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anche 7 février 2010

루이 8세 르 리옹 (Louis VIII le Lion)

필립 오귀스뜨와 이자벨 드 에노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 8세 (1187-1223-1226) 는 아버지와 사뭇 다른 삶을 산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필립 오귀스뜨는 14세에 왕으로 축성되었는데 반해, 루이 8세는 36세에 즉위하였습니다 (1223). 당시에 열 네 살이면 성인으로 인정받고, 평균 수명이 대략 서른 살 전후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루이 8세는 정말 늦은 나이에 왕이 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왕으로 3년 밖에는 재위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43년을 통치한 것에 비하면 정말 짧은 기간이죠. 또한 필립 오귀스뜨가 세 명의 왕비를 차례차례, 또는 동시에 두면서 심각한 정치 문제로까지 대두될 만큼 상당히 복잡한 부부관계를 가졌던 데 비해, 루이 8세는 열 세 살에 맞이한 신부 블렁슈 드 꺄스띠으 (Blanche de Castille) 와 평생을 서로 믿고 의지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필립 2세가 그렇게 여러 부인들과의 사이에서도 루이 8세 자신을 제외하면 별다른 후사를 못얻었는데 비해, 루이 8세와 블렁슈 드 꺄스띠으는 열 한 명의 자녀를 보았습니다 (그 중 루이 9세).

너무 대단했던 아버지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늘 속에 묻혀 있긴 하지만 사자 (Lion) 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루이 8세 역시 상당히 용맹스럽고 야심이 많았던 왕이었습니다. 물론 직접 통치 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루이 8세의 업적은 대부분 왕세자 시절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필립 오귀스뜨가 영국과 싸우던 시절, 루이 8세도 아버지를 도와 여러 차례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심지어 땅 없는 졍 (Jean sans Terre) 을 물리치고 영국의 왕위에 오르려고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프랑쓰 왕이 된 후 여러 영국 영토를 빼앗았으며, 또한 알비 십자군 전쟁 (croisade albigeoise) 에도 참여하여 옥씨따니 중 일부, 특히 오늘날의 렁그독 (Languedoc) 지역을 프랑쓰령으로 차지했습니다. 바로 이 알비 십자군 전쟁 중 이질 (dysenterie) 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루이 8세는 좀 더 오래 살았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프랑쓰의 역사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 수 없겠지만, 그의 이른 죽음 덕분에 또하나의 대단한 인물이 프랑쓰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바로 그의 아내였던 블렁슈 드 꺄스띠으 !

jeudi 4 février 2010

필립 오귀스뜨의 세 왕비 (3 reines de Philippe Auguste)

필립 오귀스뜨는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세 명의 비를 두었었는데, 첫번째를 제외하면 나머지 둘은 실제로 왕비라고 불러도 좋을지,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필립 2세의 첫번째 왕비는 이자벨 드 에노 (Isabelle de Hainaut) 였습니다. 어찌보면 그녀는 가장 평범한 왕비다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노의 백작 보두앙 5세 (Baudouin V) 와 플렁드르의 백작부인이었던 마르그릿 달자쓰 (Marguerite d'Alsace), 즉 두 세력가 집안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정략 결혼을 하고, 외국에 시집와서 공식적으로는 왕비의 대접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내야 했으며, 특히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들을 하나 낳고는 일찍 죽었습니다. 사실 프랑쓰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몇몇 개성이 강한 여자들을 제외하면, 많은 왕비들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혼을 했을 때 이자벨의 나이는 열 살이었고, 남편 필립의 나이는 열 다섯 살이었으므로, 결혼하고도 칠여년간 아이가 없었다는 것은 요즘 시각으로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 나라 사극을 봐도 비슷하지만,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하면 거의 왕실에서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기 쉽상이지요. 그 자신도 외아들이었던 필립 오귀스뜨는 이자벨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비난도 많이 했고, 그녀가 친정에 별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녀는 1187년에 왕자를 하나 낳고, 그 왕자는 훗날 필립 오귀스뜨를 이어 루이 8세 (Louis VIII) 가 되지요. 3년 뒤 이자벨은 또한번 해산을 하다가 결국은 스무 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고, 그 때 태어난 쌍동이 왕자들 역시 모두 일찍 죽습니다.

