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리의 몽빠르나쓰가 1차대전 이후 세계적인 예술의 중심지가 되기 이전, 이미 프랑쓰 문화계에서는 빠르나쓰라는 명칭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빠르나쓰는 19세기 후반, 지나치게 감성적인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특히 시 분야에서 활발했습니다. Parnasse 라는 이름은 물론 Montparnasse 와 마찬가지 어원을 가지고 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Le Parnasse contemporain (현대의 빠르나쓰) 이라는 시집의 제목에서 왔습니다. 약 십여년에 걸쳐 (1866-1876) 모두 세 권으로 나뉘어 발표된 이 시집은 거의 육백여편에 가까운 시를 수록하고 있으며, 빠르나쓰 운동의 선구자인 떼오필 고띠에 (Théophile Gautier) 부터 시작하여, 총 99명의 시인이 참여했습니다. 이 99명의 시인을 parnassiens 이라고 칭하는데, 그 대다수는 사실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다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빠르나씨앙 중에는 르꽁뜨 들 릴 (Charles Leconte de Lisle), 프렁쓰 (Anatole France),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베를렌 (Paul Verlaine), 말라르메 (Stéphane Mallarmé) 등 매우 유명한 시인들도 있었습니다.
사람 수가 99명이나 되느니 만큼, 게다가 방금 인용한 이름들처럼, 독자적인 명성을 떨칠 만큼 개성이 뚜렷한 시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빠르나쓰 운동을 단 한 마디로 규정짓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빠르나씨앙들은 모두 지나친 낭만성을 배제하고 엄격한 형식미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들은 시의 내용이나 의미보다는 어려운 운율과 각운, 특이한 음절수를 가진 싯구와 희귀한 단어 등을 찾는 데에 몰두했으며, 고띠에가 주장한 « 예술을 위한 예술 » (l'art pour l'art) 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빠르나씨앙들에 의하면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지 다른 무엇을 위해서 소용된다면 그것은 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회 문제에 작가가 참여하거나, 예술가가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것 등에 반대했으며, 개인 감정을 드러내거나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상당히 비개성적이 되었으며, 현실을 외면하려 했기에, 자연스럽게 먼 시대, 먼 장소 (예를 들면 고대 에집트) 를 동경하거나, 아니면 때와 장소를 아예 알 수 없거나, 그런 것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는 주제 - 한마디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내용을 다룹니다. 중요한 것은 시를 읽었을 때 소리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과 조화이지요. 형식미에 치중했다는 점에서 빠르나씨앙들의 시는 상당히 음악적인 데가 있으며, 실제로 이들은 음악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예술이라고 추앙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빠르나씨앙들의 시는 번역해서 읽으면 별로 흥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다른 시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비록 르 빠르나쓰 꽁떵뽀랑에 발표된 작품은 아니지만, 그냥 맛보기로, 베를렌의 달빛의 한 구절을 감상해 보세요. 빠르나쓰 시와 비슷한 분위기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빠르나씨앙들과 모든 점에서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주장 중 마음에 드는 것 한가지는, 진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피나는 노력 끝에만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술가가 자신의 즉각적인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기만 하면 예술 작품이 된다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영감을 받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식의, 극도로 낭만적인 생각들이 퍼져 있었는데, 빠르나씨앙들은 이런 생각들에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예술도 다른 기술처럼 차근차근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며, 많은 정성과 공을 들여, 갈고 닦고, 고치고 다듬어야만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답니다.
