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edi 10 janvier 2009

엉리 렁글르와 (Henri Langlois)

몽빠르나쓰 묘지의 서쪽 끝 델핀 쎄릭의 무덤에서부터 아브뉘 뒤 노르 (Avenue du Nord) 를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면, 진 쎄베르그의 무덤, 리꺄르도 므농의 무덤을 지나 엉리 렁글르와 (1914-1977) 의 무덤에 이르게 됩니다. 이 무덤은 주변의 다른 무덤들과는 달리 유리, 또는 유리를 닮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다는 특징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러 영화의 장면들이 투사되어 있지요.

Tombeau d'Henri Langlois
렁글르와의 무덤이 이렇게 꾸며진 이유는 그가 프랑쓰 씨네마떽 (Cinémathèque française) 의 창시자였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영화광이었던 그는 사비를 들여, 버려져 가고 있던 무성영화 필름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1936년 몇몇 친구들과 함께 프랑쓰 씨네마떽을 창설하였습니다. 지금도 씨네마떽은 비록 국가의 보조를 받기는 하지만, 여전히 개인 모임 형태라고 합니다. 하지만 1950년 이후로 프랑쓰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는 반드시 씨네마떽에 한 부를 기증해야 하므로, 애초에 약 150편으로 출발했던 씨네마떽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의 필름보관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프랑쓰 영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씨네마떽 측에서 사들이거나 수집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작품들로 넘쳐 납니다.

씨네마떽은 영화들을 수집할 뿐 아니라, 오래된 필름들을 복원하고, 새로운 영화의 제작도 활발히 후원하고, 소장하고 있는 영화들을 가지고 다양한 프로그람을 짜서, 쉽게 접하기 힘든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특히, 훗날 누벨 바그라고 불리게 될 감독들이 씨네마떽을 열심히 드나들며 영화를 배웠다고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에는 렁글르와 사건 (affaire Langlois) 이라는 상당히 심각한 소동이 일어났었다고 합니다. 두 달 동안 프랑쓰 영화계를 뒤흔든 이 사건은 국가가 렁글르와를 씨네마떽에서 배출시키려는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쓰의 거의 모든 영화관계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으며, 여기에 외국의 유명 감독들까지 렁글르와를 지원하였으나, 프랑쓰 정부 측은 폭력 진압으로 맞섰습니다. 결국 두 달 간의 혼란을 겪고 나서 정부가 손을 들었는데, 이 때가 바로 1968년 4월 중순이었습니다. 즉 5월 시위가 터지기 2주 전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렁글르와는 프랑쓰 씨네마떽의 총서기장 (secrétaire général) 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사실 이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해 후회의 의견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는 36년 씨네마떽의 설립 이후로 77년 사망할 때까지, 68년 2월에서 4월까지의 두 달을 제외하고는 씨네마떽의 책임자로 있었는데, 한 사람이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아무래도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겠지요. 정부가 그를 쫓아 내려 했던 것도 씨네마떽의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보조를 해 줘도 항상 빚에 허덕이고 있기에, 사람을 바꿔 보려고 생각했던 것이랍니다. 영화에 대한 렁글르와의 사랑을 아는 영화인들은 여기에 민감하게 대응했지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렁글르와는 행정적인 업무에는 실제로 매우 둔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렁글르와에 대한 비판도 꽤 있지만, 그래도 영화라면 닥치지 않고 수집하던 그의 열정만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평가입니다.

렁글르와의 무덤 위에는 샤이오 궁 (Palais de Chaillot) 의 축소판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프랑쓰 씨네마떽이 오랫동안 샤이오 궁 안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베르씨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1 commentaire:

Anonyme a 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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