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24 janvier 2011

떵쁠리에의 저주 (Malédiction du templier)

떵쁠회의 마지막 수장 (grand maître) 이었던 쟉 드 몰레 (Jacques de Molay) 는 동료 몇몇과 함께 1314년 3월 18일 억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빠리의 노트르 담 앞마당에 마련되었던 화형대에서 불길에 휩싸여 죽어가며 쟉 드 몰레가 떵쁠회를 파탄으로 몰아 넣은 프랑쓰의 왕 필립 4세 르 벨과 이것이 모함임을 알면서도 도와 주지 않은 교황 끌레멍 5세를 저주했다고 합니다. 매우 놀랍게도, 쟉 드 몰레가 죽은지 꼭 한 달 만에, 즉 4월 19일 밤에, 교황 끌레멍 5세가 죽습니다. 또한 같은 해 11월 20일에 필립 4세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합니다.

또한 쟉 드 몰레는 필립 4세 뿐 아니라, 그 자손 대대로에게까지 화가 있으리라 예언했다고 하는데, 프랑쓰 왕위를 이은 필립의 큰 아들 루이 10세 르 위땅 (Louis X le Hutin) 이 2년 만에 갑작스럽게 죽고 맙니다. 루이 10세의 아들 졍 1세 (Jean Ier) 는 이미 루이 10세가 죽은 후 태어났기에, 태어나면서부터 프랑쓰의 왕위에 올랐으나, 5일 만에 숨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졍 1세의 삼촌이자, 루이 10세의 동생, 즉 필립 4세의 둘째 아들이 필립 5세 (Philippe V) 라는 이름으로 왕이 됩니다. 그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하여 여자들이 왕위를 잇지 못하게 하는 쌀릭법을 제정하기도 하였지만, 5년간의 통치 끝에 딸만 넷을 남긴 채 죽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후손 중 어느 누구도 왕위를 잇지 못하고 대신 동생, 즉 필립 4세의 셋째 아들인 샤를 4세 (Charles IV) 가 왕위에 오르지만, 그 역시 6년의 통치 후 아무 자식 없이 죽습니다. 이로써 필립 4세의 세 아들은 모두 왕위에 올랐지만 모두 비교적 단기간 내에 죽었으며, 이상하게도 아들만 왕이 될 수 있다는 법을 정한 후부터 아들은 전혀 태어나지 않아, 꺄뻬씨앙 (Capétiens) 직계 왕조는 프랑쓰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그 와중에 세 왕의 부인들, 즉 각각 마르그릿 드 부르고뉴 (Marguerite de Bourgogne), 쟌 드 부르고뉴 (Jeanne de Bourgogne), 그리고 블렁슈 드 부르고뉴 (Blanche de Bourgogne) 가 합동으로 젊은 귀족들을 끌어 들여 간통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이 세 왕비들은 모두 삭발을 당한 채 감금되어 살다가 처참하게 죽고 맙니다. 실제로 쟉 드 몰레가 화형대에서 저주를 내뱉었는지는 전혀 확인할 수 없으며, 이렇게 프랑쓰 왕가에 닥친 일련의 불운한 사건들이 훗날 사람들에게 그러한 저주가 있었다고 상상을 하게 한 듯 싶습니다. 특히 모리쓰 드뤼옹 (Maurice Druon, 1918-2009) 의 소설 저주받은 왕들 (Les Rois maudits) 이후로 이 사건은 매우 대중적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총 일곱 권의 대하소설인 이 연작은 프랑쓰에서 매우 큰 인기를 끌었고, 텔레비젼 씨리즈로도 두 차례나 만들어진 적이 있습니다 (1972, 2005).

꺄뻬씨앙의 직계 후손이 끊긴 이후, 프랑쓰의 왕권을 두고 많은 논란이 오고 간 후, 결국은 사촌 가문인 발르와 왕조의 필립 6세 (Philippe VI de Valois) 가 왕이 되는데, 이것을 시비 삼아 영국에서 프랑쓰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백여년간이나 지속되었으니, 정말로 쟉 드 몰레의 저주가 있었다면 아주 지독하고 긴 저주임에는 분명합니다. 백년 전쟁 말기가 되어서야 겨우 하늘에서 보냈다는 쟌 다르크 (Jeann d'Arc) 가 나타나 프랑쓰를 구원하지요. 그런데 쟌 다르크도 충실히 섬겼던 프랑쓰 왕의 버림을 받고, 모함에 몰려, 조작된 증거물들로 꾸며진 거짓 재판을 받은 후, 이단자로 낙인 찍혀 화형대에서 죽습니다. 백여년 전 쟉 드 몰레와 매우 비슷한 운명을 겪은 것이지요.

lundi 17 janvier 2011

떵쁠리에 (Templiers)

