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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di 17 janvier 2011

떵쁠리에 (Templiers)

떵쁠리에들은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활동했던 기사 (chevalier) 이자 수사 (moine) 였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1차 십자군 전쟁의 성공으로, 유럽인들은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성지 순례가 다시 가능하게 되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험은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1118년, 위그 드 빵 (Hugues de Payns) 이라는 기사가 다른 여덟 명의 동료를 모아 « 그리스도의 작은 기사들 » (Pauvres chevaliers du Christ) 이라는 조직을 만듭니다. 이들은 유럽에서부터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항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안전하게 경호하는 역할을 했고, 이것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예루살렘의 왕 보두앙 2세 (Baudouin II de Jérusalem) 는 자기가 살던 궁의 일부를 이 가난한 기사들에게 내어줍니다. 보두앙 2세가 살던 궁전은 그 옛날 (기원전 10세기) 쌀로몽 왕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있었기에, 성전 즉 Temple 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하여 1119년부터 이들은 « 떵쁠의 기사 (chevaliers du Temple) » 또는 « 떵쁠리에 (Templiers) »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떵쁠리에들의 특징은 기사이면서 동시에 수사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한 데 있습니다. 창립된 지 꼭 십년 째 되던 해에 (1128), 이미 그 수가 매우 불어난 이 군사-종교적 조직은 트르와 공의회 (Concile de Troyes) 에서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수도회 인가를 받고, 고유한 규칙과 의상 등을 정합니다. 이후로 점점 더 번성한 떵쁠회 (Ordre du Temple) 는 예루살렘 왕국과 그 주변은 물론 유럽 각국에도 수많은 분원을 세웠습니다. 프랑쓰에만 삼천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빠리의 떵쁠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수도원 외에도 이들은 성과 군사적 요새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떵쁠회는 군사적 조직이긴 했지만,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싸움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떵쁠리에들 중에서도 일부 만이 말을 타고 칼과 창을 쓰는 기사였고, 다른 많은 떵쁠리에들은 수도원이 운영될 수 있도록 여러가지 다른 업무를 맡아 생활했습니다. 특히 씨또회 (Ordre de Cîteaux) 의 영향을 많이 받은 떵쁠회는 직접 농경지를 가꾸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일을 주요 임무로 생각했습니다. 떵쁠리에들의 이러한 검소한 모습과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용감한 모습, 그리고 순례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희생적인 모습 등이 복합되어, 떵쁠리에들은 많은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떵쁠리에들은 놀랍게도 은행가의 역할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어음이나 수표 등을 발명한 사람이 떵쁠리에들인 셈인데, 멀리 바다 건너 예루살렘까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이 몇 년에 걸치는 여행 기간 동안 현금을 들고 다니기가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에 있는 떵쁠 아무 곳이나 찾아가 자신들의 경비를 맡겼고, 대신 그것을 증명해 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후 빨레스띤에 도착한 다음 또다시 아무 떵쁠이나 찾아가 그 증서를 내밀면 그에 해당하는 현금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 씨스템은 반드시 유럽과 빨레스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 내에서도 활용되었으며, 또한 자신들의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용감한 군인인 동시에 검소한 떵쁠리에들에게 돈이나 보석, 보물을 맡기고 관리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심지어 프랑쓰의 왕도 자신의 개인 재산을 떵쁠리에들에게 맡겼으며, 여러 지방에서 거두는 세금 따위가 모두 빠리의 떵쁠에 도착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국세청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이 모든 것이 떵쁠리에들의 돈이 아니었지만, 점차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떵쁠리에들이 본연의 모습을 버리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더군다나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 끝에 결국은 유럽인들이 1291년 빨레스띤에서 철수하고 나서는, 더이상 떵쁠리에들은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원래 의무가 없어졌으니까요. 따라서 한때 많은 인기를 누리고 존경을 받았던 떵쁠리에들이 점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307년 10월 13일, 프랑쓰 전국의 모든 떵쁠리에들이 일제히 왕명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떵쁠리에들을 갑자기 체포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전국의 모든 떵쁠리에들을 동시에 체포했다는 것은, 이 사건이 매우 치밀하게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체포를 명한 필립 4세 르 벨 (Philippe IV le Bel) 은 부족한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 떵쁠리에들이 축적한 것으로 믿어지는 어마어마한 부를 빼앗을 생각이었습니다. 게다가 떵쁠리에들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도 부정적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치밀한 준비 끝에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때 교황으로 선출된 지 얼마 안 된 끌레멍 5세 (Clément V) 가 교회의 수사들을 함부로 잡아 들인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형식적인 반감을 표했지만, 끌레멍 5세도 사실은 애초에 프랑쓰 왕권의 힘으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그는 보르도의 주교였고, 처음으로 로마에 가기를 거부하고 아비뇽 (Avignon) 에 머문, 프랑쓰 출신의 교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문에 못이긴 떵쁠리에들이 스스로 죄를 고백하는 바람에 교황도 명목을 잃었습니다. 고문 끝에 자백한 떵쁠리에들의 죄상은 그리스도 모독, 우상 숭배, 성물과 성직 매매, 음란한 비밀 의식, 동성애, 등등 이루 말도 안되는 것들이었으며,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필립 르 벨과 그의 측근들은 이것을 합법적으로 통과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7여년에 걸친 재판 끝에 떵쁠회는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떵쁠회의 마지막 수장 쟉 드 몰레 (Jacques de Molay) 는 이단자의 선고를 받아 1314년 3월 18일 노트르 담 (Notre Dame)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집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떵쁠리에들을 화형시키거나 고문 끝에 죽였지만, 필립 4세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떵쁠의 재산은 위에서 말했듯 그들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위탁된 것이었으며, 떵쁠 고유의 재산은 떵쁠회가 해체된 후 오삐딸회 (Ordre de l'Hôpital) 를 비롯한 다른 수도원들에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떵쁠의 진짜 보물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믿는 전설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소설이나 영화, 놀이의 주제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시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떵쁠리에들이 실제로 은밀한 의식을 행하던 비밀 종교 조직이었으리라는 낭만적인 상상과, 쟉 드 몰레가 죽으면서 퍼부었다는 저주가 모두 들어맞으면서 떵쁠리에들은 일종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dimanche 20 décembre 2009

달 이름의 유래 (nom des mois)

불어에서 매달매달의 이름은 모두 라띠나어에서 유래하였는데,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은 로마 시대에는 새해가 3월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학년제와 비슷하다 할 수 있겠지요. 3월부터 시작하여 그 어원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mars : 3월은 라띠나어로 martius 라 했고, 로마 신화 속의 군신 마르쓰 (Mars) 를 기념하는 달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avril : 4월은 라띠나어 aprilis 로부터 유래했는데, 이 라띠나어의 뜻은 모호합니다. 이미 로마시대부터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그리쓰의 여신 아프로딧 (Aphrodite) 을 기념하는 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고, 또다른 사람들은 라띠나어 동사 aperire, 즉 « 열다 » 에서 기원했다고 보았습니다. 4월은 사실상 봄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꽃들이 만개하고 모든 생명이 새로 솟는 만큼 열리다 라는 동사에서 그 어원을 찾은 것도 이해는 갑니다. 또다른 주장은 라띠나어 형용사 apricus 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이 형용사는 « 양지바른, 해가 잘 드는, 햇빛을 좋아하는 » 이라는 뜻인데, 역시 봄의 시작과 관계가 있는 해석입니다.

