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redi 24 mars 2010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 (Marguerite de Provence)

블렁슈 드 꺄스띠으가 아들 루이 9세에게 보인 모성애는 약간 소유욕적인 면모가 없지 않은데, 특히 며느리와의 관계에서 그것이 잘 드러납니다. 아들이 성인 (adulte) 이 된 이후로도 여전히 어린애 취급을 하며 정사를 직접 주관하던 블렁슈는 1234년 루이 9세가 스무살 되던 해에 어쩔 수 없이 짝을 찾아주기로 합니다. 프랑쓰에 새로운 왕비가 있어야 하니까요. 아버지 루이 8세는 열세 살에 결혼했고, 할아버지 필립 오귀스뜨는 열다섯 살에 결혼한 것에 비하면, 루이 9세는 꽤 늦게 결혼한 셈입니다. 이 때 블렁슈가 아들의 아내감으로 선택한 여자는 프로벙쓰의 공주였던 마르그릿이었습니다. 1221년에 프로벙쓰의 백작 레몽-베렁제 5세 (Raymond-Bérenger V) 와 베아트리쓰 드 싸브와 (Béatrice de Savoie) 사이의 장녀로 태어난 마르그릿은 결혼 당시 13살이었습니다. 열세 살이면 당시로서는 결혼 적령기이도 했지만, 블렁슈가 그녀를 선택한 진짜 이유는 남편이 될 루이와 나이차가 일곱 살이나 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미 성인이 된 루이가 마르그릿을 여자로 보기보다는 그저 어린 아이로 볼 것이라는 기대였죠. 그리고 열세 살 짜리 며느리라면 시어머니의 말에도 고분고분할 것이었고, 블렁슈의 권위에 감히 대들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현직 왕 루이 9세가 아내를 맞이하면 그의 비가 공식적인 왕비가 되니까, 블렁슈 자신은 뒷자리로 물러나야 마땅할 것이었습니다. 공식석상에서 현직 왕비에게 자리를 내 주는 것보다도 블렁슈는 사석에서 아들에게 미치는 자신의 영향력이 며느리 때문에 줄어들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프로벙쓰는 아직 프랑쓰령이 아니었는데, 정략결혼을 통해 이 지역을 합병하려는 정치적 속셈도 물론 숨어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블렁슈의 계산 중 단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루이와 마르그릿은 처음에는 좀 어색한 사이였지만, 그건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정략결혼해야 하던 사이로서는 당연한 것일테고, 오히려 곧 금실좋은 잉꼬부부가 됩니다. 마치 블렁슈 자신과 루이 8세 사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훗날 성인 (saint) 으로 추앙될 루이 9세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왕비의 거처를 드나들어서, 어머니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합니다.

또한 한낱 어린 아이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따라서 아무런 정치적 판단력도, 자신의 뚜렷한 주관도 없을 것이기에 쉽게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는 매우 똑똑하고, 다방면에 지식이 풍부했으며, 의지가 분명했고, 시어머니의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마르그릿은 루이 9세와 블렁슈 자신 만큼이나 신심 깊은 생활을 하였기에, 도덕성 측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었으며, 19세 되던 해부터 시작하여 무려 열 한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왕비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 즉 프랑쓰의 후손을 잇는 임무도 쉽게 완성한 것입니다.

또한 마르그릿의 아버지 레몽-베렁제는 프로벙쓰가 마르그릿의 결혼과 함께 프랑쓰로 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장녀가 아닌 막내딸에게 영토를 상속시킵니다.

따라서 블렁슈는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로부터 얻으려던 것을 사실상 단 하나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jeudi 18 mars 2010

블렁슈 드 꺄스띠으 (Blanche de Castille)

루이 8세의 왕비였던 블렁슈 드 꺄스띠으 (1188-1200-1252) 는 프랑쓰 역사상 최초의 여자 섭정 (régente) 이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섭정 기간 (régence) 을 가졌습니다. 첫번째는 남편 루이 8세가 갑자기 죽고 아들 루이 9세가 아직 어린 시절이었을 때, 또 한번은 루이 9세가 성인 (adulte) 이 된 후에 십자군 전쟁을 떠나있던 기간이었습니다.

