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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edi 20 décembre 2008

작 드미의 무덤 (tombeau de Jacques Demy)

니끼 드 쌍-팔이 조각한 리꺄르도 므농의 무덤도 매우 눈에 띄는 무덤이기는 하나, 몽빠르나쓰 묘지에서 가장 예쁜 무덤은 롤라 (Lola), 천사의 해안 (La Baie des anges), 셰르부르의 우산들 (Les Parapluies de Cherbourg), 로슈포르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e Rochefort), 당나귀 가죽 (Peau d'âne) 등의 명작을 남긴 영화감독 작 드미의 무덤이 아닐까 합니다. 아녜쓰 바르다 (Agnès Varda) 가 꾸민 남편의 무덤은 초록색 덩굴로 뒤덥힌 무덤 자체도 단아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옆에 싱싱하게 우거진 나무와 작은 벤치가 있어 무덤답지 않은 정취가 있습니다. 빼곡히 들어찬 몽빠르나쓰 묘지에 이러한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samedi 2 août 2008

떼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

떼르트르 광장성심 성당 바로 뒤 쪽에 있으며, 성심 성당 다음으로 몽마르트르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장소인데, 도대체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힘듭니다.

tertre 라는 말은 « 언덕, 작은 산 » 을 뜻하는 일반 명사로, Place du Tertre 는 말그대로 « 언덕 위의 광장 » 이라는 뜻이지요. 산꼭대기 위의 이 작은 광장에 옛부터 식당과 찻집 등이 들어섰고, 거기 오는 손님들에게 그림을 파는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몽마르트르의 풍경이나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 파는 무명의 화가들이 활동 중이나, 떼르트르 광장은 이제 도무지 발 디딜 틈이 없는 시장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 말로는 떼르트르 광장에서 볼거리는 바로 관광객이라고 하더군요. 좋게 말하면, 활발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이지만, 아무튼 낭만적인 정취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떼르트르 광장의 한쪽 구석 (un coin de la place du Tertre)

vendredi 1 août 2008

퓌니뀔레르 (funiculaire)

몽마르트르에 오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은 퓌니뀔레르를 타는 것입니다. 퓌니뀔레르는 케이블 카의 일종인데,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케이블 카라고 부르는 것이 공중에 매달린 줄을 타고 다니는데 비해, 퓌니뀔레르는 바닥에 고정된 철도 위를 다니는 작은 기차입니다. 단 자체에 동력이나 운전대가 있는게 아니라, 줄을 당겼다 풀었다 함으로써 기차를 레일 위에서 이동시킵니다. 대부분 언덕, 산등성이 같은 비탈에 장착돼 있기 때문에, 줄을 감으면 퓌니뀔레르가 올라가고, 줄을 천천히 풀면 자체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내려가는 원리이지요. funiculaire 라는 이름도 라띠나어 funiculus, 즉 « 밧줄 » 에서 유래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밧줄보다는 철줄을 이용하지요.

퓌니뀔레르가 처음 태어난 곳은 바로 프랑쓰의 리용 (Lyon) 이었습니다 (1862년). 시내 한 복판에 산이 있는 리용은 한때 퓌니뀔레르 노선이 다섯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두 개만 활용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사라졌거나, 지하철로 변모되었습니다. 프랑쓰에는 리용, 빠리 뿐 아니라 여러 도시와 관광지에서 퓌니뀔레르를 이용하며, 프랑쓰 외에도 유럽의 도시들에는 퓌니뀔레르가 꽤 흔합니다.

이딸리아 꼬모의 퓌니뀔레르 (funiculaire de Côme, Italie)

사실 타도시들에 비해 빠리의 퓌니뀔레르는 장난감 수준이지요. 원래는 빠리의 퓌니뀔레르도 몽마르트르 아주 바닥부터 시작하여 꼭대기까지, 여러 정거장을 갖춘 긴 노선으로 만들 예정이었답니다. 또 1990년대에는 지하철 역과 곧장 이어지게 하려는 구상도 있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비용이나 기타 여러 다른 이유들 때문에 결국은 지금과 같은 짧은 길이로 남게 되었습니다 (승차시간 약 1분). 몽마르트르 주민들 중에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 이 퓌니뀔레르는 성심 성당을 찾는 관광객들이 재미로 타보는 놀이 기구인 셈입니다.

