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층계, 계단 » 을 뜻하는 라띠나어 gradus 는 gradus ad Parnassum 외에 또하나의 음악 용어 graduel 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répons granduel 이나, 흔히 줄여서 부르는 graduel 이라고만 하는 이 말은 꼭 음악 용어라기 보다는, 미사의 일부로써, 제 1 독서 뒤에 노래되는 응답송을 칭합니다. 이 기도문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약간의 논쟁이 있긴 하지만, 애초에는 제단이나 독서대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서 노래불렀기 때문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도 옛날에는 « 층계송 » 이라고 했었는데, 한동안 « 응송 » 이라고도 부르다가, 얼마전부터는 « 화답송 » 이라고 한답니다.
응송, 응답송, 화답송 같은 말은 불어 répons, 라띠나어 responsorium 등을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노래를 부르는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한 명의 독창자가 한 구절 (V) 을 노래하면, 나머지 신자 모두가 여기에 대한 « 답 » 으로 짧은 후렴구 (R) 를 노래하는 것이지요. 그러고나면 다시 독창자가 새로운 가사와 새로운 선율을 노래하고, 신자들은 다시 후렴구를 부르는 식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결국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R) - V1 - R- V2 - R - V3 - R - V4 - R, etc.
R 는 모두 합창이고 항상 똑같은 선율과 가사인 대신, V 는 모두 독창이고 새로운 가사이긴 하지만 반드시 선율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는 독창자가 가사의 리듬과 길이에 따라 자유롭게 장식과 멜리슴 (mélisme) 을 넣어가며 부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천주교의 미사나 성무일도에는 이렇게 주고 받는 응답 방식으로 부르는 노래들이 여럿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라뒤엘인 것입니다.
현재는 그라뒤엘 또는 화답송을 노래로 부르는 일은 드뭅니다. 하지만 사회자 한 명이 기도문의 여러 구절을 읽는 동안 신자들이 중간중간 후렴구를 반복하는 그 낭독 방식은 여전히 음악적 기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samedi 23 août 2008
jeudi 21 août 2008
빠르나쏘쓰로 오르는 계단 (gradus ad Parnassum)
문화와 예술, 학문과 지식의 보금자리라 믿어지는 빠르나쏘쓰 산은 빠리의 한 구역과 프랑쓰의 문학 운동에 그 이름을 주었을 뿐 아니라 gradus ad Parnassum [그라두쓰 아드 빠르나쑴] 이라는 라띠나어 표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직역하면 « 빠르나쏘쓰로 오르는 계단 », 의역하면 « 예술의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밟아야 할 체계적인 과정 » 을 뜻하는 이 표현은 사실상 교본, 사전, 자습서, 연습문제 같은 책의 제목으로 자주 쓰였고, 더 나아가 그런 부류의 책을 포괄하는 일반 용어가 되었습니다. 불어에서도 gradus ad Parnassum [그라뒤쓰 아드 빠르나썸] 또는 그저 gradus [그라뒤쓰] 라고 하면, 특별히 라띠나어 시 작법을 설명한 책과 라띠나어 운율 사전 등을 칭합니다.
시 외에도 이 표현은 종종 음악 분야에서도 쓰였습니다. 특히 유명한 저술 하나는 외스터라이히의 작곡가 푹쓰 (Johann Joseph Fux) 가 지은 Gradus ad Parnassum 입니다 (1725). 스승과 제자의 대화 형식으로 쓰여진 이 대위법 설명서는 많은 유명 작곡가들의 교본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끌레멘띠 (Muzio Clementi) 의 Gradus ad Parnassum (1817) 은 글로된 저술이 아니라, 피아노를 위한 실제 음악 작품입니다. 총 100 곡으로 구성된 이 피아노 연습집은 갈수록 난이도를 높여가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게끔 엮어졌기 때문에, 이 백 곡을 차근차근 연마하면 이론적으로는 피아노의 정상, 즉 빠르나쓰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요. 피아노를 배워 보신 분들은 아마 아농 (Charles-Louis Hanon) 이나 체르니 (Carl Czerny) 의 연습곡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 교본들이 바로 그라두쓰 아드 빠르나쑴의 일종입니다.
