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dredi 10 août 2007

포 부르동 2 (faux bourdon 2)

불어 명사 bourdon 에는 크게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저음 (음악 용어).
2. 벌의 일종으로, 보통 꿀벌 보다 훨씬 크고 뚱뚱하며 털이 잔뜩 난 곤충. 이 곤충은 날면서 낮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기 때문에 이렇게 불립니다.

1번의 뜻에 형용사 faux 가 붙어 만들어진 명사 faux-bourdon 은 작곡 양식의 일종임을 이미 보았습니다. 한편 2번의 뜻에 같은 형용사를 써서 faux bourdon 이라고 하면 « 수컷 꿀벌 » 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꿀벌의 수컷은 다른 꿀벌보다 덩치가 커서, 잘 관찰하지 않으면 부르동으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지요. 알고보면 « 가짜 부르동 » (faux bourdon) 이었는데 말입니다. 주의할 것은, 음악 양식 faux-bourdon 은 연결선 (-) 으로 이어진 하나의 단독 명사인데 반해, 곤충 faux bourdon 은 형용사와 명사, 두 개별 단어의 결합입니다.

부르동과는 또 다른 종류로 guêpe 이라는 벌이 있습니다. 얘도 꿀벌보다는 더 크지만, 뚱뚱하게 생긴 부르동에 비하면 훨씬 날씬하고 갸름한 몸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어에는 taille de guêpe (겝의 허리)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허리가 매우 날씬한 여자를 묘사할 때 쓰입니다.

guêpe 을 이딸리아말로는 vespa 라 하는데, Vespa는 삐아죠 (Piaggio) 사의 유명한 스쿠터 모델명이기도 합니다. 수십년전부터 팔리기 시작한 이 예쁜 스쿠터는 여전히 이딸리아에서는 물론 프랑쓰 (그리고 분명 다른 나라들) 에서도 매우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베스빠

베스빠가 베스빠라 불리는 이유는, 그 모양과 속도, 가벼움이 겝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진짜 겝은 벌들 중 가장 사나워서, 얘한테 쏘이면 엄청 아프고, 여러 마리한테 한꺼번에 쏘이면 죽기까지 한다지요.

또 겝과 매우 가까운 종속이면서 훨씬 덩치가 큰 frelon 이라는 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통 꿀벌은 abeille 라고 합니다.

매일매일 내 발꽁에 꿀을 찾으러 오는 꿀벌

mercredi 8 août 2007

포-부르동 (faux-bourdon)

불어의 형용사 faux, fausse 는 기본적인 뜻 « 가짜의 » 라고 해석되는 경우도 많지만, 때때로 외국인들에게는 직역만 해가지고는 의미가 불문명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들이 faux jeton, faux cul 등으로, 이 말들은 « 위선자 » 라는 뜻이지요.

비슷한 예로, faux frère 는 « 배신자 » 라는 뜻입니다. 직역 : « 가짜 형제 ». 한편 faux amis 는 « 가짜 친구들 » 이라는 뜻이므로, 역시 배신자나 위선자로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 사실은 « 두 언어 사이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어휘들 » 을 지칭합니다.

한편 악기와 관련해서는 뜻이 조금 다릅니다. 이 때는 « 정확한 음정이 아닌 » 이란 의미지요. faux piano 라고 하면, 물론 문맥상 진짜 피아노가 아닌 장난감 피아노 따위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 » 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fausse note 는 « 가짜 음 » 이라기 보다는 « 틀린 음 » 이란 뜻입니다 (도를 쳐야 하는데, 레나 시를 쳤을 때). chanter faux 라고 하면 faux 가 부사적으로 쓰여서, « 노래를 잘 못 부르다 » 는 뜻인데, 단지 어느 특정 경우에만 노래를 잘 못 불렀을 때 쓰는 말이 아니라, 항상 노래를 못하는 사람에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Je chante faux = « 나는 음치이다 ».

