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redi 6 juin 2007

왕가의 탈출 (1791년 6월 20일)

1789년 6월 20일, 손바닥 놀이장의 맹세가 발표된 후 프랑쓰에는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7월 14일에는 바스띠으가 함락되었고, 8월 4일에는 특권층의 « 특권 » 과 봉건제가 폐지되었고, 8월 26일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가 발표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되었으며, 10월 6일에는 왕실이 강제로 빠리로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빠리 한복판의 뛰일르리 궁 (Palais des Tuileries) 에 유치된 왕가는 시민들의 폭동에 그대로 노출되었으며, 국회에 의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받으며 살게 됩니다. 그 사이에 많은 귀족들, 왕의 충신이고 왕비의 친구임을 자부했던 사람들은 모두 프랑쓰를 떠났지요.

왕실이 뛰일르리에 « 감금 » 된 직후부터, 국외로 도망친 왕정파들 사이에서 왕과 왕비 역시 국외로 탈출시키자는 계획이 여러번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그저 막연한 계획, 거의 공상에 가까운 단계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보다 치밀하고 현실적인 계획은 왕비 마리-엉뜨와넷이 직접 1790년 12월 말부터 준비하게 됩니다. 물론 왕비는 뛰일르리를 떠날 권리도, 아무나 만나거나 아무에게나 편지를 쓸 권리도 없었기에, 실질적인 행동은 왕비의 연인이었던 페르쎈 (Hans-Axel von Fersen ou Jean-Axel de Fersen) 이 도맡아 했습니다. 페르쎈은 오로지 혼자서, 전 유럽으로 왕비의 비밀 편지를 전해 나르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섭외하고, 거기에 자신의 전 재산을 탕진하고, 모자라는 자금을 모으고, 탈출시 사용하게 될 온갖 종류의 물건들을 수집했습니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여러 번의 연기 끝에, 마침내 왕가는 1791년 6월 20일 밤, 뛰일르리 궁을 탈출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역시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거치며 빠리를 빠져 나와, 근교의 봉디 (Bondy) 라는 도시에서, 미리 마련된 큰 마차로 바꿔탑니다. 그런데 여기서 왕이 페르쎈에게 더이상 따라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지요. 페르쎈은 울며불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왕에게 빌었지만, 평소에 결단력이 없다고 알려졌던 루이 16세가 이번만은 단호했습니다. 왕비의 연인이라고 소문난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다는 사실이 싫기도 했을테고, 이제 빠리를 탈출했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을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후 이 도망자들의 행위를 보면, 너무 쉽게 낙관적이 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긴장하고 서두르기 보다는, 느긋이 시골길을 즐기는 여행자들이 되어, 곧 변장을 벗어 던지고, 말을 바꾸는 요소에 도착할 때마다 마차에서 내려 마을을 구경하고, 크고 화려한 마차를 구경하러 온 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으니까요. 그외에도 이런저런 소홀함과 생각지도 못했던 우연들이 연달아 겹친 끝에, 결국 왕가의 마차는 바렌 (Varennes) 이라는 프랑쓰 북동부의 도시에서 체포되고 맙니다. 그리고 성난 국민들의 욕설 속에서 천천히 빠리로 끌려오게 되지요.

왕이 프랑쓰를 버리고 국외로 도망치려 했던 이 사건은 그나마 남아있던 왕의 권위를 완전히 실추시켰으며, 왕정에 미련을 갖고 있던 사람들마저 실망시켰고, 왕이 없어도 나라가 돌아가는데에 별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경험시켜 줌으로써 프랑쓰공화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강화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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