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di 2 octobre 2007

벨리니 (Vincenzo Bellini)

노르마의 작곡가 빈첸쪼 벨리니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별 관심이 없었는데, 알고보니 몇몇 놀라운 점들이 눈에 띕니다 :

1. 우선 매우 짧은 삶을 살았습니다. 1801년에 태어나서 1835년에 죽었으니 서른 네 해 밖에는 살지 못했네요.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벨리니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명성은 1827년 이후로 라 스깔라 (La Sacala) 를 위해 오뻬라들을 쓰면서 생겨났으니, 그의 본격적인 활동 기간은 채 십 년이 못됩니다. 이 짧은 기간동안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누렸습니다.

2. 매우 의외롭게도, 벨리니는 퓌또 (Puteaux) 에서 죽었습니다. 퓌또는 빠리 서쪽의 볼품없는 변두리 도시인데, 국제적으로 유명한 오뻬라 작곡가가 왜 젊은 나이에 여기에 와서 죽었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고 보니 별 특별한 이유는 없고, 벨리니의 친구였던 한 영국인 은행가가 퓌또에 있는 자기 별장을 빌려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퓌또에 별장을 사는 부유한 외국인이 있을까 몹시 의심스럽지만, 이백년 전에는 상황이 달랐나 봅니다. 사실 그 때 퓌또는 한적한 시골이었던 것이지요. 벨리니는 빠리 중심가에 자기 아파트 (appartement) 가 있긴 했지만 너무 좁아서 항상 불만이었고, 또 자주 장이 아픈 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휴양도 할 겸 퓌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여기서 그의 마지막 오뻬라 청교도들 (I Puritani) 을 작곡한 후 죽었습니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는데, 로씨니 (Rossini) 의 요청으로 해부를 해 본 결과 장에 구멍이 나 있었다고 합니다.

3. 벨리니는 그의 짧았던 일생 내내 피해망상증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마지막 수년간은 로씨니와 도니제띠에 대한 질투로 괴로와 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선배격인 로씨니에 대해서는 덜했지만, 이딸리아에서나 프랑쓰에서나 그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도니제띠를 향한 벨리니의 증오는 거의 광적이었다고 합니다. 설사 그의 작품이 도니제띠보다 더 좋은 평을 받고 더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을 때도 벨리니는 전세계가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는 망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빠리 시절 동안 벨리니를 자주 만났던 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 는 벨리니를 « 구두를 신은 한숨 (un soupir en escarpins) » 이라고 묘사했습니다. 한숨 쉬느라고 바빠서 벨리니는 결국 인기와 명예를 별로 행복하게 누리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그의 장에 구멍이 난 게 정신적인 고민과 완전히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Moralité = Vivons heureux !

Portrait de Bellini, attribué à Giuseppe Cammarano, vers 1826.
Naples, Museo di San Martino

2 commentaires:

Anonyme a dit…

앗, 돌아온 주인장. 반가워.
그러게...그렇게 조금 살다갔는데도
그렇게 유명하다니~
나이만 먹고 있는 독자가---

ange dubitatif a dit…

앗, 돌아온 독자. 반가워요. 돌아오다뇨 ? 저 아무 데도 안 갔어요. 역시 게으름 부리면서 나이만 먹느라 바빠서 그랬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