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5 novembre 2010

렁발 공주 (Princesse de Lamballe)

뽈리냑 부인이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의 관심을 독차지하기 전에 왕비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렁발 공주였습니다. 렁발 공주는 뽈리냑 부인보다 훨씬 지체 높은 귀부인이었으며, 뽈리냑 부인과는 달리 전혀 왕비의 권력을 악용하지 않았고, 모두가 왕가를 버린 뒤에도 마지막까지 왕비의 곁에 남아 있었으며, 결국에는 순전히 왕비의 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처참한 죽음을 당한, 그야말로 진정한 친구라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 « 렁발 공주 » 라 불리는 그녀의 본래 이름은 마리-떼레즈였으며, 싸브와-꺄리녕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Marie-Thérèse de Savoie-Carignan). 싸브와-꺄리녕 가문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문인 싸브와 가문의 한 일파로써, 당시에는 까리냐노 (Carignano) 라는 작은 공국을 다스렸으나, 훗날 이딸리아가 통일된 후, 이딸리아 왕들은 모두 이 가문에서 배출됩니다. 마리-떼레즈는 까리냐노의 왕자 루이-빅또르 (Louis-Victor) 의 딸로 1749년 9월 8일에 또리노 (Torino) 에서 태어났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 같은 날 빠리에서는 뽈리냑 부인이 태어났습니다. 즉, 마리-엉뜨와넷이 가장 사랑했던 두 친구는 생년월일이 같습니다.

그보다 거의 정확하게 2년 전, 즉 1747년 9월 6일에는 빠리에서 루이-알렉썽드르 드 부르봉 (Louis-Alexandre de Bourbon) 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루이 14세가 몽떼스뻥 부인 (Madame de Montespan) 으로부터 얻은 자식의 후손으로, 혼외 자식, 또는 우리 나라 식으로 치자면, 후궁의 태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르봉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왕자의 칭호를 받았으며, 브르따뉴 (Bretagne) 지방에 있는 도시 렁발 (Lamballe) 을 영지로 받아, 렁발 왕자 (Prince de Lamballe) 라 불렸습니다. 바로 이 사람과 1767년 결혼함으로써 꺄리녕 공주 (Principessa di Carignano) 는 렁발 공주 (Princesse de Lamballe) 가 된 것이지요.

이렇게 이중으로 공주의 자격을 지니기는 하였지만, 렁발 부인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던 렁발 왕자는 결혼한 지 겨우 1년 만에 죽고 말았으며, 그것도 다른 여자로부터 얻은 성병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렁발 공주는 19살에 과부가 되었지만, 착하고 온화한 성격을 지녔던 그녀는 이후로 시아버지를 모시며 자선 사업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770년 프랑쓰의 도팡 (dauphin) 에게로 시집 온 마리-엉뜨와넷을 만나게 되지요. 당시 렁발 공주는 21살, 도핀 (dauphine) 은 15살이었습니다. 갑자기 외국의 낯선 환경에서 살게된 어린 세자빈은 역시 외국에서 프랑쓰로 시집 온 렁발 공주에게서 친언니의 따뜻함을 느끼고, 두 사람은 곧 둘도 없는 사이가 됩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약 5년 정도 지속되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마리-엉뜨와넷은 렁발 공주에게서 싫증을 느낍니다. 물론 그녀에 대한 우정어린 마음은 기본적으로 지속되었지만, 나이 어린 세자빈에게 렁발 공주는 지나치게 순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경박하기로 유명했던 마리-엉뜨와넷은 더 재미나고 자극적인 것을 원했지요. 마침내 프랑쓰의 왕비가 되자, 마리-엉뜨와넷은 렁발 공주를 왕비전의 총감독 (surintendante de la maison de la reine) 으로 임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높은 직책이었고, 매우 많은 급여를 받는 지위였으며, 왕비의 모든 생활을 총괄하는 명예로운 자리였지만, 사실상 이 때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집니다. 대신 왕비는 뽈리냑 부인과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잘 알려진대로 뽈리냑 부인은 철없는 왕비의 즉각적인 즐거움만 부추기다가 오히려 그녀에게 큰 해만 입히고, 혁명이 일어나자 왕비를 두고 외국으로 도주합니다. 하지만 렁발 공주는 오히려 이 때부터 더욱 왕비 곁에 가까이 머물렀으며, 1789년 10월 6일, 왕실이 빠리로 끌려오게 되었을 때, 자진하여 왕가를 따라 함께 뛰일르리 (Tuileries) 로 옵니다.

