편 해리 매튜스로부터 얻은 아들). 또한 그녀는 빠리의 몽빠르나쓰 묘지에 마련된 리꺄르도의 무덤을 장식할 기념비를 조각했습니다. 커다란 고양이의 모습을 한 이 조각은 쌍-팔의 작품답게,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의 모자익으로 장식되어 있어, 몽빠르나쓰 묘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무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밝은 느낌에도 불구하고, 쌍-팔이 자필로 쓴 비문을 읽으면 인생의 허무함을 상기하게 됩니다 : « 젊고, 사랑받고, 아름다왔으나, 너무나 일찍 죽은 우리의 절친한 친구 리꺄르도를 위하여 ».
dimanche 23 novembre 2008
따로의 정원 (Jardin des Tarots)
이딸리아 또스까나 지방 남부의 까빨비오 (Capalbio) 라는 작은 도시에는 따로의 정원 (Giardino dei Tarocchi) 이라는 장소가 있습니다. 이곳은 니끼 드 쌍-팔 (Niki de Saint-Phalle) 이 거의 이십여년에 걸쳐서 꾸민 예술 공간으로, 따로 카드에서 영감을 받은 스물 두 점의 환상적인 조각들로 수놓아져 있는 정원입니다. 쌍-팔 특유의 화려한 색채와 기괴한 모양새를 갖춘 이 조각들은 모두 십여미터 이상 높이의 대형 작품들로, 조각이라기보다 거의 건축물로 보아야 옳을 듯 싶습니다. 실제로 이 중 일부는 조각품 내부를 방문할 수 있으며, 특히 여제 (L'impératrice. 아래 사진에서 가장 왼쪽) 의 내부는 완전한 아파트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따로의 정원을 손보는 동안, 쌍-팔과 그녀의 남편 졍 땅글리 (Jean Tinguely) 는 바로 이 조각품 안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따로의 정원이 기본적으로 쌍-팔의 작품이긴 하지만, 그녀의 다른 많은 조각들처럼 따로의 정원도 역시 땅글리와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남편 외에 몇몇 예술가 친구들이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 정원은 그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전혀 국가나 재단의 후원 없이 오로지 사비만 들여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쌍-팔은 자신의 다른 작품들을 팔거나 새로운 주문을 받기도 했고 (그 중 하나가 스트라빈스끼 연못), 또한 특별히 향수를 만들어 팔았다고 합니다.
재정 마련 차원에서 보나, 작품의 규모와 양식 측면에서 보나, 따로의 정원은 슈발 우체부의 이상적인 궁전 (Palais idéal du facteur Cheval) 과 닮은 데가 있습니다. 실제로 니끼 드 쌍-팔은 슈발 (Ferdinand Cheval) 의 궁전을 방문한 후 큰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따로 정원을 건설하는데 그녀는 보마르쪼에 있는 괴물의 정원 (Jardin des monstres à Bomarzo) 과 가우디 (Antoni Gaudi) 가 만든 귀엘 정원 (Jardin Güell) 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래는 Le Jardin des Tarots 라는 책 (Benteli éditions, 2005) 에 실린 쌍-팔의 자필로, 따로의 정원을 만들게 된 동기와 과정을 작가가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끌릭하면 보다 또렷하게 글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따로의 정원이 기본적으로 쌍-팔의 작품이긴 하지만, 그녀의 다른 많은 조각들처럼 따로의 정원도 역시 땅글리와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남편 외에 몇몇 예술가 친구들이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 정원은 그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전혀 국가나 재단의 후원 없이 오로지 사비만 들여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쌍-팔은 자신의 다른 작품들을 팔거나 새로운 주문을 받기도 했고 (그 중 하나가 스트라빈스끼 연못), 또한 특별히 향수를 만들어 팔았다고 합니다.
재정 마련 차원에서 보나, 작품의 규모와 양식 측면에서 보나, 따로의 정원은 슈발 우체부의 이상적인 궁전 (Palais idéal du facteur Cheval) 과 닮은 데가 있습니다. 실제로 니끼 드 쌍-팔은 슈발 (Ferdinand Cheval) 의 궁전을 방문한 후 큰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따로 정원을 건설하는데 그녀는 보마르쪼에 있는 괴물의 정원 (Jardin des monstres à Bomarzo) 과 가우디 (Antoni Gaudi) 가 만든 귀엘 정원 (Jardin Güell) 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래는 Le Jardin des Tarots 라는 책 (Benteli éditions, 2005) 에 실린 쌍-팔의 자필로, 따로의 정원을 만들게 된 동기와 과정을 작가가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끌릭하면 보다 또렷하게 글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lundi 17 novembre 2008