드뷔씨의 유명한 Doctor Gradus ad Parnassum 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의 구석 (Children's Corner) 의 첫 곡인 이 작품은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이들이 지겨워하는 연습곡을 의인화하여 박사라는 호칭을 붙였고, 그럼으로써 제목만 들어도 따분하고 현학적인 느낌을 줍니다. 곡 자체도 음계 연습을 연상시키지만, 물론 이 작품은 연습곡이 아니라 재미있는 풍자곡이지요.
아르뚜로 베네데띠 미껠란젤리가 연주하는 그라뒤쓰 아드 빠르나썸 박사
시 외에도 이 표현은 종종 음악 분야에서도 쓰였습니다. 특히 유명한 저술 하나는 외스터라이히의 작곡가 푹쓰 (Johann Joseph Fux) 가 지은 Gradus ad Parnassum 입니다 (1725). 스승과 제자의 대화 형식으로 쓰여진 이 대위법 설명서는 많은 유명 작곡가들의 교본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끌레멘띠 (Muzio Clementi) 의 Gradus ad Parnassum (1817) 은 글로된 저술이 아니라, 피아노를 위한 실제 음악 작품입니다. 총 100 곡으로 구성된 이 피아노 연습집은 갈수록 난이도를 높여가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게끔 엮어졌기 때문에, 이 백 곡을 차근차근 연마하면 이론적으로는 피아노의 정상, 즉 빠르나쓰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요. 피아노를 배워 보신 분들은 아마 아농 (Charles-Louis Hanon) 이나 체르니 (Carl Czerny) 의 연습곡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 교본들이 바로 그라두쓰 아드 빠르나쑴의 일종입니다.
드뷔씨의 유명한 Doctor Gradus ad Parnassum 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의 구석 (Children's Corner) 의 첫 곡인 이 작품은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이들이 지겨워하는 연습곡을 의인화하여 박사라는 호칭을 붙였고, 그럼으로써 제목만 들어도 따분하고 현학적인 느낌을 줍니다. 곡 자체도 음계 연습을 연상시키지만, 물론 이 작품은 연습곡이 아니라 재미있는 풍자곡이지요.
아르뚜로 베네데띠 미껠란젤리가 연주하는 그라뒤쓰 아드 빠르나썸 박사
mardi 19 août 2008
빠르나쓰 (Parnasse)
빠리의 몽빠르나쓰가 1차대전 이후 세계적인 예술의 중심지가 되기 이전, 이미 프랑쓰 문화계에서는 빠르나쓰라는 명칭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빠르나쓰는 19세기 후반, 지나치게 감성적인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특히 시 분야에서 활발했습니다. Parnasse 라는 이름은 물론 Montparnasse 와 마찬가지 어원을 가지고 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Le Parnasse contemporain (현대의 빠르나쓰) 이라는 시집의 제목에서 왔습니다. 약 십여년에 걸쳐 (1866-1876) 모두 세 권으로 나뉘어 발표된 이 시집은 거의 육백여편에 가까운 시를 수록하고 있으며, 빠르나쓰 운동의 선구자인 떼오필 고띠에 (Théophile Gautier) 부터 시작하여, 총 99명의 시인이 참여했습니다. 이 99명의 시인을 parnassiens 이라고 칭하는데, 그 대다수는 사실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다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빠르나씨앙 중에는 르꽁뜨 들 릴 (Charles Leconte de Lisle), 프렁쓰 (Anatole France),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베를렌 (Paul Verlaine), 말라르메 (Stéphane Mallarmé) 등 매우 유명한 시인들도 있었습니다.
