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도니제띠의 말기는 막연하게나마 벨리니의 삶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수년에 걸쳐 빠리에 체류한 바 있던 도니제띠는 벨리니처럼 빠리에서 그의 마지막 오뻬라 동 쎄바스치앙 (Dom Sébastien) 을 완성합니다. 이 무렵 (1843년) 부터 그는 정신이상 증세를 자주 보이기 시작했는데, 결국 1845년 빠리에서 두뇌가 마비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벨리니의 경우처럼 그의 병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데, 오늘날 전문가들은 젊은 시절 앓았던 매독의 후유증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가 실제로 매독에 감염되었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가 평생 자주 앓았던 여러 병의 증세들, 그 뿐 아니라 그의 부인과 아이들에게서 드러났던 증상들을 볼 때도 매독이었을 확률이 많다고 합니다. 아무튼 도니제띠는 1846년초부터 이브리 (Ivry) 의 정신요양소에 수용됩니다. 이브리 역시 매우 황폐한 빠리 주변의 변두리 도시로서, 벨리니가 마지막 순간을 보냈던 퓌또를 생각치 않을 수 없습니다.
벨리니와 다른 점이라면, 도니제띠에게는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니제띠를 고향인 베르가모로 데려 오고 싶어했지만, 프랑쓰 의사들은 힘든 여행을 이유로 퇴원을 거부했습니다. 이딸리아 최고의 작곡가가 한낱 빠리 변두리의 요양소에 감금되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딸리아 전체는 크게 분노했지만, 프랑쓰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국제적인 명성의 작곡가가 빠리에서 죽기를 원했습니다. 프랑쓰 측에서는 심지어 경찰로 하여금 도니제띠를 치밀하게 감시하게 하였으며, 그 때문에 이 사건은 법정까지 가게 되고, 더 나아가 외교적인 줄다리기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당시 베르가모는 외스터라이히의 영토였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도니제띠의 국적은 외스터라이히였던 것이지요. 게다가 도니제띠가 이성을 잃기 전 행했던 마지막 공식 직업은 빈의 궁정 지휘자였기 때문에, 빈 측에서는 당장 외스터라이히 시민을 풀어 놓으라고 프랑쓰에 엄포했습니다. 또, 가에따노의 동생이자 역시 음악가였던 쥬제뻬 도니제띠는 오또멍 제국의 황실 음악가로 일하고 있었기에, 프랑쓰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 꽁스떵띠노쁠의 영향력도 이용하려 했습니다. 결국 나라들 사이에 공문서가 오가고, 대사가 파견되고 소환되는 등, 일련의 소란 끝에 도니제띠는 마침내 프랑쓰로부터 « 해방 » 될 수 있었습니다.
1847년 10월 6일, 베르가모에 도착한 도니제띠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보살핌 속에서 육개월을 더 살지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이듬해 4월 8일 숨을 거둡니다. 1855년에 도니제띠의 두 형제, 쥬제뻬와 프란체스꼬는 베르가모의 싼따 마리아 마죠레 대성당에 가에따노를 위한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리고 1875년에는 바로 이 기념비 밑으로 도니제띠의 유골이 이장되어 현재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싼따 마리아 마죠레 대성당 내에 세워진 도니제띠를 위한 기념비
기념비 밑, 도니제띠의 무덤
기념비 아랫단에 이딸리아 말로 쓰여져 있기를, «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을 많이 작곡한 트루바두르 가에따노 도니제띠에게 형제인 쥬제뻬와 프란체스꼬가 애정의 기억을 가지고 바친다 1855 ».
그리고 바닥에는 라띠나어로, « 가에따노 도니제띠, 여기 누워 있다 ».
1 commentaire:
형제간에 우애 있었나보다. 부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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