이자벨 드 에노가 죽은지 약 3년 뒤, 필립 오귀스뜨는 단마크 왕의 딸과 새로 결혼을 합니다. 이 두번째 왕비의 이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프랑쓰식으로 이정부르 (Isambour) 라고도 부르고, 단마크 식으로 잉게보르크 (Ingeborg) 또는 잉게부르게 (Ingeburge) 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옛날에는 아무리 귀족이라도 여자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낯선 외국 이름이었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철자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스껑디나비 출신의 공주가 프랑쓰의 왕비가 된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째서 그녀가 필립 오귀스뜨의 새로운 왕비로 선택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필경 정치적인 이유겠지만, 아무튼 이정부르 드 단마르크 (Isambour de Danemark) 는 1193년 8월 14일 당시 유럽 최고의 왕과 결혼식을 올리고 프랑쓰의 왕비로 축성을 받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다음날 필립 오귀스뜨는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합니다. 도대체 신혼 첫날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 아무도 모르지요. 왕비의 몸이 비늘로 덮여 있는 마녀였다 식의 희귀한 소문부터 시작해서 정치적 또는 외교적 이유까지 별별 상상이 난무했지만, 지금까지도 역사학자들은 필립 오귀스뜨의 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결혼한 다음날부터 이정부르는 왕궁에서 살기는 커녕, 빠리 동쪽의 성 모르 수도원 (Abbaye de Saint-Maur) 에 사실상 감금됩니다. 하지만 교황청은 이 이유 없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필립은 필립대로 교황에게 질 수 없었죠. 그때문에 이 결혼을 둘러싼 논쟁은 1201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8년간 이정부르는 프랑쓰의 정식 왕비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외로운 삶을 삽니다.

교황 쎌레스땅 3세 (Célestin III) 가 이정부르와의 결혼이 유효하다고 공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오귀스뜨는 이것을 무시하고 1196년 아녜쓰 드 메라니 (Agnès de Méranie) 와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립니다. 오늘날은 모라비 (Moravie) 라고 불리는 체끼 (Tchéquie) 동쪽의 공국, 메라니의 공주였던 아녜쓰는 세 명의 왕비 중 가장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필립 오귀스뜨는 왕비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그녀를 사랑했으며, 두 사람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쎌레스땅 3세가 죽고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이노썽 3세 (Innocent III) 는 교황의 말을 무시하고 이중 결혼 상태로 살고 있는 프랑쓰 왕을 가만둘 수 없었습니다. 여러 차례 이정부르의 지위를 되살리고 아녜쓰와 결별하라는 지시를 했지만 필립 오귀스뜨가 여전히 귀머거리 행세를 하자, 이노썽 3세는 결국 1200년, 프랑쓰 전체에 성무집행금지령 (interdit) 을 내립니다. 성무집행금지령은 한 나라 또는 한 지역 전체가 파문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미사를 비롯하여 결혼식, 장례식 등등 그 어떤 종교 행위도 행해지지 못하도록 하는 큰 벌이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국민이 천주교를 믿던 나라에서 이것은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지요. 결국 약 아홉개월을 버틴 끝에 필립 오귀스뜨도 항복할 수 밖에는 없었으며, 금지령은 철회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이정부르가 진짜 그리고 유일한 프랑쓰의 왕비로 인정되었습니다. 더군다나 1201년, 아녜쓰 드 메라니가 해산 중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로써 필립 오귀스뜨의 두 아내 문제는 해결된 듯 보였으나, 1205년 그는 또다시 이정부르와의 결혼을 무산시키려는 재판을 시작하고, 1212년이 되서야 모든 노력을 포기합니다. 이후 필립은 1223년에 죽고, 이정부르는 1226년에 죽습니다. 열아홉의 나이에 낯선 나라에 시집와서, 33년 동안 단 하루도 아내로서도, 왕비로서도 살지 못했던 이정부르의 삶도 참 불행한 것은 사실이나, 또 필립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게도 싫은 여자와 삼십년을 묶여 지내야했던 것도 고역이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dimanche 17 janvier 2010

