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di 13 mars 2007

로젯의 돌 (pierre de Rosette)

프똘레메 4세 필로빠또르의 아들이자, 프똘레메 6세 필로메또르의 아버지인, 프똘레메 5세에게는 Épiphane 이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쓰어로 « 조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드러난, 빛나는 », 따라서 « 유명한, 이름 높은 » 등등의 뜻입니다. 기원전 약 200년 무렵에 통치했던 이 파라옹이, 자신이 새로 제정한 법률 하나를 커다란 돌판에다 세가지 문자를 사용하여 새기게 한 적이 있는데, 이 돌판이 거의 이천년간 땅 속에 파묻혀 있다가, 1799년에 나뽈레옹 보나빠르뜨 수하의 한 장교인 부샤르 (Pierre-François-Xavier Bouchard) 라는 사람에 의하여, 에집트의 라쉬드란 도시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 도시를 불어로는 Rosette 이라 부르기 때문에, 이 돌은 로젯의 돌이라 칭해지게 되었습니다.

로젯의 돌

로젯의 돌의 특징은 같은 내용의 문구가 두 가지 언어와 세 가지 문자 체계, 즉 고대 그리쓰어, 고대 에집트어 상형 문자 (hiéroglyphe), 고대 에집트어 데모틱 문자 (démotique) 로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데모틱 문자란, 말 그대로, demos, 즉 « 대중, 민중 » 이 쓰던 글자를 말합니다.

세 글자 중 당시에 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던 유일한 언어는 고대 그리쓰어였는데, 이 그리쓰어로 쓰여진 마지막 문구에 의하면, 같은 내용을 다른 두가지 문자로 옮겨 쓴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상형 문자와 데모틱 문자가 같은 내용의 번역임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 학자들이 해독을 시도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결국은 셩뽈리옹 (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 에 의해서, 1822년 해독이 이루어졌습니다. 수세기 동안 해독이 불가능했던 상형 문자와 데모틱 문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에집트학 (égyptologie) 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죠.

셩뽈리옹은 프랑쓰에서 매우 유명합니다. 그의 이름을 딴 길, 학교, 도서관, 박물관, 단체 등이 각 도시마다 즐비하고, 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프랑쓰의 에집트학은 상당히 수준히 높은 듯 합니다 (사실 저는 잘 모르지만). 또 일반 프랑쓰 사람들도 제가 보기에는 매우 놀라울 정도로 고대 에집트의 문명과 신화를 잘 알고들 있습니다. 그리고 빠리의 꽁꼬르드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나 루브르 마당의 유리 삐라미드 등도 에집트에 대한 프랑쓰의 관심을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겠지요?

꽁꼬르드 광장의 오벨리스끄

그리고 한편, pierre de Rosette 이라는 말은 이제 숙어화 되어서, « 어려운 문제를 푸는데 받침이 되는 열쇠, 기본 » 등의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뽐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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