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di 27 novembre 2007

출현 (apparition)

e 를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쓰여진 뻬렉의 소설 실종 (La Disparition) 은 간혹 좀 특이한 단어나 잘 안쓰는 표현들이 억지스럽게 나오는 감도 없지 않으나,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매우 유연하게 쓰여져, 읽다 보면 어느새 e 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그저 보통 책처럼 자연스럽게 읽지 않고, 눈에 불을 키고 e 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장난기 많은 뻬렉이 몰래 e 를 하나 숨겨두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의도적이 아니었더라도 실수로 e 가 들어간 말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거죠. 그들이 이 책과 뻬렉에 대한 관심이 넘쳐난 사람들인지, 너무나도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인지, 아무튼 이 실종된 e 찾기는 1969년 책이 출판된 이후, 세대를 넘어 가면서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고, 사람들은 뻬렉의 천재성에 감탄하거나, 아니면 순전히 무의미한 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2003 년에 드디어 e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해 4월에 걀리마르 (Gallimard) 사에서 재판되어 나온 실종 의 119 쪽, 위에서 네번째 줄, 왼쪽에서 두번째 단어에 분명히 e 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 이 네번째 줄은 다음과 같습니다 :

« Booz dorme non loin du grain qu'on amassait »
(보즈는 우리가 줍던 곡식알 가까에서 잔다)

그런데 여기서 이 dorme 라는 단어는 문법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dormir (잠자다) 라는 동사가 접속법 현재 3인칭 단수로 쓰인 것인데, 문맥과 문장 구조상 여기서는 접속법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의 조사에 나선 뻬렉의 추종자들은 원문은 dormait 라고, 즉 e 가 없는 형태라고 주장했습니다. dormaitdormir 동사의 직설법 반과거 3인칭 단수로, 해석은 « 자고 있었다 » 가 되며, 그래야 문맥에도 맞고 문법에도 맞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전 판본들을 보아도 쉽게 확인되는 것이고, 심지어 2003년 재판되어 나온 책들 중에도 dormait 라고, 원문대로 잘 찍혀 있는 것들도 있다고 합니다. 즉, 재판본들 중에서도 일부 권수에만 오자가 난 것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 실수, 장난, 기적 ? 우선, 현대의 인쇄 기술상 이런 식의 실수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고의적인 장난일 확률이 가장 많은데, 사람들은 제일 먼저 걀리마르 출판사를 의심했습니다. 일부러 이런 소란을 일으켜서 책을 많이 팔고자 하는 속셈 아닐까 하는 것이죠. 그런데 걀리마르사는 이 사건에 대해 정말로 놀라면서, 그러한 상업적 계획이 없음을 진심으로 맹세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인쇄소에 의심이 돌아갔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이야 어디서 왔건, 실질적으로는 인쇄 과정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잘 돌아가고 있던 기계를 잠시 멈추고, 문제의 글자를 바꿔 놓은 다음, 다시 기계를 돌리다가, 또 슬쩍 멈추고는, 글자를 다시 원래대로 수정해 놓고는 사라졌을 것이라는 가정이지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인쇄소 직원인지, 아니면 출판사 직원인지, 아니면 몰래 침입한 제 삼 자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혼자 생각으로 저지른 일인지, 출판사에서 내려온 비밀 방침을 따른 것인지, 등등은 정말로 심각하고 본격적인 수사가 있어야 밝혀질 수 있는 문제였는데, 아무도 그렇게까지 파해칠 마음은 없었나 봅니다. 대신 출판사는 오자가 난 판본들을 가능한 한 모두 거둬들여 파본시키기로 했습니다. 그 때문에 유일하게 e 가 찍힌 실종 판은 모두가 찾아 헤매는 희귀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책의 본문에만 주의를 기울이느라 거의 의식하지 않고 넘어가는데, 책의 표지에 e 가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바로 저자의 이름 중에 : Georges Perec. 게다가 이 책은 imaginaire 라는 이름의 총서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것까지 치면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셈입니다. (옆에 그림에는 제목이 안 보이는데, 제목이 흰색 바탕에 흰색 글자로 쓰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책을 손에 들고 봐도 잘 안 보입니다.)

3 commentaires:

yj a dit…

하하...재밌다. 마지막 반전(?)도 인상적.
근데, 누가 그랬을지를 추적하는 것도 재밌겠는걸.

ange dubitatif a dit…

누나, 이거 전에 « 하늘아래 » 에도 썼던 건데... 생각 안 나세요 ? 마치 처음 읽는 사람 같은 말투네...

아니, 읽어 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할 입장인 제가 누나한테 시비를... ^^

yj a dit…

음...e를 빼고 쓴 소설이 있다는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는데...그 뒤에 e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 그 뒤의 에피소드들은 첨 듣는 것 같아서리.
물론 이것도 네가 했던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