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오귀스뜨는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세 명의 비를 두었었는데, 첫번째를 제외하면 나머지 둘은 실제로 왕비라고 불러도 좋을지,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필립 2세의 첫번째 왕비는 이자벨 드 에노 (Isabelle de Hainaut) 였습니다. 어찌보면 그녀는 가장 평범한 왕비다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노의 백작 보두앙 5세 (Baudouin V) 와 플렁드르의 백작부인이었던 마르그릿 달자쓰 (Marguerite d'Alsace), 즉 두 세력가 집안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정략 결혼을 하고, 외국에 시집와서 공식적으로는 왕비의 대접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내야 했으며, 특히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들을 하나 낳고는 일찍 죽었습니다. 사실 프랑쓰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몇몇 개성이 강한 여자들을 제외하면, 많은 왕비들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혼을 했을 때 이자벨의 나이는 열 살이었고, 남편 필립의 나이는 열 다섯 살이었으므로, 결혼하고도 칠여년간 아이가 없었다는 것은 요즘 시각으로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 나라 사극을 봐도 비슷하지만,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하면 거의 왕실에서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기 쉽상이지요. 그 자신도 외아들이었던 필립 오귀스뜨는 이자벨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비난도 많이 했고, 그녀가 친정에 별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녀는 1187년에 왕자를 하나 낳고, 그 왕자는 훗날 필립 오귀스뜨를 이어 루이 8세 (Louis VIII) 가 되지요. 3년 뒤 이자벨은 또한번 해산을 하다가 결국은 스무 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고, 그 때 태어난 쌍동이 왕자들 역시 모두 일찍 죽습니다.
이자벨 드 에노가 죽은지 약 3년 뒤, 필립 오귀스뜨는 단마크 왕의 딸과 새로 결혼을 합니다. 이 두번째 왕비의 이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프랑쓰식으로 이정부르 (Isambour) 라고도 부르고, 단마크 식으로 잉게보르크 (Ingeborg) 또는 잉게부르게 (Ingeburge) 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옛날에는 아무리 귀족이라도 여자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낯선 외국 이름이었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철자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스껑디나비 출신의 공주가 프랑쓰의 왕비가 된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째서 그녀가 필립 오귀스뜨의 새로운 왕비로 선택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필경 정치적인 이유겠지만, 아무튼 이정부르 드 단마르크 (Isambour de Danemark) 는 1193년 8월 14일 당시 유럽 최고의 왕과 결혼식을 올리고 프랑쓰의 왕비로 축성을 받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다음날 필립 오귀스뜨는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합니다. 도대체 신혼 첫날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 아무도 모르지요. 왕비의 몸이 비늘로 덮여 있는 마녀였다 식의 희귀한 소문부터 시작해서 정치적 또는 외교적 이유까지 별별 상상이 난무했지만, 지금까지도 역사학자들은 필립 오귀스뜨의 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결혼한 다음날부터 이정부르는 왕궁에서 살기는 커녕, 빠리 동쪽의 성 모르 수도원 (Abbaye de Saint-Maur) 에 사실상 감금됩니다. 하지만 교황청은 이 이유 없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필립은 필립대로 교황에게 질 수 없었죠. 그때문에 이 결혼을 둘러싼 논쟁은 1201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8년간 이정부르는 프랑쓰의 정식 왕비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외로운 삶을 삽니다.
교황 쎌레스땅 3세 (Célestin III) 가 이정부르와의 결혼이 유효하다고 공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오귀스뜨는 이것을 무시하고 1196년 아녜쓰 드 메라니 (Agnès de Méranie) 와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립니다. 오늘날은 모라비 (Moravie) 라고 불리는 체끼 (Tchéquie) 동쪽의 공국, 메라니의 공주였던 아녜쓰는 세 명의 왕비 중 가장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필립 오귀스뜨는 왕비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그녀를 사랑했으며, 두 사람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쎌레스땅 3세가 죽고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이노썽 3세 (Innocent III) 는 교황의 말을 무시하고 이중 결혼 상태로 살고 있는 프랑쓰 왕을 가만둘 수 없었습니다. 여러 차례 이정부르의 지위를 되살리고 아녜쓰와 결별하라는 지시를 했지만 필립 오귀스뜨가 여전히 귀머거리 행세를 하자, 이노썽 3세는 결국 1200년, 프랑쓰 전체에 성무집행금지령 (interdit) 을 내립니다. 성무집행금지령은 한 나라 또는 한 지역 전체가 파문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미사를 비롯하여 결혼식, 장례식 등등 그 어떤 종교 행위도 행해지지 못하도록 하는 큰 벌이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국민이 천주교를 믿던 나라에서 이것은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지요. 결국 약 아홉개월을 버틴 끝에 필립 오귀스뜨도 항복할 수 밖에는 없었으며, 금지령은 철회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이정부르가 진짜 그리고 유일한 프랑쓰의 왕비로 인정되었습니다. 더군다나 1201년, 아녜쓰 드 메라니가 해산 중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로써 필립 오귀스뜨의 두 아내 문제는 해결된 듯 보였으나, 1205년 그는 또다시 이정부르와의 결혼을 무산시키려는 재판을 시작하고, 1212년이 되서야 모든 노력을 포기합니다. 이후 필립은 1223년에 죽고, 이정부르는 1226년에 죽습니다. 열아홉의 나이에 낯선 나라에 시집와서, 33년 동안 단 하루도 아내로서도, 왕비로서도 살지 못했던 이정부르의 삶도 참 불행한 것은 사실이나, 또 필립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게도 싫은 여자와 삼십년을 묶여 지내야했던 것도 고역이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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