따로 (tarot)
비록 오늘날에는 프랑쓰식 놀이용 카드가 전세계적으로 규격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몇몇 지역, 특히 프랑쓰 남부와 이딸리아, 스위쓰와 독일의 일부 지방 등에서는 고유한 전통 카드 역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예이자 가장 유명한 예로 따로 카드 (cartes de tarot) 를 들 수 있습니다. 따로 카드는 프랑쓰 카드에 비하여 모양이 보다 갸름하고 길며, 무늬도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한 벌을 이루는 카드의 수가 78 장으로, 보통 프랑쓰 카드보다 26장이나 더 많습니다. 그 중 네 장은 기사 (cavalier) 들로서, 그 가치는 시종 (valet) 과 부인 (dame) 의 중간입니다. 나머지 22장은 완전히 다른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1부터 21까지 번호가 크게 매겨져 있습니다. 마지막 한 장은 아무런 번호도 글자도 없는 대신, 륏 또는 멍돌린을 연주하는 사람이 그려져 있습니다. Excuse (변명) 라고 불리는 이 카드는 일종의 죠커 역할을 합니다. 이 스물 두 장의 카드는 현대 불어로 atout, 즉 « 으뜸패 » 라고 불리는데, 오래 동안 triomphe, 즉 « 승리패 » 라고도 불렸습니다. 바로 여기서 영어의 trump 라는 용어가 비롯되었습니다.
외국에는 따로 카드가 마치 점술용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놀이용입니다. 따로 카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놀이는 몇가지가 있으나,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따로지요. 따로라는 놀이를 하는데 사용되는 카드이기 때문에 바로 따로 카드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따로 놀이는 몇가지 변형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네 명이서 하는 놀이입니다. 각각 18장의 카드를 손에 들고 시작하며, 앞사람이 낸 카드와 같은 무늬이면서 더 높은 값을 가진 카드를 내 놓는 원칙입니다. 같은 무늬가 없을 때는 바로 으뜸패 카드를 냄으로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18장의 카드가 모든 참가자들의 손을 떠나면 한 판이 끝나게 됩니다. 현대에 행해지는 많은 카드 놀이들의 규칙이 바로 따로에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놀이들에 비해 한가지 유별난 점은 따로에서는 카드의 점수를 반점 단위로 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왕은 4.5, 부인은 3.5. 사실 따로에서 제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점이 바로 점수 계산법입니다. 카드의 값과 조합에 따라, 더하고 빼고 곱하는 매우 복잡한 점수 계산을 해야 합니다.
따로의 정확한 근원에 대해서는 매우 논란이 많습니다. 점술용으로도 쓰이는 점과 관련하여, 매우 황당하고 전설같은 해석들이 많은데, 언어학적으로는 이딸리아어 tarocco 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딸리아어 tarocco 가 과연 어디서 온 말인가에 대해서는 또다시 황당하고 전설적인 주장들이 난무합니다. 아무튼 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따로 놀이는 1430년 경 롬바르디아 (현재 이딸리아 북서부) 에서 처음 목격되었으며, 곧 프로벙쓰 (현재 프랑쓰 남동부) 로 수입되었습니다. 라띠나어 문화권의 놀이이기에, 따로용 카드에는 오랫동안 라띤 무늬가 쓰였습니다 : 즉 그릇, 칼, 막대기, 동전. 그런데 18세기에 따로가 독일에 전해지면서, 오히려 프랑쓰 무늬로 변하였습니다 : 즉 심장, 창끝, 토끼풀, 네모. 또한 19세기에는 22장의 으뜸패를 장식하던 중세풍의 상징적인 그림 역시, 일상 생활 풍경을 묘사하는 귀여운 (?) 그림들로 변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술용 따로 카드는 여전히 옛날식 무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색다르고 신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주기 위해서겠지요. 그때문에 오늘날 프랑쓰에는 크게 두 종류의 따로 카드가 존재합니다 : 놀이용 따로 (tarot à jouer) 와 점술용 따로 (tarot divinatoire).