그리고 음악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에 faux-bourdon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기존 선율 (cantus firmus) 아래에 4도와 6도 간격의 화음을 주어 병행 진행시키는 작곡법을 가리킵니다. 왜 이 작법이 faux-bourdon, 즉 « 가짜 저음 » 이라 불리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원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가장 널리 그리고 오래 받아들여진 이론 중 하나는, 말 그대로 저음이 진짜 저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미-쏠-도라는 화음이 있을 때, 여기서 미가 비록 가장 낮은 음이기는 하나, 사실은 도를 근음으로 하여 아래로 쌓아져 내려간 것이기 때문에, 미는 진짜 베이쓰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다른 사람들은 근음을 중복하여 베이쓰에 깔아, 사성 화음 도-미-쏠-도를 만들어 놓고 볼 때, 낮은 도를 포-부르동이라 부릅니다. 왜냐면 비록 베이쓰의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역시 쏘프라노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진짜 저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외에도 높은 도를 포-부르동 성부라 부르는 학자들도 있고, 심지어 쏠, 즉 중간 성부를 포-부르동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며, faux-bourdon 이란 말이 불어로 « 가짜 저음 » 이란 뜻이 아니라, 영어의 faburden 으로부터 왔다고 믿는 사람들, 또 영어의 faburden 이 애초에 불어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이론 등등, 여러 논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펠 (Willi Appel) 이 결론을 내렸듯이, 결국 6도 병행화음에 불과한, 별것 아닌 걸 가지고 벌인 이 모든 논쟁은 별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그 어원과 기원이 무엇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역사적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기록은 프랑쓰의 작곡가 기욤 뒤파이 (Guillaume Dufay) 가 1428년경 작곡한 성 쟈꼽의 미사 (Missa Sancti Jacobi) 중 « 영성체송 (Communion) » 에서 확인됩니다. 그 후 이 작법은 독일에서는 Faberdon, 에스빠냐에서는 fabordón, 이딸리아에서는 falsobordone 라는 이름으로, 주로 르네썽쓰 기간 동안 유행하였습니다.

mardi 7 août 2007

위선자들 (hypocrites)

성녀 니뚜슈 같은 사람들을 hypocrite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고대그리쓰어 hupocritês 로부터 왔는데, 애초에 이 말은 « 배우 » 라는 뜻이었습니다.

위선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 중에 sainte nitouche 외에도, faux comme un jeton (쥬똥처럼 거짓된)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쥬똥은 카드 놀이 등에서 진짜 돈 대신 사용되는 동전 모양의 딱지로, 실제 가치는 없는 돈이지요. 따라서 faux comme un jeton 은 « 아무런 가치가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위선적인 » 사람들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이 말을 줄여서, 그리고 명사화시켜, faux jeton (가짜 쥬똥, 위선자) 이라고도 하는데, 어찌보면 이것은 중복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jeton 이라는 것이 « 가짜 돈 » 이라는 뜻이니까요.

faux jeton 과 비슷한 구성과 비슷한 뜻을 지닌 표현으로, faux cul 가 있습니다. cul 는 « 엉덩이 » 라는 뜻이므로, 이 말을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 가짜 엉덩이 » 이지요. 포 뀌라는 것은 옛날에 실제로 사용되었던 물건으로, 여자들이 엉덩이의 모습을 볼록하게 드러내고 옷 맵시를 살리기 위해, 치마 속에 착용했던 의상 소품입니다. 포 뀌를 착용한 여자들의 모습을 보려면, 시카고 미술관 (Art Institue of Chicago) 에 보관되어 있는 죠르쥬 쓰라 (Georges Seurat) 의 유명한 그림, 그렁드 잣 섬의 어느 일요일 오후 (Un dimanche après-midi à l'Île de la Grande Jatte) 를 보세요. 시카고까지 갈 수 없는 분들은 여기로 !

