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edi 16 juin 2007

줄초상 (hécatombe)

십년 이상의 전쟁 끝에 마침내 에스빠냐에 부르봉 왕조를 정착시키고 나자, 정작 프랑쓰 왕실에는 왕손이 모자라는 위험이 닥칩니다. 프랑쓰에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 준 비야비시오싸 (Villaviciosa) 전투가 열렸던 1710년 12월의 프랑쓰 왕실의 상황을 보면, 프랑쓰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세대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

1. 왕 루이 14세 (당시 나이 72세) ;
2. 그의 외아들 그렁 도팡 루이 (49세) ;
3. 그렁 도팡 루이의 세 아들 :
  • 루이, 부르고뉴 공작 (28세) ;
  • 필립 (27세). 공식적으로는 1700년부터, 실질적으로는 1710년부터 에스빠냐의 왕 필립 5세 ;
  • 샤를, 베리 공작 (24세) ;
4. 부르고뉴 공작 루이와 마리-아델라이드 드 싸브와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 :
  • 루이, 브르따뉴 공작 (4세) ;
  • 루이, 엉쥬 공작 (10개월). 훗날의 루이 15세.
따라서 프랑쓰 내에서 왕위 계승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너무 바글바글해서 문제라면 모를까. 특히 그렁 도팡 루이는, 도팡으로 임명된지 오십여년이 가까와 오도록 여전히 도팡이었으므로, 지칠대로 지쳤죠. 그는 칠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활동적인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어 곧장 왕이 되고 싶어하는 젊은 아들 부르고뉴 공작, 그리고 벌써 에스빠냐의 왕이 된 둘째 아들 필립 5세 틈에서 많은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해 봄, 그렁 도팡 루이가 천연두에 걸려, 어떻게 손 써 볼 틈도 없이 갑자기 죽습니다 (1711년 4월 14일). 그의 부인이었던 마리-안 드 바비에르는 이미 이십여년 전에 벌써 죽었구요.

이것은 당연히 슬픈 일이었지만,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왕위를 이어갈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니까요. 그래서 그의 첫째 아들 부르고뉴 공작 루이가 도팡으로, 그의 부인 마리-아델라이드가 도핀으로 임명됩니다. 그런데 일 년이 채 못되, 1712년 2월 12일, 도핀이 숨을 거두고, 그녀를 몹시 사랑했던 도팡 역시 6 일 뒤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3월 8일에는 이 부부의 첫아들, 브르따뉴 공작 루이가, 도팡으로 임명되기가 무섭게, 목숨을 잃습니다. 엄마, 아빠, 아들의 연달은 죽음은 독살설을 돌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사실은 홍역이었습니다. 엉쥬 공작 루이 역시 같은 병에 걸렸었지만, 궁정의사들이 모두들 형을 치료하는데 매달려 있는 동안, 혼자 저절로 나았습니다. 그리고 1714년 5월 4일에는 베리 공작 샤를 마저 사냥 중 사고로 죽고 맙니다.

1710년까지만 해도 왕자가 너무 많아서 탈이었는데, 1714년에는 루이 14세를 이어갈 유일한 후손이라고는 네 살바기 증손자 루이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유아사망률을 볼 때 얘라고 해서 완전히 안전한 것도 아니었죠. 얘마저 죽고 나면 오히려 다시 에스빠냐의 필립 5세를 도로 불러와야 할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아이는 이듬해 9월 1일, 루이 14세가 77세의 나이로 죽자, 다섯 살의 나이에 루이 15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쓰의 왕이 되고, 증조 할아버지 못지 않게 장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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