점술용 따로는 자주 마르쎄이으 따로 (tarot de Marseille) 라고 불리며, 드물게 이딸리아 따로 (tarot italien) 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방금 말했듯, 마르쎄이으 (즉 프로벙쓰) 와 이딸리아에서 쓰이던 라띤 무늬 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점술에서는 22장의 특별 카드를 으뜸패나 승리패라 부르지 않고 대비밀 (arcanes majeurs) 이라고 칭합니다. 이런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저로서는 폭소가 터져나오는 표현이기는 하나, 아무튼 대비밀을 구성하는 카드들은 방금 말했듯 여전히 중세풍의 상징적, 은유적 그림을 띄고 있습니다.
외국에는 따로 카드가 마치 점술용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놀이용입니다. 따로 카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놀이는 몇가지가 있으나,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따로지요. 따로라는 놀이를 하는데 사용되는 카드이기 때문에 바로 따로 카드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따로 놀이는 몇가지 변형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네 명이서 하는 놀이입니다. 각각 18장의 카드를 손에 들고 시작하며, 앞사람이 낸 카드와 같은 무늬이면서 더 높은 값을 가진 카드를 내 놓는 원칙입니다. 같은 무늬가 없을 때는 바로 으뜸패 카드를 냄으로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18장의 카드가 모든 참가자들의 손을 떠나면 한 판이 끝나게 됩니다. 현대에 행해지는 많은 카드 놀이들의 규칙이 바로 따로에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놀이들에 비해 한가지 유별난 점은 따로에서는 카드의 점수를 반점 단위로 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왕은 4.5, 부인은 3.5. 사실 따로에서 제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점이 바로 점수 계산법입니다. 카드의 값과 조합에 따라, 더하고 빼고 곱하는 매우 복잡한 점수 계산을 해야 합니다.
따로의 정확한 근원에 대해서는 매우 논란이 많습니다. 점술용으로도 쓰이는 점과 관련하여, 매우 황당하고 전설같은 해석들이 많은데, 언어학적으로는 이딸리아어 tarocco 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딸리아어 tarocco 가 과연 어디서 온 말인가에 대해서는 또다시 황당하고 전설적인 주장들이 난무합니다. 아무튼 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따로 놀이는 1430년 경 롬바르디아 (현재 이딸리아 북서부) 에서 처음 목격되었으며, 곧 프로벙쓰 (현재 프랑쓰 남동부) 로 수입되었습니다. 라띠나어 문화권의 놀이이기에, 따로용 카드에는 오랫동안 라띤 무늬가 쓰였습니다 : 즉 그릇, 칼, 막대기, 동전. 그런데 18세기에 따로가 독일에 전해지면서, 오히려 프랑쓰 무늬로 변하였습니다 : 즉 심장, 창끝, 토끼풀, 네모. 또한 19세기에는 22장의 으뜸패를 장식하던 중세풍의 상징적인 그림 역시, 일상 생활 풍경을 묘사하는 귀여운 (?) 그림들로 변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술용 따로 카드는 여전히 옛날식 무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색다르고 신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주기 위해서겠지요. 그때문에 오늘날 프랑쓰에는 크게 두 종류의 따로 카드가 존재합니다 : 놀이용 따로 (tarot à jouer) 와 점술용 따로 (tarot divinatoire).
점술용 따로는 자주 마르쎄이으 따로 (tarot de Marseille) 라고 불리며, 드물게 이딸리아 따로 (tarot italien) 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방금 말했듯, 마르쎄이으 (즉 프로벙쓰) 와 이딸리아에서 쓰이던 라띤 무늬 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점술에서는 22장의 특별 카드를 으뜸패나 승리패라 부르지 않고 대비밀 (arcanes majeurs) 이라고 칭합니다. 이런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저로서는 폭소가 터져나오는 표현이기는 하나, 아무튼 대비밀을 구성하는 카드들은 방금 말했듯 여전히 중세풍의 상징적, 은유적 그림을 띄고 있습니다.
1. Le bateleur (마술사)
2. La papesse (여교황)
3. L'impératrice (여제)
2. La papesse (여교황)
3. L'impératrice (여제)
4. L'empereur (황제)
5. Le pape (교황)
6. L'amoureux (사랑에 빠진 남자)
7. Le chariot (수레 또는 마차)
8. La justice (정의)
9. L'hermite (은둔자 또는 연금술사)
10. La roue de la fortune (운명의 바퀴)