이 1분 정도를 타기 위하여 지하철이나 버쓰 표 한 장을 내야 합니다. 물론 정기권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탈 수 있지요. 퓌니뀔레르는 빠리 교통 공사 (RATP) 에서 다루고 있고, 지하철 노선의 일부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지하철 노선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빠리 지하철 노선도의 일부 (détail du plan de métro parisien)

퓌니뀔레르를 타기 싫은 사람들은 바로 옆의 층계로 걸어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모두 222개의 계단으로 구성된 이 층계는 빠리에서 가장 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빠리에서 가장 긴 계단과 그 오른편을 오르내리는 퓌니뀔레르

mercredi 30 juillet 2008

몽마르트르 (Montmartre)

몽마르트르는 빠리 북쪽의 산 이름이자, 그 산을 둘러싸고 있는 동네의 이름입니다. 사실 산 (mont) 이라기 보다는 작은 언덕 (butte, colline) 이지만, 땅이 매우 평평한 빠리에서는 어쨌거나 가장 높은 장소입니다. 물론 에펠탑 (Tour Eiffel) 이나 몽빠르나쓰 빌딩 (Tour Montparnasse) 같이, 인간이 세운 더 높은 건물들도 있지만, 자연 지형 중에서는 몽마르트르가 빠리의 최고 지점입니다. 그 정상에서부터 내려다보면 빠리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몽마르트르 정상에서 내려다 본 빠리
(vue sur Paris)

Montmartre 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빠리의 최초의 주교였던 성 드니가 3세기 무렵 이 언덕에서 순교를 당한 후 순교자의 산 (Mons martyrum)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이미 그보다 훨씬 이전 로마 시대부터 전쟁의 신 마르쓰에게 바쳐진 산 (Mons Martis) 이었다는 설입니다. 아마도 결국은 두 이름이 혼합되어 현대 불어의 Montmartre 로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몽마르트르가 빠리의 일부가 된 것은 그다지 오랜 일이 아닙니다. 1860년까지 몽마르트르는 빠리와는 별개의 독립된 도시로서, 그 때까지는 주민의 수도 적었고, 나무와 밭이 우거진 진짜 산 다운 산이었답니다. 지금은 집과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차서, 산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마르트르는 어딘가 모르게 시골스런 분위기가 납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성심 성당떼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 정도만 보고 돌아가는데, 몽마르트르를 구석구석 걸으면서 둘러보면 매력적인 장소가 정말 많습니다. 이 때,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다녀도 나쁠 것은 없으나, 사실 좋은 안내책과 지도를 가지고 산책하는 것을 권합니다. 왜냐하면 좁은 골목길, 가파른 층계, 숨겨진 정원, 유명한 예술가들의 집, 등등은 사실 쉽게 눈에 띄지 않거든요.

몽마르트르의 여기저기

그런데 몽마르트르를 처음에는 우습게 보았다가도 이렇게 걸어다녀 보면 꽤 경사가 심한 산이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면 몽마르트로뷔쓰 (Montmartrobus) 라는 버쓰를 타는 것도 좋습니다. 이 버쓰는 빠리의 일반 시내 버쓰와 똑같은데 다만 몽마르트르 산동네 만을 운행하는 노선입니다. 보통 버쓰나 지하철 타는 표를 한 장 내고 타거나, 아니면 정기권이 있는 사람들은 수십번 마음껏 탈 수 있습니다. 이 버쓰는 몽마르트르의 유명 관광지들은 물론, 꼬불꼬불하고 좁고 가파른 길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기 때문에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dimanche 27 juillet 2008

성심 대성당 (Basilique du Sacré-Cœur)