mai : 5월을 가리키는 말은 라띠나어 maius 에서 왔으며, 이 말은 그리쓰와 로마 신화 속의 여신 마이아 (Maia) 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juin : 6월은 라띠나어 iunius 에서 비롯되었고, 이 단어는 로마의 여신 유노 (Juno) 를 기념하는 달입니다.

juillet : 7월을 칭하는 이름은 라띠나어 iulius 가 변해서 된 말인데, 이것은 율리우쓰 까에싸르 (Julius Caesar) 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원래 애초에는 이 달의 이름은 quintilis 였으며, 그저 « 다섯번째 달 » 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새해가 3월부터 시작하므로 7월은 다섯번째 달이 맞지요. 그러던 것을 아우구스뚜쓰 (Augustus) 황제가 까에싸르를 기념한다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바꾼 것입니다.

août : 8월도 7월과 비슷한 현상을 겪었습니다. 원래 8월의 이름은 sextilis, 즉 여섯번째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뚜쓰의 후계자였던 띠베리우쓰 (Tiberius) 가 양아버지이자 선임 황제였던 아우구스뚜쓰를 기념한다하여 augustus 라고 달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단어가 차차 변하고 줄어, 불어에서는 août 이 되었습니다. août 은 발음이 조금 문제가 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셔요.

septembre : 9월의 이름은 라띠나어 september 에서 왔으며, 이 단어는 그저 일곱번째 달이라는 뜻입니다. 역시 3월을 시작으로 보았을 때 이야기이지요. 불어 숫자 sept (7) 을 생각해 보면, 같은 어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octobre : 10월도 9월과 마찬가지 원칙입니다. 라띠나어 october 는 여덟번째 달이라는 뜻이며, 불어 huit (8) 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novembre : 11월 역시 아홉번째 달이라는 뜻의 라띠나어 nouember 에서 왔습니다. 불어 neuf (9) 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décembre : 12월을 칭하던 라띠나어 december 는 열번째 달이라는 뜻이며, 현대 불어 dix (10) 도 같은 어원입니다.

janvier : 1월은 조금 더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초창기의 로마력은 데껨베르로서 한 해가 끝났으며, 나머지 육십여일은 날짜를 세지 않았다고 합니다. 농경 시대에는 겨울 동안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저 3월의 꺌렁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지요. 하지만 누마 뽐삘리우쓰 (Numa Pompilius) 라는 왕 (기원전 8-7세기) 이 달력을 개편하면서 1월과 2월을 연말에 추가했습니다. 어쨌거나 1월의 이름은 라띠나어 januarius 에서 왔으며, 이 달은 로마의 신 야누쓰 (Janus) 를 기념합니다.

février : 2월은 라띠나어 februarius 에서 온 이름인데, 이 단어는 동사 februare, 즉 « 정화하다, 순화하다 » 라는 뜻입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은 애초에는 야누아리우쓰와 페브루아리우쓰의 순서가 서로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즉 누마 뽐삘리우쓰가 달력을 개편했을 때는 데껨베르에 이어지는 달 이름을 페브루아리우쓰라 불렀고, 그 뒤에 오는 달을 야누아리우쓰라 불렀으며, 이러한 관습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450년 경, 두 달의 이름을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153년부터 1월 1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게 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랍니다.

vendredi 30 janvier 2009

셩-젤리제 (Champs-Élysées)

자칭 타칭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la plus belle avenue du monde) 이라고 불리는 셩-젤리제는 빠리 중앙으로부터 서쪽을 향해 길게 뻗은 대로 (avenue) 를 말합니다. 정확한 행정 구역 이름은 avenue des Champs-Élysées 이며, 쁠라쓰 들 라 꽁꼬르드 (place de la Concorde) 와 쁠라쓰 샤를-드-골 (place Charles-De-Gaulle), 두 광장을 이어주는, 길이 약 2 킬로미터, 폭 약 70 미터의 길입니다. 빠리의 길들은 대부분 좁고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셩-젤리제처럼 곧고 넓은 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긴 하지만,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 이라는 것은 너무 광고문안적인 표현이 굳어진 것 아닌가 합니다. 혹시 옛날에는 더 아름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넓게 트인 길에 가로수가 끝이 안 보이게 줄지어 있고, 인도도 매우 넓어서 산책하기에 쾌적한 길이었을테니까요. 사실 이미 18세기에도 이 동네를 빠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역의 하나라고 묘사한 문서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점들, 은행들, 식당들, 여행사들이 너무 많이 들어 차 있어서, 과연 이 길만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예전에는 최고급 상점들 위주라 희귀성이라도 있었지만, 요즘은 전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체인 상표들이 셩-젤리제를 수 놓고 있습니다.

셩-젤리제에서 그나마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부위는 꽁꼬르드 광장부터 롱-쁘왕 데 셩-젤리제 (rond-point des Champs-Élysées), 즉 아브뉘의 한 중간 정도까지입니다. 여기도 물론 차도에는 차들이 씽씽 달리지만, 양 옆 인도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고, 인도의 폭이 거의 삼사백미터에 가깝도록 넓직하기 때문에 산책하는 맛이 있습니다. 물론 셩-젤리제의 나머지 부위도 빠리의 보도로서는 정말 넓은 편이지만, 관광객들로 미어 터지고, 소매치기들의 활약이 많으며, 잡상인들로 들끓기 때문에, 발디딜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셩-젤리제 — 또는 빠리 사람들이 줄여 말하듯 셩 (Champs) — 에 가면, 알 수 없는 흥분과 때로는 « 감동 » 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괜히 술렁이는 분위기 때문이겠지만요. 특히 11월 말부터 가로수에 성탄절 장식을 했을 때는 정말 엘리제 (Élysées) 들판 (champs) 에 온 듯한 기분도 듭니다. 엘리제 들판은 그리쓰 신화에서 영웅들과 착한 사람들이 죽은 후 가게 되는, 일종의 천국과 같은 장소를 말하지요. 여기서부터 이 길의 이름이 왔으며, 그 외에도 프랑쓰에는 엘리제라는 이름을 딴 장소나 명소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ex. Palais de l'Élysée).

아브뉘 데 셩-젤리제는 매년 7월 14일 군인들의 행진 장소로 쓰이고, 또 매년 여름 뚜르 드 프렁쓰 (Tour de France = 프랑쓰 일주 자전거 대회) 의 종착지로도 쓰이며, 그 외에도 특별한 행사들, 주로 화려한 축제 분위기의 행사들이 종종 열립니다. 공식적인 행사 외에도 나라에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빠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와 모여드는 곳도 셩-젤리제랍니다.

셩-젤리제의 성탄 장식

꽁꼬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위에서부터 개선문 쪽을 향해 바라 본
아브뉘 데 셩-젤리제source de cette photo

mercredi 9 juillet 2008

Le secret de Marc

Exceptionnellement, j'écris de Hongkong, le temps d'une escale...