떵쁠리에들은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활동했던 기사 (chevalier) 이자 수사 (moine) 였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1차 십자군 전쟁의 성공으로, 유럽인들은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성지 순례가 다시 가능하게 되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험은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1118년, 위그 드 빵 (Hugues de Payns) 이라는 기사가 다른 여덟 명의 동료를 모아 « 그리스도의 작은 기사들 » (Pauvres chevaliers du Christ) 이라는 조직을 만듭니다. 이들은 유럽에서부터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항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안전하게 경호하는 역할을 했고, 이것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예루살렘의 왕 보두앙 2세 (Baudouin II de Jérusalem) 는 자기가 살던 궁의 일부를 이 가난한 기사들에게 내어줍니다. 보두앙 2세가 살던 궁전은 그 옛날 (기원전 10세기) 쌀로몽 왕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있었기에, 성전 즉 Temple 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하여 1119년부터 이들은 « 떵쁠의 기사 (chevaliers du Temple) » 또는 « 떵쁠리에 (Templiers) »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떵쁠리에들의 특징은 기사이면서 동시에 수사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한 데 있습니다. 창립된 지 꼭 십년 째 되던 해에 (1128), 이미 그 수가 매우 불어난 이 군사-종교적 조직은 트르와 공의회 (Concile de Troyes) 에서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수도회 인가를 받고, 고유한 규칙과 의상 등을 정합니다. 이후로 점점 더 번성한 떵쁠회 (Ordre du Temple) 는 예루살렘 왕국과 그 주변은 물론 유럽 각국에도 수많은 분원을 세웠습니다. 프랑쓰에만 삼천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빠리의 떵쁠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수도원 외에도 이들은 성과 군사적 요새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떵쁠회는 군사적 조직이긴 했지만,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싸움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떵쁠리에들 중에서도 일부 만이 말을 타고 칼과 창을 쓰는 기사였고, 다른 많은 떵쁠리에들은 수도원이 운영될 수 있도록 여러가지 다른 업무를 맡아 생활했습니다. 특히 씨또회 (Ordre de Cîteaux) 의 영향을 많이 받은 떵쁠회는 직접 농경지를 가꾸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일을 주요 임무로 생각했습니다. 떵쁠리에들의 이러한 검소한 모습과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용감한 모습, 그리고 순례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희생적인 모습 등이 복합되어, 떵쁠리에들은 많은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떵쁠리에들은 놀랍게도 은행가의 역할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어음이나 수표 등을 발명한 사람이 떵쁠리에들인 셈인데, 멀리 바다 건너 예루살렘까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이 몇 년에 걸치는 여행 기간 동안 현금을 들고 다니기가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에 있는 떵쁠 아무 곳이나 찾아가 자신들의 경비를 맡겼고, 대신 그것을 증명해 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후 빨레스띤에 도착한 다음 또다시 아무 떵쁠이나 찾아가 그 증서를 내밀면 그에 해당하는 현금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 씨스템은 반드시 유럽과 빨레스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 내에서도 활용되었으며, 또한 자신들의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용감한 군인인 동시에 검소한 떵쁠리에들에게 돈이나 보석, 보물을 맡기고 관리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심지어 프랑쓰의 왕도 자신의 개인 재산을 떵쁠리에들에게 맡겼으며, 여러 지방에서 거두는 세금 따위가 모두 빠리의 떵쁠에 도착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국세청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이 모든 것이 떵쁠리에들의 돈이 아니었지만, 점차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떵쁠리에들이 본연의 모습을 버리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더군다나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 끝에 결국은 유럽인들이 1291년 빨레스띤에서 철수하고 나서는, 더이상 떵쁠리에들은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원래 의무가 없어졌으니까요. 따라서 한때 많은 인기를 누리고 존경을 받았던 떵쁠리에들이 점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307년 10월 13일, 프랑쓰 전국의 모든 떵쁠리에들이 일제히 왕명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떵쁠리에들을 갑자기 체포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전국의 모든 떵쁠리에들을 동시에 체포했다는 것은, 이 사건이 매우 치밀하게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체포를 명한 필립 4세 르 벨 (Philippe IV le Bel) 은 부족한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 떵쁠리에들이 축적한 것으로 믿어지는 어마어마한 부를 빼앗을 생각이었습니다. 게다가 떵쁠리에들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도 부정적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치밀한 준비 끝에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때 교황으로 선출된 지 얼마 안 된 끌레멍 5세 (Clément V) 가 교회의 수사들을 함부로 잡아 들인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형식적인 반감을 표했지만, 끌레멍 5세도 사실은 애초에 프랑쓰 왕권의 힘으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그는 보르도의 주교였고, 처음으로 로마에 가기를 거부하고 아비뇽 (Avignon) 에 머문, 프랑쓰 출신의 교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문에 못이긴 떵쁠리에들이 스스로 죄를 고백하는 바람에 교황도 명목을 잃었습니다. 고문 끝에 자백한 떵쁠리에들의 죄상은 그리스도 모독, 우상 숭배, 성물과 성직 매매, 음란한 비밀 의식, 동성애, 등등 이루 말도 안되는 것들이었으며,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필립 르 벨과 그의 측근들은 이것을 합법적으로 통과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7여년에 걸친 재판 끝에 떵쁠회는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떵쁠회의 마지막 수장 쟉 드 몰레 (Jacques de Molay) 는 이단자의 선고를 받아 1314년 3월 18일 노트르 담 (Notre Dame)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집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떵쁠리에들을 화형시키거나 고문 끝에 죽였지만, 필립 4세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떵쁠의 재산은 위에서 말했듯 그들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위탁된 것이었으며, 떵쁠 고유의 재산은 떵쁠회가 해체된 후 오삐딸회 (Ordre de l'Hôpital) 를 비롯한 다른 수도원들에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떵쁠의 진짜 보물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믿는 전설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소설이나 영화, 놀이의 주제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시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떵쁠리에들이 실제로 은밀한 의식을 행하던 비밀 종교 조직이었으리라는 낭만적인 상상과, 쟉 드 몰레가 죽으면서 퍼부었다는 저주가 모두 들어맞으면서 떵쁠리에들은 일종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dimanche 9 janvier 2011

떵쁠 (Temple)