1871년의 꼬뮌시청, 뛰일르리, 벙돔 기둥 같은 빠리의 유적 여러 품이 훼손을 입은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오늘날 프랑쓰를 대변하는 유명한 기념물 하나를 더 낳는 핑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피의 주간의 학살을 통해 꼬뮌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제 3 공화국 정부는, 오늘날 생각하면 정말 믿기 힘들지만, 꼬뮌이 저지른 죄의 용서를 하늘에 빈다는 명목으로 새로운 성당 하나를 세우기로 합니다. 띠에르가 대포를 뺏기 위해 보낸 군대와 빠리 시민들이 처음 격투를 벌인 장소, 즉 꼬뮌 혁명의 시발점이 바로 몽마르트르였기 때문에, 새 성당은 몽마르트르의 정상에 짓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계획에 반대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 국회는 매우 보수적인 왕정파 의원들 위주였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엉리 드 셩보르를 왕으로 추대해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까지 했을 정도니까, 교회와 손잡고 성당 하나 새로 짓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 (1873년 7월 23일 법령)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 할 수 있지요.

새로운 성당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Sacré-Cœur) 에 바쳐지기로 기획되었으며, 건축에 드는 비용은 프랑쓰 전국민의 성금을 통해 모아졌고, 공개 경쟁을 통해 뽈 아바디 (Paul Abadie) 라는 건축가의 도안이 채택되었습니다. 1875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14년 완성된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바디는 비정땅 양식 (style byzantin) 과 로멍 양식 (style roman) 을 혼합한 중세 풍의 건물로 설계하였습니다. 그리고 건축에 사용된 돌은 빠리 남동쪽의 샤또-렁동 (Château-Landon) 이라는 마을에서부터 가져왔는데, 이 돌은 물에 젖으면 더욱더 흰색이 되는 특별한 돌이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성심 성당은 비를 맞으면 맞을 수록 더욱 더 하얗게 빛난다고 하지요. 하지만 빠리 어디서나 눈에 띄는 이 흰 색의 둥근 지붕들 때문에 성심 성당은 흔히 거대한 므랑그 (meringue) 라고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므랑그는 달걀 흰자를 부풀려서 구운 과자).

1914년 완성되었지만 1차 대전의 발발로 이 성당은 결국 1919년에야 공식적으로 축성을 받았고, 이 때 교황으로부터 바질릭 (basilique) 의 호칭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공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던 1885년부터 지금 현재까지 이 성당은 단 한 순간도 문을 닫은 적이 없으며, 밤낮으로 성체 경배가 이어지고 있답니다. 매우 놀랍지만 전 세계에서 순례 온 신자들이 릴레이 식으로 이어가며 하루 24시간씩 120년이 넘게 꼬뮌 혁명의 죄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측에서는 이제 꼬뮌 얘기는 피하는 추세이며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밤이나 낮이나 성심 성당은 기도하는 사람들, 관광하는 사람들로 항상 붐빕니다.

몽마르트르 산 위의 성심 대성당
(Basilique du Sacré-Cœur de Montmartre)

vendredi 25 juillet 2008

빠리 시청 (Hôtel de ville de Paris)

뛰일르리 궁과 비슷한 운명을 겪은 또다른 건물로 빠리 시청이 있습니다. 빠리 시청의 위치는 1357년 이후로 변함없이 그레브 광장이기는 하나,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건물은 사실 19세기 말에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1533년부터 이딸리아 건축가 보꺄도르 (Boccador) 의 설계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 수세기 동안 빠리 시청으로 쓰였으나, 1871년 피의 주간 동안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뛰일르리 궁과는 달리 빠리 시청 건물은 이듬해부터 곧 복원 공사에 들어가서, 1882년 새로이 완성되었습니다. 원래 시청과 똑 닮게 지었기 때문에, 19세기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르네썽쓰 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건물이 사라지면, 왜 시대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꼭 옛날 식으로 복원하고들 싶어하는지, 개인적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가기는 하지만, 빠리 시청은 빠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임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빠리 시청

jeudi 24 juillet 2008

뛰일르리 (Tuileries)

