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udi 24 juillet 2008

뛰일르리 (Tuileries)

1871년의 꼬뮌의 진압 동안 빠리시는 많은 인명을 잃었을 뿐 아니라, 여러 유적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흔히 말하기로는, « 악독한 » 꼬뮈나르들이 스스로 빠리의 명소에 불을 지르고 폭파시켰다고 하는데, 요즘은 조금 다른 견해들도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빠리 시민군이 뛰일르리 궁이나 시청, 대법원 같은 기념비적 장소들을 방어 요지로 삼은 것은, 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런 장소들이 꼬뮌 드 빠리의 주요 행정기관이었으므로,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꼬뮈나르들에게는 당연한 의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는, 정부군이 이런 유적지들을 파괴시키면서까지 밀고 들어오지는 감히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으리라는 것이죠. 하지만 정부군은 문화 유산의 파괴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결국 시민군도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열세에 몰리다보니, 시간을 벌기 위해, 의도적인 화재를 일으키는 일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다보니 오늘날 과연 어느쪽 군대가 역사적 장소의 파괴에 더 큰, 또는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영원히 사라진 대표적인 건물이 바로 뛰일르리 궁 (Palais des Tuileries) 입니다. 뛰일르리는 옛날에 기와 (tuile) 를 굽던 장소에 지어진 궁으로, 현재의 루브르 궁과 뛰일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이 만나는 경계에, 남북으로 길게 세워졌던 건물입니다. 이 궁은 1564년, 프랑쓰의 왕비이자 섭정이었던 꺄트린 드 메디씨쓰 (Catherine de Médicis) 의 명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한 후로, 종종 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지만, 왕실이 베르싸이으로 이주한 후는 거의 버림받은 상태였습니다. 왕실이 다시 뛰일르리로 돌아온 것은 1789년 10월 6일로, 이 날 빠리의 여자들은 손에 부엌칼과 곡괭이를 들고 베르싸이으까지 찾아가서, 억지로 왕과 왕비를 빠리로 끌고 왔습니다. 이후로 뛰일르리는 체제가 무엇이든 간에 프랑쓰 정부의 중심이 됩니다.

우선 루이 16세는 비록 감시받는 상태로나마 1792년까지 뛰일르리에서 입헌왕정을 유지했으며, 그가 사형된 후로는 혁명 정부가 뛰일르리에 자리잡습니다. 나뽈레옹 역시 집정관 (consul) 시절이나 황제 (empereur) 시절이나, 뛰일르리 궁을 본거지로 삼았고, 왕정 복귀가 된 후로는 루이 16세의 두 동생,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차례차례 뛰일르리 궁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들어선 7월 왕정 (Monarchie de juillet) 의 주인공 루이-필립 역시 뛰일르리에 왕실을 차렸으며, 그 역시 밀려났을 때는 프랑쓰 최초의 대통령 (président) 으로 뽑힌 루이-나뽈레옹 보나빠르뜨가 뛰일르리를 대통령 관저로 삼았습니다. 곧이어 그가 나뽈레옹 3세로 등극하면서 뛰일르리는 나뽈레옹 1세 때처럼, 황제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제 2 제정이 무너진 후, 뛰일르리궁은 꼬뮌의 차지가 되었으며, 결국 1871년 피의 주간 때 이 궁전은 꼬뮈나르들이 저지른 화재에 의해 장장 3일간을 탔다고 합니다.

하지만 뛰일르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이 때가 아닙니다. 이 때의 화재는 나무로 장식된 뛰일르리의 내부만 태웠지, 돌로 만들어진 골격과 외부는, 그을림을 제외하고는, 거의 피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꼬뮌이 몰살된 후 제 3 공화국 정부는 뛰일르리를 재건하려는 계획도 여러번 가졌습니다. 하지만 여러번의 업치락 뒷차락 끝에 결국 1883년에 아직도 버티고 서 있던 뛰일르리 본궁을 깨끗이 철수시켰습니다.

하지만 뛰일르리를 구성하던 몇몇 부속 건물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선 뛰일르리 궁과 루브르 궁을 연결하던 두 건물 (플로르 관과 마르썽 관) 은 그대로 있으며, 뛰일르리 궁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꺄루젤 개선문 역시 굳건히 서 있습니다. 또 뛰일르리 정원에는 나뽈레옹 3세가 사용하던 손바닥 놀이장 (Jeu de paume) 이, 그 맞은편에는 똑같이 생긴 온실 (Orangerie) 이, 지금은 모두 박물관으로 변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뛰일르리 궁이 사라진 바람에, 오늘날의 관광객들은 루브르 마당부터 꽁꼬르드 광장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드넓은 정원을 산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정원을 산책하고 나면 꼭 신발과 바지 밑자락이 뽀얗고 고운 흙먼지로 뒤덥히는데, 그것을 보면서, 이 정원의 흙으로 원래는 기와를 구웠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꺄루젤 개선문 (Arc de triomphe du Carrousel)
왼쪽부터 꺄루젤 개선문, 마르썽 관, 루브르 궁
(Arc de triomphe du Carousel, Pavillon de Marsan, Louvre)

오른쪽부터 꺄루젤 개선문, 플로르 관, 루브르 궁
(Arc de triomphe du Carrousel, Pavillon de Flore, Louvre)

뛰일르리 정원의 손바닥 경기장
(Jeu de paume du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의 온실 (Orangerie du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
멀리에 오벨리스크와 에뜨왈 개선문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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