필립 오귀스뜨 (Philippe Auguste)

필립 2세 (Philippe II) 또는 필립 오귀스뜨는 프랑쓰의 영토 확장과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한 왕입니다. 루이 7세 (Louis VII) 가 세 번의 결혼 끝에 얻은 유일한 아들인 필립은 태어나면서부터 왕위를 잇는 것이 확정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아버지의 살아 생전에 이미 왕으로서 축성을 받았습니다 (1179). 비록 바로 그 다음 해에 루이 7세가 사망하긴 하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프랑쓰는 공식적으로 두 명의 왕이 다스린 셈이 되지요. 축성을 받았을 때 필립의 나이는 14살이었으며, 15살부터는 단독으로 프랑쓰의 왕 필립 2세가 됩니다.

당시의 프랑쓰 및 유럽의 정치 체제는 봉건주의 (féodalisme) 로서, 이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론적으로는 많은 귀족들이 프랑쓰의 왕에게 복종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귀족들은 매우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영지를 다스렸습니다. 따라서 프랑쓰 왕의 직접적인 권한은 오늘날 빠리와 일-드-프렁쓰 (Île-de-France) 를 둘러싼 극히 작은 지방에 밖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지요. 특히 영국의 왕은 이론적으로 프랑쓰 왕의 신하였으나, 영국 섬은 물론 프랑쓰 내에 그보다 더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쓰의 남서쪽, 북서쪽, 북쪽 등등이 모두 영국 왕의 영지였지요. 따라서 프랑쓰는 상당히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필립 2세가 단독으로 다스리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자벨 드 에노 (Isabelle de Hainaut) 와의 결혼이었고, 이 공주는 결혼 선물로 아르뜨와 (Artois) 지방을 필립에게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영토 확장을 시작한 필립 오귀스뜨는 계속해서 술책과 정책, 전쟁과 외교를 통하여 프랑쓰의 영토를 넓히는데 일생을 바칩니다. 특히 프랑쓰 내의 영국 영토를 빼았기 위해 그는 영국 왕자들이 그들의 아버지인 엉리 2세 (Henri II) 에게 일으킨 반란을 후원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엉리 2세의 아들 리샤르 (Richard) 가 영국의 왕이 되자, 이번엔 그와 그의 동생인 졍 (Jean) 사이를 이간질 시켰습니다. 또한 후사없이 죽은 리샤르를 뒤이어 졍이 왕이 되자, 그가 프랑쓰 내에 소유했던 영토를 하나하나 다 빼앗았습니다. 그 때문에 졍은 흔히 졍 썽 떼르 (Jean sans Terre) 즉 « 땅없는 졍 »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엉리 2세와 리샤르, 졍 등은 모두 프랑쓰 출신인 쁠렁따쥬네 가문의 사람들로, 불어와 옥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비록 영국이라는 섬의 일부를 다스리기는 했지만 영어를 전혀 몰랐으며, 영국의 왕인 동시에 노르멍디 공작, 엉주 백작, 멘 공작, 쁘와뚜 백작, 아끼뗀 공작으로써, 대부분 프랑쓰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프랑쓰에 묻혔습니다.)