꺄스띠야 (Castilla = Castille) 의 인판따였던 블랑까 (Blanca = Blanche) 는 열 두 살의 나이에 훗날 프랑쓰의 왕이 될 루이 8세와 결혼하게 되어 프랑쓰로 옵니다. 그리고 이 어린 부부는 남매처럼 함께 자라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믿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실상 유럽 왕가의 정략 결혼 중에서 이렇게 행복한 결혼은 역사를 통틀어서 별로 찾아 보기 힘들지요. 오랜 세월을 왕세자로만 보냈던 루이 8세는 왕이 되자마자 알비 십자군 전쟁을 치루러 왕궁을 떠났으므로, 블렁슈는 사실상 이미 남편이 살아 있던 시절부터 빠리에 머물면서 실질적인 정치를 했습니다. 물론 아내를 완전히 믿는 남편의 허락 하에 그러했던 것이지요.

루이 8세가 왕이 된지 3년 만에 숨을 거두면서 어린 아들 루이 9세의 섭정으로 그 어머니인 블렁슈 드 꺄스띠으를 지칭함으로써 그녀는 공식적으로 프랑쓰의 최고 권력을 쥐게 됩니다. 그 이전에도 프랑쓰에 섭정이 있었던 적은 두어번 있었으나, 여자에게 섭정권을 준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블렁슈는 1226년 루이 8세가 숨을 거둔 때부터 1235년 루이 9세가 성인 (adulte) 으로 공표될 때까지 9년간 프랑쓰를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이미 남편이 죽기 전부터 정치에 참여했고, 아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에, 그녀가 실권을 행사한 기간은 더 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세력을 제대로 정착시키지도 못한 채 루이 8세가 죽고, 어린 아이가 왕이 되고, 여자가 권력을 잡게 되자, 여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또는 이 틈을 타 대세를 뒤집어 보려던 귀족들이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정치술과 판단력, 결단력이 매우 뛰어났던 블렁슈는 모든 반란을 다 진압하고 왕권을 오히려 강화시켰습니다. 그녀는 또한 남편이 참여했던 알비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지어 뚤루즈 백작령 (comté de Toulouse) 의 절반 이상을 프랑쓰령으로 합병하였습니다.

루이 9세와 블렁슈 드 꺄스띠으의 관계는 매우 애틋했던 것 같습니다. 블렁슈는 장남 (엄격히는 장남이 아니지만 위의 세 형이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으므로) 루이 9세를 다른 아들들 보다 끔찍히 여겼던 것 같고, 매우 신심 깊고 곧은 성격이었던 루이 9세는 어머니를 무척 공경했습니다. 그리하여, 성장한 루이 9세는 독자적으로 정치를 하면서도 어머니의 의견을 자주 참고했고, 1248년 제 7 차 십자군 전쟁을 떠나면서는 공식적으로 블렁슈 드 꺄스띠으를 프랑쓰의 섭정으로 임명합니다. 이 때 블렁슈의 나이는 60살이었지요. 그런데 에집트로 떠났던 루이 9세가 결국 그곳에서 포로로 잡히고 맙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쓰에서는 목동들의 반란 (révolte des pastoureaux) 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가난한 목동들, 초라한 농민들이 왕을 구하러 가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면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특권층에 대한 봉기로 돌변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아들을 구하러 가겠다는 백성들의 열정에 감동받았던 블렁슈는 이것이 반란으로 돌아서자 엄하게 진압합니다.

번번이 그녀의 섭정 기간마다 반란이 있었고 그걸 성공적으로 다스렸기에, 블렁슈 드 꺄스띠으는 무섭고 냉정하고 표독한 여자로 그려지기도 했고, 남편과 아들로부터 왕권을 빼았을 정도로 권력을 좋아한 여자라는 인상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으며, 며느리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와의 관계 때문에 악독한 시어머니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녀가 상당히 현실적인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매우 균형있게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평가합니다. 싫든 좋든 그녀는 프랑쓰 최초의 여왕이라 할 만합니다. 쌀릭법 때문에 여자는 왕이 될 수 없었던 프랑쓰에서 그녀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 없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목동들의 반란을 진압한지 얼마 되지 않아 블렁슈는 64살의 나이에 숨을 거둡니다. 십자군 전쟁을 떠난 루이 9세, 그녀가 집착에 가까울 만큼 사랑했던 아들은 다시 보지 못한 채 말이지요.

dimanche 7 février 2010

루이 8세 르 리옹 (Louis VIII le Lion)