오늘날 faux cul 의 원의미는 거의 완전히 잊혀졌으며, 일상 생활에서 faux cul 라고 하면 « 위선자 » 를 가리킵니다. 포 뀌를 착용함으로써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기 때문이겠지요. 실제로 매우 자주 듣게 되는 표현이긴 하지만, faux jeton 보다 훨씬 저속한 표현이므로, 조심해서 사용해야합니다.

faux derche 라는 표현도 역시 « 위선자 » 를 지칭합니다. derchederrière (엉덩이) 를 줄인 속어로, 역시나 « 가짜 엉덩이 » 라는 뜻이지요. 이 말은 필경 faux cul 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lundi 6 août 2007

성녀 니뚜슈 (sainte nitouche)

성 글랑글랑과 마찬가지로, 성녀 니뚜슈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숙어적 표현을 의인화시킨 것입니다. 불어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nitouche 가 n'y touche 라는 문장을 살짝 변형시킨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뜻 : 거기에 (y) 손대지 (touche) 않는 (n'). "거기" 란 남자의 몸을 암묵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sainte nitouche 를 중립적으로 해석하면, "남자를 멀리하는 성녀" 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마치 성녀이기라도 하듯이 (사실은 아니면서^^), 남자와 손가락만 살짝 스쳐도 큰 봉변을 당한 양 호들갑을 떠는 여자들을 놀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말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오늘날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에게도 그대로 쓰입니다. Il fait la sainte nitouche = 그 남자는 순진한 척 한다 ; Ne fais la sainte nitouche = 얌전한 척 하지마, 내숭 떨지 마.

dimanche 5 août 2007

성 글랑글랑 (Saint-Glinglin)

프랑쓰에서 비교적 자주 쓰이는 숙어 중에 la saint-Glinglin 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 성 글랑글랑의 축일 » 이라는 뜻인데, 얼마전 설명한 바 있듯이, 유럽의 천주교 전통의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성인들의 이름으로 날짜를 말하는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 Qu'est-ce que tu fais à la saint-Sylvestre ? » (너 성 씰베스트르의 축일날 뭐할 거니 ?) 라는 질문은 « 12월 31일날 뭐 할거니 ? » 또는 더 넓은 의미에서, « 연말에 뭐 할거니 ? » 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성 글랑글랑의 축일은 언제 ? 글랑글랑이라는 이름의 성인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이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은 없습니다. glinglin 이라는 말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종소리의 의성어입니다 (우리말 뎅그렁그렁). 그리고 saint 도 원래는 sein 또는 seing 이라 썼구요. 이 말은 옛 불어에서 « 종 » (cloche) 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즉 애초에 sein(g) glinglin 이라는 표현은 « 글랑글랑 거리며 울리는 종 » 이라는 뜻이었는데, 종이 교회와 연관이 깊고, 교회와 성인들이 연관이 깊고, 성인들의 이름과 달력이 연관이 깊다 보니, 자연스레 혼돈이 일어났습니다. 또는 동음이의어라는 점을 이용하여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말장난을 한 것이 널리 퍼진 것일 수도 있겠지요.

결론으로, 이 표현의 뜻은 « 결코, 절대, 영원히 오지 않는 날 » 입니다. 예를 들어, « 너 돈 언제 갚을래 ? » 그랬을 때, « À la saint-Glinglin » 이라고 답한다면, 갚지 않겠다거나 또는 도무지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또 attendre la saint-Glinglin 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한없이 기다린다는 말이지요.

jeudi 2 août 2007

성녀 쟌 다르크 (Sainte Jeanne d'Arc)

프랑쓰의 역사와 관련된 성인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중 하나는 바로 성녀 쟌 다르크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백년 전쟁 후반기 무렵, 평범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이 시골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프랑쓰를 구하라는 하늘의 목소리를 여러 차례 듣고는 혜성처럼 나타나 전쟁의 판도를 뒤집어 엎었죠.