Le Roman de Tristan, de Béroul, Paris, Bibliothèque Nationale, ms. fr. 2171, f° 1-32, vv. 1306-1350, édité par Philippe Walter, in Tristan et Iseut. Les poèmes français. La saga norroise, Textes originaux et intégraux présentés, traduits et commentés par Daniel Lacroix et Philippe Walter, Le Livre de poche, coll. Lettres gothiques, 1989, pp. 82-84 :

Oiez du nain com au roi sert.
Un consel sot li nains du roi,
Ne sot que il. Par grant desroi
Le descovri : il fist que beste,
Qar puis an prist li rois la teste.
Li nain esr ivres, li baron
Un jor le mistrent a raison
Que ce devoit que tant parloient,
Il et li rois, et conselloient :
« A celer bien un suen consel
Molt m'a trové toz jors feel.
Bien voi que le volez oïr,
Et je ne vuel ma foi mentir.
Mais je merrai les trois de vos
Devant le Gué Aventuros.
Et iluec a une aube espine,
Une fosse a soz la racine :
Mon chief porai dedenz boter
Et vos m'orrez defors parler.
Ce que je dirai, c'ert du segroi
Dont je sui vers le roi par foi. »
Li baron vienent a l'espine,
Devant eus vient li nains Frocine.
Li nains fu cort, la teste ot grose,
Delivrement ont fait la fosse,
Jusqu'as espaules l'i ont mis.
« Or escoutez, seignor marchis !
Espine, a vos, non a vasal :
Marc a orelles de cheval. »
Bien ont oï le nain parler.
S'avint un jor, aprés disner,
Parlout a ses barons roi Marc,
En sa main tint d'auborc un arc.
Atant i sont venu li troi
A qui li nains dist le secroi,
Au roi dïent priveement :
« Rois, non savon ton celement. »
Li rois s'en rist et dist : « Ce mal
Que j'ai orelles de cheval,
M'est avenu par cest devin :
Certes, ja ert fait de lui fin. »
Trait l'espee, le chief en prent.
Molt en fu bel a mainte gent,
Que haoient le nain Frocine
Por Tristan et por la roïne.

Traduction en français moderne par Philippe Walter, ibid. pp. 83-85.

Mais écoutez plutôt ce que le nain fit au roi. Il détenait du roi un secret qu'il était le seul à connaître. Une grande imprudence l'amena à le divulguer. Il commit une bêtise car cela lui valut ensuite d'être décapité par le roi. Un jour, le nain était ivre et les barons lui demandèrent ce que signifiaient les entretiens qu'il avait fréquemment avec le roi.
« J'ai toujours gardé loyalement le secret qu'il m'a confié. Je vois bien que vous voulez le connaître, mais je ne veux pas trahir ma parole. Je vous mènerai tous les trois devant le Gué Aventureux. Il y a là une aubépine dont les racines surplombent un fossé. Je pourrai placer ma tête à l'intérieur et vous m'entendrez du dehors. Ce que je dirai concernera le secret pour lequel je suis lié par serment au roi. »
Les barons se rendent devant l'épine. Frocin les précède. Le nain était petit mais il avait une grosse tête. Ils ont vite fait d'élargir le trou et y enfoncent Frocin jusqu'aux épaules.
« Écoutez, seigneurs marquis ! Épine, c'est à vous que je m'adresse et non à eux ! Marc a des oreilles de cheval ! »
Ils ont parfaitement entendu le nain. Un jour, après le dîner, Marc s'entretenait avec ses barons. Il tenait un arc d'aubour dans la main. Les trois barons à qui le nain avait révélé le secret s'approchent du roi. Ils lui disent à voix basse :
« Sire, nous savons ce que vous cachez. »
Le roi en rit et dit :
« Cette maladie des oreilles de cheval, c'est à ce devin que je la dois. Vraiment, il n'en a plus pour très longtemps à vivre. »
Il tire son épée, décapite le nabot. Beaucoup s'en réjouissent qui haïssent le nain Frocin à cause de ses méchancetés envers Tristan et la reine.

lundi 7 juillet 2008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Roi aux oreilles de cheval)

트리스떵과 이즈의 이야기에는 유리 장갑 말고도 또다른 유명한 일화 하나가 더 들어 있습니다. 베룰이 저술한 판에 의하면, 꼬르누아이으 (Cornouaille) 의 왕 마르크 (Marc) 는 프로쌍 (Frocin) 이라는 난장이를 광대처럼 두고 있는데, 이 난장이가 바로 마르크에게 트리스떵과 이즈의 관계를 고자질한 장본인이며, 두 사람을 함정에 몰아 넣기도 합니다. 흉칙하고 못생겼으며, 교활하고 음흉한 성격에다가, 괴이한 마술까지 부릴 줄 아는 이 난장이를 궁정 사람들은 모두 싫어하지만, 질투에 눈이 먼 왕은 그를 크게 신임하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난장이가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 한 가지를 알고 있었기에, 왕은 그에게 조종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르크의 부끄러운 비밀이란, 바로 그가 매우 길고 뾰족하고 털이 난 귀를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프로쌍은 한동안 이 비밀을 굳게 지켰으나, 다른 간신들의 재촉이 있자, 입이 근질근질하여 결국은 그들에게 비밀을 털어 놓습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비밀을 지킨 행세를 하기 위하여, 대놓고 얘기하지 않고, 산사나무 (aubépine) 밑을 파서 얼굴을 묻고, 거기다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이 소리는 뿌리를 타고 나무의 몸통으로 올라와 사방으로 울려 퍼졌고, 나무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의 간신은 마르크 왕의 비밀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이 일화는 그리쓰 신화에 등장하는 미다쓰 왕의 전설과 매우 흡사하고,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나라의 어느 왕에 얽힌 전설이라고도 어디서 들었던 것도 같은데, 사실 각 나라마다 비슷비슷한 옛날 이야기가 구전되 오는 일이 종종 있지요 (콩쥐팥쥐와 썽드리용). 마르크의 경우는 순전히 그의 이름 때문에 이런 일화가 생겨났으리라는 짐작을 쉽게 해 볼 수 있습니다. 쎌트 계열 언어들에서 Marc 또는 Marc'h 는 고유명사로는 사람 이름이지만, 보통 명사로는 바로 « 말 » 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베룰은 트리스떵과 이즈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에서 그저 이 일화를 지나가듯 이야기하고 그만이지만, 프랑쓰의 브르따뉴 지방에는 마르크와 그의 귀를 주제로 하는 보다 복합적인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흔히 말해지기를 브르따뉴는 마르크와 트리스떵의 고향이기 때문이지요. 마르크는 원래 현재 프랑쓰의 북서부 브르따뉴의 일부인 꼬르누아이으의 왕이었는데, 이 말 귀 사건이 드러나고 나서, 영국 섬으로 건너가 거기서 자신의 사촌인 아르뛰르 (Arthur) 왕에게 남서부의 작은 왕국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왕국도 꼬르누아이으라 이름지었습니다. 현대 불어에서는 원래 꼬르누아이으는 Cornouaille, 영국에 새로 생긴 꼬르누아이으는 Cornouailles 라고 합니다. 하지만 s 는 발음되지 않기 때문에, 두 지명을 귀로 들어서는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단어는 현대 영어에서 Cornwall 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전설일 뿐, 마르크라는 왕이 실존했던 인물인지, 정말로 브르따뉴 출신인지, 귀가 유난히 길었는지, 아일랜드의 공주와 결혼을 했었는지, 그 공주가 시조카와 사랑에 빠졌었는지, 등등은 모두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프랑쓰의 꼬르누아이으와 영국의 콘월 두 지명이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vendredi 4 juillet 2008