필립 오귀스뜨와 이자벨 드 에노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 8세 (1187-1223-1226) 는 아버지와 사뭇 다른 삶을 산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필립 오귀스뜨는 14세에 왕으로 축성되었는데 반해, 루이 8세는 36세에 즉위하였습니다 (1223). 당시에 열 네 살이면 성인으로 인정받고, 평균 수명이 대략 서른 살 전후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루이 8세는 정말 늦은 나이에 왕이 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왕으로 3년 밖에는 재위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43년을 통치한 것에 비하면 정말 짧은 기간이죠. 또한 필립 오귀스뜨가 세 명의 왕비를 차례차례, 또는 동시에 두면서 심각한 정치 문제로까지 대두될 만큼 상당히 복잡한 부부관계를 가졌던 데 비해, 루이 8세는 열 세 살에 맞이한 신부 블렁슈 드 꺄스띠으 (Blanche de Castille) 와 평생을 서로 믿고 의지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필립 2세가 그렇게 여러 부인들과의 사이에서도 루이 8세 자신을 제외하면 별다른 후사를 못얻었는데 비해, 루이 8세와 블렁슈 드 꺄스띠으는 열 한 명의 자녀를 보았습니다 (그 중 루이 9세).

너무 대단했던 아버지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늘 속에 묻혀 있긴 하지만 사자 (Lion) 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루이 8세 역시 상당히 용맹스럽고 야심이 많았던 왕이었습니다. 물론 직접 통치 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루이 8세의 업적은 대부분 왕세자 시절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필립 오귀스뜨가 영국과 싸우던 시절, 루이 8세도 아버지를 도와 여러 차례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심지어 땅 없는 졍 (Jean sans Terre) 을 물리치고 영국의 왕위에 오르려고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프랑쓰 왕이 된 후 여러 영국 영토를 빼앗았으며, 또한 알비 십자군 전쟁 (croisade albigeoise) 에도 참여하여 옥씨따니 중 일부, 특히 오늘날의 렁그독 (Languedoc) 지역을 프랑쓰령으로 차지했습니다. 바로 이 알비 십자군 전쟁 중 이질 (dysenterie) 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루이 8세는 좀 더 오래 살았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프랑쓰의 역사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 수 없겠지만, 그의 이른 죽음 덕분에 또하나의 대단한 인물이 프랑쓰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바로 그의 아내였던 블렁슈 드 꺄스띠으 !

jeudi 4 février 2010

필립 오귀스뜨의 세 왕비 (3 reines de Philippe Auguste)

필립 오귀스뜨는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세 명의 비를 두었었는데, 첫번째를 제외하면 나머지 둘은 실제로 왕비라고 불러도 좋을지,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필립 2세의 첫번째 왕비는 이자벨 드 에노 (Isabelle de Hainaut) 였습니다. 어찌보면 그녀는 가장 평범한 왕비다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노의 백작 보두앙 5세 (Baudouin V) 와 플렁드르의 백작부인이었던 마르그릿 달자쓰 (Marguerite d'Alsace), 즉 두 세력가 집안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정략 결혼을 하고, 외국에 시집와서 공식적으로는 왕비의 대접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내야 했으며, 특히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들을 하나 낳고는 일찍 죽었습니다. 사실 프랑쓰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몇몇 개성이 강한 여자들을 제외하면, 많은 왕비들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혼을 했을 때 이자벨의 나이는 열 살이었고, 남편 필립의 나이는 열 다섯 살이었으므로, 결혼하고도 칠여년간 아이가 없었다는 것은 요즘 시각으로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 나라 사극을 봐도 비슷하지만,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하면 거의 왕실에서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기 쉽상이지요. 그 자신도 외아들이었던 필립 오귀스뜨는 이자벨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비난도 많이 했고, 그녀가 친정에 별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녀는 1187년에 왕자를 하나 낳고, 그 왕자는 훗날 필립 오귀스뜨를 이어 루이 8세 (Louis VIII) 가 되지요. 3년 뒤 이자벨은 또한번 해산을 하다가 결국은 스무 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고, 그 때 태어난 쌍동이 왕자들 역시 모두 일찍 죽습니다.