사람 수가 99명이나 되느니 만큼, 게다가 방금 인용한 이름들처럼, 독자적인 명성을 떨칠 만큼 개성이 뚜렷한 시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빠르나쓰 운동을 단 한 마디로 규정짓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빠르나씨앙들은 모두 지나친 낭만성을 배제하고 엄격한 형식미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들은 시의 내용이나 의미보다는 어려운 운율과 각운, 특이한 음절수를 가진 싯구와 희귀한 단어 등을 찾는 데에 몰두했으며, 고띠에가 주장한 « 예술을 위한 예술 » (l'art pour l'art) 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빠르나씨앙들에 의하면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지 다른 무엇을 위해서 소용된다면 그것은 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회 문제에 작가가 참여하거나, 예술가가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것 등에 반대했으며, 개인 감정을 드러내거나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상당히 비개성적이 되었으며, 현실을 외면하려 했기에, 자연스럽게 먼 시대, 먼 장소 (예를 들면 고대 에집트) 를 동경하거나, 아니면 때와 장소를 아예 알 수 없거나, 그런 것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는 주제 - 한마디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내용을 다룹니다. 중요한 것은 시를 읽었을 때 소리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과 조화이지요. 형식미에 치중했다는 점에서 빠르나씨앙들의 시는 상당히 음악적인 데가 있으며, 실제로 이들은 음악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예술이라고 추앙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빠르나씨앙들의 시는 번역해서 읽으면 별로 흥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다른 시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비록 르 빠르나쓰 꽁떵뽀랑에 발표된 작품은 아니지만, 그냥 맛보기로, 베를렌의 달빛의 한 구절을 감상해 보세요. 빠르나쓰 시와 비슷한 분위기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빠르나씨앙들과 모든 점에서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주장 중 마음에 드는 것 한가지는, 진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피나는 노력 끝에만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술가가 자신의 즉각적인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기만 하면 예술 작품이 된다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영감을 받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식의, 극도로 낭만적인 생각들이 퍼져 있었는데, 빠르나씨앙들은 이런 생각들에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예술도 다른 기술처럼 차근차근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며, 많은 정성과 공을 들여, 갈고 닦고, 고치고 다듬어야만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답니다.
빠르나쓰 운동은 상징주의 (symbolisme) 를 낳는데 한몫 했습니다. 비록 상징주의는 빠르나쓰가 지나치게 형식미에만 집중한다고 비난하기는 했지만, 사실 빠르나쓰와 많은 특징들을 공유합니다. 베를렌, 보들레르, 말라르메 등이 빠르나쓰앙인 동시에 상징주의 시인인 것도 그런 까닭이지요. 그리고 또다른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 랑보 (Arthur Rimbaud) 는 어린 시절 바로 르 빠르나쓰 꽁떵뽀랑을 읽고 시인이 되기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사람 수가 99명이나 되느니 만큼, 게다가 방금 인용한 이름들처럼, 독자적인 명성을 떨칠 만큼 개성이 뚜렷한 시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빠르나쓰 운동을 단 한 마디로 규정짓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빠르나씨앙들은 모두 지나친 낭만성을 배제하고 엄격한 형식미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들은 시의 내용이나 의미보다는 어려운 운율과 각운, 특이한 음절수를 가진 싯구와 희귀한 단어 등을 찾는 데에 몰두했으며, 고띠에가 주장한 « 예술을 위한 예술 » (l'art pour l'art) 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빠르나씨앙들에 의하면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지 다른 무엇을 위해서 소용된다면 그것은 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회 문제에 작가가 참여하거나, 예술가가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것 등에 반대했으며, 개인 감정을 드러내거나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상당히 비개성적이 되었으며, 현실을 외면하려 했기에, 자연스럽게 먼 시대, 먼 장소 (예를 들면 고대 에집트) 를 동경하거나, 아니면 때와 장소를 아예 알 수 없거나, 그런 것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는 주제 - 한마디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내용을 다룹니다. 중요한 것은 시를 읽었을 때 소리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과 조화이지요. 형식미에 치중했다는 점에서 빠르나씨앙들의 시는 상당히 음악적인 데가 있으며, 실제로 이들은 음악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예술이라고 추앙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빠르나씨앙들의 시는 번역해서 읽으면 별로 흥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다른 시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비록 르 빠르나쓰 꽁떵뽀랑에 발표된 작품은 아니지만, 그냥 맛보기로, 베를렌의 달빛의 한 구절을 감상해 보세요. 빠르나쓰 시와 비슷한 분위기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빠르나씨앙들과 모든 점에서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주장 중 마음에 드는 것 한가지는, 진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피나는 노력 끝에만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술가가 자신의 즉각적인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기만 하면 예술 작품이 된다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영감을 받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식의, 극도로 낭만적인 생각들이 퍼져 있었는데, 빠르나씨앙들은 이런 생각들에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예술도 다른 기술처럼 차근차근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며, 많은 정성과 공을 들여, 갈고 닦고, 고치고 다듬어야만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답니다.