렁발 공주가 프랑쓰 왕가와 함께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낸 떵쁠의 탑 (Tour du Temple) 은 떵쁠의 집 (Maison du Temple) 을 구성하던 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떵쁠의 집은 중세에 떵쁠리에 (Templier) 들이 오늘날의 빠리의 3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세운 넓은 공간으로, 중세에는 거의 독립된 도시와도 같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떵쁠리에들은 십자군 전쟁 시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활동했던 수사이자 군인이면서, 은행가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애초에 떵쁠회 (Ordre du Temple) 는 예루살렘의 성전 (Temple) 이 있던 자리를 첫 본거지로 삼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는데, 크게 번성하여 유럽 도처에 분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을 떵쁠의 집이라 불렀지요. 빠리의 떵쁠도 그 중 하나로, 다른 떵쁠의 집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넓은 농지로 구성되었습니다. 흔히 떵쁠리에들을 군인이나 은행가로만 보지만, 실제로는 다른 수사들처럼 땅을 경작하는 일에도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따라서 농사에 관계된 여러 부속 건물들 (곳간, 마굿간 등등) 이 있었으며, 빠리의 떵쁠은 사각형의 거대한 탑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늪과 습지에 불과했던 이 지역은 빠리의 외곽으로서, 떵쁠리에들은 상당히 넓은 영토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을 성벽으로 둘러 쌓아 요새화 시켰습니다.

1450년 경의 떵쁠을 묘사한 그림

하지만 1312년 프랑쓰의 왕 필립 4세 르 벨 (Philippe IV le Bel) 과 교황 끌레멍 5세 (Clément V) 가 떵쁠회를 폐지시키면서, 떵쁠회의 재산과 소유지는 모두 오삐딸회 (Ordre de l'Hôpital) 로 넘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리의 떵쁠은 여전히 떵쁠이라 불리면서 여러 변화를 거치지요. 우선 빠리 시내가 커지면서 떵쁠이 빠리 시내의 일부가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여러 저택과 집들이 들어서고, 병원, 묘지, 정원 등이 생겨납니다. 거대한 떵쁠의 탑은 14세기 말에 잠시 감옥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16-17세기에는 군대의 무기고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는 문서보관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6세기 말에는 원래 있던 50 미터 높이의 떵쁠의 탑 (Grande Tour) 앞에 그 절반 정도 높이의 작은 탑 (Petite Tour) 을 덧붙여 세워, 문서보관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살기도 했습니다. 17세기에는 베르싸이으를 건축한 아르두앙-멍싸르 (Jules Hardouin-Mansart) 가 오삐딸회의 대원장을 위한 궁전 (Palais du Grand Prieur) 을 세웠으며, 이 건물은 18세기에 아르뜨와 백작 (comte d'Artois), 즉 루이 16세의 동생이자 훗날의 샤를 10세의 소유가 됩니다.

18세기의 떵쁠 탑을 묘사한 그림

비록 중세의 두껍고 투박하고 순전히 군사적인 보호를 목적으로 하던 성벽은 사라졌지만, 떵쁠은 여전히 보다 낮고 보다 얇은 벽으로 둘러쌓인 동네였습니다. 이 동네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딱 하나의 문 밖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꼬뮌 드 빠리는 왕정이 무너진 후 왕가를 떵쁠에 가두기로 했던 것입니다. 즉 통제를 하기가 쉬웠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왕가를 떵쁠로 이송한다고 했을 때, 그래도 프랑쓰의 왕실인데, 모두들 대원장의 궁에 머물게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꼬뮌 드 빠리는 작은 탑을 왕실의 거처로 정했습니다. 그나마도 큰 탑이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수리하는 동안만이었습니다. 따라서 작은 탑에서는 약 한 달 여간, 그리고 큰 탑으로 옮겨가서는 식구별로 최소 4개월에서 최대 3년 넘게까지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우선 루이 16세가 떵쁠을 가장 먼저 떠나긴 했지만, 이것은 1793년 1월 21일 기요띤에 목이 잘리기 위함이었지요. 다음으로 마리-엉뜨와넷이 1793년 8월에 꽁씨에르쥬리 (Conciergerie) 로 이감됩니다. 1794년 5월에는 루이 16세의 여동생 엘리자벳 (Élisabeth) 공주가 역시 기요띤 형을 당하고, 1795년 6월에는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살던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이 결핵으로 죽습니다. 유일한 생존자는 루이 16세의 첫째 딸 마리-떼레즈 (Marie-Thérèse) 로, 그녀는 1795년 12월 외스터라이히 제국에 잡혀 있던 네 명의 프랑쓰 포로와 교환됩니다. 

이후 세월이 바뀌면서 왕정주의자들이 떵쁠의 탑을 마치 순례지처럼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자, 황제가 된 나뽈레옹이 1808년 탑을 제거하게 합니다. 지금은 탑이 있던 자리를 표시해 주는 흔적 만이 길 위에 그려져 있습니다.