11. La force (힘)
12. Le pendu (거꾸로 매달린 남자)
13. L'arcane sans nom ou la mort (이름없는 비밀 또는 죽음)
14. La tempérance (절제 또는 균형)
15. Le diable (악마)
16. La Maison-Dieu (신-집)
17. L'étoile (별)
18. La lune (달)
19. Le soleil (해)
20. Le jugement (심판)
21. Le monde (세계)
그리고 번호가 없는 마지막 카드 Le mat (광대)
나머지 카드들은 소비밀 (arcanes mineurs) 이라고 불리며, 소비밀과 대비밀의 여러 조합을 통하여 점을 치나 봅니다. 아무튼 따로 카드들은 그 그림의 특이함 때문에, 점술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점술의 관점이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서, 사회 현상으로서, 풍습의 역사로서 따로 카드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학문을 tarologie 라고도 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프랑쓰 국립 도서관에는 여러 벌의 희귀한 따로 카드들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 (15세기) 은 샤를 6세의 따로 (tarot de Charles VI) 라고 불리는 카드들로서, 불행히도 17장 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대부분을 위에 소개했으나,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으신 분은 여기를 방문하시길...




16. La Maison-Dieu (신-집)

18. La lune (달)





jeudi 7 août 2008
세탁선 (Bateau-Lavoir)
세탁선 (un bateau-lavoir) 이란, 이름 그대로 빨래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배를 말합니다. 세탁기는 커녕, 집에 수도 시설 조차 없던 때에 - 대략 20세기 초까지는 빨래를 하기 위해 일부러 빨래감을 가지고 빨래터 (lavoir) 까지 찾아다녀야 했는데, 세탁선이 바로 그런 빨래터의 일종이었던 것입니다. 빨래터는 어차피 물가에 만들어야 하기에, 아예 강에 둥실 떠 있는 빨래터를 만든 것이지요. 세탁선으로 사용된 배들은 비교적 큰 규모로서, 안을 개조하여, 물을 퍼 올리는 시설, 물을 끓이는 시설, 빨래 말리는 장소 등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간혹 강을 따라 운항을 하며 이곳 저곳 옮겨 다니는 세탁선도 있었지만, 대개 이런 배들은 운항을 하기에는 좀 낡은 배들을 개조한 것이라, 한 장소에 정착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가서 더 자세한 설명과 사진들을 보세요.)
그런데 몽마르트르 산등성이에도 유명한 세탁선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배도 아니고, 빨래터도 아닙니다. 단지 이름만 그렇게 붙었을 따름이지요. 몽마르트르의 세탁선 또는 바또-라브와르 (le Bateau-Lavoir) 는 20세기 초반에 많은 화가들이 살았던 건물입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훗날 유명인이 되었지요 : 반 동겐, 모딜리아니, 그리쓰, 삐까쏘, etc... 또 오랜 기간 상주하지는 않았더라도 로렁쌍, 블라망끄, 뒤피, 마띠쓰, 브락, 레제, 드랑, 위트리요, 브란꾸지, 루쏘 등이 이 곳을 거쳐갔습니다. 그리고 화가들 외에도 아뽈리네르, 쟈리, 꼭또, 라디게, 스타인 남매, 쌀몽, 쟈꼽 등의 작가들 역시 자주 이 곳에 모였다고 하지요. 바또-라브와르는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명실공히 현대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입체주의 또는 뀌비슴 (cubisme) 의 탄생지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서 1906년과 1907년에 걸쳐 삐까쏘가 아비뇽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Avignon) 을 그렸기 때문이지요.
애초에 피아노 공장이었던 이 건물은 1889년부터 화가들의 작업실로 변모되기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막쓰 쟈꼽이 바또-라브와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건물 모양이 세탁선들과 비슷하다하여). 지금은 아무리 상상력을 가지고 보아도 이 건물에서 전혀 배 모양이 연상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원래 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무로 지어졌던 건물은 1970년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저 밋밋한 시멘트 벽만을 밖에서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 건물은 지금도 여전히 화가들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미 1차대전무렵부터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빛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몽마르트르에 살던 많은 화가들이 몽빠르나쓰로 이주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몽마르트르 산등성이에도 유명한 세탁선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배도 아니고, 빨래터도 아닙니다. 단지 이름만 그렇게 붙었을 따름이지요. 몽마르트르의 세탁선 또는 바또-라브와르 (le Bateau-Lavoir) 는 20세기 초반에 많은 화가들이 살았던 건물입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훗날 유명인이 되었지요 : 반 동겐, 모딜리아니, 그리쓰, 삐까쏘, etc... 또 오랜 기간 상주하지는 않았더라도 로렁쌍, 블라망끄, 뒤피, 마띠쓰, 브락, 레제, 드랑, 위트리요, 브란꾸지, 루쏘 등이 이 곳을 거쳐갔습니다. 그리고 화가들 외에도 아뽈리네르, 쟈리, 꼭또, 라디게, 스타인 남매, 쌀몽, 쟈꼽 등의 작가들 역시 자주 이 곳에 모였다고 하지요. 바또-라브와르는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명실공히 현대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입체주의 또는 뀌비슴 (cubisme) 의 탄생지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서 1906년과 1907년에 걸쳐 삐까쏘가 아비뇽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Avignon) 을 그렸기 때문이지요.
애초에 피아노 공장이었던 이 건물은 1889년부터 화가들의 작업실로 변모되기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막쓰 쟈꼽이 바또-라브와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건물 모양이 세탁선들과 비슷하다하여). 지금은 아무리 상상력을 가지고 보아도 이 건물에서 전혀 배 모양이 연상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원래 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무로 지어졌던 건물은 1970년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저 밋밋한 시멘트 벽만을 밖에서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 건물은 지금도 여전히 화가들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미 1차대전무렵부터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빛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몽마르트르에 살던 많은 화가들이 몽빠르나쓰로 이주하였기 때문이지요.
세탁선 (Bateau-Lavoir)

lundi 4 août 2008
걀렛 풍차방아 (Moulin de la Galette)
몽마르트르에서 떼르트르 광장보다 훨씬 더 색다른 볼거리는 걀렛 풍차입니다. 뤼 르삑 (rue Lepic) 과 뤼 지라르동 (rue Girardon) 이 만나는 모서리에 17세기부터 자리잡고 있는 이 풍차는 빠리에 남아있는 유일한 풍차이며, 지금도 여전히 작동이 가능한 상태라고 합니다 (물론 여러차례 보수, 복원 공사를 거쳤습니다). 유일하다고 했는데, 사실 알고보면 풍차가 두 개 있습니다. 길가에 있어서 사람들 눈에 쉽게 띄며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사진에 담아가는 풍차 (Radet) 말고도, 보다 안 쪽을 잘 들여다보면 풍차가 하나 더 (Blute-fin) 있습니다. 라데와 블륏-팡, 이 두 풍차를 합해서 걀렛 방앗간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작동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지금은 물론 이 풍차들을 사용하여 방아를 찧지는 않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방앗간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음식점으로 영업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사실 완전히 식당이 되기 전에도 이 방앗간은 이미 어느 정도 간이 식당이었습니다. 풍차를 이용해서 빻은 곡식으로 얇은 빵, 즉 걀렛 (galette) 을 만들어 팔았던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여기서 방앗간의 이름이 생겨났지요.
술집겸 식당이 되고 나서 이 방앗간은 많은 화가들의 단골집이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몽마르트르가 예술의 중심지였을 때 많은 화가들이 이 풍차의 외형이나 식당 안의 흥겨운 풍경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 중 몇 점 :
길거리의 라데 풍차와 숨어 있는 블륏-팡 풍차