빠르나쓰 운동은 상징주의 (symbolisme) 를 낳는데 한몫 했습니다. 비록 상징주의는 빠르나쓰가 지나치게 형식미에만 집중한다고 비난하기는 했지만, 사실 빠르나쓰와 많은 특징들을 공유합니다. 베를렌, 보들레르, 말라르메 등이 빠르나쓰앙인 동시에 상징주의 시인인 것도 그런 까닭이지요. 그리고 또다른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 랑보 (Arthur Rimbaud) 는 어린 시절 바로 르 빠르나쓰 꽁떵뽀랑을 읽고 시인이 되기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samedi 16 août 2008
몽빠르나쓰 (Montparnasse)
몽빠르나쓰는 빠리 중심에서 약간 남쪽, 대략 6구와 14구, 15구가 만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네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그리쓰의 유명한 빠르나쏘쓰 산에서부터 온 것인데, 이 산은 특히 아뽈롱과 뮈즈들의 거처, 즉 문화와 예술의 근원지로 간주되곤 하지요.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빠리의 몽빠르나쓰 일대에 산은 커녕 도무지 낮은 경사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빠리 사람들이 몽마르트르 (Montmartre) 나 몽 쌍뜨-쥰비에브 (Mont Sainte-Geneviève) 처럼, 산 같지도 않은 걸 산이라고 부르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
사실은 18세기까지는 현재의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 (bd. du Montparnasse) 와 불바르 라스빠이으 (bd. Raspail) 가 교차하는 지점 쯤에 작은 언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를 뚫으면서 깎여 없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도 이 언덕은 진짜 산은 아니었습니다. 1860년까지 몽빠르나쓰는 빠리의 외곽으로서, 그 지하는 수백년 동안 채석장으로 쓰였는데, 여기서 돌을 캐내고 난 후, 한 쪽 옆에다 필요 없는 흙과 자갈 등을 쌓아 놓기를 오랜 세월을 하다보니, 거의 작은 산을 이룰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 인공 흙더미에 옛날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빠르나쓰 산 (Mont Parnasse) 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웃기 위해 붙인 이름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제 값을 하게 되었습니다. 몽마르트르에서 살던 화가들과 시인들이 점차 빠리 시내와 보다 가까우면서 방값도 적당한 몽빠르나쓰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많은 외국인 망명객, 또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프랑쓰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몽빠르나쓰는 매우 다양한 색깔을 지닌 활기찬 동네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유명한 꺄페, 뮤직홀, 극장 등이 밀집되면서 몽빠르나쓰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몽빠르나쓰에서 살았던 유명한 사람들 중 몇몇 : 모딜리아니, 위트리요, 쑤띤, 브락, 샤걀, 삐까쏘, 루오, 끌레, 레제, 마띠쓰, 그리쓰, 부르델, 쟈꼬메띠, 뒤셩, 쟈꼽, 아뽈리네르, 썽드라르,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밀러, 파운드, 레, 콜더, 죠이쓰, 레닌, 트로츠끼, 싸띠, 미요, 오네게르. 오릭, 뿔랑크, 아라공과 트리올레, 싸르트르와 보브와르, 드미와 바르다...
