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anche 9 janvier 2011

떵쁠 (Temple)

렁발 공주가 프랑쓰 왕가와 함께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낸 떵쁠의 탑 (Tour du Temple) 은 떵쁠의 집 (Maison du Temple) 을 구성하던 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떵쁠의 집은 중세에 떵쁠리에 (Templier) 들이 오늘날의 빠리의 3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세운 넓은 공간으로, 중세에는 거의 독립된 도시와도 같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떵쁠리에들은 십자군 전쟁 시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활동했던 수사이자 군인이면서, 은행가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애초에 떵쁠회 (Ordre du Temple) 는 예루살렘의 성전 (Temple) 이 있던 자리를 첫 본거지로 삼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는데, 크게 번성하여 유럽 도처에 분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을 떵쁠의 집이라 불렀지요. 빠리의 떵쁠도 그 중 하나로, 다른 떵쁠의 집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넓은 농지로 구성되었습니다. 흔히 떵쁠리에들을 군인이나 은행가로만 보지만, 실제로는 다른 수사들처럼 땅을 경작하는 일에도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따라서 농사에 관계된 여러 부속 건물들 (곳간, 마굿간 등등) 이 있었으며, 빠리의 떵쁠은 사각형의 거대한 탑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늪과 습지에 불과했던 이 지역은 빠리의 외곽으로서, 떵쁠리에들은 상당히 넓은 영토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을 성벽으로 둘러 쌓아 요새화 시켰습니다.

1450년 경의 떵쁠을 묘사한 그림

하지만 1312년 프랑쓰의 왕 필립 4세 르 벨 (Philippe IV le Bel) 과 교황 끌레멍 5세 (Clément V) 가 떵쁠회를 폐지시키면서, 떵쁠회의 재산과 소유지는 모두 오삐딸회 (Ordre de l'Hôpital) 로 넘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리의 떵쁠은 여전히 떵쁠이라 불리면서 여러 변화를 거치지요. 우선 빠리 시내가 커지면서 떵쁠이 빠리 시내의 일부가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여러 저택과 집들이 들어서고, 병원, 묘지, 정원 등이 생겨납니다. 거대한 떵쁠의 탑은 14세기 말에 잠시 감옥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16-17세기에는 군대의 무기고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는 문서보관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6세기 말에는 원래 있던 50 미터 높이의 떵쁠의 탑 (Grande Tour) 앞에 그 절반 정도 높이의 작은 탑 (Petite Tour) 을 덧붙여 세워, 문서보관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살기도 했습니다. 17세기에는 베르싸이으를 건축한 아르두앙-멍싸르 (Jules Hardouin-Mansart) 가 오삐딸회의 대원장을 위한 궁전 (Palais du Grand Prieur) 을 세웠으며, 이 건물은 18세기에 아르뜨와 백작 (comte d'Artois), 즉 루이 16세의 동생이자 훗날의 샤를 10세의 소유가 됩니다.

18세기의 떵쁠 탑을 묘사한 그림

비록 중세의 두껍고 투박하고 순전히 군사적인 보호를 목적으로 하던 성벽은 사라졌지만, 떵쁠은 여전히 보다 낮고 보다 얇은 벽으로 둘러쌓인 동네였습니다. 이 동네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딱 하나의 문 밖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꼬뮌 드 빠리는 왕정이 무너진 후 왕가를 떵쁠에 가두기로 했던 것입니다. 즉 통제를 하기가 쉬웠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왕가를 떵쁠로 이송한다고 했을 때, 그래도 프랑쓰의 왕실인데, 모두들 대원장의 궁에 머물게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꼬뮌 드 빠리는 작은 탑을 왕실의 거처로 정했습니다. 그나마도 큰 탑이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수리하는 동안만이었습니다. 따라서 작은 탑에서는 약 한 달 여간, 그리고 큰 탑으로 옮겨가서는 식구별로 최소 4개월에서 최대 3년 넘게까지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우선 루이 16세가 떵쁠을 가장 먼저 떠나긴 했지만, 이것은 1793년 1월 21일 기요띤에 목이 잘리기 위함이었지요. 다음으로 마리-엉뜨와넷이 1793년 8월에 꽁씨에르쥬리 (Conciergerie) 로 이감됩니다. 1794년 5월에는 루이 16세의 여동생 엘리자벳 (Élisabeth) 공주가 역시 기요띤 형을 당하고, 1795년 6월에는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살던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이 결핵으로 죽습니다. 유일한 생존자는 루이 16세의 첫째 딸 마리-떼레즈 (Marie-Thérèse) 로, 그녀는 1795년 12월 외스터라이히 제국에 잡혀 있던 네 명의 프랑쓰 포로와 교환됩니다. 

이후 세월이 바뀌면서 왕정주의자들이 떵쁠의 탑을 마치 순례지처럼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자, 황제가 된 나뽈레옹이 1808년 탑을 제거하게 합니다. 지금은 탑이 있던 자리를 표시해 주는 흔적 만이 길 위에 그려져 있습니다.

탑이 있던 자리의 한 쪽 모퉁이를 표시해 주는 3구 구청 앞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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