작동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지금은 물론 이 풍차들을 사용하여 방아를 찧지는 않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방앗간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음식점으로 영업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사실 완전히 식당이 되기 전에도 이 방앗간은 이미 어느 정도 간이 식당이었습니다. 풍차를 이용해서 빻은 곡식으로 얇은 빵, 즉 걀렛 (galette) 을 만들어 팔았던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여기서 방앗간의 이름이 생겨났지요.
술집겸 식당이 되고 나서 이 방앗간은 많은 화가들의 단골집이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몽마르트르가 예술의 중심지였을 때 많은 화가들이 이 풍차의 외형이나 식당 안의 흥겨운 풍경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 중 몇 점 :
벙 고그, 걀렛 풍차 (Van Gogh, Moulin de la Galette)
위트리요, 뤼 똘로제와 걀렛 풍차 (Utrillo, Rue Tholozé et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 걀렛 풍차의 무도회
(Renoir, Le Bal du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의 윗그림을 재 작업한
뒤피의 걀렛 풍차 (Dufy, Moulin de la Galette)
뚤루즈-로트렉, 걀렛 풍차 (Toulouse-Lautrec, Moulin de la Galette)
삐꺄쏘, 걀렛 풍차 (Picasso, Moulin de la Galette)
반 동겐, 걀렛 풍차 (Van Dongen, Moulin de la Galette)

위트리요, 뤼 똘로제와 걀렛 풍차 (Utrillo, Rue Tholozé et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 걀렛 풍차의 무도회
(Renoir, Le Bal du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의 윗그림을 재 작업한
뒤피의 걀렛 풍차 (Dufy, Moulin de la Galette)

뚤루즈-로트렉, 걀렛 풍차 (Toulouse-Lautrec, Moulin de la Galette)

삐꺄쏘, 걀렛 풍차 (Picasso, Moulin de la Galette)

반 동겐, 걀렛 풍차 (Van Dongen, Moulin de la Galette)

dimanche 16 décembre 2007
스트라빈스끼 광장 (Place Stravinsky)
죠르쥬-뽕삐두 쎈터 바로 옆에는 이고르-스트라빈스끼 광장 (Place Igor-Stravinksy) 이 있습니다. place 는 흔히 우리말로 « 광장 » 으로 번역하는데,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빠리의 쁠라쓰들 대부분은 우리말의 광장이 뜻하는 것처럼 드넓고 탁 트인 공간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스트라빈스끼 광장도 우리말 광장만 생각하고 가보면 비교적 자그마한 장소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빠리의 쁠라쓰들 치고는 의외로 넓은 편이죠. 특히 차가 다닐 수 없어서 더욱 좋은.
스트라빈스끼 광장 1 번지에는 유명한 이르깜 (Ircam) 이 있습니다. Ircam 또는 IRCAM 은 Institut de Recherche et de Coordination Acoustique/Musique 의 아크로님으로, 직역하면 « 음악과 음향의 연구와 조화를 위한 기관 » 이라는 뜻이지만, 한마디로 현대 음악 연구소입니다. 특히 컴퓨터를 비롯한 최첨단 기술들과 음악의 관계에 촛점을 맞춘 연구 활동을 합니다. 이르깜은 뽕삐두 쎈터의 부속 기관이지만 독립적인 건물을 갖고 있습니다. 역시 렌쪼 삐아노와 리쳐드 로져쓰에 의해 건축된 이르깜 건물은 뽕삐두 쎈터 만큼 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비슷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
이르깜은 방문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안에 들어가봤자 별 볼 것은 없습니다. 도서실을 이용할 수도 있고, 이르깜에서 주최하는 강연이나 다른 여러 행사에 참가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문가들을 위한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스트라빈스끼 광장에서 이르깜보다는 그 앞에 펼쳐져 있는 스트라빈스끼 연못 (Fontaine Stravinksy) 을 더 좋아하지요. 졍 땅글리 (Jean Tinguely, 1925-1991) 의 움직이는 조각과 니끼 드 쌍-팔 (Niki de Saint-Phalle, 1930-2002) 의 화려한 색채가 재미난 조화를 이루는 이 연못은 특히 여름에 많은 관람객을 모읍니다. 두 예술가 부부는 이 연못의 실현을 위해 스트라빈스끼의 작품들, 특히 불새 (L'Oiseau de feu) 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높은 음자리표가 하나 있고, 화려한 빛깔의 새처럼 생긴 조각들이 보이긴 하지만, 직접적인 관계를 찾는 것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아니면 제가 스트라빈스끼의 작품들을 너무 몰라서 뚜렷한 연관성이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반면 쌍-팔의 또다른 대작 따로의 정원과는 그 양식이 매우 닮았습니다.