뛰일르리에 갇혀 살았던 3여년간 왕비와 공주는 다시 예전의 우정을 되새기게 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더욱 우정을 굳혔습니다. 하지만 1791년 6월 20일, 왕실이 뛰일르리를 탈출했을 때, 렁발 공주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믿지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녀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마리-엉뜨와넷은 렁발 공주를 탈출 계획에서 멀리하려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에 의하면, 렁발 공주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꼼짝 못하고 갇혀 살아야 했던 왕비에 비해, 렁발 공주는 자유롭게 궁을 드나들 수도, 외국으로 여행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왕비의 심부름을 했습니다. 비밀리에 행해진 심부름이었기데 그 정확한 내용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탈출 준비와 연관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탈출에 실패한 후, 더욱 삼엄한 감시를 받는 왕비의 수족 역할을 렁발 공주가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번번이 왕비는 렁발 공주를 외국에 심부름 보내면서 돌아오지 말 것을 명했지만, 공주는 위험에 처해 있는 친구를 버리지 못해, 매번 빠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왕실이 겪는 모든 치욕을 함께 겪었지요.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특히 1792년 8월 10일 — 뛰일르리를 침입한 폭도들을 피하기 위해, 왕이 국회에 목숨을 보호해 달라고 무릎꿇어야 했던 날, 렁발 공주는 왕가와 함께했으며, 국회가 내어 준, 지붕이 낮은 서기실에서 3일을 왕가와 함께 보냅니다. 이 사건으로 국회는 왕권을 정지시키고, 8월 13일, 왕가를 폭동으로부터 보호한다는 핑계 하에 떵쁠 (Temple) 의 한 탑에 가둡니다. 이 때도 렁발 부인은 왕실을 따릅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8월 19일 밤에 꼬뮌 드 빠리 (Commune de Paris) 는 렁발 부인을 체포하여 포르쓰 감옥 (prison de la Force) 에 따로 가둡니다. 애초에 렁발 부인을 비롯하여 몇몇 시종을 허락한 것은 왕가를 잘 대접한다는 듯한 인상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을 뿐, 왕가의 운명을 손에 쥔 꼬뮌 드 빠리는 전혀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 의도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렁발 공주는 1792 년 8월의 마지막 열흘을 따로 격리된 채 보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가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날들이었죠. 9월초부터 빠리에는 훗날 9월 학살 (massacres de septembre) 이라 불리게 될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시민들이 빠리의 여러 감옥들을 돌며, 혁명에 비혐조적이라 여겨지는 사람들, 숭고한 혁명 정신에 흠이 될 사람들, 왕가에 우호적인 태도를 비친 사람들을 마음대로 판결하여 죽인 학살 사건이었습니다. 9월 2일부터 시작하여 때로는 5일까지, 때로는 6일이나 7일까지로 지속되었다고 보는데, 아무튼 이 며칠 동안 약 1 300 명의 죄수들이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이 때 가장 많이 죽은 사람들은 혁명 정부에 선서를 하지 않은 신부들 (prêtres réfractaires) 이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는 그다지 상관 없는 일반 범죄자들과 매춘부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뛰일르리에서 일한 적이 있었던 사람들, 근위대 병사들 등도 왕가와 친밀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으며, 감옥에 갇혔 있던 몇몇 귀족들이 특히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렁발 공주이지요.

9월 3일 아침에 포르쓰 감옥의 마당에서 그녀는 약식으로 차려진 재판대에 불려 나와 왕을 고발하라는 다그침을 받았지만, 이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녀의 머리를 망치로 여러 차례 내려쳤다고 합니다. 아마 이로 인해, 그녀는 죽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망치에 머리를 맞아 죽는 것이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그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녀가 죽었는지 아직 살아있는지 상관도 하지 않은 채, 쓰러진 그녀의 몸을 강간했으니까요. 이후, 사람들은 그녀의 몸을 난도질했고, 가슴과 성기를 도려내었으며, 몸을 갈라 심장과 창자를 꺼내어 그것을 구워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건 사람들은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시체를 창에 꽂아 마치 인형처럼 가지고 다녔으며, 목은 따로 잘라 다른 창 끝에 꽂아 기념패처럼 과시했습니다. 술에 취한 대중들은 렁발 공주의 머리를 미용사에게 가져가 새로 가발을 씌우고 화장을 시킨 후, 떵쁠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왕실이 갇혀 있던 탑 밑에서 창을 치켜 들며, 왕비로 하여금 친구의 죽은 입술에 입맞추기를 요구했습니다. 다행히 떵쁠을 지키던 시청 직원들이 미리 덧창을 닫고, 흥분한 대중들을 저지하였습니다. 덕분에 왕비는 이 광경을 직접 보는 고통은 겪지 않아도 되었지만, 바로 창문 밖에 렁발 공주의 잘려진 목과 조각난 시체가 끌려다니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정신을 잃기에 충분했습니다.

오후 다섯시 무렵까지 웅성대던 군중들은 점차 흩어졌고, 렁발 공주의 시체는 무관심하게 버려졌습니다.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쟉 쁘왕뗄 (Jacques Pointel) 이라는 한 시민이 렁발 공주의 조각난 시체들을 모아 고아들이 묻히는 무덤에 묻어 주었고, 뒤늦게 며느리의 참상을 들은 렁발 공주의 시아버지가 그녀의 시신을 가족 묘지로 이전시켰습니다. 이후로 렁발 공주는 왕정파들에 의해서 순교자로 추앙되기도 하는데, 마리-엉뜨와넷이 신이 아닌 이상, 이런 표현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렁발 공주가 친구와의 우정, 자기가 섬기던 사람에 대한 충성을 목숨을 바쳐 지킨 것은 매우 고귀한 행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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