이자벨 드 에노가 죽은지 약 3년 뒤, 필립 오귀스뜨는 단마크 왕의 딸과 새로 결혼을 합니다. 이 두번째 왕비의 이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프랑쓰식으로 이정부르 (Isambour) 라고도 부르고, 단마크 식으로 잉게보르크 (Ingeborg) 또는 잉게부르게 (Ingeburge) 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옛날에는 아무리 귀족이라도 여자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낯선 외국 이름이었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철자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스껑디나비 출신의 공주가 프랑쓰의 왕비가 된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째서 그녀가 필립 오귀스뜨의 새로운 왕비로 선택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필경 정치적인 이유겠지만, 아무튼 이정부르 드 단마르크 (Isambour de Danemark) 는 1193년 8월 14일 당시 유럽 최고의 왕과 결혼식을 올리고 프랑쓰의 왕비로 축성을 받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다음날 필립 오귀스뜨는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합니다. 도대체 신혼 첫날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 아무도 모르지요. 왕비의 몸이 비늘로 덮여 있는 마녀였다 식의 희귀한 소문부터 시작해서 정치적 또는 외교적 이유까지 별별 상상이 난무했지만, 지금까지도 역사학자들은 필립 오귀스뜨의 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결혼한 다음날부터 이정부르는 왕궁에서 살기는 커녕, 빠리 동쪽의 성 모르 수도원 (Abbaye de Saint-Maur) 에 사실상 감금됩니다. 하지만 교황청은 이 이유 없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필립은 필립대로 교황에게 질 수 없었죠. 그때문에 이 결혼을 둘러싼 논쟁은 1201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8년간 이정부르는 프랑쓰의 정식 왕비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외로운 삶을 삽니다.

교황 쎌레스땅 3세 (Célestin III) 가 이정부르와의 결혼이 유효하다고 공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오귀스뜨는 이것을 무시하고 1196년 아녜쓰 드 메라니 (Agnès de Méranie) 와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립니다. 오늘날은 모라비 (Moravie) 라고 불리는 체끼 (Tchéquie) 동쪽의 공국, 메라니의 공주였던 아녜쓰는 세 명의 왕비 중 가장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필립 오귀스뜨는 왕비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그녀를 사랑했으며, 두 사람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쎌레스땅 3세가 죽고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이노썽 3세 (Innocent III) 는 교황의 말을 무시하고 이중 결혼 상태로 살고 있는 프랑쓰 왕을 가만둘 수 없었습니다. 여러 차례 이정부르의 지위를 되살리고 아녜쓰와 결별하라는 지시를 했지만 필립 오귀스뜨가 여전히 귀머거리 행세를 하자, 이노썽 3세는 결국 1200년, 프랑쓰 전체에 성무집행금지령 (interdit) 을 내립니다. 성무집행금지령은 한 나라 또는 한 지역 전체가 파문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미사를 비롯하여 결혼식, 장례식 등등 그 어떤 종교 행위도 행해지지 못하도록 하는 큰 벌이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국민이 천주교를 믿던 나라에서 이것은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지요. 결국 약 아홉개월을 버틴 끝에 필립 오귀스뜨도 항복할 수 밖에는 없었으며, 금지령은 철회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이정부르가 진짜 그리고 유일한 프랑쓰의 왕비로 인정되었습니다. 더군다나 1201년, 아녜쓰 드 메라니가 해산 중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로써 필립 오귀스뜨의 두 아내 문제는 해결된 듯 보였으나, 1205년 그는 또다시 이정부르와의 결혼을 무산시키려는 재판을 시작하고, 1212년이 되서야 모든 노력을 포기합니다. 이후 필립은 1223년에 죽고, 이정부르는 1226년에 죽습니다. 열아홉의 나이에 낯선 나라에 시집와서, 33년 동안 단 하루도 아내로서도, 왕비로서도 살지 못했던 이정부르의 삶도 참 불행한 것은 사실이나, 또 필립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게도 싫은 여자와 삼십년을 묶여 지내야했던 것도 고역이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dimanche 17 janvier 2010

필립 오귀스뜨 (Philippe Auguste)

필립 2세 (Philippe II) 또는 필립 오귀스뜨는 프랑쓰의 영토 확장과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한 왕입니다. 루이 7세 (Louis VII) 가 세 번의 결혼 끝에 얻은 유일한 아들인 필립은 태어나면서부터 왕위를 잇는 것이 확정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아버지의 살아 생전에 이미 왕으로서 축성을 받았습니다 (1179). 비록 바로 그 다음 해에 루이 7세가 사망하긴 하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프랑쓰는 공식적으로 두 명의 왕이 다스린 셈이 되지요. 축성을 받았을 때 필립의 나이는 14살이었으며, 15살부터는 단독으로 프랑쓰의 왕 필립 2세가 됩니다.