몽빠르나쓰를 찾은 사람들의 국적은 각양각색이었지만, 20년대에는 특히 금주법을 피해서 도망온 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작가, 예술가, 지식인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자유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또 19세기 말에 프랑쓰 북서부를 연결하는 기차 노선이 생긴 이후로는 많은 브르따뉴 사람들이 몽빠르나쓰로 모여들었습니다. 몽빠르나쓰 역에 내린 이들은 멀리 가지 않고 이 주변에 정착한 것이지요. 브르따뉴 사람들은 프랑쓰 나머지와는 다르게 쎌트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색다른 분위기를 갖는데 한 몫 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시작된 재개발 계획 때문에 이런 전설적인 몽빠르나쓰의 자취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옛 몽빠르나쓰 역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59층짜리 몽빠르나쓰 빌딩이 들어섰으며, 그 옆에 약간 자리를 옮겨 빠리에서 유일하게 현대식 외관을 갖춘 기차역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현재는 역과 빌딩을 중심으로 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현대식 상업 시설과 사무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화가에서부터 조금만 멀어지면 몽빠르나쓰는 상당히 쾌적한 분위기를 주는 동네입니다. 대단한 관광거리는 없지만, 죽죽 뻗은 대로에 가로수가 울창한 넓은 인도, 종종 눈에 띄는 아르 데꼬 건물들, 여전히 밀집되어 있는 크렙 식당들 (크렙은 브르따뉴의 전통 음식), 유서 깊은 꺄페들과 크고 작은 연극 무대들, 호젓한 몽빠르나쓰 묘지... 이 모든 것들이 몽빠르나쓰를 여전히 매력적인 장소로 유지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18세기까지는 현재의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 (bd. du Montparnasse) 와 불바르 라스빠이으 (bd. Raspail) 가 교차하는 지점 쯤에 작은 언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를 뚫으면서 깎여 없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도 이 언덕은 진짜 산은 아니었습니다. 1860년까지 몽빠르나쓰는 빠리의 외곽으로서, 그 지하는 수백년 동안 채석장으로 쓰였는데, 여기서 돌을 캐내고 난 후, 한 쪽 옆에다 필요 없는 흙과 자갈 등을 쌓아 놓기를 오랜 세월을 하다보니, 거의 작은 산을 이룰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 인공 흙더미에 옛날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빠르나쓰 산 (Mont Parnasse) 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웃기 위해 붙인 이름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제 값을 하게 되었습니다. 몽마르트르에서 살던 화가들과 시인들이 점차 빠리 시내와 보다 가까우면서 방값도 적당한 몽빠르나쓰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많은 외국인 망명객, 또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프랑쓰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몽빠르나쓰는 매우 다양한 색깔을 지닌 활기찬 동네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유명한 꺄페, 뮤직홀, 극장 등이 밀집되면서 몽빠르나쓰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몽빠르나쓰에서 살았던 유명한 사람들 중 몇몇 : 모딜리아니, 위트리요, 쑤띤, 브락, 샤걀, 삐까쏘, 루오, 끌레, 레제, 마띠쓰, 그리쓰, 부르델, 쟈꼬메띠, 뒤셩, 쟈꼽, 아뽈리네르, 썽드라르,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밀러, 파운드, 레, 콜더, 죠이쓰, 레닌, 트로츠끼, 싸띠, 미요, 오네게르. 오릭, 뿔랑크, 아라공과 트리올레, 싸르트르와 보브와르, 드미와 바르다...