유리 장갑 (gants de verre)

매우 시적이고 아름다운 칼의 일화는 모호함으로도 가득 차 있습니다. 트리스떵은 과연 왜 칼로 자신과 이즈 사이에 간격을 두었을까요 ? 또한 그들의 닿지 않은 입술, 이즈가 굳이 간직하고 있는 결혼 반지 등등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 베룰은 두 사람의 사랑이 오로지 쁠라또닉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 하지만 다른 대목에서는 그와 모순되는 장면도 많습니다. 어쨌거나 칼의 일화 다음에는 마르크 왕이 두 사람이 함께 잠든 모습을 발견하고도, 그 모습이 너무 순결하다 하여,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이 때 왕은 자신이 잠든 두 연인을 발견했음을, 그리고 충분히 그들을 처치할 수 있었지만 용서했음을 뜻하는 뚜렷한 증표를 남기고 싶어합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개인 물건들 몇 개를 남겨 두고 떠납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이즈가 아일랜드로부터 가지고 와서 결혼 선물로 왕에게 선사한 유리 장갑입니다. 이 부분의 오일어 원문을 소개하면,

« ...
Uns ganz de voirre ai je o moi,
Qu'el aporta o soi d'Irlande.
Le rai qui sor la face brande
Qui li fait chaut en vuel covrir ;
Et qant vendra au departir,
Prendrai l'espee d'entre eus deus
Dont au Morhot fu le chief blos.»
Li rois a deslïé les ganz,
Vit ensenble les deus dormanz,
Le rai qui sor Yseut decent
Covre des ganz molt bonement.
Béroul, Le Roman de Tristan, vv. 2032-2042

(«... 나는 그녀가 아일랜드에서 가져온 유리 장갑을 끼고 있다. 얼굴에 햇빛이 내리쬐어 더울테니, 그녀의 얼굴을 장갑으로 보호하고 싶다. 그리고 떠날 때는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칼, 모르올트 [트리스떵이 죽인 이즈의 삼촌] 의 머리를 잘라 낸 저 칼을 내가 가지고 가겠다.» 왕은 장갑을 벗고 나란히 누워 자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장갑으로 조심스럽게 이즈의 얼굴을 덮어, 내려 쪼이는 햇빛을 막았다.)

이 유리 장갑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합니다. 물론 오로지 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말이 안됩니다. 유리 장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걸 실제로 사람이 착용할 수 있는가 ? 그리고 유리로 어떻게 햇빛을 막는가 ? 도대체 이 이즈라는 여자는 얼굴에 햇빛이 비치고 그 위에 누가 유리를 덮는데도 계속 쿨쿨 잠만 잔단 말인가 ? 그리고 이것을 다 인정한다 치더라도, 서지학적으로도 모순이 있습니다. 장갑이 처음 언급되었을 때 (v. 2032) 는 ganz de voirre (유리 장갑) 이라고 나오지만, 곧이어 (v. 2039) 는 voirre 라는 말이 사라지고 단지 les ganz (장갑들) 이라고만 하며, 좀 더 뒤에는 (v. 2075) 아예 li gant paré du blanc hermine (흰담비로 장식된 장갑) 이라는 묘사가 나옵니다 :

De l'esfroi que Iseut en a
Geta un cri, si s'esveilla.
Li gant paré du blanc hermine
Li sont choiet sor la poitrine.
Béroul, Le Roman de Tristan, vv. 2073-2076

([악몽을 꾼] 이즈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마르크가 덮어 놓고 간] 흰담비 장갑들이 그녀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그래서 베룰의 작품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이 voirre 라는 단어가 vair 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여깁니다. « 유리 » 라는 뜻의 오일어 voirre 는 변화를 거쳐 현대 불어에서는 verre 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vair 라는 것은, 등은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회색이고, 배는 흰색의 털을 가진 다람쥐의 모피로서, 매우 값비싼 재료였습니다. 따라서 베르는 흰담비와 상당히 비슷한 동물이었고, 둘 다 매우 희귀한 고급 가죽이지요. 문제의 장갑이 다람쥐와 흰담비의 모피를 섞어 만든 장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보다 논리적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필립 왈떼르 (Philippe Walter) 같은 학자는 voirre 를 굳이 vair 로 수정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전설의 운치를 더 돋궈 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말도 맞습니다. 중세의 문학 작품들에는 여러가지 마술과 신비로운 물체들이 자주 등장하니까요.

이런 류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동일 작품의 필사본이 여러편 있으면, 서로 비교를 통하여 대개는 문제 해결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베룰의 트리스떵은 오로지 단 한 편의 필사본 (Paris, Bibliothèque Nationale, ms. fr. 2171) 을 통해서만 전해졌기 때문에, 비교의 대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트리스떵 이야기나 외국어 번역판에는 이 유리 장갑의 이야기가 아예 없거나, 극히 간략하게 처리되거나, 단지 장갑이라고만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판본들에서는 두 주인공이 잠든 장소가 나뭇잎으로 엮어 만든 숲 속의 오두막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동굴 안입니다. 그때문에 굳이 이즈의 얼굴을 햇빛으로부터 가려야 할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마르크는 장갑을 그저 이즈 곁에 놓아 둡니다. 그렇다면 유리 장갑이라도 별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논쟁이 몇 세기 뒤에 다시 한번 일어났습니다. 다만 이 때는 장갑이 아니라 신발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썽드리용의 구두 (사실은 pantoufles = « 실내화 ») 는 과연 유리인가 모피인가 ? 썽드리용의 작가 뻬로 (Charles Perrault) 는 verre 라고 썼지만, 뒤늦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vair 의 잘못된 표기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었습니다. 그렇다면 트리스떵과 이즈의 전설은 동화 썽드리용의 먼 조상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일까요 ?

mercredi 2 juillet 2008

트리스떵과 이즈 (Tristan et Yseut)

트리스떵과 이즈 (또는 이즛) 의 이야기는 유명한 중세의 전설입니다. 금지된 줄 알지만, 실수로 마술약을 먹는 바람에, 서로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 두 연인의 비극은 원래는 중세 초기부터 쎌트 문화권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던 전설로 추정되는데, 이 이야기가 전 유럽에서 인기를 얻고, 오늘날까지도 살아 남게 된 것은 사실상 불어권 작가들 덕분입니다. 트리스떵과 이즈의 이야기는 전설의 원어라 볼 수 있는 쎌트 계열 언어로도, 쎌트어를 몰아낸 영어로도 쓰여진 바가 없으며, 주로 공식적인 기록을 전담했던 라띠나어로는 물론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오로지 오일 (oïl) 어, 즉 중세 불어로만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13세기 이후로는 중세 독어와 노르와어 (스껑디나비 지역에서 사용되던 옛 언어) 로 적힌 필사본들도 나타나나, 이들은 모두 불어판의 번역일 따름입니다. 바그너는 바로 이 중, 곳프릿 드 스트라쓰부르 (Gottfried de Strasbourg) 의 독어판을 기초로, 너무나 아름다운 오뻬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를 작곡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곳프릿의 작품이 사실은 또마의 불어 원판을 번역-각색-축약한 것임을 몰랐다고 하지요.

