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anche 20 juillet 2008

첫번째 꼬뮌 드 빠리 (Commune de Paris)

버찌철랑떼르나씨오날은 모두 1871년의 꼬뮌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라띠나어 commune [꼼문네] 에서부터 비롯된 불어 commune [꼬뮌] 이란 단어의 뜻은 원래는 그저 « 공동체 » 로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데, 중세에는 흔히 왕이나 황제, 기타 다른 봉건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고, 시민들끼리 공동 (commun) 으로 꾸려나가는, 비교적, 또는 완전히 독립된 도시들이 꼬뮌이란 이름을 취했습니다. 현대 불어에서도 commune 은 매우 자주 쓰이는 용어로서, 프랑쓰 행정구역의 가장 작은 단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빠리는 하나의 꼬뮌이며, 리용도 하나의 꼬뮌이지요. 즉, 우리나라의 시 정도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Commune de Paris 라고 하면 « 빠리시 » 란 뜻에 불과하지만, 프랑쓰 역사에는 조금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꼬뮌 드 빠리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번째 꼬뮌 드 빠리는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이 바스띠으 (Bastille) 를 점령함과 동시에 공포되었습니다. 이것은 중세의 자유 꼬뮌들처럼, 빠리시가 더 이상 왕권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일종의 독립 의사의 표명이었지요. 이 시립 자치 정부 체제는 1795년까지 계속되었고, 그동안 혁명의 매우 중요한 사건들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1792년 8월 10일의 폭동을 조직하여 왕권을 완전히 몰락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면서 꼬뮌 드 빠리는 매우 강력한 조직이 되었습니다. 1792년 9월 학살 (Massacre du septembre) 을 일으킨 장본인도 꼬뮌이었고, 비상 범죄 재판소 (Tribunal criminel extraordinaire) 를 설립한 것도 꼬뮌이었습니다. 1793년, 혁명 재판소 (Tribunal révolutionnaire) 로 발전한 이 법정은 공화국에 혹시라도 해를 끼칠 우려가 있을지 모른다고 조금이라도 염려되는 사람들을 후다닥 재판하기 위한 기관으로서, 여기서 내려진 결정은 24시간 내로 시행되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재심은 요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꼬뮌은 이 재판소를 통해 지롱당 (간단히 말하여 온건파) 의원들을 모두 제거하였으며, 점점 더 극단적이고 과격화되어, 1793년 9월 5일, 꽁벙씨옹 나씨오날 (간단히 말하여 국회) 로 하여금 프랑쓰 전국에 공포 정치 (Terreur) 를 합법화시키는 법령을 발표하게끔 하였습니다. 공포 정치의 첫 희생자 중 한 명이 바로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녀 외에도 약 17.000 명이 약식 재판 뒤에 처형을 당하였고, 25.000 명은 단순히 이름만 확인한 뒤 사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꼬뮌 드 빠리는 엄격히 말하면 빠리시의 업무 만을 처리하여야 했겠지만, 이렇게 실제로는 혁명 정부와 함께 프랑쓰 전국을 좌지우지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1793년 말부터 영향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여, 1794년 7월 이후로는 모든 힘을 잃었고, 1795년 8월 제정된 새로운 헌법 (Constitution de l'an III) 이, 빠리시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시를 열 두 개로 조각냄으로써 꼬뮌 드 빠리는 해체됩니다. 이 열 두 개의 조각에 1860년, 여덟 개의 교외 도시들이 합쳐지면서 오늘날 빠리를 구성하는 스무 개의 구 (arrondissement) 가 생겨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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