빠르나쓰 운동은 상징주의 (symbolisme) 를 낳는데 한몫 했습니다. 비록 상징주의는 빠르나쓰가 지나치게 형식미에만 집중한다고 비난하기는 했지만, 사실 빠르나쓰와 많은 특징들을 공유합니다. 베를렌, 보들레르, 말라르메 등이 빠르나쓰앙인 동시에 상징주의 시인인 것도 그런 까닭이지요. 그리고 또다른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 랑보 (Arthur Rimbaud) 는 어린 시절 바로 르 빠르나쓰 꽁떵뽀랑을 읽고 시인이 되기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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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aires:
내 관심분야랑 관련이 있어서 다른 글보다 유심히 봤는데, 네가 정리를 잘해서, 머리에 쏙 들어오더라. 땡큐~
내가 가진 책을 뒤적여보니, 파나시안들의 시들은, 객관성을 중시하고 어려운 재료와 열심히 씨름하는 자세때문에 조각가나 건축가의 자세나 이상과도 비교된다고 나와있네. 네 글에 약간 보충~
근데, Leconte de Lisle은 왜 s가 묵음이야? 이제까지 들 릴이라고 읽는줄 몰랐다, 흑흑.
얘기 나온 김에 Barbey d'Aurevilly는 어떻게 발음해? 이 사람 이름은 늘 그림처럼 쳐다보기만 하고 발음을 못해, 에고고..(사실 내 마음대로 발음하긴 하는데...^^)
아이고, 전문가 앞에서 제가 저도 모르는 얘기를 떠벌였네요. 보충까지 해 주시니 감사.
발음 문제는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래요. 불어에서 자음은 꼭 단어 끝에서만 발음 안되는게 아니라, 단어 중간이라도 모음이 받쳐주지 않으면 발음 안될 때가 많아요, 특히 s 가. 유명한 예가 Descartes [데꺄르뜨] 잖아요. 아니면 Doisneau [드와노]. 하지만 Desnos 는 [데스노쓰].^^ 결국 고유명사는 일일이 익히는 수 밖에...
그런데 Lisle 의 경우는 사실은 일반 명사에서 왔어요. la + isle = île 의 옛 불어. 이미 불어에서 발음되지 않게 된 다음에 영어로 건너갔기 때문에, 영어에서도 s 를 발음하지 안잖아요 : isle, island. 다른 예들 : hospital, hostel, forest... 이런 단어들은 아직 s 가 발음되던 시절 영어로 건너갔기 때문에 영어에서는 여전히 다 발음되는데, 현대 불어에서는 전부 s 가 발음되지 않다가, 아예 표기에서도 사라졌어요. 대신 꼬깔 모자 (accent circonflexe) 를 씌워요 : hôpital, hôtel, forêt, île.
Leconte de Lisle 은 일반 명사라 생각하고 풀어 쓰면, le conte de l'île, 즉 « 섬의 이야기 » 라는 뜻. 이 사람이 레위니옹 섬 (L'île de la Réunion) 에서 태어나긴 했는데, 왜 이 가문이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는 더 조사를 해 봐야겠지요.
Barbey d'Aurevilly 는 [바르베 도르빌리]. 이건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데 ???
저 는 불어보다도 폴란드어에서 자음이 연속으로 나올 때 정확히 어떻게 발음되는지 궁금해요. 프랑쓰의 왕비였던 Marie Leszczynska. 프랑쓰 사람들은 대개 [레진스꺄] 라고 읽는 것 같은데, 그 [-진-] 부분의 발음이 매우 불확실.^^
전문가는...말도 안되는 소리...사실은 얘네들 뭐야, 하고 관심도 없었는데, 네가 정리해준 거 보니까, 아하 그런거구나,싶던걸...
바르베 도르빌리였군...일단, 도르빌리 이름은 프랑스어 이름치고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고, 왜 바르베라고 읽어? ey가 오이/에이 뭐 이렇게 읽히지 않나? (확인하지 않고 말하는 거임...)
너의 들 릴 설명, 고마워~ 네 설명은 늘 풍부해서 재밌더라.
"진"의 철자가 szcz라...장난 아니게 길다..많아도 한 두개만 적으면 될 것 같은데. 러시아쪽 이름은 참 발음하기도 어렵게 길더니...폴란드도 비슷한가봐.
ey 는 [에] 로 발음되는 거 맞는데요. Disney = [디스네], Mickey = [미께].
Loved reading this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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