쒸에드 출신이면서 프랑쓰 왕실을 위해 오래 일했던 페르쎈과는 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이 있습니다. 졍-바띠스뜨 베르나돗 (Jean-Baptiste Bernadotte, 1763-1844) 이란 사람은 쒸에드로부터는 머나먼, 프랑쓰에서도 매우 남쪽인, 에스빠냐 국경 근처의 뽀 (Pau) 에서 태어났습니다. 군인의 길을 택한 그는 차차 경력을 쌓아, 나뽈레옹 보나빠르뜨 (Napoléon Bonaparte) 수하의 장군이 되었으며, 나뽈레옹의 첫 약혼녀였지만 그로부터 버림받은 데지레 끌라리 (Désirée Clary) 와 결혼하였습니다. 한편 데지레의 언니인 쥘리 끌라리 (Julie Clary) 는 나뽈레옹의 형인 죠제프 보나빠르뜨 (Joseph Bonaparte) 와 결혼하였으므로, 졍-바띠스뜨 베르나돗은 이래저래 나뽈레옹의 측근이 되었습니다.
나뽈레옹이 황제가 되고 나서 베르나돗은 여러 칭호와 관직을 얻었는데, 1808년에는 한자 동맹 도시들 (villes hanséantiques) 의 총독 (gouverneur) 으로 임명됩니다. 이때 한자는 쒸에드와 전쟁 중이었는데, 쒸에드가 더이상 프랑쓰에 적대적이 아니라고 판단한 베르나돗은 곧 공격을 멈춥니다. 이 평화적인 판단 덕에 베르나돗은 쒸에드 국민들 사이에 많은 호감을 얻게 되었지요.
한편 쒸에드의 왕 샤를 13세는 나이가 많고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단마크의 왕자 크리스치엉-오귀스뜨 (Christian-Auguste de Holstein-Sonderbourg-Augustenbourg) 를 양자로 맞이합니다. 유럽 역사에는 이렇게 다른 나라, 또는 다른 가문의 왕자를 초청해서 다시 새로운 왕조를 연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데 왕위계승자로 지목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왕자가 갑자기 죽습니다. 부검 결과 뇌혈증으로 밝혀졌는데, 쒸에드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쒸에드의 왕위를 탐낸 페르쎈이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결과 페르쎈은 1810년 6월 20일 시민들에 의하여 길거리 한복판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왕위계승자를 잃은 쒸에드는 새로운 사람을 찾아야 했는데, 이 때 바로 쒸에드 국민들 사이에 인기가 많던 졍-바띠스뜨 베르나돗이 뽑힙니다 (1810년 8월 20일).
그가 이 자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프랑쓰 측으로부터는 나뽈레옹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쒸에드 측에서는 그가 천주교를 버리고 개신교로 개종하길 요구했습니다.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개종했고, 나뽈레옹 역시 자신의 부하이자 친척이 쒸에드의 왕이 되면 프랑쓰에 이로울 것이라 생각하여 기꺼이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쒸에드의 왕세자가 되고 난 베르나돗은 이제는 자기 나라가 된 쒸에드를 잘 살게 하기 위해, 지나치게 프랑쓰의 이익만을 위주로 하는 나뽈레옹의 정치에 맞섰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가 1818년 쒸에드와 노르베쥬의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을 때, 나뽈레옹은 이미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쎄인트-헬레나 섬에 유배중이었습니다.
쒸에드 왕으로서 그의 이름은 샤를 14세 졍 (Charles XIV Jean, ou en suédois, Karl XIV Johan) 이고, 노르베쥬 왕으로는 샤를 3세 졍입니다. 그의 후손들은 노르베쥬가 분리되어 나간 1905년까지는 쒸에드와 노르베쥬 두 왕국의, 그 이후로 지금까지는 쒸에드의 왕위를 잇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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