중세 불어로 쓰여진 트리스떵과 이즈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모두 일곱 편이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그저 주인공들의 이름이나 간단한 참고가 언급된 작품들까지 다 합지자면 그 수는 이루 셀 수 없습니다. 일곱 편 중 한 편을 제외하면 모두 운문으로 쓰여졌으며, 모두 12세기의 작품입니다. 그 길이와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베룰 (Béroul) 과 또마 (Thomas) 가 지은 트리스떵의 이야기가 비교적 전체적인 줄거리를 다룬다면, 다른 시들은 트리스떵과 이즈의 이야기 중 한 일화 만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또마의 트리스떵은 중세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고, 다른 불어 작품들과 외국어 번역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가장 일찍 (1173년 경) 쓰여진 작품으로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베룰의 트리스떵이 좀 더 일찍 (1150년 경)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트리스떵 문학 연구가들의 경향입니다.

베룰의 트리스떵의 이야기 (Le Roman de Tristan) 중 마음에 드는 구절 하나를 어설피 번역해 보았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흔히 « 칼의 일화 (épisode de l'épée) » 라고 일컬어지는 이 장면은, 두 주인공이 마르크 (이즈의 남편이자 트리스떵의 외삼촌) 의 노여움을 피해 숲 속을 헤매다니며 살던 중 일어납니다. 배고프고 지친 두 사람이 나뭇잎으로 지은 오두막에서 잠시 낮잠을 취하는 장면입니다 :

이즈가 먼저 누웠다. 트리스떵도 누우면서 자신의 칼을 뽑아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이즈는 속옷을 입고 있었고 (만약 이 날 그녀가 옷을 벗었더라면 큰 일 날 뻔 했다), 트리스떵도 바지를 입은 채로 누웠다. 왕비 [이즈] 는 결혼식날 왕 [마르크] 이 준, 에므로드가 박힌 금반지를 손에 끼고 있었는데, 손가락이 너무 가늘어져서, 반지가 흘러 빠지지 않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두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잠들었는가 들어보라. 이즈는 한 쪽 팔을 트리스떵의 목 뒤로 넣었고, 또다른 팔은, 내 기억에, 그의 가슴 위에 얹었던 것 같다. 이즈는 트리스떵을 꼭 안고 있었고, 트리스떵도 그녀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들의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입술은 서로 닿을 듯 말 듯 했으나, 실제로는 닿지 않았다. 이 순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나뭇잎 하나 떨지 않았다. 단지 한 줄기 햇빛 만이 얼음보다도 더 반짝거리는 이즈의 얼굴을 밝히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잠이 든다. 그들은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

베룰의 트리스떵 이야기, 1804-1830 행.
(원문은 여기로)

lundi 30 juin 2008

Tristan et Yseut, de Béroul

Un passage (épisode de l'épée) du Roman de Tristan de Béroul, Paris, Bibliothèque Nationale, ms. fr. 2171, f° 1-32, vv. 1801-1834, édité par Philippe Walter, in Tristan et Iseut. Les poèmes français. La saga norroise, Textes originaux et intégraux présentés, traduits et commentés par Daniel Lacroix et Philippe Walter, Le Livre de poche, coll. Lettres gothiques, 1989 : 104-106.

La loge fu de vers rains faite,
De leus en leus ot fuelle atraite,
Et par terre fu bien jonchie.
Yseut fu premiere couchie ;
Tristran se couche et trait s'espee,
Entre les deux chars l'a posee.
Sa chemise out Yseut vestue
(Se ele fust icel jor nue,
Mervelles lor fut meschoiet),
Et Tristran ses braies ravoit.
La roïne avoit en son doi
L'anel d'or des noces le roi,
O esmeraudes planteïz.
Mervelles fu li doiz gresliz,
A poi que li aneaus n'en chiet.
Oez com il se sont couchiez :
Desoz le col Tristran a mis
Son braz, et l'autre, ce m'est vis,
Li out par dedesus geté ;
Estroitement l'ot acolé,
Et il la rot de ses braz çainte.
Lor amistié ne fut pas fainte.
Les bouches furent pres asises,
Et neporquant si ot devises
Que n'asenbloient pas ensenble.
Vent ne cort ne fuelle ne trenble.
Uns rais decent desor la face
Yseut, que plus reluist que glace.
Eisi s'endorment li amant,
Ne pensent mal ne tant ne quant.
N'avoit qu'eus deus en cel païs ;
Quar Governal, ce m'est avis,
S'en ert alez o le destrier
Aval el bois au forestier.

Traduction en français moderne de Philippe Walter, in Tristan et Iseut. Les poèmes français. La saga norroise, Textes originaux et intégraux présentés, traduits et commentés par Daniel Lacroix et Philippe Walter, Le Livre de poche, coll. Lettres gothiques, 1989 : 105-107.

La loge était faite de rameaux verts où de part en part des feuilles avaient été rajoutées ; le sol en était également jonché. Yseut se couche la première.

Tristan fait de même ; il tire son épée et la place entre leurs deux corps. Yseut portait sa chemise (si elle avait été nue ce jour-là, une horrible aventure leur serait arrivée). Tristan, lui, portait ses braies. La reine gardait à son doigt la bague en or sertie d'émeraudes que le roi lui avait remise lors de leur mariage. Le doigt, d'une étonnante maigreur, retenait à peine la bague.

Écoutez comment ils se sont couchés ! Elle glissa un bras sous la nuque de Tristan et l'autre, je pense, elle le posa sur lui. Elle le tenait serré contre elle et lui aussi l'entourait de ses bras. Leur affection ne se dissimulait pas. Leurs bouches se touchaient presque, mais il y avait toutefois un espace entre elles, de sorte qu'elles ne se rejoignaient pas. Pas un souffle de vent, pas un frémissement de feuille. Un rayon de soleil tombait sur le visage d'Yseut, plus éclatant que la glace. C'est ainsi que s'endorment les amants ; ils ne pensent pas à mal. Ils sont tous les deux seuls à cet endroit car Gouvernal, il me semble, était parti à cheval chez le forestier, à l'autre bout de la forêt.

samedi 12 janvier 2008

크르와썽 (croissant)

초승달 모양을 가진 크르와썽은 프랑쓰의 대표적인 빵으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지만, 그 기원이 정말로 프랑쓰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자주 듣게 되는 설 중 하나는 이 빵이 외스터라이히의 수도 빈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입니다. 외스터라이히 제국은 역사에 걸쳐 오또멍 제국과 여러번 전쟁을 치루었는데, 1683년에는 수도 빈이 포위될 정도로 심각한 열세에 몰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외스터라이히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을 축하하기 위해서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어 먹어 치웠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초승달은 오또멍 제국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또다른 주장들에 의하면 초승달 모양의 빵은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또다시 두 파로 나뉩니다. 한 파는 이미 중세부터 유럽 각지에서 갸름한 모양의 빵을 만들어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또다른 파는, 그 반대로, 크르와썽은 비교적 최근, 즉 19세기 넘어서 생겨난 빵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독어로 이 빵을 Hörnchen, 즉 « 작은 뿔 » 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위의 역사적 사건과 별 관련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로 오또멍 제국에 대한 적개심에서 만들어진 빵이라면, 독어로도 당연히 Sichel 또는 Mondsichel, « 초승달 » 이라고 불렀어야 할텐데 말이지요. 또 한편 이 빵이 정말로 외스터라이히로부터 프랑쓰에 수입된 것이라면, 왜 Hörnchencroissant 으로 번역되었는가도 의문으로 남습니다. « 작은 뿔 » 은 불어로 cornet 라고 번역하면 꼭 들어맞는데 말이지요. 한 예로 이딸리아에는 크르와썽과 비슷한 모양의 빵이 있는데, 그 빵의 이름은 바로 cornetto, 즉 « 작은 뿔 » 입니다.