영국의 왕으로부터 빼앗은 땅 이외에도 필립 2세는 여러 지역을 차지하여 오귀스뜨 (Auguste) 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가 죽을 무렵 (1223) 에는 프랑쓰 왕의 소유지가 현대 프랑쓰의 거의 3분의 2 정도가 될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렇게 영토가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오귀스뜨는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 왕국 전체를 통일적으로 다스리는 데 성공했으며, 도시 시민들 (bourgeois) 을 장려함으로써, 봉건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필립 오귀스뜨는 또한 수도 빠리를 확장시키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도 많은 정성을 들였습니다. 진흙 바닥이었던 빠리의 길은 돌로 포장이 되었고,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성벽이 축조되었습니다. 바로 이 성벽을 쌓으면서 루브르 (Louvre) 궁도 지어졌습니다. 또한 빠리의 중앙에 거대한 시장을 만든 것도 바로 이 왕으로, 이 시장은 1969년까지 지속되었고, 빠리의 여러 학교들을 모아 공식적으로 빠리 대학 (Université de Paris) 의 지위를 준 것도 필립 2세였습니다.

현재도 남아 있는 필립 오귀스뜨의 성벽의 유적
(Reste de l'enceinte Philippe Auguste)

jeudi 31 décembre 2009

augur 의 파생어들

불어 août 의 어원인 augustus 는 로마 제국의 첫 황제의 이름에서 유래했지만 이것은 고유명사는 아닙니다. 이 단어는 « 거룩한, 축성받은 » 이라는 뜻의 형용사인데, 가이우쓰 옥따위우쓰 뚜리누쓰 (Caius Octauius Thurinus) 가 황제가 되면서 별명으로 취했습니다. 이후 사실상 로마의 모든 황제들이 이 형용사를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이면서 augustus 는 결국 로마 황제들의 호칭 중 하나가 되버렸습니다. 물론 지금은 관습상 아우구스뚜쓰라고만 하면 로마의 첫 황제 가이우쓰 옥따위우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가 8월에 죽었으므로, 그의 계승자가 선임자를 기념하기 위해 8월에 그의 이름을 준 것이 현재 août 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augustus 는 황제들의 호칭이 되기 이전에는 종교적인 단어였습니다. 이 말은 라띠나어 augur 로부터 왔는데, augur 란 « 미래를 점칠 줄 아는 사제 » 를 가리켰습니다. 이들은 특히 새들이 날아가는 방향이나 새들이 먹는 모이, 그리고 노래하는 소리 등을 듣고 좋은 일이 있을지 나쁜 일이 있을지를 판단했다고 하지요. augur 는 현대 불어로도 발전하여 augure 라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불어 augure 는 두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방금 말한 « 로마 시대의 사제 » 를 가리키고, 또 하나는 그 사제들이 하는 일, 즉 « 미래를 점치기 위해 주변을 관찰하는 일 » 또는 « 미래의 징조 » 입니다. 또한 augurer 라는 동사도 있는데, 이는 당연히 « 점치다, 예언하다, 예견하다 » 등의 뜻이지요. 그런가하면 자주 쓰이는 단어 inaugurer 역시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단어는 « 개막하다, 시작하다 » 등의 뜻인데, 이것은 애초에 새로운 성전이나 기념물 등을 지으면 아우구르들이 그 건물의 안전과 번성을 예언하며 축성하였기 때문입니다.

라띠나어 augur 는 불어에서 거의 모양에 변화가 없는 augure 뿐 아니라, 모양이 많이 달라진 heur 로도 발전하였습니다. heur 는 « 징조, 운, 행운 » 이라는 뜻이죠. 여기에 좋은 운이면 bon 을 붙이고, 나쁜 운이면 mal 을 붙여,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bonheur, malheur 라는 단어들이 태어났습니다.

다시 augustus 로 돌아와, 이 단어는 불어에서 auguste 로 발전하였습니다. 역시 프랑쓰에서도 로마에서처럼 왕들의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였던 단어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 왕은 필립 2세 (Philippe II) 인데, 그는 44년간 재위하면서 프랑쓰 왕권을 강화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고,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미 살아생전부터 auguste 라는 수식어가 이름 뒤에 따라다녔고, 지금도 필립 2세라기 보다는 필립 오귀스뜨 (Philippe Auguste) 라고 자주 불립니다. 더군다나 그는 8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주 적당한 별명이었던 것이지요.