몽빠르나쓰를 찾은 사람들의 국적은 각양각색이었지만, 20년대에는 특히 금주법을 피해서 도망온 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작가, 예술가, 지식인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자유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또 19세기 말에 프랑쓰 북서부를 연결하는 기차 노선이 생긴 이후로는 많은 브르따뉴 사람들이 몽빠르나쓰로 모여들었습니다. 몽빠르나쓰 역에 내린 이들은 멀리 가지 않고 이 주변에 정착한 것이지요. 브르따뉴 사람들은 프랑쓰 나머지와는 다르게 쎌트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색다른 분위기를 갖는데 한 몫 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시작된 재개발 계획 때문에 이런 전설적인 몽빠르나쓰의 자취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옛 몽빠르나쓰 역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59층짜리 몽빠르나쓰 빌딩이 들어섰으며, 그 옆에 약간 자리를 옮겨 빠리에서 유일하게 현대식 외관을 갖춘 기차역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현재는 역과 빌딩을 중심으로 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현대식 상업 시설과 사무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La tour Montparnasse et la gare Montparnasse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화가에서부터 조금만 멀어지면 몽빠르나쓰는 상당히 쾌적한 분위기를 주는 동네입니다. 대단한 관광거리는 없지만, 죽죽 뻗은 대로에 가로수가 울창한 넓은 인도, 종종 눈에 띄는 아르 데꼬 건물들, 여전히 밀집되어 있는 크렙 식당들 (크렙은 브르따뉴의 전통 음식), 유서 깊은 꺄페들과 크고 작은 연극 무대들, 호젓한 몽빠르나쓰 묘지... 이 모든 것들이 몽빠르나쓰를 여전히 매력적인 장소로 유지해 주고 있습니다.
jeudi 7 août 2008
세탁선 (Bateau-Lavoir)
세탁선 (un bateau-lavoir) 이란, 이름 그대로 빨래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배를 말합니다. 세탁기는 커녕, 집에 수도 시설 조차 없던 때에 - 대략 20세기 초까지는 빨래를 하기 위해 일부러 빨래감을 가지고 빨래터 (lavoir) 까지 찾아다녀야 했는데, 세탁선이 바로 그런 빨래터의 일종이었던 것입니다. 빨래터는 어차피 물가에 만들어야 하기에, 아예 강에 둥실 떠 있는 빨래터를 만든 것이지요. 세탁선으로 사용된 배들은 비교적 큰 규모로서, 안을 개조하여, 물을 퍼 올리는 시설, 물을 끓이는 시설, 빨래 말리는 장소 등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간혹 강을 따라 운항을 하며 이곳 저곳 옮겨 다니는 세탁선도 있었지만, 대개 이런 배들은 운항을 하기에는 좀 낡은 배들을 개조한 것이라, 한 장소에 정착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가서 더 자세한 설명과 사진들을 보세요.)
그런데 몽마르트르 산등성이에도 유명한 세탁선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배도 아니고, 빨래터도 아닙니다. 단지 이름만 그렇게 붙었을 따름이지요. 몽마르트르의 세탁선 또는 바또-라브와르 (le Bateau-Lavoir) 는 20세기 초반에 많은 화가들이 살았던 건물입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훗날 유명인이 되었지요 : 반 동겐, 모딜리아니, 그리쓰, 삐까쏘, etc... 또 오랜 기간 상주하지는 않았더라도 로렁쌍, 블라망끄, 뒤피, 마띠쓰, 브락, 레제, 드랑, 위트리요, 브란꾸지, 루쏘 등이 이 곳을 거쳐갔습니다. 그리고 화가들 외에도 아뽈리네르, 쟈리, 꼭또, 라디게, 스타인 남매, 쌀몽, 쟈꼽 등의 작가들 역시 자주 이 곳에 모였다고 하지요. 바또-라브와르는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명실공히 현대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입체주의 또는 뀌비슴 (cubisme) 의 탄생지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서 1906년과 1907년에 걸쳐 삐까쏘가 아비뇽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Avignon) 을 그렸기 때문이지요.