또달리 보면, 어쨌거나 이 빵이 빈에서 기원하여 다른 나라로 퍼진 것이 맞는 듯도 싶습니다. 오래동안 외스터라이히 제국에 속해 있던 이딸리아에서는 보다 충실한 번역을 했고, 좀 더 멀리 떨어진 나라인 프랑쓰에서는 약간 색다른 번역을 한 것 아닐까요 ? 제가 이런 짐작을 해 보는 또다른 이유 중 하나는 불어로는 크르와썽을 비롯하여 그 비슷한 무리의 빵들을 viennoiserie 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viennois = « 빈의, 빈 출신의, 빈에서 유래한 ». 빈 기원설을 믿는 사람들은 한술 더 나아가, 1770년에 마리-엉뜨와넷이 프랑쓰로 시집오면서 크르와썽을 프랑쓰에 들여왔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역대 프랑쓰의 왕비들이 모두들 자기 나라의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특별히 크르와썽에 관해서는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학 사전들에 의하면 croissant 이라는 단어는 1863년, viennoiserie 는 1977년에야 불어 문헌들에서 처음 확인됩니다. 따라서 마리-엉뜨와넷이 빈에서부터 들여왔다는 주장 만큼은 뒤늦은 발상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좋을 듯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빈 기원설을 통째로 무시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역사나 언어를 다 집어 치우고 빵 자체를 먹어 보면, 크르와썽은 회른헨이나 꼬르네또와는 전혀 다른 빵임을 알게 됩니다. 이딸리아에 가서 꼬르네또를 먹어 보면, 프랑쓰의 크르와썽과는 달리, 좀 눅눅하고 말랑거리는, 마치 크르와썽을 만들려다가 실패한 작품 ^^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꼬르네또의 반죽에는 우유와 달걀이 들어갔기 때문이지요. 결국 꼬르네또는 프랑쓰에서 브리오슈 (brioche) 라 부르는 빵과 맛과 질이 더 비슷합니다. 크르와썽에는 우유나 달걀은 전혀 들어가지 않고, 대신 버터가 많이 들어간 종잇장 반죽으로 구워, 바삭바삭하고 여러 겹이 일어나면서 부서지는 재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른헨은 직접 먹어 본 적이 없어 장담할 수 없지만, 만드는 방법과 재료가 꼬르네또와 매우 흡사한 것으로 보아, 비슷한 빵이라 추측됩니다.

그때문에 독어와 이딸리아어에는 불어에서 그대로 건너간 croissant 이라는 단어가 함께 사용됩니다. 즉 croissant 은 프랑쓰에서부터 수입된 종잇장 반죽의 빵을 지칭하고, Hörnchencornetto 는 원래부터 자기네 나라에 존재하던 브리오슈 반죽의 빵을 칭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독어로는 모르겠으나, 이딸리아어에서는 사실 이 두 말의 구분이 그다지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딸리아에서 크르와썽을 사면 자칫 꼬르네또인 경우가 많지요.

마지막으로, 불어의 croissant 은 물론 « 초승달 » 이라는 뜻의 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croître 동사의 현재분사입니다. 따라서 « 증가하고 있는, 성장 중인 » 이라는 뜻에 불과하며, 달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 외에도, 여러 다른 상황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크르와썽 (croissant) 또는 초승달 빵

dimanche 30 décembre 2007

성탄절 할아버지 (Père Noël)

우리나라에서는 성탄절날 선물을 가져다 주는 할아버지를 싼타 클로쓰라고 부르지만 불어로는 Père Noël 이라 합니다. père 는 물론 « 아버지 » 라는 뜻이지만, 이 때는 친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 아버지뻘 되는 사람,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노인 » 등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발작의 소설 Père Goriot 는 우리말로 « 고리오 영감 » 이라 번역하지요. 이것은 mère 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어에는 « 친어머니 » 라는 뜻 외에도 « 동네 아줌마, 할멈, 어멈 » 등의 뜻이 있습니다. 뻬로의 동화집 Contes de ma mère l'oye 를 « 엄마 거위의 이야기 » 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 거위 아줌마의 이야기 » 가 보다 올바른 해석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주 Père NoëlPapa Noël 이라고 부릅니다. papa 는 물론 père 의 애칭. 우리나라에서는 « 크리스마쓰 » 에 « 싼타 클로쓰 » 로부터 선물을 받으며 « 징글벨 » 을 부르지만, 프랑쓰에서는 Petit Papa Noël 이라는 노래가 대표적인 성탄절 노래입니다. 여기서 petit 는 뻬르 노엘의 키가 작아서가 아니라, 역시 친근함을 표시하기 위한 표현일 뿐.

한편 Santa Claus 라는 이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Saint Nicolas 의 이름이 변형된 것입니다. 19세기에 미국에서 태어난 싼타 클로쓰라는 인물은 사실 유럽에서 오래동안 어린이들의 수호 성인으로 숭배되었던 성 니꼴라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성 니꼴라의 축일날 (12월 6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성 니꼴라로 분장한 사람이 어린이들에게 사탕, 과자, 선물을 나눠 주는 풍습이 있었고, 지금도 드물게 행해집니다. 성 니꼴라는 프랑쓰에서는 특히 북부와 동부 지방에서 인기있는 성인인데, 특히 11세기에, 로렌 (Lorraine) 지방의 작은 도시 쌍-니꼴라-뒤-뽀르 (Saint-Nicolas-du-Port) 의 바질릭에 그의 유해 일부가 안치된 후, 로렌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 지역에서, 그리고 그 옆 지방인 알자쓰 (Alsace) 에서 성 니꼴라를 기념하는 풍습이 매우 크게 발전했지요.

성 니꼴라를 따라 다니는 채찍 영감 (Père Fouettard) 이라는 인물도 로렌의 수도인 메쓰 (Metz) 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습니다. 빨간 외투를 입은 성 니꼴라가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동안, 검은 옷을 입은 채찍 영감은 나쁜 아이들에게 채찍질 (fouet) 을 했다고 합니다. 또는 실제로 채찍을 휘두르지는 않더라도, 과자 대신 회초리나 몽둥이를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프랑쓰에서는 어린이들에게 겁을 줄 때, 너 말 안들으면 채찍 영감한테 벌받는다라고 위협하지요.^^

따라서 비교적 최근 (육칠십년대) 까지도 프랑쓰에서 어린이들이 가장 기다리던 명절은 성탄절이 아니라 성 니꼴라의 축일이었다고 합니다. 성탄절에 어른들끼리 선물을 주고 받는 풍습은 있었지만, 성탄절이 특별히 어린이를 위한 명절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미국으로부터 건너온 싼타 클로쓰 문화가 점차 퍼지면서 성 니꼴라의 전통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고, 오늘날 프랑쓰의 어린이들은 일년 내내 뻬르 노엘만을 기다리며 삽니다. 불쌍한 것들, 쯧쯧...