Auguste 는 또한 남자 이름으로도 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Augustin, Augustine 같은 애칭들이 나오기도 했구요. Augustin 을 더 줄이면 Tintin 이 됩니다. 물론 Tintin 은 Augustin 외에도 Martin 이라든지 Justin 이라든지, 다른 이름의 애칭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만화 주인공 땅땅의 진짜 이름이 오귀스땅일 수도 있다는 사실 ! 이렇게 불어에서는 한 음절을 반복하여 애칭을 만들 때가 많은데, 마찬가지로 Auguste 의 중간 음절을 반복하여 Gugusse 라는 애칭도 있습니다. gugusse 는 이제는 일반명사화 되어 « 써커쓰의 광대 » 를 뜻하기도 하고, 넓은 의미에서 그저 « 웃기는 사람 », 그리고 더 넓은 의미에서 그저 « 사람, 남자 » 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군대에서 많이 쓰이면서 gus 로 다시 한 번 줄어, « 군인 », 그리고 뜻이 또 확장되어 « 녀석, 놈 » 등의 뜻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고귀하고 엄숙하고 종교적인 의미였던 augustus 가 참 많은 변화를 겪었지요 ?

mardi 22 décembre 2009

prononciation de « août » (août 의 발음)

불어로 된 달의 이름 중에서 8월을 칭하는 août 은 그 발음이 특이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내용을 아래에 실었습니다.
Je recopie ci-dessous un article intéressant sur la prononciation du mot août. La source de l'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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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de publication sur le site : 31 juillet 2007
La Lettre du CSA n° 207 - Juillet 2007   

Bientôt le « joli août »...

Dans le cadre de la mission du Conseil consistant à veiller à la défense et à l'illustration de la langue française dans les médias audiovisuels, La Lettre du CSA du mois de juillet donne quelques précisions sur la pronociation du mot « août ». C'est cet article qui est reproduit ci-dessous.

Comme chaque année, le mois d'août suscite sur les antennes quatre prononciations différentes : [ou], [out], [a-ou] [a-out]. Pierre Fouché, dans le Traité de prononciation française (1969), recommande la prononciation [ou] et précise : « La prononciation [a-ou] est archaïque ou dialectale. Il en est de même de [out] et à plus forte raison de [a-out] ».

Le Petit Robert (2007) et le Petit Larousse illustré (2007) donnent [ou] et [out] alors que des éditions antérieures ne retenaient que le mois d'[ou].

Pour Joseph Hanse, dans le Nouveau Dictionnaire des difficultés du français moderne (1987), « Le mois d'août se dit [ou] mais beaucoup prononcent le t final. La prononciation [a-out] est fautive alors qu'elle est correcte dans les dérivés aoûtat, aoûté et aoûtien [aoussien] ».

Dans le Dictionnaire des difficultés du français (1993), Jean-Paul Colin recommande « la seule prononciation correcte [ou], le t devant rester muet, bien que l'usage se répande, notamment dans les médias de prononcer [a-ou] ».

Maurice Grevisse, dans Le Bon Usage (1986), donne la prononciation habituelle [ou] mais trouve excessif de condamner [out].

Moins sévères sont les recommandations données par le Dictionnaire de l'Académie française qui, dans sa neuvième édition, note : « Août se prononce [ou] plutôt que [a-ou], le t se fait parfois entendre ». La septième édition (1878) préconisait [ou] mais signalait cependant « on prononce souvent [out] ».

Quelques années auparavant, Émile Littré, dans le Dictionnaire de la langue française (1863-1873), indiquait : « Août se prononce [ou], l'a ne se prononce pas. Pourtant quelques personnes prononcent [a-ou] ».

Venant du latin Augustus (mensis), substitué en l'honneur de l'empereur Auguste à Sextilis mensis (sixième mois devenu huitième mois lors de l'instauration du calendrier grégorien), ce mot de quatre lettres n'a cessé de provoquer de vives querelles à cause tant de sa prononciation que de sa graphie.