탑이 있던 자리의 한 쪽 모퉁이를 표시해 주는 3구 구청 앞의 흔적

lundi 15 novembre 2010

렁발 공주 (Princesse de Lamballe)

뽈리냑 부인이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의 관심을 독차지하기 전에 왕비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렁발 공주였습니다. 렁발 공주는 뽈리냑 부인보다 훨씬 지체 높은 귀부인이었으며, 뽈리냑 부인과는 달리 전혀 왕비의 권력을 악용하지 않았고, 모두가 왕가를 버린 뒤에도 마지막까지 왕비의 곁에 남아 있었으며, 결국에는 순전히 왕비의 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처참한 죽음을 당한, 그야말로 진정한 친구라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 « 렁발 공주 » 라 불리는 그녀의 본래 이름은 마리-떼레즈였으며, 싸브와-꺄리녕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Marie-Thérèse de Savoie-Carignan). 싸브와-꺄리녕 가문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문인 싸브와 가문의 한 일파로써, 당시에는 까리냐노 (Carignano) 라는 작은 공국을 다스렸으나, 훗날 이딸리아가 통일된 후, 이딸리아 왕들은 모두 이 가문에서 배출됩니다. 마리-떼레즈는 까리냐노의 왕자 루이-빅또르 (Louis-Victor) 의 딸로 1749년 9월 8일에 또리노 (Torino) 에서 태어났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 같은 날 빠리에서는 뽈리냑 부인이 태어났습니다. 즉, 마리-엉뜨와넷이 가장 사랑했던 두 친구는 생년월일이 같습니다.

그보다 거의 정확하게 2년 전, 즉 1747년 9월 6일에는 빠리에서 루이-알렉썽드르 드 부르봉 (Louis-Alexandre de Bourbon) 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루이 14세가 몽떼스뻥 부인 (Madame de Montespan) 으로부터 얻은 자식의 후손으로, 혼외 자식, 또는 우리 나라 식으로 치자면, 후궁의 태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르봉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왕자의 칭호를 받았으며, 브르따뉴 (Bretagne) 지방에 있는 도시 렁발 (Lamballe) 을 영지로 받아, 렁발 왕자 (Prince de Lamballe) 라 불렸습니다. 바로 이 사람과 1767년 결혼함으로써 꺄리녕 공주 (Principessa di Carignano) 는 렁발 공주 (Princesse de Lamballe) 가 된 것이지요.

이렇게 이중으로 공주의 자격을 지니기는 하였지만, 렁발 부인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던 렁발 왕자는 결혼한 지 겨우 1년 만에 죽고 말았으며, 그것도 다른 여자로부터 얻은 성병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렁발 공주는 19살에 과부가 되었지만, 착하고 온화한 성격을 지녔던 그녀는 이후로 시아버지를 모시며 자선 사업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770년 프랑쓰의 도팡 (dauphin) 에게로 시집 온 마리-엉뜨와넷을 만나게 되지요. 당시 렁발 공주는 21살, 도핀 (dauphine) 은 15살이었습니다. 갑자기 외국의 낯선 환경에서 살게된 어린 세자빈은 역시 외국에서 프랑쓰로 시집 온 렁발 공주에게서 친언니의 따뜻함을 느끼고, 두 사람은 곧 둘도 없는 사이가 됩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약 5년 정도 지속되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마리-엉뜨와넷은 렁발 공주에게서 싫증을 느낍니다. 물론 그녀에 대한 우정어린 마음은 기본적으로 지속되었지만, 나이 어린 세자빈에게 렁발 공주는 지나치게 순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경박하기로 유명했던 마리-엉뜨와넷은 더 재미나고 자극적인 것을 원했지요. 마침내 프랑쓰의 왕비가 되자, 마리-엉뜨와넷은 렁발 공주를 왕비전의 총감독 (surintendante de la maison de la reine) 으로 임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높은 직책이었고, 매우 많은 급여를 받는 지위였으며, 왕비의 모든 생활을 총괄하는 명예로운 자리였지만, 사실상 이 때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집니다. 대신 왕비는 뽈리냑 부인과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잘 알려진대로 뽈리냑 부인은 철없는 왕비의 즉각적인 즐거움만 부추기다가 오히려 그녀에게 큰 해만 입히고, 혁명이 일어나자 왕비를 두고 외국으로 도주합니다. 하지만 렁발 공주는 오히려 이 때부터 더욱 왕비 곁에 가까이 머물렀으며, 1789년 10월 6일, 왕실이 빠리로 끌려오게 되었을 때, 자진하여 왕가를 따라 함께 뛰일르리 (Tuileries) 로 옵니다.