그녀가 실제로 천사와 성인들의 목소리를 들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여러 사건들이 많은 증인들 앞에서 행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그녀가 처음 프랑쓰의 왕 샤를 7세 (Charles VII) 를 만나러 왔을 때, 궁정에서는 그녀를 시험해 보고자, 가짜 왕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쟌은 곧 그가 가짜임을 알아차렸을 뿐 아니라, 군중 틈에 변장하고 숨어 있던 진짜 왕을 대번에 발견했다고 합니다. 또, 쟌의 첫번째 전투는 오를레엉 (Orléans) 에서였는데, 아무런 군사적 교육을 받은 적이 없던 이 열일곱살의 아가씨는 일곱달 이상 포위되어 있던 오를레엉을 7일 만에 해방시켰습니다. 그 후 그녀는 지휘하는 전투마다 승승장구하여, 샤를 7세를 랑쓰 (Reims) 까지 수위해 가, 프랑쓰의 왕으로 축성시키는데 성공하지요. 당시 프랑쓰는 수도를 포함하여 북부 절반을 영국군에게 빼앗긴 상태였으며, 랑쓰 역시 적군의 손아귀에 있었기에, 샤를 7세는 7년이 지나도록 축성을 받지 못한 채로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왕이 아니라 자주 도팡이라 불렸습니다.) 쟌은 오를레엉의 승리와 랑쓰의 축성을 비롯하여, 자신의 앞날의 주요 사건들을 미리 예견했으며, 자신이 포로로 잡힐 날짜와 장소 역시 미리 예고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이 정말 그녀가 하늘이 보낸 사람인 탓인지, 순전히 우연의 일치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지만, 그녀의 용기와 자신감,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신념은 상당히 감동적인 데가 있습니다. 난 열 일곱 살에 뭘했나 생각해 보면, 참...

쟌 다르크가 활동한 기간은 총 1년 남짓 (1429년 5월-1430년 5월) 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백년 전쟁은 그녀가 영국군에 의해 화형당한 (1431년 5월 29일) 후로도, 이십여년간 더 지속되지만, 쟌 다르크에 의해 사기를 얻은 프랑쓰군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하여, 잃었던 땅의 거의 전부를 되찾았습니다.

따라서 쟌 다르크는 프랑쓰에서 매우 중요하고 « 인기있는 »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신비스러운 삶과, 프랑쓰를 구했지만 프랑쓰로부터 버림받은 그녀의 극적인 운명 역시 많은 관심을 일으키는데 한 몫 했겠지요 ? 쟌 다르크의 삶의 무대가 되었던 주요 장소들, 동레미, 오를레엉, 빠떼 (Patay), 랑쓰, 루엉 (Rouen) 등등은 물론,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라도, 프랑쓰 도처에는 그녀를 기리는 광장, 길, 동상 등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또한 바띠껑 (Vatican) 이 그녀를 성인으로 인정하고 나서는, 그녀에게 바쳐진 성당들이 거의 각 도시마다 하나씩은 생겨났고, 그렇지 않은 성당들이라도 반드시 쟌 다르크의 동상이나 그림 한 점 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성모 마리아 (Vierge Marie) 와 대천사 미꺄엘 (Archange saint Michel) 과 함께 프랑쓰 전체의 수호 성인이기도 합니다.

빠리 1구, 성-으스따슈 (Saint-Eustache) 성당의 쟌 다르크 동상

빠리 8구, 마들렌 (Madeleine) 성당의 쟌 다르크

루브르 궁과 뛰일르리 정원 사이에 위치한
금으로 떡칠^^을 한 쟌 다르크 동상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숭배가 지나치다 못해 왜곡되어, 쟌 다르크는 오늘날 프랑쓰 극우파 (FN) 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극우파들은 매년 5월, 빠리의 루브르 앞 쟌 다르크의 동상 앞 (윗사진) 에 모여, 꽃을 헌사하고, 무릎 꿇고 참배하며, 쟌 다르크의 정신을 이어받아, 외국인들의 손에서 프랑쓰를 구하겠다는 맹세를 다집니다.

