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돔 기둥은 빠리의 벙돔 광장 (Place Vendôme)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높다란 (약 45미터) 청동탑입니다. 이 탑 역시 빠리 시청사처럼 1871년의 꼬뮌 때에 무너졌다가 꼬뮌이 끝나고 난 후 복원된 기념물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약간 맥락이 다릅니다. 뛰일르리나 시청, 대법원 같은 건물들은 꼬뮌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아무렇게나 파손된 것이지만, 벙돔 기둥은 꼬뮌 정부가 아직 활동중일 때, 법적인 합의를 거쳐 제대로 철거를 시켰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꼬뮌이 보기에 이 탑은 권위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지요.
아닌게 아니라, 이 탑은 나뽈레옹 1세가 오스떼를리츠 전투 (1805년) 에서 적군에게서 뺏은 대포를 녹여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기 위하여 세운 탑으로, 로마에 있는 트라잔 기둥 (Colonne Trajane) 을 모방하고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쎄자르 (César ou Caesar) 의 모습을 한 나뽈레옹의 동상이 얹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실 이 기둥은 이미 꼬뮌 전에도 여러번 구설수에 올랐었는데, 이 기둥을 아예 없애버리자는 제안을 처음으로 낸 사람은 다름아닌 화가 귀스따브 꾸르베 (Gustave Courbet) 였습니다. 꾸르베는 세상의 원천 (L'Origine du monde) 같은 현실주의적 그림으로도 유명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심취하여 정치 활동도 했으며, 특히 1871년의 꼬뮌 정부의 한 의원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이미 제 3 공화국 정부에게도 이러한 제안을 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꼬뮌이 출범하고 나서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871년 5월 16일, 벙돔 기둥은 철거되었는데, 그로부터 며칠 후 - 정확히는 5월 22일부터 피의 주간, 즉 꼬뮌의 몰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특히 꼬뮌에 극도로 적대적이었던 제 3 공화국 정부는 꼬뮌 해체 후 벙돔 기둥을 같은 자리에 새로 세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게 보게 되는 것은 1874년에 복구된 탑.
한편 벙돔 광장은 원형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팔각형의 모습으로 생긴 광장으로, 호화로운 건물들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지금 이 건물들 대부분에는 세계적인 보석상들 (Cartier...) 이나, 최고급 호텔 (Ritz...), 아랍 왕자들의 별장, 그리고 프랑쓰 법무부 (Ministère de la justice) 가 들어서 있습니다.
samedi 26 juillet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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