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쓰가 미국의 독립을 도왔다고 해서 미국의 많은 지명들이 프랑쓰에 경의를 표하고는 있지만, 사실 프랑쓰가 그렇게 한 것은 순전히 영국에 대한 경쟁심 때문이었고, 그 이전에는 프랑쓰도 미국의 식민지화에, 또는 좋게 말하여, 개척에 활발하게 참여했었지요. 사실 알고 보면, 진짜 미국땅을 발견한 것은 졍 드 베라잔 (Jean de Verrazane, 1481 ? - 1528) 의 지휘 하에 1524년에 미국에 도착한 프랑쓰 사람들이었습니다.
졍 드 베라잔, 또는 죠반니 다 베라짜노 (Giovanni da Verrazano ou Verrazzano) 는 이딸리아 출신의 항해사이지만, 일찍부터 프랑쓰에 정착해서 살았고, 최근 역사가들에 의하면 피렌체는 커녕, 리용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는 프랑쓰의 왕, 프렁쓰와 1세 (François Ier) 를 위해 일했는데 (레오나르 드 방씨처럼), 1523년, 그로부터 아시아로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라는 명을 받고, 다음해 미국 동부 해안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미대륙의 발견과 탐험은 이미 여러해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크리스또프 꼴롱 (Christophe Colomb 또는 Cristoforo Colombo 또는 Cristobal Colon) 의 발견이 엉띠으 제도 (Antilles) 와 남미 대륙에, 졍 꺄보 (Jean Cabot 또는 Giovanni Caboto 또는 John Cabot) 의 발견이 현재의 꺄나다 동부에 한정되었으므로, 졍 드 베라잔은 역사상 최초로 실제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첫 유럽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현재 미국의 남 꺄롤린 (Caroline du Sud ou South Carolina) 주부터 멘 (Maine) 주까지, 즉 사실상 동부 해안 전체를 탐험한 후, 프렁쓰와 1세의 이름을 따서 이 지역을 Francesca 라 명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현재의 뉴욕을 Terre d'Angoulême (엉굴렘의 땅) 이라 칭하였습니다. 이 역시 프렁쓰와 1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가 왕이 되기전까지의 공식 칭호가 엉굴렘 백작 (comte d'Angoulême) 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렁쓰와 덩굴렘 (François d'Angoulême) 은 원래는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으나, 루이 12세 (Louis XII) 에게 딸만 둘이 있었던 관계로, 그리고 프랑쓰는 쌀릭법의 적용을 받는 나라이므로,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인 프렁쓰와가 도팡으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됨으로써 그는 발르와-엉굴렘 (les Valois-Angoulême) 이라 불리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습니다. 따라서 엉굴렘은 프렁쓰와 1세에게 매우 소중한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떼르 덩굴렘은 뒤이어 Nouvelle-Angoulême (새 엉굴렘) 이라고 잠시 불리웠으나, 17세기에 네덜란드인이 정착하면서 Nieuw Amsterdam (새 암스떼르담) 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영국인들이 네덜란드인을 몰아낸 후 New York (새 욕) 으로 이름이 다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베라잔이 미국 동부에 준 명칭들은 모두 잊혀졌고, 다만, 브루클린과 스테이튼 아일랜드를 잊는 거대한 다리에 뉴욕의 첫발견자를 기념하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Verrazano-Narrows 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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