뛰일르리에 갇혀 살았던 3여년간 왕비와 공주는 다시 예전의 우정을 되새기게 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더욱 우정을 굳혔습니다. 하지만 1791년 6월 20일, 왕실이 뛰일르리를 탈출했을 때, 렁발 공주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믿지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녀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마리-엉뜨와넷은 렁발 공주를 탈출 계획에서 멀리하려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에 의하면, 렁발 공주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꼼짝 못하고 갇혀 살아야 했던 왕비에 비해, 렁발 공주는 자유롭게 궁을 드나들 수도, 외국으로 여행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왕비의 심부름을 했습니다. 비밀리에 행해진 심부름이었기데 그 정확한 내용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탈출 준비와 연관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탈출에 실패한 후, 더욱 삼엄한 감시를 받는 왕비의 수족 역할을 렁발 공주가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번번이 왕비는 렁발 공주를 외국에 심부름 보내면서 돌아오지 말 것을 명했지만, 공주는 위험에 처해 있는 친구를 버리지 못해, 매번 빠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왕실이 겪는 모든 치욕을 함께 겪었지요.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특히 1792년 8월 10일 — 뛰일르리를 침입한 폭도들을 피하기 위해, 왕이 국회에 목숨을 보호해 달라고 무릎꿇어야 했던 날, 렁발 공주는 왕가와 함께했으며, 국회가 내어 준, 지붕이 낮은 서기실에서 3일을 왕가와 함께 보냅니다. 이 사건으로 국회는 왕권을 정지시키고, 8월 13일, 왕가를 폭동으로부터 보호한다는 핑계 하에 떵쁠 (Temple) 의 한 탑에 가둡니다. 이 때도 렁발 부인은 왕실을 따릅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8월 19일 밤에 꼬뮌 드 빠리 (Commune de Paris) 는 렁발 부인을 체포하여 포르쓰 감옥 (prison de la Force) 에 따로 가둡니다. 애초에 렁발 부인을 비롯하여 몇몇 시종을 허락한 것은 왕가를 잘 대접한다는 듯한 인상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을 뿐, 왕가의 운명을 손에 쥔 꼬뮌 드 빠리는 전혀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 의도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렁발 공주는 1792 년 8월의 마지막 열흘을 따로 격리된 채 보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가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날들이었죠. 9월초부터 빠리에는 훗날 9월 학살 (massacres de septembre) 이라 불리게 될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시민들이 빠리의 여러 감옥들을 돌며, 혁명에 비혐조적이라 여겨지는 사람들, 숭고한 혁명 정신에 흠이 될 사람들, 왕가에 우호적인 태도를 비친 사람들을 마음대로 판결하여 죽인 학살 사건이었습니다. 9월 2일부터 시작하여 때로는 5일까지, 때로는 6일이나 7일까지로 지속되었다고 보는데, 아무튼 이 며칠 동안 약 1 300 명의 죄수들이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이 때 가장 많이 죽은 사람들은 혁명 정부에 선서를 하지 않은 신부들 (prêtres réfractaires) 이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는 그다지 상관 없는 일반 범죄자들과 매춘부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뛰일르리에서 일한 적이 있었던 사람들, 근위대 병사들 등도 왕가와 친밀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으며, 감옥에 갇혔 있던 몇몇 귀족들이 특히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렁발 공주이지요.

9월 3일 아침에 포르쓰 감옥의 마당에서 그녀는 약식으로 차려진 재판대에 불려 나와 왕을 고발하라는 다그침을 받았지만, 이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녀의 머리를 망치로 여러 차례 내려쳤다고 합니다. 아마 이로 인해, 그녀는 죽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망치에 머리를 맞아 죽는 것이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그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녀가 죽었는지 아직 살아있는지 상관도 하지 않은 채, 쓰러진 그녀의 몸을 강간했으니까요. 이후, 사람들은 그녀의 몸을 난도질했고, 가슴과 성기를 도려내었으며, 몸을 갈라 심장과 창자를 꺼내어 그것을 구워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건 사람들은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시체를 창에 꽂아 마치 인형처럼 가지고 다녔으며, 목은 따로 잘라 다른 창 끝에 꽂아 기념패처럼 과시했습니다. 술에 취한 대중들은 렁발 공주의 머리를 미용사에게 가져가 새로 가발을 씌우고 화장을 시킨 후, 떵쁠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왕실이 갇혀 있던 탑 밑에서 창을 치켜 들며, 왕비로 하여금 친구의 죽은 입술에 입맞추기를 요구했습니다. 다행히 떵쁠을 지키던 시청 직원들이 미리 덧창을 닫고, 흥분한 대중들을 저지하였습니다. 덕분에 왕비는 이 광경을 직접 보는 고통은 겪지 않아도 되었지만, 바로 창문 밖에 렁발 공주의 잘려진 목과 조각난 시체가 끌려다니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정신을 잃기에 충분했습니다.

오후 다섯시 무렵까지 웅성대던 군중들은 점차 흩어졌고, 렁발 공주의 시체는 무관심하게 버려졌습니다.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쟉 쁘왕뗄 (Jacques Pointel) 이라는 한 시민이 렁발 공주의 조각난 시체들을 모아 고아들이 묻히는 무덤에 묻어 주었고, 뒤늦게 며느리의 참상을 들은 렁발 공주의 시아버지가 그녀의 시신을 가족 묘지로 이전시켰습니다. 이후로 렁발 공주는 왕정파들에 의해서 순교자로 추앙되기도 하는데, 마리-엉뜨와넷이 신이 아닌 이상, 이런 표현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렁발 공주가 친구와의 우정, 자기가 섬기던 사람에 대한 충성을 목숨을 바쳐 지킨 것은 매우 고귀한 행동이었습니다.

dimanche 8 août 2010

뽈리냑 부인 (Madame de Polignac)

뽈리냑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18세기 (1749-1793) 에 살았던 뽈리냑 부인일 것입니다. 본명이 욜렁드 드 뽈라스트롱 (Yolande de Polastron) 인 그녀는 1767 년 쥘 드 뽈리냑 (Jules de Polignac) 과 결혼함으로써 뽈리냑 백작부인 (comtesse de Polignac) 이 됩니다. 뽈리냑 가문은 매우 오래된 명문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욜렁드의 친정인 뽈라스트롱 가문도 비슷한 처지이긴 마찬가지였구요. 당시 가난한 귀족은 사실상 평민보다도 더 못한 처지일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더했지요. 가난한 남자 귀족들은 최후의 방책으로 군대에 가서 군인으로서의 경력이라도 쌓을 수 있었지만, 여자 귀족들은 아무 일이나 할 수도 없었으며,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품위가 있었으므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가난한 여자 귀족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자기 보다 좋은 형편의 귀족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넉넉치 못했던 뽈라스트롱 가문도 큰 딸 욜렁드를 명문가 뽈리냑에 시집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뽈리냑 가문 역시 당시에는 빚에 허덕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명문가의 백작부인으로서 욜렁드 드 뽈리냑은 베르싸이으궁을 몇 번 구경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드문 기회 중 한 번, 1775년의 어느 여름 날, 그녀는 왕비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의 눈에 띄는 행운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욜렁드는 스물여섯 살이었으며,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지만, 그녀의 몸가짐, 시선,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어리고 청순하며 온화하고 부드러워, 당대 사람들이 그녀를 두고 «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얼굴 (le plus charmant visage qu'on pût voir) » 이라거나 « 천상의 표정 (l'expression céléste) » 등으로 묘사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초상화를 보면, 설사 미화되었다 치더라도, 훗날 알려지게될 이기적이고 뻔뻔하고 악독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뽈리냑 부인의 초상
엘리자벳 비제-르브랑 (Elisabeth Vigée-Lebrun)
Château de Versailles