당시의 프랑쓰 및 유럽의 정치 체제는 봉건주의 (féodalisme) 로서, 이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론적으로는 많은 귀족들이 프랑쓰의 왕에게 복종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귀족들은 매우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영지를 다스렸습니다. 따라서 프랑쓰 왕의 직접적인 권한은 오늘날 빠리와 일-드-프렁쓰 (Île-de-France) 를 둘러싼 극히 작은 지방에 밖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지요. 특히 영국의 왕은 이론적으로 프랑쓰 왕의 신하였으나, 영국 섬은 물론 프랑쓰 내에 그보다 더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쓰의 남서쪽, 북서쪽, 북쪽 등등이 모두 영국 왕의 영지였지요. 따라서 프랑쓰는 상당히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필립 2세가 단독으로 다스리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자벨 드 에노 (Isabelle de Hainaut) 와의 결혼이었고, 이 공주는 결혼 선물로 아르뜨와 (Artois) 지방을 필립에게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영토 확장을 시작한 필립 오귀스뜨는 계속해서 술책과 정책, 전쟁과 외교를 통하여 프랑쓰의 영토를 넓히는데 일생을 바칩니다. 특히 프랑쓰 내의 영국 영토를 빼았기 위해 그는 영국 왕자들이 그들의 아버지인 엉리 2세 (Henri II) 에게 일으킨 반란을 후원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엉리 2세의 아들 리샤르 (Richard) 가 영국의 왕이 되자, 이번엔 그와 그의 동생인 졍 (Jean) 사이를 이간질 시켰습니다. 또한 후사없이 죽은 리샤르를 뒤이어 졍이 왕이 되자, 그가 프랑쓰 내에 소유했던 영토를 하나하나 다 빼앗았습니다. 그 때문에 졍은 흔히 졍 썽 떼르 (Jean sans Terre) 즉 « 땅없는 졍 »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엉리 2세와 리샤르, 졍 등은 모두 프랑쓰 출신인 쁠렁따쥬네 가문의 사람들로, 불어와 옥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비록 영국이라는 섬의 일부를 다스리기는 했지만 영어를 전혀 몰랐으며, 영국의 왕인 동시에 노르멍디 공작, 엉주 백작, 멘 공작, 쁘와뚜 백작, 아끼뗀 공작으로써, 대부분 프랑쓰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프랑쓰에 묻혔습니다.)

영국의 왕으로부터 빼앗은 땅 이외에도 필립 2세는 여러 지역을 차지하여 오귀스뜨 (Auguste) 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가 죽을 무렵 (1223) 에는 프랑쓰 왕의 소유지가 현대 프랑쓰의 거의 3분의 2 정도가 될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렇게 영토가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오귀스뜨는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 왕국 전체를 통일적으로 다스리는 데 성공했으며, 도시 시민들 (bourgeois) 을 장려함으로써, 봉건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필립 오귀스뜨는 또한 수도 빠리를 확장시키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도 많은 정성을 들였습니다. 진흙 바닥이었던 빠리의 길은 돌로 포장이 되었고,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성벽이 축조되었습니다. 바로 이 성벽을 쌓으면서 루브르 (Louvre) 궁도 지어졌습니다. 또한 빠리의 중앙에 거대한 시장을 만든 것도 바로 이 왕으로, 이 시장은 1969년까지 지속되었고, 빠리의 여러 학교들을 모아 공식적으로 빠리 대학 (Université de Paris) 의 지위를 준 것도 필립 2세였습니다.