Dans son traité complet de prononciation, Comment on prononce le français (1917), Philippe Martinon écrit au sujet de l'histoire du mot : « Dans « août », l'a a cessé de se prononcer depuis le XVIe siècle [...] ; on a malheureusement continué d'écrire « août » avec un a [mais] la prononciation [a-ou] est surannée ». Il signale que la prononciation [a-ou] réapparaît à partir du XIXe siècle chez les orateurs et chez les poètes comme Victor Hugo, Sainte-Beuve et Henri de Régnier mais, pour lui, « on serait dans la tradition française en prononçant toujours et uniquement [ou] ».

En 1930, Léon Clédat raconte que Voltaire qui, dans l'avertissement de Zaïre affirme que le mois d'août se prononce [out], commençait ainsi une lettre à la marquise du Deffand « À Ferney le 19 Auguste », car il trouvait trop barbare d'écrire août et de prononcer [ou].

Si le « joli août » n'a pas de barque sur le Rhin, des poètes l'ont fêté comme mois de la moisson, avec une rime en [ou] :

« Dites ! L'ancien labeur pacifique, dans l'août
Des seigles murs et des avoines rousses,
Avec les bras au clair, le front debout
Dans l'or des blés qui se retrousse
Vers l'horizon torride où le silence bout ». (1)

Au sens figuré, le mot a désigné l'âge de la maturité par comparaison des périodes de la vie avec les mois des travaux agricoles : « D'ailleurs, elle touchait au mois d'août des femmes, époque tout à la fois de réflexion et de tendresse ». (2)

Enfin, il fut aussi employé dans la locution « faire l'août », c'est-à-dire faire la moisson, et dans l'expression aujourd'hui disparue « faire son août dans une affaire », au sens d'y gagner beaucoup, d'en tirer énormément de prof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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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Émile Verhaeren, « La plaine », Les Villes tentaculaires, 1895.
(2) Gustave Flaubert, L'Éducation sentimentale, 1869.

dimanche 20 décembre 2009

달 이름의 유래 (nom des mois)

불어에서 매달매달의 이름은 모두 라띠나어에서 유래하였는데,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은 로마 시대에는 새해가 3월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학년제와 비슷하다 할 수 있겠지요. 3월부터 시작하여 그 어원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mars : 3월은 라띠나어로 martius 라 했고, 로마 신화 속의 군신 마르쓰 (Mars) 를 기념하는 달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avril : 4월은 라띠나어 aprilis 로부터 유래했는데, 이 라띠나어의 뜻은 모호합니다. 이미 로마시대부터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그리쓰의 여신 아프로딧 (Aphrodite) 을 기념하는 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고, 또다른 사람들은 라띠나어 동사 aperire, 즉 « 열다 » 에서 기원했다고 보았습니다. 4월은 사실상 봄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꽃들이 만개하고 모든 생명이 새로 솟는 만큼 열리다 라는 동사에서 그 어원을 찾은 것도 이해는 갑니다. 또다른 주장은 라띠나어 형용사 apricus 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이 형용사는 « 양지바른, 해가 잘 드는, 햇빛을 좋아하는 » 이라는 뜻인데, 역시 봄의 시작과 관계가 있는 해석입니다.

mai : 5월을 가리키는 말은 라띠나어 maius 에서 왔으며, 이 말은 그리쓰와 로마 신화 속의 여신 마이아 (Maia) 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juin : 6월은 라띠나어 iunius 에서 비롯되었고, 이 단어는 로마의 여신 유노 (Juno) 를 기념하는 달입니다.

juillet : 7월을 칭하는 이름은 라띠나어 iulius 가 변해서 된 말인데, 이것은 율리우쓰 까에싸르 (Julius Caesar) 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원래 애초에는 이 달의 이름은 quintilis 였으며, 그저 « 다섯번째 달 » 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새해가 3월부터 시작하므로 7월은 다섯번째 달이 맞지요. 그러던 것을 아우구스뚜쓰 (Augustus) 황제가 까에싸르를 기념한다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바꾼 것입니다.