mercredi 17 octobre 2007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 (Francesca da Rimini)

polenta 는 보통명사로서 음식 이름이지만, 고유명사로서는 지명이자 인명이기도 합니다. 라벤나 (Ravenna) 를 1287년부터 1441년까지 다스렸던 가문 다 뽈렌따 (da Polenta) 는, 이름이 뜻하듯이, 근방의 작은 마을인 « 뽈렌따 (Polenta) 로부터 (da) »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다 뽈렌따 가문의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프란체스까일 것입니다. 유명하다고는 하나 그녀의 자세한 삶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는 젊은 나이에 리미니의 영주인 쟌초또 말라떼스따 (Gianciotto Malatesta di Rimini) 와 결혼해야 했으며 (1275), 그 때문에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 (불어로는 Françoise de Rimini) 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역사학의 관습을 따르자면 프란체스까 다 뽈렌따라고 부르는게 더 정확하겠지만). 프란체스까는 나이 많고 절름발이였던 남편보다는 그의 동생이었던 빠올로 (Paolo Malatesta di Rimini) 와 사랑에 빠졌고, 이것을 목격한 쟌초또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두 사람을 한꺼번에 살해하였습니다 (1285).

이 어찌보면 « 별것 아닌 » 사건은 단떼 (Dante Alighieri) 가 신곡 (Divina Commedia) 에서 다룸으로써 일약 전설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각각 남편과 형을 배신한 프란체스까와 빠올로는 지옥에 가게 되었지만, 지옥에서나마 두 사람은 영원히 맺어지게 되었고, 비슷한 죄를 지은 다른 영혼들, 쎄미라미쓰, 디동, 끌레오빠트르, 엘렌, 빠리쓰, 아쉴, 트리스떵 같은 유명한 연인들과 함께, 지옥의 두번째 테를 떠돌게 됩니다. 이 모든 전설적인 연인들 중에서 단떼는 유난히 빠올로와 프란체스까의 고통에 극심한 슬픔을 느낍니다.

단떼 이후 이 이야기는 한동안 잊혀졌다가, 19세기부터 갑자기 많은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이딸리아의 작가 뺄리꼬 (Silvio Pellico) 와 단눈치오 (Gabriele D'Annunzio) 는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라는 제목의 희곡을 썼으며 (각각 1815, 1901), 벨리니도니제띠와 함께 자주 일했던 로마니 (Felice Romani) 는 오뻬라 대본을 한 편 남겼습니다. 이 대본은 당대의 여러 « 이류 » 음악가들에 의해 오뻬라로 작곡되긴 했지만, 오늘날은 모두 잊혀졌습니다. 반면 챠이코프스키의 교향시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 (1876) 는 현재도 자주 연주되는 인기있는 작품입니다. 또 챠이코프스키의 동생인 모데스트 챠이코프스키도 같은 주제로 짤막한 오뻬라 대본을 썼으며, 여기에 맞춰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마지막 오뻬라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를 작곡하였습니다 (1905). 또 잔도나이 (Riccardo Zandonai) 의 가장 유명한 오뻬라이자 거의 유일하게 알려진 작품인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 (1914) 는 단눈치오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대본을 사용합니다.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의 화가들이 두 연인을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특히 앙그르는 빠올로와 프란체스까 (Paolo et Francesca) 라는 제목의 그림을 일곱 편 이상 남겼고, 로당 역시 빠올로와 프란체스까를 거대한 지옥의 문 (La Porte de l'Enfer) 속에 집어 넣기 위해 많은 궁리를 했습니다. (기타 빠올로와 프란체스까를 소재로 한 미술품 모음집)

jeudi 19 juillet 2007

성 드니 (Saint Denis)

프랑쓰는 이딸리아와 더불어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이딸리아 출신의 성인은 600 여명이 조금 넘고, 프랑쓰 출신은 600 여명이 조금 안됩니다. 하지만 사실 성인들의 국적과 수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한데, 옛날에는 국적의 개념이 없거나 불확실했으며, 국경이 현재와는 달랐고, 또 집단 학살 당한 순교자들의 경우 이름과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삶이 어느 정도라도 알려져 있고, 개인적인 명목으로 성인이 된 사람의 수는 대략 2500명 정도이지만, 실제로 이름이 교회력에 기록된 인물들의 수는 그 두 배가 넘으며, 이름 모를 순교자들까지 다 합하면 성인의 수는 수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비록 성인들의 국적을 따지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몇몇 성인들은 프랑쓰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드니 (Denis) 라는 성인이 있는데, 그는 3세기 무렵 살았던 사람이며, 빠리의 첫 주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빠리와 그 근방에서 선교를 하던 드니는 제국의 박해로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드니와 그의 제자들의 목이 잘린 장소는 당시 빠리 북쪽의 작은 산이었는데, 드니의 순교 이후 이 산은 Montmartre, 즉 « 순교자 (martyr) 의 산 (mont) » 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몽마르트르의 쒸잔-뷔이쏭 공원 (Square Suzanne-Buisson) 에 있는 성 드니의 동상

그런데 드니는 처형을 당하고도 죽지 않고, 자신의 잘린 목을 손에 들고는 계속하여 북쪽으로 걸어갔다고 합니다. 약 6 킬로 정도를 걷고서야 성 드니는 완전히 목숨이 끊겼고, 그가 쓰러진 자리에는 곧 그를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으며, 그 자리를 중심으로 하여 쌍-드니 (Saint-Denis) 라 불리는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 빠리와 경계를 이루는 이 도시는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 문제 » 도시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수세기 동안 이 도시는 프랑쓰 왕가의 공식 왕릉 역할을 했습니다. 몇몇 예외들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프랑쓰의 거의 모든 왕과 왕비가 성 드니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에 매장되어 있습니다.

dimanche 18 mars 2007

접두사 pan-

에르마프로딧 외에도 에르메쓰는 여러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뻥 (Pan) 이라는 신은 반은 인간, 반은 염소의 모습을 하고 태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곧 양치기들을 보호하는 신, 그리고 더 나아가 숲과 산과 동물, 즉 자연을 관장하는 신으로 숭배되었지요. 하지만 그의 흉칙한 모습과 동물적인 성격 때문에,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두 겁을 먹고 혼비백산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뻥 신에 의해서 유발된 이러한 혼란을 불어로 terreur panique (글자 그대로, « 뻥의 공포 »)이라 불렀었는데, 이 말이 결국은 줄어서 이제는 panique 이라고만 해도 « 극도의 공포 » 또는 « 갑작스러운 위기감 » 등을 의미하는 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paniquer 라는 동사마저 나왔지요. 이 단어는 타동사이자 자동사이므로 « 남에게 겁을 준다 » 는 뜻으로도, « 스스로 겁을 먹다 » 라는 뜻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뻥이 인간에게는 무서운 존재로 보였다면, 신들한테는 우스운 존재로 보였습니다. 에르메쓰가 갓 태어난 그의 아들을 신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 모든 신들이, 이 염소의 뿔과 꼬리를 가진 아기를 보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워 했다고 합니다. 그때문에 이 신의 이름이 Pan 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레쓰어로 pan, panto = 모두). 또다른 설에 의하면, 뻥이 자연의 신이다 보니, 결국 자연, 즉 세상 모두를 창조한 것으로 여겨져서 그를 뻥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발음과 철자가 같다는 점에 의존한 가설일 뿐, 오늘날 언어학자들과 신화학자들은 인정하지 않는 이론입니다.