1871년의 꼬뮌의 진압 동안 빠리시는 많은 인명을 잃었을 뿐 아니라, 여러 유적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흔히 말하기로는, « 악독한 » 꼬뮈나르들이 스스로 빠리의 명소에 불을 지르고 폭파시켰다고 하는데, 요즘은 조금 다른 견해들도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빠리 시민군이 뛰일르리 궁이나 시청, 대법원 같은 기념비적 장소들을 방어 요지로 삼은 것은, 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런 장소들이 꼬뮌 드 빠리의 주요 행정기관이었으므로,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꼬뮈나르들에게는 당연한 의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는, 정부군이 이런 유적지들을 파괴시키면서까지 밀고 들어오지는 감히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으리라는 것이죠. 하지만 정부군은 문화 유산의 파괴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결국 시민군도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열세에 몰리다보니, 시간을 벌기 위해, 의도적인 화재를 일으키는 일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다보니 오늘날 과연 어느쪽 군대가 역사적 장소의 파괴에 더 큰, 또는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영원히 사라진 대표적인 건물이 바로 뛰일르리 궁 (Palais des Tuileries) 입니다. 뛰일르리는 옛날에 기와 (tuile) 를 굽던 장소에 지어진 궁으로, 현재의 루브르 궁과 뛰일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이 만나는 경계에, 남북으로 길게 세워졌던 건물입니다. 이 궁은 1564년, 프랑쓰의 왕비이자 섭정이었던 꺄트린 드 메디씨쓰 (Catherine de Médicis) 의 명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한 후로, 종종 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지만, 왕실이 베르싸이으로 이주한 후는 거의 버림받은 상태였습니다. 왕실이 다시 뛰일르리로 돌아온 것은 1789년 10월 6일로, 이 날 빠리의 여자들은 손에 부엌칼과 곡괭이를 들고 베르싸이으까지 찾아가서, 억지로 왕과 왕비를 빠리로 끌고 왔습니다. 이후로 뛰일르리는 체제가 무엇이든 간에 프랑쓰 정부의 중심이 됩니다.

우선 루이 16세는 비록 감시받는 상태로나마 1792년까지 뛰일르리에서 입헌왕정을 유지했으며, 그가 사형된 후로는 혁명 정부가 뛰일르리에 자리잡습니다. 나뽈레옹 역시 집정관 (consul) 시절이나 황제 (empereur) 시절이나, 뛰일르리 궁을 본거지로 삼았고, 왕정 복귀가 된 후로는 루이 16세의 두 동생,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차례차례 뛰일르리 궁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들어선 7월 왕정 (Monarchie de juillet) 의 주인공 루이-필립 역시 뛰일르리에 왕실을 차렸으며, 그 역시 밀려났을 때는 프랑쓰 최초의 대통령 (président) 으로 뽑힌 루이-나뽈레옹 보나빠르뜨가 뛰일르리를 대통령 관저로 삼았습니다. 곧이어 그가 나뽈레옹 3세로 등극하면서 뛰일르리는 나뽈레옹 1세 때처럼, 황제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제 2 제정이 무너진 후, 뛰일르리궁은 꼬뮌의 차지가 되었으며, 결국 1871년 피의 주간 때 이 궁전은 꼬뮈나르들이 저지른 화재에 의해 장장 3일간을 탔다고 합니다.

하지만 뛰일르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이 때가 아닙니다. 이 때의 화재는 나무로 장식된 뛰일르리의 내부만 태웠지, 돌로 만들어진 골격과 외부는, 그을림을 제외하고는, 거의 피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꼬뮌이 몰살된 후 제 3 공화국 정부는 뛰일르리를 재건하려는 계획도 여러번 가졌습니다. 하지만 여러번의 업치락 뒷차락 끝에 결국 1883년에 아직도 버티고 서 있던 뛰일르리 본궁을 깨끗이 철수시켰습니다.