스트라빈스끼 광장 1 번지에는 유명한 이르깜 (Ircam) 이 있습니다. Ircam 또는 IRCAM 은 Institut de Recherche et de Coordination Acoustique/Musique 의 아크로님으로, 직역하면 « 음악과 음향의 연구와 조화를 위한 기관 » 이라는 뜻이지만, 한마디로 현대 음악 연구소입니다. 특히 컴퓨터를 비롯한 최첨단 기술들과 음악의 관계에 촛점을 맞춘 연구 활동을 합니다. 이르깜은 뽕삐두 쎈터의 부속 기관이지만 독립적인 건물을 갖고 있습니다. 역시 렌쪼 삐아노와 리쳐드 로져쓰에 의해 건축된 이르깜 건물은 뽕삐두 쎈터 만큼 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비슷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
이르깜은 방문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안에 들어가봤자 별 볼 것은 없습니다. 도서실을 이용할 수도 있고, 이르깜에서 주최하는 강연이나 다른 여러 행사에 참가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문가들을 위한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스트라빈스끼 광장에서 이르깜보다는 그 앞에 펼쳐져 있는 스트라빈스끼 연못 (Fontaine Stravinksy) 을 더 좋아하지요. 졍 땅글리 (Jean Tinguely, 1925-1991) 의 움직이는 조각과 니끼 드 쌍-팔 (Niki de Saint-Phalle, 1930-2002) 의 화려한 색채가 재미난 조화를 이루는 이 연못은 특히 여름에 많은 관람객을 모읍니다. 두 예술가 부부는 이 연못의 실현을 위해 스트라빈스끼의 작품들, 특히 불새 (L'Oiseau de feu) 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높은 음자리표가 하나 있고, 화려한 빛깔의 새처럼 생긴 조각들이 보이긴 하지만, 직접적인 관계를 찾는 것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아니면 제가 스트라빈스끼의 작품들을 너무 몰라서 뚜렷한 연관성이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반면 쌍-팔의 또다른 대작 따로의 정원과는 그 양식이 매우 닮았습니다.
스트라빈스끼 연못
뒤에 보이는 벽돌 건물이 이르깜
vendredi 14 décembre 2007
썽트르 뽕삐두 (Centre Pompidou)


빠리 시내 한복판에 이렇게 넓은 공간 (약 15 000 m²) 이 비어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70년대 이전에 보부르는 지저분한 폐허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1969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죠르쥬 뽕삐두는 이 버려진 장소에 그의 야망이었던 문화예술 쎈터를 지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 건물의 건축은 국제 경연을 통해서 뽑힌 렌쪼 삐아노 (Renzo Piano, 1937-) 와 리쳐드 로져쓰 (Richard Rogers, 1933-) 에게 맡겨졌습니다. 거의 700 여 개의 안건을 제치고 선택된 이 두 건축가의 공동 설계는 놀랍게도, 전통적으로 건물 내부에 숨기는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바깥으로 드러냈습니다 (온갖 종류의 관, 전기/수도 시설, 철근, 공기배출구, 계단...). 하지만 건물 외향의 독창성보다 더 놀라운 점은 제공된 공간의 단지 절반 밖에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오늘날 뽕삐두 쎈터 앞에는 보행자들만을 위한 드넓은 광장이 있습니다. 1977년 뽕삐두 쎈터가 문을 연 후로 이 광장은 많은 젊은이들과 관광객, 거리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jeudi 13 décembre 2007
엉덩이가 뜨거워 (L. H. O. O. Q.)
때때로 현대 미술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미술사에 큰 혁신을 가져온 마르쎌 뒤셩 (Marcel Duchamp, 1887-1968) 은 울리뽀 회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울리뽀의 다른 동료들, 즉 브라포르와 르 뗄리에 보다 훨씬 이전에 라 죠꽁드 (La Joconde) 를 풍자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919년, 뒤셩은 엽서 만한 크기의 라 죠꽁드의 복제본에 수염을 그려 넣고, 그림 밑에는 L. H. O. O. Q. 라는 수수께끼 같은 제목을 달았습니다. 약자처럼 보이지만 약자가 아닌 이 글자들의 나열은 몬나 리자의 수수께끼 같은 미소에 대한 뒤셩 나름의 해답입니다. 즉, 뒤셩 생각에 그녀가 살며시 웃을듯 말듯 미소 짓는 이유는 엉덩이가 뜨겁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불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물론, 불어권 사람들이라도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자칫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는 말장난입니다. L. H. O. O. Q 의 글자 이름들을 그대로 읽으면, [엘. 아슈. 오. 오. 뀌.] 가 되고, 이것은 마치 불어 문장 Elle a chaud au cul 를 발음한 것처럼 들립니다. 이 문장은 직역하면 «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 » 라는 뜻인데, 실제로 엉덩이 주변의 온도가 높아서 뜨겁다는 뜻이 아니라, 성적으로 흥분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안그래도 라 죠꽁드가 레오나르 드 방씨의 분장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거기다가 수염을 그려서 남자처럼 만들고, 성적인 암시가 들어간 제목까지 덧붙이는 바람에, 이 그림은 많은 논쟁을 일으켰고, 오늘날 난무하는 수많은 라 죠꽁드 풍자화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뒤셩은 이 그림 (보다 정확히는 레디-메이드) 을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에게 선물하였고, 아라공은 생애 말기에 이 작품을 프랑쓰 공산당에 기증하였습니다. 지금도 이 그림은 여전히 프랑쓰 공산당의 소유품이지만, 2005년부터 뽕삐두 쎈터 (Centre Pompidou) 에 99년간 빌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물론, 불어권 사람들이라도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자칫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는 말장난입니다. L. H. O. O. Q 의 글자 이름들을 그대로 읽으면, [엘. 아슈. 오. 오. 뀌.] 가 되고, 이것은 마치 불어 문장 Elle a chaud au cul 를 발음한 것처럼 들립니다. 이 문장은 직역하면 «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 » 라는 뜻인데, 실제로 엉덩이 주변의 온도가 높아서 뜨겁다는 뜻이 아니라, 성적으로 흥분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안그래도 라 죠꽁드가 레오나르 드 방씨의 분장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거기다가 수염을 그려서 남자처럼 만들고, 성적인 암시가 들어간 제목까지 덧붙이는 바람에, 이 그림은 많은 논쟁을 일으켰고, 오늘날 난무하는 수많은 라 죠꽁드 풍자화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뒤셩은 이 그림 (보다 정확히는 레디-메이드) 을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에게 선물하였고, 아라공은 생애 말기에 이 작품을 프랑쓰 공산당에 기증하였습니다. 지금도 이 그림은 여전히 프랑쓰 공산당의 소유품이지만, 2005년부터 뽕삐두 쎈터 (Centre Pompidou) 에 99년간 빌려 주었다고 합니다.
L. H. O. O. Q. de Marcel Duchamp (1919)