août : 8월도 7월과 비슷한 현상을 겪었습니다. 원래 8월의 이름은 sextilis, 즉 여섯번째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뚜쓰의 후계자였던 띠베리우쓰 (Tiberius) 가 양아버지이자 선임 황제였던 아우구스뚜쓰를 기념한다하여 augustus 라고 달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단어가 차차 변하고 줄어, 불어에서는 août 이 되었습니다. août 은 발음이 조금 문제가 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셔요.

septembre : 9월의 이름은 라띠나어 september 에서 왔으며, 이 단어는 그저 일곱번째 달이라는 뜻입니다. 역시 3월을 시작으로 보았을 때 이야기이지요. 불어 숫자 sept (7) 을 생각해 보면, 같은 어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octobre : 10월도 9월과 마찬가지 원칙입니다. 라띠나어 october 는 여덟번째 달이라는 뜻이며, 불어 huit (8) 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novembre : 11월 역시 아홉번째 달이라는 뜻의 라띠나어 nouember 에서 왔습니다. 불어 neuf (9) 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décembre : 12월을 칭하던 라띠나어 december 는 열번째 달이라는 뜻이며, 현대 불어 dix (10) 도 같은 어원입니다.

janvier : 1월은 조금 더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초창기의 로마력은 데껨베르로서 한 해가 끝났으며, 나머지 육십여일은 날짜를 세지 않았다고 합니다. 농경 시대에는 겨울 동안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저 3월의 꺌렁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지요. 하지만 누마 뽐삘리우쓰 (Numa Pompilius) 라는 왕 (기원전 8-7세기) 이 달력을 개편하면서 1월과 2월을 연말에 추가했습니다. 어쨌거나 1월의 이름은 라띠나어 januarius 에서 왔으며, 이 달은 로마의 신 야누쓰 (Janus) 를 기념합니다.

février : 2월은 라띠나어 februarius 에서 온 이름인데, 이 단어는 동사 februare, 즉 « 정화하다, 순화하다 » 라는 뜻입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은 애초에는 야누아리우쓰와 페브루아리우쓰의 순서가 서로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즉 누마 뽐삘리우쓰가 달력을 개편했을 때는 데껨베르에 이어지는 달 이름을 페브루아리우쓰라 불렀고, 그 뒤에 오는 달을 야누아리우쓰라 불렀으며, 이러한 관습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450년 경, 두 달의 이름을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153년부터 1월 1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게 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랍니다.

dimanche 13 décembre 2009

꺌렁드 (calendes)

라임바웃 데 바께이라쓰 (Raimbaut de Vaqueiras) 의 에스떵삐 Calenda maia 는 « 오월의 첫 날 » 이라는 뜻입니다. 옥어 calenda, 불어 calendes 는 라띠나어 calendae 로부터 온 단어이며, 이것은 고대 로마 시대에 매 달의 첫 날을 지칭하던 용어였습니다. 로마력에서는 매일매일을 숫자로 세지 않고, 몇몇 특정한 날들, 즉 꺌렁드 (매 달 첫 날), 이드 (ides, 매달 보름) 등과 같은 날을 기준으로 하여 날짜를 세었습니다. 즉 꺌렁드로부터 며칠 전 날, 이드로부터 며칠 전 날 식으로 불렀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 꺌렁드라는 개념은 로마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짜였으며, 새로운 꺌렁드가 시작하기 전 채무 관계를 모두 정리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꺌렁드에 맞추어 돈 갚고 받을 날짜를 적어 둔 책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달력 (calendrier) 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또한 불어 속담 중 renvoyer aux calendes grecques « 그리쓰 꺌렁드로 미루다 »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말은 존재하지 않는 날짜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꺌렁드라는 이름은 로마 시대에 와서야 생겨난 것으로, 그리쓰 시대에는 첫 날을 꺌렁드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 성 글랑글랑의 날에 » 와 같은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