하지만 뛰일르리를 구성하던 몇몇 부속 건물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선 뛰일르리 궁과 루브르 궁을 연결하던 두 건물 (플로르 관과 마르썽 관) 은 그대로 있으며, 뛰일르리 궁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꺄루젤 개선문 역시 굳건히 서 있습니다. 또 뛰일르리 정원에는 나뽈레옹 3세가 사용하던 손바닥 놀이장 (Jeu de paume) 이, 그 맞은편에는 똑같이 생긴 온실 (Orangerie) 이, 지금은 모두 박물관으로 변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뛰일르리 궁이 사라진 바람에, 오늘날의 관광객들은 루브르 마당부터 꽁꼬르드 광장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드넓은 정원을 산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정원을 산책하고 나면 꼭 신발과 바지 밑자락이 뽀얗고 고운 흙먼지로 뒤덥히는데, 그것을 보면서, 이 정원의 흙으로 원래는 기와를 구웠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꺄루젤 개선문 (Arc de triomphe du Carrousel)
왼쪽부터 꺄루젤 개선문, 마르썽 관, 루브르 궁
(Arc de triomphe du Carousel, Pavillon de Marsan, Louvre)

오른쪽부터 꺄루젤 개선문, 플로르 관, 루브르 궁
(Arc de triomphe du Carrousel, Pavillon de Flore, Louvre)

뛰일르리 정원의 손바닥 경기장
(Jeu de paume du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의 온실 (Orangerie du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뛰일르리 정원.
멀리에 오벨리스크와 에뜨왈 개선문이 보입니다.

mercredi 6 février 2008

2008년의 페브 (fèves de 2008)

아직도 드물게 몇몇 빵집에서 보이기는 하지만, 이제 걀렛 데 르와를 먹는 철은 사실상 끝났습니다. 어쨌건 저는 이제 그만 먹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올해에 새로 생긴 페브들을 공개합니다.


왼쪽부터 가장 제 마음에 드는 순서입니다. 특히 빠트릭은 엊그제에 가장 마지막으로 먹은 걀렛에서,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와서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스떼릭쓰는 지금까지는 날개 달린 모자만 있었는데 이제 얼굴도 있는 페브가 생겼습니다. 그다음은 챨리 채플린, 그리고 강아지. 나머지는 별다른 특징 없는 모양들... 원래는 해리 포터와 관계된 페브가 하나 더 있는데, 실수로 책장 뒤로 떨어트리는 바람에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그 페브 찾으려면 책장을 다 들어내야 하는데, 이사가지 않는 한 아마 다시 못볼 듯...^^

vendredi 2 novembre 2007

아쉬 빠르멍띠에 (hachis parmentier)

오늘날 프랑쓰 사람들은 감자를 참 좋아하고 즐겨 먹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감자가 유럽에 처음 소개된 것이 16세기인데, 처음엔 다들 이 새로운 식물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처음 보는 것이니 그럴만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늘날 돌이켜 볼 때는 믿기 힘든 소문이 많이 돌았습니다 : 감자를 먹으면 죽는다, 병에 걸린다... 심지어 프랑쓰에서는 과학자들이 공식적으로 감자는 문둥병을 유발한다고 발표해서 재배를 아예 금지시키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감자는, 당시 유럽에 잦았던 기아에도 불구하고, 매우 푸대접을 받았지요. 하지만 각 나라의 식물학자들이 감자가 식용에 적합하고, 쉽게 대량 재배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내면서, 차츰차츰 아일랜드와 독일을 선두로 하여 다른 나라들에서는 감자의 소비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유독 프랑쓰 사람들만이 이백년이 넘도록 감자를 거부했습니다.