mardi 11 décembre 2007
라 죠꽁드 (La Joconde)
끄노가 바흐에게 영감을 받아 문체 연습을 지었다면, 르 뗄리에는 끄노의 문체 연습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두 편의 라 죠꽁드 연작을 썼습니다.
라 죠꽁드는 레오나르 드 방씨 (Léonard de Vinci, 1452-1519) 가 그린, 정의 내리기 힘든 미소 (sourire indéfinissable) 로 유명한 초상화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무턱대고 영어를 따라 모나 리자 라고 부르지만,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La Joconde (이딸리아어로는 La Gioconda) 입니다. Monna Lisa 라는 별칭은 뒤늦게 리자 델 죠꼰도 (Lisa del Giocondo) 라는 여자가 그림의 모델이었다는 설이 나오면서 생겨났습니다. 이 설은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최근의 연구들에 의하여 더욱 더 유력한 것으로 인정되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아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리자 델 죠꼰도 외에도 당대의 다른 이딸리아 귀부인들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하며, 심지어 레오나르 자신이 여자로 분장한 채 그린 자화상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리자는 귀족 부인이었으므로 그 이름 앞에는 경칭인 madonna (불어 madame) 를 붙이는데, 옛 이딸리아어에서 madonna 는 간혹 monna [몬나] 라는 형태로 축약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딸리아어와 불어에서는 그림의 제목을 말할 때는 La Gioconda, La Joconde 라 하고, 모델의 이름을 거론할 때는 Monna Lisa 라고 합니다. mona [모나] 는 이딸리아 속어로 « 여성의 성기 » 를 칭하기 때문에, Mona Lisa 라고 쓰는 것은 아무런 뜻도, 근거도 없는, 잘못된 형태입니다. 게다가 lisa 는 « (헝겊이) 헤진, 닳은, 너덜너덜한 » 이라는 뜻의 형용사이기도 하므로, [모나 리자] 라는 말을 들으면 이딸리아 사람들은 뒤로 넘어갑니다.
한편 Gioconda 라는 말은 리자 델 죠꼰도의 성 (nom) 을 여성화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여자가 정말로 모델이었는지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그저 보통 단어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gioconda, joconde 는 모두 라띠나어 jucundus [유꾼두쓰] 에서 온 말로, « 기분 좋은, 마음에 드는, 상쾌한, 매력적인 » 등등의 뜻을 가진 형용사입니다. La Joconde 는 그러니까 « 매력적인 여자, (보고 있으면) 사람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는 여자 » 라는 뜻이지요.
프랑쓰의 왕 프렁쓰와 1세 (François Ier, 1494-1515-1547) 가 이 그림을 보고 바로 그런 기분을 느꼈나 봅니다. 그는 레오나르 드 방씨가 1516년 프랑쓰로 가져 온 라 죠꽁드를 곧 사들였습니다. 그 후 이 그림은 역대 프랑쓰 왕들의 개인 보물로 전수되면서, 퐁뗀블로, 베르싸이으, 루브르, 뛰일르리 등, 왕궁을 옮겨 다니며 전시되었습니다. 현재도, 박물관이 된 루브르에 걸려 있습니다.
저는 도대체 이 그림이 뭐가 그리 특별난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미 르네썽쓰 시대부터 라 죠꽁드는 수많은 찬미와 관심, 모방과 풍자, 해석과 분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수학자이자 울리삐앙인 에르베 르 뗄리에 (Hervé Le Tellier, 1957-) 역시 라 죠꽁드를 대상으로 하여 두 편의 책을 썼습니다. 우선 1998년 출판된 Joconde jusqu'à cent (100 까지의 죠꽁드) 는 끄노의 문체 연습을 본따, 라 죠꽁드를 99 가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책입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직업, 여러 사회 신분, 계층, 나이, 유명인, 허구의 인물 등의 싯점이 포함됩니다. 99 가지 관점만이 제시되었는데도 책의 제목이 « 100 까지... » 라고 되어 있는 이유는, 책의 가장 마지막 쪽은 독자의 관점을 스스로 적도록 백지로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제목은 발음에 의한 말장난이기도 한데, Je compte jusqu'à cent = « 백까지 세겠다 » 고 하는 표현을 Joconde jusqu'à cent 으로 바꾼 것입니다.
2002년에 새로 나온 제 2 권, Joconde sur votre indulgence 역시 비슷한 말장난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compter 는 위의 예에서처럼 « 수를 세다 » 라는 뜻의 동사이기도 하지만, compter sur 라고 하면 « -를 믿다, -에 의존하다 » 라는 뜻도 됩니다. 따라서 Je compte sur votre indulgence 는 « 여러분의 너그러운 용서를 믿겠습니다 » 라는 뜻인데, 역시 je compte 와 joconde 의 발음이 비슷한 점을 이용하여 제목을 지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1 권에 더하여, 라 죠꽁드를 바라보는 백가지의 또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유명한 그림 라 죠꽁드를 이렇게 비웃고 풍자한 것을 용서해 달라는 의미이지요.
이 두 책은 끄노의 문체 연습 (Exercices de style) 에서 영감을 받았고, 화자의 관점에 따라 문체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나, 엄격히 말해 문체 연습 (exercices de style) 은 아닙니다. 때로는 같은 그림을 바라 보는 서로 다른 시선들이 다루어지기도 하나, 때로는 리자와 레오나르가 직접 등장하여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무대가 르네썽쓰 시대의 피렌체이기도 하다가, 현대 빠리의 꺄페나, 문제 구역의 경찰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불어 문법만 알아서는 이해가 힘들고, 문화적 상황과 맥락을 알아야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방송 프로그람, 시사 풍자, 인기있는 영화나 노래에 대한 암시, 말장난, 유명인들의 어투나 유행어 모방 등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 중 번역이나 긴 설명이 굳이 필요 없는 몇가지 예 :
- Cond, my name is Cond. Joe Cond.