현재도 남아 있는 필립 오귀스뜨의 성벽의 유적
(Reste de l'enceinte Philippe Auguste)

jeudi 31 décembre 2009

augur 의 파생어들

불어 août 의 어원인 augustus 는 로마 제국의 첫 황제의 이름에서 유래했지만 이것은 고유명사는 아닙니다. 이 단어는 « 거룩한, 축성받은 » 이라는 뜻의 형용사인데, 가이우쓰 옥따위우쓰 뚜리누쓰 (Caius Octauius Thurinus) 가 황제가 되면서 별명으로 취했습니다. 이후 사실상 로마의 모든 황제들이 이 형용사를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이면서 augustus 는 결국 로마 황제들의 호칭 중 하나가 되버렸습니다. 물론 지금은 관습상 아우구스뚜쓰라고만 하면 로마의 첫 황제 가이우쓰 옥따위우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가 8월에 죽었으므로, 그의 계승자가 선임자를 기념하기 위해 8월에 그의 이름을 준 것이 현재 août 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augustus 는 황제들의 호칭이 되기 이전에는 종교적인 단어였습니다. 이 말은 라띠나어 augur 로부터 왔는데, augur 란 « 미래를 점칠 줄 아는 사제 » 를 가리켰습니다. 이들은 특히 새들이 날아가는 방향이나 새들이 먹는 모이, 그리고 노래하는 소리 등을 듣고 좋은 일이 있을지 나쁜 일이 있을지를 판단했다고 하지요. augur 는 현대 불어로도 발전하여 augure 라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불어 augure 는 두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방금 말한 « 로마 시대의 사제 » 를 가리키고, 또 하나는 그 사제들이 하는 일, 즉 « 미래를 점치기 위해 주변을 관찰하는 일 » 또는 « 미래의 징조 » 입니다. 또한 augurer 라는 동사도 있는데, 이는 당연히 « 점치다, 예언하다, 예견하다 » 등의 뜻이지요. 그런가하면 자주 쓰이는 단어 inaugurer 역시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단어는 « 개막하다, 시작하다 » 등의 뜻인데, 이것은 애초에 새로운 성전이나 기념물 등을 지으면 아우구르들이 그 건물의 안전과 번성을 예언하며 축성하였기 때문입니다.

라띠나어 augur 는 불어에서 거의 모양에 변화가 없는 augure 뿐 아니라, 모양이 많이 달라진 heur 로도 발전하였습니다. heur 는 « 징조, 운, 행운 » 이라는 뜻이죠. 여기에 좋은 운이면 bon 을 붙이고, 나쁜 운이면 mal 을 붙여,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bonheur, malheur 라는 단어들이 태어났습니다.

다시 augustus 로 돌아와, 이 단어는 불어에서 auguste 로 발전하였습니다. 역시 프랑쓰에서도 로마에서처럼 왕들의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였던 단어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 왕은 필립 2세 (Philippe II) 인데, 그는 44년간 재위하면서 프랑쓰 왕권을 강화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고,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미 살아생전부터 auguste 라는 수식어가 이름 뒤에 따라다녔고, 지금도 필립 2세라기 보다는 필립 오귀스뜨 (Philippe Auguste) 라고 자주 불립니다. 더군다나 그는 8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주 적당한 별명이었던 것이지요.

Auguste 는 또한 남자 이름으로도 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Augustin, Augustine 같은 애칭들이 나오기도 했구요. Augustin 을 더 줄이면 Tintin 이 됩니다. 물론 Tintin 은 Augustin 외에도 Martin 이라든지 Justin 이라든지, 다른 이름의 애칭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만화 주인공 땅땅의 진짜 이름이 오귀스땅일 수도 있다는 사실 ! 이렇게 불어에서는 한 음절을 반복하여 애칭을 만들 때가 많은데, 마찬가지로 Auguste 의 중간 음절을 반복하여 Gugusse 라는 애칭도 있습니다. gugusse 는 이제는 일반명사화 되어 « 써커쓰의 광대 » 를 뜻하기도 하고, 넓은 의미에서 그저 « 웃기는 사람 », 그리고 더 넓은 의미에서 그저 « 사람, 남자 » 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군대에서 많이 쓰이면서 gus 로 다시 한 번 줄어, « 군인 », 그리고 뜻이 또 확장되어 « 녀석, 놈 » 등의 뜻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고귀하고 엄숙하고 종교적인 의미였던 augustus 가 참 많은 변화를 겪었지요 ?

mardi 22 décembre 2009

prononciation de « août » (août 의 발음)

불어로 된 달의 이름 중에서 8월을 칭하는 août 은 그 발음이 특이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내용을 아래에 실었습니다.
Je recopie ci-dessous un article intéressant sur la prononciation du mot août. La source de l'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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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de publication sur le site : 31 juillet 2007
La Lettre du CSA n° 207 - Juillet 2007   

Bientôt le « joli août »...