프랑쓰에서 감자가 대중화된 것은 오로지 엉뜨완 오귀스땅 빠르멍띠에 (Antoine Augustin Parmentier, 1737-1813) 라는 약사이자 농업학자의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프랑쓰 사람들의 감자에 대한 깊은 편견을 이성적으로 고치기 힘든 것을 깨닫고, 한가지 꾀를 내었습니다. 즉, 그는 왕 (루이 16세) 에게 부탁해서 빠리 주변에 큰 밭을 샀고, 마을 주민들을 불러 모아 놓은 다음 공개적으로 감자를 심고서는, 여기서 나는 식물은 너무나 귀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왕실 만을 위한 것이니 감히 손댈 생각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군인들을 데려다가 밭을 철저하게 감시케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정말 저 야채가 맛있고 귀한 건가 보다, 나도 한 번 먹어봤으면... 감자가 많이 열리자 빠르멍띠에는 일부러 밤에는 보초를 서지 않게끔 했습니다. 평민들이 몰래 밭에 와서 감자를 훔쳐가게끔 유도한 것이지요. 다음 해에 그는 다른 곳에 더 큰 밭을 사서 같은 일을 했으며, 결과는 번번이 성공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여 차츰차츰 감자는 프랑쓰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감자를 널리 전파시킨 빠르멍띠에를 기리기 위해서 프랑쓰에는 빠르멍띠에의 이름을 딴 음식이 몇가지 있습니다. 모두 감자와 연관된 음식들인데, 그 중 매우 대중적이고 대표적인 것이 아쉬 빠르멍띠에입니다. 이것은 잘게 다져서 볶은 쇠고기 (hachis) 와 삶아 으깬 감자 (parmentier) 를 층층이 깔고, 제일 위에 그뤼예르를 얹어 그라땅처럼 구워 낸 것입니다. 제가 찍은 사진은 별로 안 예쁘지만, 실제로는 정말 맛있습니다.^^

감자는 아이띠 원주민의 말로 batata 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에스빠냐말과 이딸리아말에서 patata 가 되었으며, 불어에서 patate 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patate 이라는 말은 «감자» 와 «고구마» 를 모두 칭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구별을 해야 할 때는 «고구마» 는 patate douce, «감자» 는 pomme de terre 라고 합니다.

samedi 6 octobre 2007

베르가모 (Bergamo)

도니제띠의 출생지이자 사망지인 이딸리아의 베르가모는 매우 예쁜 도시입니다. 베르가모는 크게 두 구역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데, 낮은 도시 (città bassa) 는 평지 위에 넓게 펼쳐져 있으며, 낮은 도시로부터 퓌니뀔레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높은 도시 (città alta) 는 좁은 산등성이 위에 오밀조밀 응집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낮은 도시에도 의외의 매력이 있긴 하지만, 베르가모의 진짜 아름다움은 당연히 높은 도시에서 발견되지요. 여전히 성벽으로 둘러싸인 높은 도시에는 중세와 르네썽쓰 시대의 건물들로 가득하므로, 좁고 꼬불꼬불하고 울퉁불퉁한 돌길들을 거닐다 보면, 정말 다른 시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도니제띠의 무덤이 있는 싼따 마리아 마죠레 대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di Bergamo) 의 한 벽화.

싼따 마리아 마죠레 성당의 천장. 상대적으로 초라한 외부를 가진 이 성당의 내부는 휘황찬란한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싼따 마리아 마죠레의 측면과 꼴레오니 성당 (Cappella Colloni) 의 정면.

색깔돌을 사용한 꼴레오니 성당. 15세기에 베네치아를 위해 일했던 유명한 꼰도띠에로 (condottiero = 용병대장) 바르똘로메오 꼴레오니 (Bartolomeo Colleoni) 와 그의 딸 메데아 (Medea) 를 매장하기 위해 지은 꼴레오니 가문의 성당. 이 두 사람 외에 메데아가 사랑하던 새도 함께 묻혔다고 합니다.
빨라쪼 델라 라죠네. palazzo della ragione 라는 것은, 직역하면 « 이성, 판단의 궁전 » 이란 뜻으로, 사실은 중세 이딸리아 도시들에서 법원이나 시청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베르가모의 빨라쪼 델라 라죠네의 정면에는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베네치아의 상징인 날개달린 사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베르가모는 15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은 덕에 베르가모는 크게 번영할 수 있었으며,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보존하는 데에도 베네치아의 역할이 컸습니다. 나뽈레옹의 침략으로 베르가모는 프랑쓰의 영토가 되었다가, 나뽈레옹의 퇴락 후에는 외스터라이히에 합병되었고, 1859년 이후로 이딸리아에 속하게 됩니다.