라 죠꽁드는 레오나르 드 방씨 (Léonard de Vinci, 1452-1519) 가 그린, 정의 내리기 힘든 미소 (sourire indéfinissable) 로 유명한 초상화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무턱대고 영어를 따라 모나 리자 라고 부르지만,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La Joconde (이딸리아어로는 La Gioconda) 입니다. Monna Lisa 라는 별칭은 뒤늦게 리자 델 죠꼰도 (Lisa del Giocondo) 라는 여자가 그림의 모델이었다는 설이 나오면서 생겨났습니다. 이 설은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최근의 연구들에 의하여 더욱 더 유력한 것으로 인정되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아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리자 델 죠꼰도 외에도 당대의 다른 이딸리아 귀부인들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하며, 심지어 레오나르 자신이 여자로 분장한 채 그린 자화상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리자는 귀족 부인이었으므로 그 이름 앞에는 경칭인 madonna (불어 madame) 를 붙이는데, 옛 이딸리아어에서 madonna 는 간혹 monna [몬나] 라는 형태로 축약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딸리아어와 불어에서는 그림의 제목을 말할 때는 La Gioconda, La Joconde 라 하고, 모델의 이름을 거론할 때는 Monna Lisa 라고 합니다. mona [모나] 는 이딸리아 속어로 « 여성의 성기 » 를 칭하기 때문에, Mona Lisa 라고 쓰는 것은 아무런 뜻도, 근거도 없는, 잘못된 형태입니다. 게다가 lisa 는 « (헝겊이) 헤진, 닳은, 너덜너덜한 » 이라는 뜻의 형용사이기도 하므로, [모나 리자] 라는 말을 들으면 이딸리아 사람들은 뒤로 넘어갑니다.
한편 Gioconda 라는 말은 리자 델 죠꼰도의 성 (nom) 을 여성화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여자가 정말로 모델이었는지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그저 보통 단어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gioconda, joconde 는 모두 라띠나어 jucundus [유꾼두쓰] 에서 온 말로, « 기분 좋은, 마음에 드는, 상쾌한, 매력적인 » 등등의 뜻을 가진 형용사입니다. La Joconde 는 그러니까 « 매력적인 여자, (보고 있으면) 사람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는 여자 » 라는 뜻이지요.
프랑쓰의 왕 프렁쓰와 1세 (François Ier, 1494-1515-1547) 가 이 그림을 보고 바로 그런 기분을 느꼈나 봅니다. 그는 레오나르 드 방씨가 1516년 프랑쓰로 가져 온 라 죠꽁드를 곧 사들였습니다. 그 후 이 그림은 역대 프랑쓰 왕들의 개인 보물로 전수되면서, 퐁뗀블로, 베르싸이으, 루브르, 뛰일르리 등, 왕궁을 옮겨 다니며 전시되었습니다. 현재도, 박물관이 된 루브르에 걸려 있습니다.


이 두 책은 끄노의 문체 연습 (Exercices de style) 에서 영감을 받았고, 화자의 관점에 따라 문체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나, 엄격히 말해 문체 연습 (exercices de style) 은 아닙니다. 때로는 같은 그림을 바라 보는 서로 다른 시선들이 다루어지기도 하나, 때로는 리자와 레오나르가 직접 등장하여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무대가 르네썽쓰 시대의 피렌체이기도 하다가, 현대 빠리의 꺄페나, 문제 구역의 경찰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불어 문법만 알아서는 이해가 힘들고, 문화적 상황과 맥락을 알아야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방송 프로그람, 시사 풍자, 인기있는 영화나 노래에 대한 암시, 말장난, 유명인들의 어투나 유행어 모방 등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 중 번역이나 긴 설명이 굳이 필요 없는 몇가지 예 :
007의 관점 (le point de vue de l'agent 007)
- Ne nous sommes-nous pas déjà rencontrés, Monsieur ?- Cond, my name is Cond. Joe Cond.
인쇄기술자의 관점
성악가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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