하지만 쟌 다르크를 국민적 영웅으로 보는 시각은 19세기 이후로 생겨난 개념으로, 정작 중세 사람들은 백년이 넘도록 전쟁을 하면서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습니다. 백년 전쟁 훨씬 이전부터 영국의 왕과 귀족들은 프랑쓰 내부에 합법적으로 물려받은 영토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영국 왕실과 프랑쓰 왕실은 수많은 결혼을 통하여 거의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고, 부르고뉴파는 비록 프랑쓰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지지하는데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프랑쓰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 (Isabeau de Bavière) 는 친아들 샤를 7세 대신 사위인 영국왕 헨리 5세 (Henry V) 가 프랑쓰의 왕위를 물려받는 조약을 맺기도 했습니다 (traité de Troyes, 1420).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나라에서는 한 언어, 즉 불어를 사용했지요.

하지만 백년 전쟁 이후로 국민성이라는 개념이 두 나라에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며, 영국에서 불어의 공식적인 사용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같은 기간 동안이었습니다.

mercredi 1 août 2007

성 루이 (Saint Louis = Louis IX)

끌로비쓰의 먼 후계자 중 한 명인 루이 9세 (1214-1226-1270) 는 역대 프랑쓰의 왕 중 유일하게 성인이 된 사람입니다. 루이 8세블렁슈 드 꺄스띠으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매우 신심이 깊고 정직한 성격을 지녔다고 전해지며, 정의감에 매우 민감하여, 프랑쓰 법조 체계의 기반을 다진 왕이기도 합니다. 그의 통치기간 중 프랑쓰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매우 안정되고 화려한 시기를 살았고, 루이 9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현명한 왕으로 통하여, 여러 나라의 왕들이 외교적인 문제의 판결을 그에게 의뢰하곤 했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업적이 많지만, 종교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는, 두 번의 십자군 전쟁 (croisade) 이 있습니다. 전쟁을 과연 업적이라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루이 9세 또는 성 루이는 7차 (1248-1254) 와 8차 (1270) 십자군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그가 목숨을 잃은 것도 8차 십자군 전쟁 중 뛰니쓰 (Tunis) 에서였습니다. 성 루이의 축일은 그가 죽은 1270년 8월 25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8월 25일 지냅니다.

그는 또한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인 빠리의 쌍뜨-샤뺄 (Sainte-Chapelle) 을 건축하도록 하였습니다 (1248년 완성). 벽이나 기둥이 전혀 없이 사방이 드높은 색유리로 둘러싸인 이 성당은 직접 방문해 보지 않고는 그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경험하기 힘듭니다. 이 성당은 특별한 의도로 건축되었는데, 즉 루이 9세가 구입한 여러 종류의 성유물들 (Saintes Reliques) 을 보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루이 9세는 우선 1238년에 베네치아로부터 진짜 가시관 (Sainte Couronne) 을 사들입니다. 다음으로는 진짜 십자가 (Sainte Croix) 의 한 조각,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창의 끝 (Sainte Lance),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 (Saint Sang),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얼굴을 적시는데 사용되었다는 해면 (Sainte Éponge), 등등을 차례차례 수집했습니다. 쌍뜨-샤뺄은 결국 이 모든 보물들을 보관하기 위한 보석함이었던 것이지요. 성유물들의 대부분은 프랑쓰 혁명 중 파괴되었지만, 종교적 의미를 떠나, 문화적,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몇몇 유물은 프랑쓰 국립 도서관에 한동안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빠리의 주교좌 성당노트르-담 (Notre-Dame) 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13세기 이후로 거의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성유물은 가시관으로서, 여전히 노트르-담에서 볼 수는 있되, 한 달에 한 번씩만 일반에게 공개됩니다.

Sainte-Chapelle


쌍뜨-샤뺄이 위치한 씨떼 섬 (île de la Cité) 바로 옆에는 쌍-루이 섬 (île Saint-Louis) 이 있는데, 이 섬의 이름이 루이 9세를 기념하기 위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겠죠 ? 그리고 또 미국의 도시 쎄인트 루이쓰 (Saint Louis, Missouri) 역시 성 루이의 이름을 기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애초에 이 도시가 프랑쓰인들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프랑쓰인들이 발을 들여 놓은 꺄나다, 쎄네걀 (Sénégal), 과들룹 (Guadeloupe), 레위니옹 (Réunion) 등등, 세계 곳곳, 여기저기에는 쌍-루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