실제로 뽈리냑 부인은 매우 소박하고 겸손하고 얌전한 여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이 왕비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지요. 왕비는 직접 그녀에게 누구인지, 어째서 궁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뽈리냑 부인은 너무나 솔직하고 담담하게 집안 사정이 넉넉치 못하기 때문에 베르싸이으에 자주 올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의심했던 것과는 달리 이 때 뽈리냑 부인에게 다른 흑심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정말로 거의 어리석다 싶을 만큼 순진무구한, 베르싸이으의 거짓과 위선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가난한 시골 여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이 솔직한 한마디 이후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순진한 뽈리냑 부인과는 정반대로 거짓과 위선에 둘러싸인 삶을 사는 왕비 마리-엉뜨와넷은 천사 같은 여자의 입에서 나온 이 겸손한 고백에 완전 감동받았기 때문이지요. 이후로 뽈리냑 부인은 왕비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어, 그녀 자신은 물론, 그녀의 남편과 가족, 친척, 친구들 모두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가 멈출 줄 모르고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왕가는 국고를 열어 뽈리냑 집안의 빚을 모두 청산해 주었으며, 뽈리냑 집안의 일원들 모두에게 궁궐 내의 요직을 내주고, 따라서 이들은 베르싸이으에 정착해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1780년에는 쥘 드 뽈리냑이 공작에 봉해짐으로써, 욜렁드 역시 더이상 백작부인이 아닌 공작부인 (duchesse de Polignac) 으로 승격되며, 1782년부터는 왕손의 보호자 (gouvernante des enfants royaux) 역할을 맡게 됩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뽈리냑 부인과 그 일파가 누리는 이 모든 특권에 대해 많은 시샘과 비난이 몰아쳤지만, 그럴수록 왕비는 더욱 더 자신의 착하고 가난하고 연약한 친구를 보호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뽈리냑 부인에게 많은 권력을 쥐어 줍니다.

오늘날, 뽈리냑 부인의 진짜 속마음이 어땠는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과연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던 것처럼 왕비의 순수한 우정을 이용만 해먹은 이기적인 악녀였을까요 ? 꼭 그렇다고만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 증언들, 왕비 자신의 편지들, 당대의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뽈리냑 부인이 대단한 야심을 품고 의도적으로 왕비에게 접근해서, 조금의 진심도 섞이지 않은 마음으로 겉으로만 왕비와 친한 척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위에서 이미 말했듯, 그녀는 상당히 순진하고 소박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고, 왕비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우정을 베풀자 그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가난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빚에 더이상 시달리지 않고 마음껏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러면서 점점 더 지위와 권세가 높아지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 생활에 익숙해 지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한 사람이 권력을 쥐게 되면 그 본인 보다도 주위에서 더 설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어찌보면 왕비와 뽈리냑 부인의 우정을 이용한 것은 뽈리냑 부인 자신보다도 뽈리냑 부인에게 빌붙어 어떻게든 권세를 누리고 싶어하는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왕비 뿐 아니라 왕 루이 16세 (Louis XVI) 역시 뽈리냑 부인에게서 매우 진실되고 아름다운 인품을 느껴, 그녀를 역시 친구로 여긴 점이나, 자신의 아이들의 교육과 보호를 기꺼이 뽈리냑 부인에게 맡긴 것, 왕비가 뽈리냑 부인의 아이들 역시 친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여러 차례 말한 점 등을 볼 때, 이들의 우정이 순전히 권력과 부에만 기반을 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뽈리냑 부인의 우정이 아무리 진실된 것이었다 해도, 그녀는 마리-엉뜨와넷과 왕가에게 큰 해를 끼쳤습니다. 왕실의 국고를 탕진한 것 외에도, 그녀는 왕비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함으로써, 그녀를 다른 귀족들로부터 고립시켰습니다. 마리-엉뜨와넷은 안그래도 궁궐의 온갖 허례허식을 귀찮아 하고 있었는데, 뽈리냑 부인이 더욱 그녀의 그러한 성향을 부추기는 바람에, 그녀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왕비로서의 의무 대부분을 저버리고 그저 마음에 맞는 젊은 친구들과 놀고 먹고 즐기는 데만 집중해서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왕비의 명예는 백성들 뿐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크게 실추했고, 이는 프랑쓰 혁명을 앞당기는 데에 한 역할을 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789년 7월 14일 빠리 시민들이 바스띠으 (Bastille) 를 공격함으로써 프랑쓰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겨우 이틀 뒤 뽈리냑 부인은 왕비를 버리고 국외로 도주합니다. 이 역시 뽈리냑 부인의 진심을 매우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었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릅니다. 당시에 많은 귀족들이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기미를 느끼고 프랑쓰를 떠나기 시작했고, 특히 루이 16세의 친동생들이 가장 선두가 되어, 형과 형수 및 조카들의 운명을 나몰라라 하고 저버렸습니다. 뽈리냑 부인은 사실 왕비 옆에 남아있겠다고 했지만, 왕과 왕비가 먼저 나서서 뽈리냑 가족에게 떠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물론, 명을 거역하면서라도 뽈리냑 부인이 왕비 옆에 남았더라면 좀 더 숭고한 우정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역시 일단 살고 보자는 주변의 재촉에, 약한 성격의 뽈리냑 부인은 왕 부부의 명에 조금 저항하다가 맙니다.