애초에 피아노 공장이었던 이 건물은 1889년부터 화가들의 작업실로 변모되기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막쓰 쟈꼽이 바또-라브와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건물 모양이 세탁선들과 비슷하다하여). 지금은 아무리 상상력을 가지고 보아도 이 건물에서 전혀 배 모양이 연상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원래 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무로 지어졌던 건물은 1970년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저 밋밋한 시멘트 벽만을 밖에서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 건물은 지금도 여전히 화가들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미 1차대전무렵부터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빛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몽마르트르에 살던 많은 화가들이 몽빠르나쓰로 이주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몽마르트르 산등성이에도 유명한 세탁선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배도 아니고, 빨래터도 아닙니다. 단지 이름만 그렇게 붙었을 따름이지요. 몽마르트르의 세탁선 또는 바또-라브와르 (le Bateau-Lavoir) 는 20세기 초반에 많은 화가들이 살았던 건물입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훗날 유명인이 되었지요 : 반 동겐, 모딜리아니, 그리쓰, 삐까쏘, etc... 또 오랜 기간 상주하지는 않았더라도 로렁쌍, 블라망끄, 뒤피, 마띠쓰, 브락, 레제, 드랑, 위트리요, 브란꾸지, 루쏘 등이 이 곳을 거쳐갔습니다. 그리고 화가들 외에도 아뽈리네르, 쟈리, 꼭또, 라디게, 스타인 남매, 쌀몽, 쟈꼽 등의 작가들 역시 자주 이 곳에 모였다고 하지요. 바또-라브와르는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명실공히 현대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입체주의 또는 뀌비슴 (cubisme) 의 탄생지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서 1906년과 1907년에 걸쳐 삐까쏘가 아비뇽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Avignon) 을 그렸기 때문이지요.
애초에 피아노 공장이었던 이 건물은 1889년부터 화가들의 작업실로 변모되기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막쓰 쟈꼽이 바또-라브와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건물 모양이 세탁선들과 비슷하다하여). 지금은 아무리 상상력을 가지고 보아도 이 건물에서 전혀 배 모양이 연상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원래 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무로 지어졌던 건물은 1970년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저 밋밋한 시멘트 벽만을 밖에서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 건물은 지금도 여전히 화가들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미 1차대전무렵부터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빛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몽마르트르에 살던 많은 화가들이 몽빠르나쓰로 이주하였기 때문이지요.
세탁선 (Bateau-Lavoir)
lundi 4 août 2008
걀렛 풍차방아 (Moulin de la Galette)
몽마르트르에서 떼르트르 광장보다 훨씬 더 색다른 볼거리는 걀렛 풍차입니다. 뤼 르삑 (rue Lepic) 과 뤼 지라르동 (rue Girardon) 이 만나는 모서리에 17세기부터 자리잡고 있는 이 풍차는 빠리에 남아있는 유일한 풍차이며, 지금도 여전히 작동이 가능한 상태라고 합니다 (물론 여러차례 보수, 복원 공사를 거쳤습니다). 유일하다고 했는데, 사실 알고보면 풍차가 두 개 있습니다. 길가에 있어서 사람들 눈에 쉽게 띄며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사진에 담아가는 풍차 (Radet) 말고도, 보다 안 쪽을 잘 들여다보면 풍차가 하나 더 (Blute-fin) 있습니다. 라데와 블륏-팡, 이 두 풍차를 합해서 걀렛 방앗간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작동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지금은 물론 이 풍차들을 사용하여 방아를 찧지는 않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방앗간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음식점으로 영업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사실 완전히 식당이 되기 전에도 이 방앗간은 이미 어느 정도 간이 식당이었습니다. 풍차를 이용해서 빻은 곡식으로 얇은 빵, 즉 걀렛 (galette) 을 만들어 팔았던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여기서 방앗간의 이름이 생겨났지요.