도시의 탑 (Torre civica) 또는 종탑 (Campanone).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이 종탑은 매일 22시마다 130번 울린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이 종소리를 신호로 높은 도시의 모든 문을 닫았습니다.
북서쪽 성벽 위. 높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여러 시대에 걸쳐 차차 건설되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은 베네치아의 지배 하에 16세기에 완성된 유적들입니다.

남쪽의 성벽으로부터 바라본 낮은 도시.
기타 기억이 가물가물한^^ 베르가모의 이곳저곳...

mercredi 15 août 2007

위데르조 (Uderzo)

본명은 알베르 위데르조 (Albert Uderzo) 이지만, 대부분의 만화가들이 그러하듯 흔히 성으로만 불리는 위데르조는 프랑쓰의 만화가 (dessinateur) 로, 특히 아스떼릭쓰 (Astérix) 연작이 매우 유명합니다.

위데르조가 직접 그려준 아스떼릭쓰

mardi 14 août 2007

Sarah Chang

Sarah Chang joue le concerto pour violon en ré majeur, op. 35, de Tchaïkovsky, avec l'Orchestre National de France , dirigé par Kurt Masur, le 22 novembre 2006, au Théâtre des Champs-Élysées, Paris.




S. Chang et K. Masur sous des applaudissements et des bravos


Sarah Chang m'a signé un autographe après le concert

jeudi 2 août 2007

성녀 쟌 다르크 (Sainte Jeanne d'Arc)

프랑쓰의 역사와 관련된 성인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중 하나는 바로 성녀 쟌 다르크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백년 전쟁 후반기 무렵, 평범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이 시골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프랑쓰를 구하라는 하늘의 목소리를 여러 차례 듣고는 혜성처럼 나타나 전쟁의 판도를 뒤집어 엎었죠.

그녀가 실제로 천사와 성인들의 목소리를 들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여러 사건들이 많은 증인들 앞에서 행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그녀가 처음 프랑쓰의 왕 샤를 7세 (Charles VII) 를 만나러 왔을 때, 궁정에서는 그녀를 시험해 보고자, 가짜 왕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쟌은 곧 그가 가짜임을 알아차렸을 뿐 아니라, 군중 틈에 변장하고 숨어 있던 진짜 왕을 대번에 발견했다고 합니다. 또, 쟌의 첫번째 전투는 오를레엉 (Orléans) 에서였는데, 아무런 군사적 교육을 받은 적이 없던 이 열일곱살의 아가씨는 일곱달 이상 포위되어 있던 오를레엉을 7일 만에 해방시켰습니다. 그 후 그녀는 지휘하는 전투마다 승승장구하여, 샤를 7세를 랑쓰 (Reims) 까지 수위해 가, 프랑쓰의 왕으로 축성시키는데 성공하지요. 당시 프랑쓰는 수도를 포함하여 북부 절반을 영국군에게 빼앗긴 상태였으며, 랑쓰 역시 적군의 손아귀에 있었기에, 샤를 7세는 7년이 지나도록 축성을 받지 못한 채로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왕이 아니라 자주 도팡이라 불렸습니다.) 쟌은 오를레엉의 승리와 랑쓰의 축성을 비롯하여, 자신의 앞날의 주요 사건들을 미리 예견했으며, 자신이 포로로 잡힐 날짜와 장소 역시 미리 예고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이 정말 그녀가 하늘이 보낸 사람인 탓인지, 순전히 우연의 일치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지만, 그녀의 용기와 자신감,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신념은 상당히 감동적인 데가 있습니다. 난 열 일곱 살에 뭘했나 생각해 보면, 참...