이후 뽈리냑 가족은 유럽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결국 왕비의 고향인 빈 (Vienne) 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왕비와 뽈리냑 부인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그 내용 역시 매우 감동적입니다. 뽈리냑 부인의 망명 생활은 별로 행복했던 것 같지 않으며, 특히 1793년 10월 16일 왕비가 기요띤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뽈리냑 부인 역시 큰 고통과 후회로 눈물 젖은 생활을 보내다 두 달이 채 못 된 12월 9일 숨을 거두고 맙니다.

samedi 17 juillet 2010

뽈리냑 가문 (Maison de Polignac)

아르나웃 까딸란 (Arnaut Catalan) 의 깐쏘 Anc per null temps no.m donet iai, PC 27,4베아트리쓰 드 싸브와 (Béatrice de Savoie) 에게 바쳐진 노래 (canso) 일 뿐 아니라, 또 한 명의 후원자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가장 마지막 또르나다 (tornada) 에서 언급되고 있는 « Seinh'en vescoms de Polinhac », 즉 뽈리냑 자작이 그 사람입니다. 이 뽈리냑 자작이 정확히 누구인가에 대해서 몇가지 의견이 있었지만, 알려진 정보가 너무 적고, 그나마도 서로 모순되고 있기에, 명확히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르나웃 까딸란의 작품들을 편집한 페루쵸 블라지 (Ferrucio Blasi) 는 에라끌 3세 드 뽈리냑 (Eracle III de Polignac) 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의 주장은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말하길 에라끌 드 뽈리냑은 1201년에 죽었으며, 이 깐쏘는 1220년 이후에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무렵에 아르나웃은 어린 에라끌을 만났을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 어느 부분에선가 착각을 일으킨 듯 합니다. 참고로 1220년 경에 뽈리냑의 공식적인 자작으로 있었던 사람은 뽕쓰 5세 (Pons V) 입니다.

따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아르나웃이 찬양하고 있는 뽈리냑은 뽕쓰 5세라고 생각하지만, 누가 되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뽈리냑 가문이 중세 때부터 이미 음악과 문학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유명하고 오래된 프랑쓰의 귀족 가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집안은 870년 경부터 뽈리냑 (Polignac) 을 다스리기 시작하여 1385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때에 마지막 상속녀였던 자작부인 발쀠르쥬 (Valpurge de Polignac) 의 사망으로 결국 맥이 끊기 맙니다.

하지만 발쀠르쥬 드 뽈리냑은 기욤 드 샬렁쏭 (Guillaume de Chalençon) 과 결혼했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삐에르-아르멍 (Pierre-Armand) 은 샬렁쏭의 백작인 동시에 뽈리냑의 자작이었습니다. 그는 오래된 명문인 어머니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해서인지, 두 이름을 합하여 샬렁쏭 드 뽈리냑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가문의 이름은 결국 뽈리냑으로 축소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실은 샬렁쏭인 이 집안을 두번째 뽈리냑 가문이라고 부릅니다.

두번째 뽈리냑 가문 (2e maison de Polignac) 은 별다른 문제없이 아들에서 아들로 수백년간 이어져 내려오면서 자작 (vicomte) 에서 백작 (comte) 으로, 백작에서 공작 (duc) 으로 그 지위를 높이는 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으로 뽈리냑 공작의 작위를 받은 사람은 쥘 (Jules de Polignac) 인데, 그 사람 본인보다는 그의 부인인 욜렁드 드 뽈라스트롱 (Yolande de Polastron) 이 왕비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남편에게 공작의 칭호가 내려진 것도 욜렁드가 공작부인이 되게 해주려는 왕비의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뽈리냑 가문은 엄청난 부와 권세를 누렸으나, 프랑쓰 혁명으로 그 영화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지요. 하지만 쥘 드 뽈리냑과 욜렁드 드 뽈라스트롱의 큰아들 쥘 2세 (Jules II) 드 뽈리냑은 왕정이 복귀된 후 샤를 10세 (Charles X) 정부의 수상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 두번째 쥘 드 뽈리냑의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자칭 뽈리냑 공작 (9대) 이라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물론 법적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쥘 드 뽈리냑과 욜렁드 드 뽈라스트롱의 두번째 아들, 즉 쥘 2세의 동생인 멜끼오르 드 뽈리냑 (Melchior) 의 후손 중에는 삐에르 (Pierre)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후손은 오늘날 법적으로 유효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귀족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바로 모나꼬의 왕자 (Prince de Monaco) 입니다. 1920년 삐에르 드 뽈리냑은 모나꼬의 상속녀인 샤를롯 그리말디 (Charlotte Grimaldi) 와 결혼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아내의 이름을 택합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태어난 레니에 3세 (Rainier III) 가 모나꼬의 왕좌에 올랐지요. 현재는 레니에 3세와 미국의 여배우 그레이쓰 켈리 (Grace Kelly) 사이에서 태어난 알베르 2세 (Albert II) 가 모나꼬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레니에와 알베르의 성은 공식적으로는 그리말디이지만, 부계 혈통으로 따지자면 사실상 이들은 뽈리냑 사람들이지요. 또한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사실은 샬렁쏭 사람이구요. 물론 모계 혈통으로 보자면 알베르 2세에게 저 옛날 아르나웃 까딸란이 노래했던 그 뽈리냑 자작의 피가 한 방울 쯤은 섞여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samedi 10 juillet 2010