술집겸 식당이 되고 나서 이 방앗간은 많은 화가들의 단골집이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몽마르트르가 예술의 중심지였을 때 많은 화가들이 이 풍차의 외형이나 식당 안의 흥겨운 풍경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 중 몇 점 :
길거리의 라데 풍차와 숨어 있는 블륏-팡 풍차


작동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지금은 물론 이 풍차들을 사용하여 방아를 찧지는 않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방앗간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음식점으로 영업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사실 완전히 식당이 되기 전에도 이 방앗간은 이미 어느 정도 간이 식당이었습니다. 풍차를 이용해서 빻은 곡식으로 얇은 빵, 즉 걀렛 (galette) 을 만들어 팔았던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여기서 방앗간의 이름이 생겨났지요.
술집겸 식당이 되고 나서 이 방앗간은 많은 화가들의 단골집이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몽마르트르가 예술의 중심지였을 때 많은 화가들이 이 풍차의 외형이나 식당 안의 흥겨운 풍경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 중 몇 점 :
벙 고그, 걀렛 풍차 (Van Gogh, Moulin de la Galette)
위트리요, 뤼 똘로제와 걀렛 풍차 (Utrillo, Rue Tholozé et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 걀렛 풍차의 무도회
(Renoir, Le Bal du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의 윗그림을 재 작업한
뒤피의 걀렛 풍차 (Dufy, Moulin de la Galette)
뚤루즈-로트렉, 걀렛 풍차 (Toulouse-Lautrec, Moulin de la Galette)
삐꺄쏘, 걀렛 풍차 (Picasso, Moulin de la Galette)
반 동겐, 걀렛 풍차 (Van Dongen, Moulin de la Galette)
위트리요, 뤼 똘로제와 걀렛 풍차 (Utrillo, Rue Tholozé et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 걀렛 풍차의 무도회
(Renoir, Le Bal du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의 윗그림을 재 작업한
뒤피의 걀렛 풍차 (Dufy, Moulin de la Galette)
뚤루즈-로트렉, 걀렛 풍차 (Toulouse-Lautrec, Moulin de la Galette)
삐꺄쏘, 걀렛 풍차 (Picasso, Moulin de la Galette)
반 동겐, 걀렛 풍차 (Van Dongen, Moulin de la Galette)
samedi 2 août 2008
떼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
떼르트르 광장은 성심 성당 바로 뒤 쪽에 있으며, 성심 성당 다음으로 몽마르트르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장소인데, 도대체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힘듭니다.
tertre 라는 말은 « 언덕, 작은 산 » 을 뜻하는 일반 명사로, Place du Tertre 는 말그대로 « 언덕 위의 광장 » 이라는 뜻이지요. 산꼭대기 위의 이 작은 광장에 옛부터 식당과 찻집 등이 들어섰고, 거기 오는 손님들에게 그림을 파는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몽마르트르의 풍경이나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 파는 무명의 화가들이 활동 중이나, 떼르트르 광장은 이제 도무지 발 디딜 틈이 없는 시장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 말로는 떼르트르 광장에서 볼거리는 바로 관광객이라고 하더군요. 좋게 말하면, 활발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이지만, 아무튼 낭만적인 정취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tertre 라는 말은 « 언덕, 작은 산 » 을 뜻하는 일반 명사로, Place du Tertre 는 말그대로 « 언덕 위의 광장 » 이라는 뜻이지요. 산꼭대기 위의 이 작은 광장에 옛부터 식당과 찻집 등이 들어섰고, 거기 오는 손님들에게 그림을 파는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몽마르트르의 풍경이나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 파는 무명의 화가들이 활동 중이나, 떼르트르 광장은 이제 도무지 발 디딜 틈이 없는 시장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 말로는 떼르트르 광장에서 볼거리는 바로 관광객이라고 하더군요. 좋게 말하면, 활발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이지만, 아무튼 낭만적인 정취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떼르트르 광장의 한쪽 구석 (un coin de la place du Ter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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