아무튼 며칠 전 pantophobie (모든 것에 대한 포비) 라는 말로 보았듯, pan-, panto- 라는 말은 « 모든 » 이라는 뜻의 접두사 역할을 합니다. pan- 으로 시작하는 말을 불어사전에서 보면 상당히 많은데, 그 중 우리도 잘 아는 말로 panorama 가 있습니다. 이 말은 pan- + orama (시각, 시야), 즉 « 전경, 전망 » 을 뜻합니다. 불어와 영어 중 똑같은 철자를 쓰거나 비슷한 형태의 단어들 대부분은 불어에서 영어로 건너간 경우가 많은데, 이 말은 영어에서 먼저 생긴 후 불어로 수입된 말입니다.

또 빠리 시내에는 Panthéon 이라는 건물이 있지요. 이 이름은 pan- 과 theos 로 구성된 말로 , « 모든 신 » 이라는 뜻입니다. 애초에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어느 특정 종교의 모든 신을 통칭할 때 이 말을 자주 씁니다. 여기서 뜻이 확장되어 « 모든 신에게 바쳐진 사원 » 을 의미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거의 신적인 숭배를 받아도 좋을 만큼) « 위대한 인물들에게 바쳐진 전당 » 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빠리의 뻥떼옹

빠리의 뻥떼옹에는 현재 국가에 큰 공헌을 했다고 여겨지는 약 70여명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데, 사실 그 대부분은, 외국 사람들에게는 물론, 프랑쓰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입니다. 초기 공화국 시절들의 정치인들,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장군들 등이 많고, 의외로 과학자들이 꽤 많습니다. 그나마 이름이 비교적 잘 알려진 사람들이라면, 작가들로서, 볼떼르, 루쏘, 위고, 말로, 뒤마 뻬르 등이 뻥떼옹에 들어가 있습니다.

누가 뻥떼옹에 안치될 자격이 있고 없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를 통해 자주 바뀌었는데, 현재는 순전히 대통령 개인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가끔씩 이 문제로 토론이 한판씩 벌어지고는 합니다. 누구는 들어갈 자격이 있다, 누구는 없다, 누구는 다시 끄집어 내야 한다, 등등. 가장 최근에 토론이 되었던 사람은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 로써, 거의 들어가는게 확정되었었는데, 결국은 무효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베를리오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작곡가 한 명 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빠리의 뻥떼옹


한편 70명 이상의 인물 중 여자는 단 두 명인데, 그나마 그 중 한 명인 쏘피 베르뜰로 (Sophie Berthelot) 는 개인적인 업적 때문이 아니라, 화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남편 마르쓸랑 베르뜰로 (Marcelin Berthelot) 와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죽었기 때문에 그냥 함께 매장을 해 준 것입니다.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명목으로 뻥떼옹에 들어간 유일한 여자는 마리 뀌리 (Marie Curie) 뿐이지요. 어제 말했던 프랑쓰의 미조지니의 한 예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또다른 미조지니의 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Pandore 의 신화입니다. 뻥도르는 그레쓰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 여자인데, 신들로부터 온갖 (pan) 선물 (doron) 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미와 덕을 겸비했던 이 여자는 인간 세상에 보내졌는데, 절대로 한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호기심이 났던 뻥도르는 항아리를 열고 말았고, 거기서 온갖 종류의 악 (전쟁, 병, 고뇌, 슬픔, 등등) 이 뛰쳐나와 세상에 퍼지게 되었답니다. 다만 가장 마지막에 희망 만은 항아리 안에 남아 있었다고 하지요.

다른 해석에 의하면, 그 항아리 안에 들어있던 것들은 악이 아니라 바로 신이 준 모든 선물들 (아름다움, 행복, 지혜, 등등) 이었는데, 뻥도르가 뚜껑을 여는 바람에 모두 뛰쳐나와 다시 하늘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상에는 나쁜 것들만 남게 된 것이구요.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희망만은 항아리 안에 남아 있었던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인간들은 아무리 힘들고 고달픈 일이 많아도 희망을 갖고 살고 있는 것이라지요. 에이구, 그 놈의 희망이 뭔지...

samedi 17 mars 2007

접두사 mis-, miso-

접미사 -phile 의 반대가 -phobe 이라면, 접두사 phil(o)- 의 반대는 mis-,miso- 입니다. 이 접두사는 고대 그리쓰어 misein = « 싫어하다, 미워하다, 증오하다 » 에서 왔습니다.

misanthrope = « 인류를 미워하는 »
misanthropie = 윗단어의 명사형. 그리쓰어 anthropos = « 인간, 사람 » (anthropologie = 인류학).
misanthrope, misanthropie
의 반대는 philanthrope, philanthropie (인류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자, 박애정신) 입니다.

인류 중에서 유독 여자만 싫어하면 misogyne, misogynie 라 하지요. 프랑쓰는 제가 볼 때 상당히 미조진한 사회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는 프랑쓰보다 더 심한 나라들도 많지만, 프랑쓰 역시 여자들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합니다. 특히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차별이 행해지지요. 아무튼 이 말의 어원은 miso- + gunê 또는 gunaïkos = 그리쓰어로 « 여자 ». gynécologie = « 여성학 (의학에서) », gynécologue = « 산부인과 의사 ».

남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에 해당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 misandre, misandrie.
anêr, andros
= 그리쓰어로 « 남자 ».

사람 이름 André (또는 다른 나라 말로 Andrea, Andrew, etc.) 는 별게 아니라, 단지 « 남자 » 라는 뜻입니다. 프랑쓰의 거의 대부분의 이름들은 남성형과 여성형이 있는데, André 도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Andrée 라는 여자 이름이 있습니다 (발음은 같음 : [엉드레]). 딸한테 « 남자애 » 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좀 이상해 보이지만, 모든 부모들이 이름들의 기원을 다 알고 있거나, 이름을 지을 때 항상 기원을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요. 단지 발음이 예쁘다거나, 성과 같이 발음했을 때 잘 어울린다거나, 부모나 친척 이름을 따거나 하는 경우들이 많지요. 아니면 이름에도 세대별로 유행이 있습니다. Andrée 라는 이름은 옛날에 유행했던 이름으로,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날 극히 드물고, 그나마 다 할머니들이지요. 남자 이름 André 역시 젊은 층에서는 드문 편이나, 그래도 간혹 발견됩니다.

andro- 와 -gyne 를 합하면 androgyne 이 되지요. 이 말은 즉, 두 성을 모두 가졌다는 뜻입니다. 남자인데 여자처럼 생겼다거나, 여자인데 남자같은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 간혹 있지요. 하지만 이 말은 주로 외모로 성을 구분하기 힘들 때만 쓰이고, 의학적으로 실제로 두 성을 가진 경우는 hermaphrodite 이란 말이 더 자주 쓰입니다. 이 말은 사실은 고유명사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에르마프로딧 (Hermaphrodite) 은 그리쓰 신화의 인물로, 에르메쓰 (Hermès) 와 아프로딧 (Aphrodite) 의 아들이었는데, 어느날 쌀라마씨쓰 (Salmacis) 라는 이름의 낭프가 그의 미모를 보고는 사랑에 빠져, 그를 껴안고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애원이 하도 간절해서 신들이 결국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에르마프로딧은 양성을 모두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