Anc per null temps no.m donet iai, d'Arnaut Catalan, PC 27,4

Édition du texte : Ferruccio Blasi, Le poesie del trovatore Arnaut Catalan, Florence, 1937 : 14-16.

I
Anc per null temps no.m donet iai
amors, per q'om sol esser pros
e.n sol far rics fatz enveios
e metre e donar e garnir ;
ar no.n fan ren cill cui fai mantenensa
e ieu, qe anc non aic iorn sa valensa,
am desamatz per leis en grat servir,
e sui amics ses respieg de iauçir.

II
Francs cors, tu temps tan q'ab esglai
m'as tornat d'ardit temeros
de leis, qe.m ten marrit ioios.
Per so o fai : qar ieu m'albir
q'el mon non es neguna benvoilhensa
qe si'egals a la soa entendensa :
per so.m don gaug e dol, qar no.ill aus dir
lo ben qe.il vueilh, per q'ieu ab ioi m'açir.

III
Un iorn ensems el mes de mai
volgra q'estessan li gelos
e.l drut ab lur muilhers rescos
lai on cascuns poges conplir
so qe mais vol, de leis qi plus ll'agensa,
ab ardimen e ses tota temensa !
Q'ieu sui aqell qi no m'aus enardir
de tan ric ioi, per paor de failhir.

IV
De ioi viu sems e ab esmai,
fins amans desaventuros ;
e es m'avengut tot per vos,
donna, qe.m fas pensan langir,
per q'ieu non sai vas nuilha part girensa,
plazens dona, si vos no.m fas sufrensa,
si.us plai, d'aitan qe vueilhaz q'ie.us remir,
pensan el cor so qe de vos dezir.

V
E qar am nems ab cor verai,
contra mon saber cabalos
mos francs volers sobramoros
m'en fai forsar lo trop-grazir ;
mas no.n ai fag ni ieu no.n fatz parvensa,
q'ira m'en vens e tem qe.m sobrevensa,
per q'ieu iratz non mi puesc esiauzir
plus q'oms iauzenz, tan qant a ioi, marrir.

VI
Pros comtessa de pretz e de Proensa,
vos iest ses par de gentil captenensa
e de beutat e de gent acuilhir
e d'onratz fatz comensar e fenir.

VII
Seinh'en vescoms de Polinhac, temensa
mi pren de vos, qar iest de grand valensa :
qe mortz non vol los avols rics delir,
anz poinh'ades e.lls pros valenz auç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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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 traduction d'après F. Blasi :

I. Jamais à aucun moment, l'amour ne m'a donné la joie alors qu'on a l'habitude, pour l'amour, d'être preux, d'accomplir de nobles faits qui rendent les autres jaloux, de dépenser, de donner et de garnir ; maintenant ceux que l'amour maintient ne font rien de cela et moi qui n'ai jamais eu de son secours aime, bien que je ne sois pas aimé, pour le servir de bon gré, et je suis un ami sans espoir de jouir.

II. Cœur franc, tu crains tant qu'avec effroi, tu m'as fais un téméraire hardi d'elle qui me tient marri joyeux. Donc je le fais : car je m'imagine qu'au monde n'existe aucune bienveillance qui soit égale à son entendement : c'est pour cela que je me donne la joie et la douleur, car je n'ose lui dire le bien que je lui veux, donc je m'attriste avec joie.

III. Un jour au mois de mai, je voudrais que les jaloux et les amants soient ensemble cachés avec leurs femmes là où chacun peut obtenir ce qu'il veut à jamais de la personne qui lui plaît le plus, avec hardiesse et sans aucune crainte ! Car je suis celui qui n'ose enhardir de tant de riche joie, par peur de falloir.

IV. Je vis sans joie et avec inquiétude, en tant qu'amant malchanceux ; et tout m'est arrivé pour vous, madame, qui me faites languir en pensant, c'est pourquoi je ne trouve nulle part le secours, dame plaisante, si vous ne me faites pas indulgence, s'il vous plaît, d'autant que vous voulez que je vous admire pensant au cœur ce que je désire de vous.

V. Et puisque j'aime trop avec un cœur vrai contre mon bon sens, mon franc désir très amoureux me force trop aimer ; mais je n'en ai fait ni n'en fais paraître, car la colère m'en vainc et je crains qu'elle me vainc, c'est pourquoi en colère, je ne peux pas me réjouir plus que quelqu'un qui s'attriste en réjouissant, aussi joyeux que je sois.

VI. Vaillante comtesse de prix et et de Provence, vous êtes sans paire en ce qui concerne la conduite noble, la beauté, le gentil accueil et le commencement et la fin des faits honorables.

VII. Seigneur vicomte de Polignac, la peur me prend de vous, car vous êtes de grande valeur : car la mort ne veut pas détruire les mauvais seigneurs ; plutôt elle s'efforce à tuer les preux vailla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