Dans le cadre de la mission du Conseil consistant à veiller à la défense et à l'illustration de la langue française dans les médias audiovisuels, La Lettre du CSA du mois de juillet donne quelques précisions sur la pronociation du mot « août ». C'est cet article qui est reproduit ci-dessous.

Comme chaque année, le mois d'août suscite sur les antennes quatre prononciations différentes : [ou], [out], [a-ou] [a-out]. Pierre Fouché, dans le Traité de prononciation française (1969), recommande la prononciation [ou] et précise : « La prononciation [a-ou] est archaïque ou dialectale. Il en est de même de [out] et à plus forte raison de [a-out] ».

Le Petit Robert (2007) et le Petit Larousse illustré (2007) donnent [ou] et [out] alors que des éditions antérieures ne retenaient que le mois d'[ou].

Pour Joseph Hanse, dans le Nouveau Dictionnaire des difficultés du français moderne (1987), « Le mois d'août se dit [ou] mais beaucoup prononcent le t final. La prononciation [a-out] est fautive alors qu'elle est correcte dans les dérivés aoûtat, aoûté et aoûtien [aoussien] ».

Dans le Dictionnaire des difficultés du français (1993), Jean-Paul Colin recommande « la seule prononciation correcte [ou], le t devant rester muet, bien que l'usage se répande, notamment dans les médias de prononcer [a-ou] ».

Maurice Grevisse, dans Le Bon Usage (1986), donne la prononciation habituelle [ou] mais trouve excessif de condamner [out].

Moins sévères sont les recommandations données par le Dictionnaire de l'Académie française qui, dans sa neuvième édition, note : « Août se prononce [ou] plutôt que [a-ou], le t se fait parfois entendre ». La septième édition (1878) préconisait [ou] mais signalait cependant « on prononce souvent [out] ».

Quelques années auparavant, Émile Littré, dans le Dictionnaire de la langue française (1863-1873), indiquait : « Août se prononce [ou], l'a ne se prononce pas. Pourtant quelques personnes prononcent [a-ou] ».

Venant du latin Augustus (mensis), substitué en l'honneur de l'empereur Auguste à Sextilis mensis (sixième mois devenu huitième mois lors de l'instauration du calendrier grégorien), ce mot de quatre lettres n'a cessé de provoquer de vives querelles à cause tant de sa prononciation que de sa graphie.

Dans son traité complet de prononciation, Comment on prononce le français (1917), Philippe Martinon écrit au sujet de l'histoire du mot : « Dans « août », l'a a cessé de se prononcer depuis le XVIe siècle [...] ; on a malheureusement continué d'écrire « août » avec un a [mais] la prononciation [a-ou] est surannée ». Il signale que la prononciation [a-ou] réapparaît à partir du XIXe siècle chez les orateurs et chez les poètes comme Victor Hugo, Sainte-Beuve et Henri de Régnier mais, pour lui, « on serait dans la tradition française en prononçant toujours et uniquement [ou] ».

En 1930, Léon Clédat raconte que Voltaire qui, dans l'avertissement de Zaïre affirme que le mois d'août se prononce [out], commençait ainsi une lettre à la marquise du Deffand « À Ferney le 19 Auguste », car il trouvait trop barbare d'écrire août et de prononcer [ou].

Si le « joli août » n'a pas de barque sur le Rhin, des poètes l'ont fêté comme mois de la moisson, avec une rime en [ou] :

« Dites ! L'ancien labeur pacifique, dans l'août
Des seigles murs et des avoines rousses,
Avec les bras au clair, le front debout
Dans l'or des blés qui se retrousse
Vers l'horizon torride où le silence bout ». (1)

Au sens figuré, le mot a désigné l'âge de la maturité par comparaison des périodes de la vie avec les mois des travaux agricoles : « D'ailleurs, elle touchait au mois d'août des femmes, époque tout à la fois de réflexion et de tendresse ». (2)

Enfin, il fut aussi employé dans la locution « faire l'août », c'est-à-dire faire la moisson, et dans l'expression aujourd'hui disparue « faire son août dans une affaire », au sens d'y gagner beaucoup, d'en tirer énormément de prof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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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Émile Verhaeren, « La plaine », Les Villes tentaculaires, 1895.
(2) Gustave Flaubert, L'Éducation sentimentale, 1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