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졸리에와 마르껫도 엄격히 말하면 미씨씨삐 전체를 탐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대략 아르껑싸쓰 (Arkansas) 가 미씨씨삐로 합류되는 지점에 이르러, 이 강은 오로지 남쪽을 향하여 거의 직선으로만 흐른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따라서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열어줄 희망이 전혀 없었으므로, 탐험을 중지하고 대호수 지역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비록 그들이 원하는 길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졸리에와 마르껫은 총 3800 킬로미터에 달하는 미씨씨삐 강의 3분의 2를 탐사했으며, 그 뿐 아니라, 미씨씨삐의 삼대 지류인 미쑤리 (Missouri), 오하이오 (Ohio), 아르껑싸쓰를 비롯하여, 미네조따 (Minnesota), 위스꼰씬 (Wisconsin), 아이오와 (Iowa), 일리느와 (Illinois) 등 미씨씨삐로 흘러드는 여러 강들을 발견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주 이름으로 채용된 이 강 이름들은 모두 원주민어를 불어로 옮겨 적은 것입니다 (대부분은 마르껫에 의해서).
미씨씨삐를 모두 탐험한 최초의 사람은 르네 로베르 꺄블리에 들 라 쌀 (René Robert Cavelier de La Salle) 이었습니다. 1682년, 대호수들부터 시작하여 메히꼬 만 (golfe du Mexique) 까지 미씨씨삐를 타고 내려온 꺄블리에 들 라 쌀은 미씨씨삐와 그 지류들이 적시고 있는 모든 지역을 프랑쓰의 소유로 선포하고, 당시 프랑쓰 왕이었던 루이 14세 (Louis XIV) 의 이름을 따서 Louisiane 이라 명하였습니다. 이 때의 루이지안은 현재 미국의 루이지안 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영토로, 간단히 말하여, 아빨라슈 산맥 (les Appalaches) 과 로슈즈 산맥 (les Rocheuses) 사이에 위치한 모든 영토라고 보면 됩니다 (참고로, 이 두 산맥의 이름 역시 프랑쓰 사람들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꺄블리에 들 라 쌀이 1682년 4월 9일, 루이 14세의 이름으로 작성한
루이지안 획득 공증서의 시작 부분.
Procès-verbal de la possession de la Louisiane
par Cavelier de la Salle.
Aix-en-Provence, CAOM, C 13C, f° 28
루이지안 획득 공증서의 시작 부분.
Procès-verbal de la possession de la Louisiane
par Cavelier de la Salle.
Aix-en-Provence, CAOM, C 13C, f° 28
이미 꺄나다에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던 프랑쓰가 루이지안까지 획득하게 되자, 신대륙의 식민화에 나섰던 다른 나라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죠. 특히 영국과는 꺄나다의 영토부터 시작하여 분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남미쪽에서부터 올라온 에스빠냐 역시 루이지안의 일부를 요구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생국 미국은 미국대로, 비록 프랑쓰의 도움을 받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긴 했지만, 일단 독립이 완료되고 나자, 루이지안을 떠밀고 서쪽으로 확장하고 싶어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결국 1803년, 당시 프랑쓰를 다스리던 나뽈레옹 보나빠르뜨 (Napoléon Bonaparte) 는 이 골치 아픈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랑쓰 국고에 돈이 필요했으므로, 루이지안을 미국에게 팔천만 프렁에 팝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거지만, 이 때 프랑쓰가 루이지안을 미국에게 헐값 (?) 에 팔아 넘기지 않았더라면, 지금 미국은, 또 프랑쓰는 과연 어떤 나라가 되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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