쟌 다르크가 활동한 기간은 총 1년 남짓 (1429년 5월-1430년 5월) 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백년 전쟁은 그녀가 영국군에 의해 화형당한 (1431년 5월 29일) 후로도, 이십여년간 더 지속되지만, 쟌 다르크에 의해 사기를 얻은 프랑쓰군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하여, 잃었던 땅의 거의 전부를 되찾았습니다.

따라서 쟌 다르크는 프랑쓰에서 매우 중요하고 « 인기있는 »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신비스러운 삶과, 프랑쓰를 구했지만 프랑쓰로부터 버림받은 그녀의 극적인 운명 역시 많은 관심을 일으키는데 한 몫 했겠지요 ? 쟌 다르크의 삶의 무대가 되었던 주요 장소들, 동레미, 오를레엉, 빠떼 (Patay), 랑쓰, 루엉 (Rouen) 등등은 물론,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라도, 프랑쓰 도처에는 그녀를 기리는 광장, 길, 동상 등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또한 바띠껑 (Vatican) 이 그녀를 성인으로 인정하고 나서는, 그녀에게 바쳐진 성당들이 거의 각 도시마다 하나씩은 생겨났고, 그렇지 않은 성당들이라도 반드시 쟌 다르크의 동상이나 그림 한 점 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성모 마리아 (Vierge Marie) 와 대천사 미꺄엘 (Archange saint Michel) 과 함께 프랑쓰 전체의 수호 성인이기도 합니다.

빠리 1구, 성-으스따슈 (Saint-Eustache) 성당의 쟌 다르크 동상

빠리 8구, 마들렌 (Madeleine) 성당의 쟌 다르크

루브르 궁과 뛰일르리 정원 사이에 위치한
금으로 떡칠^^을 한 쟌 다르크 동상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숭배가 지나치다 못해 왜곡되어, 쟌 다르크는 오늘날 프랑쓰 극우파 (FN) 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극우파들은 매년 5월, 빠리의 루브르 앞 쟌 다르크의 동상 앞 (윗사진) 에 모여, 꽃을 헌사하고, 무릎 꿇고 참배하며, 쟌 다르크의 정신을 이어받아, 외국인들의 손에서 프랑쓰를 구하겠다는 맹세를 다집니다.

하지만 쟌 다르크를 국민적 영웅으로 보는 시각은 19세기 이후로 생겨난 개념으로, 정작 중세 사람들은 백년이 넘도록 전쟁을 하면서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습니다. 백년 전쟁 훨씬 이전부터 영국의 왕과 귀족들은 프랑쓰 내부에 합법적으로 물려받은 영토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영국 왕실과 프랑쓰 왕실은 수많은 결혼을 통하여 거의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고, 부르고뉴파는 비록 프랑쓰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지지하는데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프랑쓰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 (Isabeau de Bavière) 는 친아들 샤를 7세 대신 사위인 영국왕 헨리 5세 (Henry V) 가 프랑쓰의 왕위를 물려받는 조약을 맺기도 했습니다 (traité de Troyes, 1420).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나라에서는 한 언어, 즉 불어를 사용했지요.

하지만 백년 전쟁 이후로 국민성이라는 개념이 두 나라에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며, 영국에서 불어의 공식적인 사용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같은 기간 동안이었습니다.

dimanche 8 avril 2007

Quelques photos en rapport avec « La Bohème »

Nadar, Henry Murger (vers 1860)

Giacomo Puccini, Giuseppe Giacosa, Luigi Illica
(photographe et date inconnus)

André Kertesz, Paris Quartier latin (1926)

Une scène extraite du film Sous les toits de Paris de René Clair (1930)

Le café Momus, 17, rue des Prêtres
Fusain de Thomas Boys (1819)

Rue des Prêtres où il y avait le café Momus. Celui-ci fut remplacé en 1850 par un marchand de couleurs, comme on le voit sur cette photo anonyme. À comparer avec la photo précédente.

La Barrière d'Enfer

Luigi Comenci et Simone Giannozzi,
pendant le tournage de L'Incompreso (1966)
(photographe incon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